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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 이후 성종 임금 시기까지 조선은 신생 국가의 틀을 벗고 유교를 국가 이념으로 하는 중앙집권 국가로 정체성을 확립했다. 이후 조선은 큰 번영기를 누렸다. 역사상 최악의 폭군, 연산군 시기도 있었지만, 명종 때까지 조선은 외적의 침입 등 대외적인 위협도 크지 않았고 체제를 흔드는 불안 요소도 없었다. 조선은 100년이 넘는 평화 시기를 보냈다. 

하지만 이 기간 조선은 체제의 구조적 문제가 사회를 좀먹고 있었다. 특히, 군정의 난맥상이 점차 심화됐다. 조선 초기 강력했던 조선의 군 시스템이 무너졌고 이는 국방력 약화를 불러왔다. 이는 일본의 대대적 침략이었던 임진왜란 초기 대응을 어렵게 했다. 그 결과 조선은 일본군에 거의 전 국토가 파괴되고 막대한 재산, 인명 피해를 입었다. 명 재상 류성룡과 수많은 의병장과 의병들, 바다를 수호한 이순신 등의 활약으로 침략군을 물리칠 수 있었지만, 조선의 영토 내에서 벌어진 7년 전쟁의 후유증은 엄청났다. 

이후 조선은 전쟁 피해 복구와 함께 오랜 전쟁으로 무너진 국가 시스템을 재정비하는 데 상당한 노력을 해야 했다. 하지만 사회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이르지 못했다. 이미 한계를 드러난 성리학적 가치에 입각한 국가 운영에 대한 개혁이 없었고 변화한 국제정세에 대한 이해나 그에 맞는 대응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양반 사대부들을 중심으로 한 기득권 층은 그들의 권력과 입지를 지키는데 주력했고 더 경직된 사고로 국가를 통치했다. 사회는 변화를 요구했지만, 기득권 층은 달라지지 않았다. 성리학적 가치관을 더 공고히 할 뿐이었다. 이는 병자호란이라는 또 다른 역사의 비극으로 이어졌다. 

 

 

김홍도 씨름
김홍도 서당

 

 

https://blog.naver.com/youlsim74/223318248671

 

[역사 이야기] 조선 후기 부흥의 주역에서 쓸쓸한 인생 말년 보낸 천재 화가 김홍도

세종대왕 이후 성종 임금 시기까지 조선은 신생 국가의 틀을 벗고 유교를 국가 이념으로 하는 중앙집권 국...

blog.naver.com

 

조선 통치 시스템의 한계점 드러낸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만주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난 신흥 강국, 후금, 청나라와 쇠약해진 강국 명나라 사이에서 조선은 매우 신중하고 전략적인 외교를 해야 했지만, 조선은 그렇지 않았다. 그나마 중립 외교정책으로 전쟁을 피했던 광해군이 실각한 이후 조선은 명분론에 입각해 친 명나라 외교 노선을 더 분명히 했다. 이는 청나라와의 전쟁을 불가피하게 했다. 그 결과 1627년 정묘호란에 이어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조선은 나름 전쟁에 대비했지만, 임진왜란 이전의 국력을 회복하지 못한 상황에서 역부족이었다. 

조선은 결국, 당시 임금이었던 인조가 청나라 황제에 항복의 예를 갖추며 굴욕적인 패배를 당했다. 조선은 그들이 오랑캐라 여겼던 여진족의 나라 청나라에 사대를 해야 했다. 

병자호란의 굴욕 이후 사회 전반의 개혁이 절실했다. 두 차례 전란은 집권층의 무능이 부른 결과이기도 했다. 사회 전반에 변화를 요구하는 여론이 형성돼야 했지만, 조선 사회의 구조는 변화가 없었다. 집권층들은 붕당을 중심으로 정치를 장악했고 여전히 권력과 부를 독점했다. 붕당의 대립은 한정된 권력과 그에 부수되는 경제적 이권을 놓고 벌이는 권력 투쟁이었다. 북벌론이라는 새로운 국가 어젠다가 나오긴 했지만, 현실과는 동떨어진 구호였고 국내 정치용의 성격이 강했다. 

물론, 한편에서 대동법 시행 등 조세 제도 개편으로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는 노력이 있었고 사회 곳곳에서 신분제가 붕괴되고 상공업이 발달하는 등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지만, 이것이 집권층의 교체 등 큰 틀의 변화로는 연결되지 않았다. 기득권 양반들의 붕당정치 체제 변화는 한계가 분명했다. 이에 조선의 변화는 양대 전란을 거치면서 더 강력해진 신권을 누르고 시대상을 읽을 수 있는 강력한 군주가 아니면 이루기 힘들었다.

하지만 조선 후기 신권을 능가하는 힘을 가진 임금은 나오지 않았다. 그런 흐름이 달라진 건 숙종 임금부터였다. 숙종은 적장자의 정통성을 바탕으로 왕권을 강화할 명분이 있었고 역사적으로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수차례 환국 정치를 단행하며 국정을 주도하는 정치력이 있었다. 숙종의 환국 정치는 붕당정치를 상대 당의 존재마저 부인하는 극단적인 양상으로 변모시키는 부작용이 있었지만, 왕권 강화라는 목적을 이루는 데는 일정 성공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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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 정조시대 조선의 부흥기 


그의 유산은 결과적으로 영. 정조 시대의 국가 부흥의 기반이 됐다. 붕당 정치가 일당 독재로 흘러가긴 했지만, 영조와 정조 임금은 강력한 왕권으로 신권이 왕권을 능가하는 걸 견제하며 국정을 주도했다. 이는 기득권층의 반발에도 변화를 왕이 이끌 수 있었다. 그 결과 조선은  영. 정조 시대 긴 침체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이런 부흥의 시기는 문화와 예술 분야에도 새 바람이 일어나게 했다. 다양한 형식의 예술 사조가 등장했고 작품들도 다양해졌다. 작품의 소재 역시 일반 백성들의 삶 등으로 확대되고 사실주의적 성향을 보였다. 미술에서 그 경향이 강하게 나타났다. 서양의 미술이 르네상스 시기가 되면서 기독교적 세계관을 벗어나 인간에 다시 집중하고 고대 그리스. 로마에서 새로운 영감을 얻고 이후 사실주의로 변화하는 과정을 조선 미술도 겪었다. 

그리고 이런 미술 사조의 변화에 있어 중심인물이 김홍도다. 김홍도는 신윤복, 정선, 장승업 등과 함께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화가로 영. 정조 시대 주로 활동하며 많은 작품을 남겼다. 김홍도는 다방면에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지만  특히,  조선 후기 중요한 미술의 장르인 풍속화가로서 큰 명성을 얻었다. 지금도 김홍도 하면 떠오르는 단어는 풍속화다.

풍속화는 기존 중국의 화풍이나 작품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우리만의 화풍으로 우리의 자연과 멋을 그리는 것을 초월해 백성들의 삶을 담은 작품이다. 그 안에는 당시 시대상과 사회상, 사람들의 삶이 담겨있다. 풍속화 속에는 조선 후기 역사가 담겨 있다 할 수 있다. 김홍도는 소재의 확대와 함께 과감한 구도 설정으로 보다 역동적인 작품을 그려냈다. 

김홍도가 풍속화가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건 개혁 군주로 불리는 정조가 있었다. 정조는 학문은 물론이고 다방면에 정통했고 박식했다. 정치력도 갖추고 있었다. 정조는 조선 후기 정치를 주도했던 붕당인 노론에 맞서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고 탕평책으로 그들을 견제했다. 그 기간 조선 조정은 여러 붕당이 공존하는 모습을 보였다.

정조는 이와 함께 김홍도의 강력한 후원자였다. 김홍도는 그 이전에 정조의 신임을 얻고 있었던 문인 강세황에게 그림을 배우고 후원을 받았다. 강세황은 그림에도 능력했던 문인으로 김홍도에게 큰 영향을 줬던 인물이다. 김홍도는 그를 통해 세손 시절 정조와 연결됐고 그의 초상을 그리는데 참여할 수 있었다. 그 인연은 정조가 왕위에 오른 이후에도 지속됐다. 

 

 

김홍도 길쌈
김홍도 대장간

 

 

정조의 동반자 김홍도 


이에 김홍도의 작품은 정조의 정치관과 국가 통치 이념, 백성들에 대한 마음이 투영될 수밖에 없었다. 정조는 재위 기간 여러 차례 그가 신도시로 건설한 수원 행차를 했다. 대규모 행차는 강력한 왕권과 왕으로서 권위를 상징하는 일이었지만, 백성들과 만남, 소통의 수단이기도 했다. 정조의 행차를 담은 그림에는 백성들의 신분과 나이, 성별을 가리지 않고 그 장면을 자유롭게 보고 즐기는 모습이다. 왕의 행차에 납작 엎드려 예를 표하는 모습이 아니다. 이는 정조의 백성에 대한 마음이 담겨있다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행차도와 각종 행사의 그림에는 김홍도가 함께 하고 있다. 김홍도는 화원에 소속된 화가였고 공식 행사 그림에도 그 역량을 발휘했다. 그만큼 왕과 가까운 관계라 할 수 있었다. 왕과 가까이할 수 있었다는 건 김홍도가 뛰어난 실력과 함께 정조의 신임을 얻고 있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김홍도 정조 재위 기간 화원으로는 이례적으로 높은 관직에 올랐고 그 기간이 길지 않았지만, 지방관으로 임명되어 일하기도 했다. 그에 대한 정조의 각별한 마음을 엿볼 수 있는 일화다. 정조는 그의 문집에서 김홍도와 그의 작품에 대한 찬사를 글로서 나타내기도 했다. 

김홍도는 정조 재위 기간 조선의 부흥기를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열린 사고를 가진 임금이었고 성리학 외에 서양의 과학기술은 물론이고 실용 학문의 도입에도 관심이 많았다. 천주교에 대해서도 비교적 유연한 사고를 보였다. 그의 재위 기간 실사구시를 내세운 실학이 융성할 수 있었던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는 예술에서의 표현도 보다 자유롭게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당연히 소재나 기법도 입체감을 더하는 원근법을 과감히 도입하는 등 다양해질 수 있었다. 김홍도의 풍속화는 그 시대를 상징하는 의미도 있었다. 

이렇게 정조 임금 시대 전성기를 누렸던 김홍도였지만, 정조의 갑작스러운 승하와 함께 그의 인생은 급격히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김홍도는 그 명성으로 인해 그림 청탁에 엄청난 금액을 받을 수 있었지만, 부를 축적하지 못했다. 김홍도는 셈에 능하지 않았고 벌어들인 돈을 축재하는 데 이용하지 않고 정원을 꾸미거나 작품을 위해 아낌없이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연히 그의 삶은 늘 궁핍했고 이는 건강도 악화시켰다.

 

 

화성행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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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와 함께 한 김홍도의 전성기 정조의 죽음과 함께 사라진 이름 김홍도 


또한, 김홍도는 정조 승하 후 많은 나이로 인해 화원에서도 나와야 했다. 그가 주로 관계를 맺었던 인물들이 정조 사후 몰락한 남인 계열 인사들이 많았다는 점도 그를 힘들게 하는 원인이었다. 남인들은 정조 사후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 박해가 시행되는 상황에서 완전히 몰락하고 말았다. 그들과 관계가 있었던 인사들 역시 정치적 입지가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김홍도에 대한 개인적 후원 역시 급격히 감소할 수밖에 없었다. 

인생 말년에 김홍도는 궁핍한 생활을 했고 병마와도 싸워야 했다. 그의 아들 역시 화가의 길을 걸었지만, 왕실 화원에 들어가기 위한 교육비를 충당하기 힘들 정도였다. 김홍도의 최후와 관련해 그 년도가 정확히 특정되지 않는다. 1805년 경 그의 병환이 깊어졌다는 편지가 있는 것으로 그 즈음에 세상을 떠난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그만큼 노년의 김홍도는 조선 미술계에서 멀어진 인물이었고 크게 언급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 시점에 김홍도는 유작으로 추정되는 '추석 부도'를 남겼다. 늦가을의 쓸쓸하고 고독한 느낌이 가득 담겨있다. 많은 이들이 알고 있는 김홍도의 그림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이를 통해 김홍도는 인생의 허무함과 삶의 회환 등 삶을 정리하면서 가진 느낌을 담은 것으로 보인다. 그 유작과 함께 김홍도는 쓸쓸히 세상을 떠났을 것으로 보인다. 

파란만장하다는 말이 딱 맞는 삶이었다. 김홍도는 이전에 없었던 그림 세계를 열었고 시대 변화를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풍속화라는 한 장르를 새롭게 열었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한국 미술사에서 독보적 존재였다. 공교롭게도 정조와 김홍도가 세상을 떠난 이후 조선은 어렵게 찾아온 부흥기가 저물고 세도정치기로 접어들면서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김홍도의 삶과 닮은 조선의 모습이었다.


그 점에서 김홍도의 삶은 한 천재 화가의 삶, 개인의 삶,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사진 : 위키백과,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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