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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2년 기존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롭게 건국된 조선은 유교적 가치관을 중심으로 사회 전반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양반 사대부로 불리는 새로운 지배층이 등장했고 고려 시대까지 사회 전반을 지배했던 불교의 영향력을 억제하고 유교가 지배하는 국가 운영 시스템을 만들었다. 

이런 조선의 대외 정책에서 중요한 흐름은 사대교린이었다. 조선은 중국의 통일 왕조 명나라에는 사대를 하고 그 외 북방의 여진족, 일본에는 강. 온 양면 정책으로 이들을 관리했다. 그들의 노략질이 극심할 시기에는 무력을 통해 토벌을 감행하고 한정된 통로를 열어 무역 등 교류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교류의 폭은 매우 한정적이었다. 

조선과 달리 고려는 북방 민족과 중국, 일본, 아라비아, 동남아시아까지 교류의 폭이 매우 넓었다. 고려는 거란과의 3차례 침략을 막아내면서 중국, 거란과 동등한 외교 관계를 정립하고 무역에 있어서는 거란과 여진, 중국, 일본을 연결하는 중계 무역을 주도하며 동북아시아의 정치, 경제의 중심 국가로 자리했다. 

하지만 조선의 대외 교류는 중국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경향을 보였고 육로가 주 통로였다. 고려 시대 활발했던 해양 교류가 사실상 중단됐다. 바닷길을 통해 교류는 대부분 일본에 한정됐고 그나마도 조선이 지정한 조선 내 왜관이라는 공간에서만 가능했다. 일본이 전면 침략을 받았던 임진왜란 이후에는 해양 루트를 통한 대외 교류가 더 위축됐다.


 

 




스스로 좁힌 세계관, 해양 교류에 소극적이었던 조선 


이에 조선의 대외 무역은 중국과의 조공외교에 절대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일본에서도 활성화된 서구 국가들과의 무역에서 조선은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조선은 건국 이후 상업을 천시하는 경향이 강했고 민간의 상업 발전을 억제했다. 국내 상업 발전이 부진한 상황에서 조선인들의 대외 진출도 거의 불가능했다. 이는 조선 역사에서 아쉬운 부분이다.

이런 폐쇄성은 선진 문물의 유입을 더디게 했고 국제 정세의 변화에도 조선을 둔감하게 만들었다. 대항해 시대와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서구 국가들의 급속한 발전을 이루는 사이 중국과 중국 중심의 세계관에 갇혀있던 조선은 국가 경쟁력이 뒤처지고 말았다. 이는 탐욕적이고 약탈적인 제국주의 세력에 침략에 대응할 수 없게 했다. 이후 역사는 우리가 알고 있듯이 서구 문물을 보다 일찍 받아들이고 그들의 제국주의 침략 정책을 답습한 일본에 조선이 식민지로 전락하는 비극과 연결됐다. 

이렇게 대외 교류에 소극적이었던 조선에서 무려 3개국의 삶과 문화를 접한 인물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문순득이었다. 그는 1777년 조선에는 정조 1년, 전남 신안에서도 멀리 떨어져 있는 흑산도, 그 흑산도에서도 더 서쪽으로 가야 만날 수 있는 섬인 우이도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지역 바다에서 나는 특산물인 홍어 중계업을 하며 생활했다.

문순득 역시 어려서부터 상업에 종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글을 배우지 못했지만, 친화력과 장사 수완이 뛰어난 상인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육지와 멀리 떨어진 서해바다의 섬에 살고 있는 상인이 조선 역사 기록에 남을 인물이 될지는 아무도 몰랐다. 

 

 




평함한 홍어 상인의 예상치 못한 3개국 표류기 


그렇게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던 문순득은 24살이 되는 1801년 12월, 여느 때처럼 그의 일행과 함께 홍어를 구입하기 위해 배를 타고 바다로 나섰다. 불행히도 문순득 일행은 귀환하는 길에 큰 풍랑을 만났고 망망대해를 표류하게 됐다. 그들을 태운 배는 제주를 지나 지금의 오키나와인 류큐국까지 흘러갔다.

당시까지만 해도 류큐국은 독자적인 왕국을 유지하고 있었고 조선, 중국, 일본과 교류가 있었다. 일설에는 고려 몽골과의 전쟁 당시 끝까지 저항했던 삼별초 세력 일부가 완도와 제주를 거쳐 이동하다 오키나와에 세운 나라가 류큐국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만큼 류큐국은 일찍부터 조선 이전부터 한반도와 교류가 있었다. 

다행히도 류큐국에는 조선말을 할 수 있는 통역사가 있었고 그들의 상황을 알리고 소통할 수 있었다. 지역민들은 일행을 우호적으로 대했고 편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하지만 조선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는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조선과 류큐국이 정기적으로 사람이 오가는 교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문순득 일행의 류큐국 체류는 1년 가까이 이어졌다. 

이 시기 문순득은 좌절하지 않고 그의 친화력을 바탕으로 현지어를 배우고 지역민들과 적극 소통했다. 그 속에서 여러 정보를 얻었고 류큐국 사람들의 생활을 살피기도 했다. 그 속에서 조선에서는 접하지 못한 다양한 삶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런 문순득 일행에서 조선으로 돌아갈 길이 열렸다. 중국과 조공 관계에 있었던 류쿠국에서 중국으로 향하는 조공선에 문순득 일행도 동행할 수 있게 했기 때문이다. 문순득은 그 배를 타고 중국에 도착해 조선으로 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그들을 태운 류쿠국의 선박마저 풍랑에 휩쓸렸고 문순득은 또다시 이전에 접하지 못한 곳으로 향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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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를 거쳐 필리핀으로 이어진 표류의 여정


문순득 일행에 도착한 곳은 루손섬이었다. 그곳은 지금의 필리핀이었고 당시는 여송국이라 불렸다. 필리핀은 류큐국과 달리 조선과는 전혀 교류가 없는 미지의 땅이었다. 문순득 일행과 소통할 수 있는 조선말을 할 수 있는 이들이 전혀 없었고 사는 사람들의 모습도 매우 낯설 수밖에 없었다. 문순득 일행이 도착할 시점에 필리핀은 스페인의 식민지였고 서양 상인들이 수시로 드나드는 곳이었다. 그들은 필리핀을 거쳐 중국, 일본을 상대로 무역을 했다. 루손섬 일대에는 서양식 건물이 곳곳에 들어섰고 거대한 성당도 생겼다.

문순득은 그곳에서 신묘라고 표현된 성당을 직접 볼 수 있었다. 그는 그 성당을 매우 상세히 묘사했다. 그가 본 성당은 지금도 필리핀의 중요한 역사 문화 유적인 파블로 대성당, 성 바오로 성당으로 추정된다. 문순득 일행은 그 지역민들에게 낯선 이방인이었고 체류에 있어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

다행히 문순득 일행은 중국민들의 거주지에서 기거할 수 있었다. 조선의 존재를 아는 중국인 거주지는 최소한의 안전과 생활을 할 수 있게 했다. 하지만, 중국인들과 함께 온 류큐국 인원들의 갈등으로 류큐국 인원들이 루손섬을 떠나면서 문순득은 또 한 번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류큐국 인원들은 루손섬을 급히 떠나게 됐다. 문순득은 그 배에 오르지 못했다. 결국, 문순득은 다른 조선인 일행과도 떨어지며 단 한 명의 조선인 일행과 함게 루손섬에 남게 됐다.

깊은 절망감에 빠질 수 있었지만, 문순득은 류큐국에서처럼 빠르게 현지 루손어를 익히고 생활에 적응했다. 그와 동시에 상인으로서 장사 수완을 발휘해 루손섬 사람들이 필요한 물품을 만들어 팔거나 항구에서 일하며 생활비를 충당하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그리고 조선으로 돌아갈 방법을 모색했다. 그 한편에서는 현지 생활과 문화를 경험하는 여행자의 삶도 함께 했다. 

 

 

 




오키나와, 필리핀 다시 마카오 그리고 중국 거쳐 조선 귀환


다시 한 해가 지난 1803년 8월, 루손섬에서 마카오로 향하는 상선에 승선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그의 계속된 노력이 결실은 맺는 순간이었다. 그는 항구 등에서 일하며 루손섬을 드나드는 배들의 행선지를 탐문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통해 중국으로 향하는 배를 탈 수 있다면 조선으로 갈 방법이 생길 수 있음을 알게 됐고 적극적으로 중국행 배에 탈 수 있는 기회를 모색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와 관련한 문헌에서 문순득은 1803년 3월에 루손섬의 고위 관리 또는 총독을 면담했다는 기록이 있다. 루손섬이 스페인의 지배하에 있었음을 고려하면 스페인 총독이나 관리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현지에서 익힌 루손어 등으로 소통하며 그의 처지를 알렸고 도움을 받았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의 적극적인 성격과 친화력이 그를 다시 위기에서 벗어나게 했다. 

그렇게 마카오에 도착한 문순득은 마침내 중국 난징과 베이징을 거쳐 꿈에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문순득은 포르투갈령인 마카오에서 포르투갈 고위 관리와 면담하기도 했고 서양 양식의 건물들이 곳곳에 들어선 생경한 풍경을 눈으로 담을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1805년 1월 그는 고향인 우이도에 돌아와 가족들을 만날 수 있었다. 3년이 넘는 긴 세월이었다. 그가 죽은 줄 알고 있었던 가족들과 지인들에는 기적과도 같은 일이라 할 수 있었다. 

그는 다시 홍어 상인으로 일하면서 그의 경험담을 지인들에게 알렸다. 그의 친화력과 입담, 수많은 사람들과 만날 수 있는 직업의 특성으로 인해 그의 표류기는 지역민들에게 널리 퍼져나갔다. 그의 표류기는 당시 문순득이 살고 있는 우이도 인근 흑산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정약전의 귀에까지 전해졌다. 

 

 

문순득 관련 EBS 콘텐츠

https://jisike.ebs.co.kr/jisike/vodReplayView?siteCd=JE&prodId=352&courseId=BP0PAPB0000000009&stepId=01BP0PAPB0000000009&lectId=60128431

 

조선의 3개 국어 마스터

통역사가 된 홍어장수의 이야기...

jisike.ebs.co.kr

 

 




정약전과의 운명적 만남 


정약전은 문순득의 이야기를 흘려듣지 않았고 그와 직접 만나 그의 경험담을 들었다. 그러면서 그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겼다. 그렇게 만들어진 책이 '표해시말'이다. 이를 통해 구전으로만 전해진 문순득의 표류기가 글로 기록되고 전해질 수 있었다. 한국판 걸리버 여행기, 하멜 표류기라 할 수 있었다. 

'표해시말'을 집필하는 과정에서 정약전과 문순득은 수시로 만남을 가졌고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신분과 나이를 초월한 우정을 쌓게 된다. 정약전은 천주교 신자이기도 했고 서양 문물에 대한 관심이 컸다. 문순득이 있었던 필리핀과 마카오는 서양인들이 지배하는 지역이었다. 문순득이 보고 듣고 경험한 일들은 정약전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일이었다. 이는 정약전을 포함해 새로운 문물에 대한 갈증이 컸던 실학자들에게 중요한 자료가 됐다. 

정약전은 이에 그치지 않고 기록으로 남겨 후세에 전해지도록 했다. 이미 정약전은 유배 기간 해양 생태서 전문서인 '자산어보'를 집필하기도 했다. 정약전은 절망 가득한 유배생활에도 지식인으로서 지적 탐구를 멈추지 않았고 그가 취득한 지식을 기록으로 남기는 일에 큰 열정을 보였다. 문순득의 남다른 경험 역시 정약전에게는 중요한 집필의 소재가 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문순득의 표류기는 지금까지 전해질 수 있었다. 

또한, '표해시말'에는 문순득이 익힌 류큐어와 루손어, 일로카노어가 함께 기록되어 있다. 이는 류큐어와 일로카노어 연구에 있어 중요한 사료로 큰 가치를 가지고 있다. 이 자료는 얼마 안 되는 시간에 현지어를 익힌 문순득의 남다른 언어 습득 능력을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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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전과 문순득은 이후에도 지속 교류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동생인 정약용 역시 그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간접적으로 교류를 했다. 특히, 문순득이 루손섬에서 본 화폐경제가 활성화된 모습은 정약용의 경세유표에서 화폐 개혁안을 담도록 했다. 문순득은 비록 글을 알지 못하는 상인이었지만, 정약전과 정약용을 통해 그 존재를 알릴 수 있었고 조선 후기 사회에 영향을 줬다. 

정약전과 문순득의 우정은 정약전이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어졌다. 문순득은 그의 생활을 살폈고 정약전은 그에게 '천조'라는 호를 지어주기도 했다. 그리고 정약전이 세상을 떠나자 문순득은 후하게 장례를 치러주기도 했다. 역적의 신분으로 유배당한 이의 장례를 치러준다는 건 자칫 신변의 위협이 될 수 있었지만, 문순득은 그의 벗에 대한 의리를 끝까지 지켰다. 훗날 정약용은 이런 문순득에게 고마움을 서찰로 전하기도 했다. 

이후 문순득은 홍어 상인으로 평범한 일상을 영위했고 1847년 세상을 떠났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전 다시 한 번 역사에 언급된다. 그는 제주에 표류한 루손인, 필리핀인들의 상황을 전해 듣고 제주로 향해 그들의 처지를 듣고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데 힘을 보탰다. 루손인들을 제주로 표류해 9년 넘게 살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처지를 말할 수 있는 대상이 없었다. 그 사이 몇몇 동료들이 세상을 떠나기도 했다. 그들은 문순득을 통해 절망적인 상황을 벗어날 수 있었다. 문순득은 그들에게서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문순득 관련 EBS 콘텐츠

 

https://classe.ebs.co.kr/classe/detail/show?siteCd=CL&prodId=428160&courseId=10207462&stepId=60038074&lectId=60237169&clsfn_syst_id=40009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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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sse.ebs.co.kr:443

 



조선 역사 최초의 필리핀어 통역사 


조선 역사 최초의 루손어 통역사 역할을 한 문순득이었다. 이와 관련해 그가 루손어로 대화를 하자 루손인들이 크게 감격하게 눈물을 흘렸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이를 계기로 문순득은 당시 조선 임금은 순조로부터 명예직이지만, 종 2품의 벼슬을 하사받기도 했다. 그의 남다른 친화력과 역경에서 굴하지 않는 의지, 뛰어난 언어 능력,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은 따뜻한 마음이 보답을 받는 순간이었다. 

문순득의 사례는 한편으로 해양 교류에 소극적이었던 조선의 어두운 이면과 함께 한다. 조선이 바다를 통해 교류가 활발했고 조선이라는 나라가 더 널리 알려졌다면 그의 표류기 간은 문순득의 표류기간은 훨씬 단축될 수 있었다. 또한, 문순득의 이야기가 신비롭게 느껴지지 않은 일이 될 수 있었다. 조선 후기 실학자들 중 일부가 선박의 활용을 보다 활성화하자는 주장을 한 것은 해양을 통한 교류에 소극적이었던 사회 분위기를 변화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이었을 수도 있다. 

문순득 외에도 더 많은 조선인들이 미지의 세상인 루손섬 등에 표류했겠지만, 그들의 이야기를 전해지지 않는다. 아마도 현지에서 어렵게 살다 세상을 떠났을 가능성이 크다. 문순득은 절망에도 좌절하지 않았고 뛰어난 적응력으로 상황을 극복했다. 그가 표류기는 한 인간의 생존을 위한 위대한 투쟁기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문순득의 삶은 매우 극적이었고 수많은 위기가 있었지만,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됐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의 모험은 조선 사회에 중국과 일본 외에 다른 세상이 있음을 알렸고 지식인들에게도 큰 영감을 불어넣어 줬다. 정조 승하 후 숙청되어 유배된 정약전과의 만남은 그의 삶을 더 극적으로 만들었다. 두 사람의 편견 없는 열린 마음이 소중한 기록을 후대에 전해지게 했기 때문이다.

이에 문순득의 이야기는 시사하는 바가 크고 여러 관점에서 살필 필요가 있다. 


본 게시글은 EBS 스토리 기자단 18기 활동으로 작성하였습니다. 


사진 :  EBS,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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