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900년, 676년 이후 지속됐던 통일 신라 시대에 큰 변화를 가져온 사건이 발생했다. 옛 백제 지역의 군벌이었던 견훤이 지금의 전주인 완산주를 도읍으로 하는 후백제 건국을 선포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신라는 한반도 전역의 지배권을 잃었고 고구려의 부활을 명분으로 궁예의 후고구려까지 삼국으로 나뉘며 후 삼국시대로 접어들었다. 일각에서는 926년까지 존속했던 발해를 포함해 후사국 시대로 그 시대를 칭하기도 한다.
견훤은 이런 후삼국 시대를 연 인물로 그 역사적 의미가 크지만, 그동안 평가 절하되어 왔다. 후백제가 궁예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왕건의 고려와 경쟁에서 패하며 그 존속 기간이 짧았던 탓에 관련 기록이 부족했다. 이후 고려 시대 역사도 당연히 후백제의 비중이 크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후백제와 견훤에 대한 기록은 대체로 부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 기록에 근거해 현대 각종 다큐나 드라마 등에서 묘사된 견훤은 성품이 포악하고 마초적 이미지가 강했다. 견훤과 관련한 역사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부분도 신라 수도 경주를 기습해 신라 왕이었던 경애왕을 살해하고 약탈을 자행했다는 것으로 그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더 가지게 했다.
하지만 견훤은 철저한 신분제 사회였던 신라에서 가장 하층 계급에서 군대에서 계속 공을 세워 성공한 군인이 됐고 그의 연고지였던 지금의 경북 문경과 상주 지역이 아닌 호남 지역에서 세력을 키워 건국에까지 이른 영웅이었다. 또한,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큰 성공을 이룬 입지전적 인물이기도 했다. 그는 통일 신라 후반 극심한 혼란기에 각 지역을 장악한 호족들이 독자세력을 이루는 시기, 그 세력을 통해 나라를 세웠다는 점에서 비범한 능력도 갖춘 인물로 볼 수 있다.
하층민에서 창업 군주로 견훤의 영웅적 삶
견훤은 앞서 언급한 대로 평민 출신으로 정치적으로 성장할 기반이 전혀 없었다. 그의 아버지 아자개가 훗날 상주 지역의 호족이 됐지만, 견훤은 그의 후원을 받지 않았다. 오히려 그 부자관계가 원만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견훤은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장군이 되고 지역의 호족이 됐다.
견훤은 말단 군인으로 시작해 호남의 서남해안 일대를 책임지는 장군이 됐다. 통일 신라 후기에는 전국 각지에서 조정의 폭정과 수탈에 반발해 농민봉기가 일어났고 일부는 거대한 군사조직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견훤은 이런 도적떼를 소통하는 데 있어 큰 공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견훤이 역사에서 본격 등장한 건 892년 경이다. 호남의 서남해안 일대를 책임지는 장군이었던 견훤은 지금의 광주인 무진주 일대를 장악하고 스스로 신라 조정을 통제를 받지 않는 독자 세력임을 천명했다. 사실상의 건국 선포나 다름없었다.
당시 그에게는 무려 5천 명이 넘는 군사들이 함께 하고 있다는 기록이 있다.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무의미해진 상황에서 매우 큰 세력이라 할 수 있다. 5천 명의 군사라고 하면 그에 딸린 식구들부터 군사력을 유지하기 위한 경제력도 필요하다는 점에서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할 수 있다. 이는 단순히 무력만으로는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 점에서 견훤의 나라 창업 과정은 무협지나 만화와 같이 갑자기 이루어진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지역 여론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 수 있는 정치력과 리더십이 있었고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도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를 위해 견훤은 각종 설화를 통해 자신의 비범한 인물임을 대중들에게 알렸고 견훤의 설화는 문경 지역에서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이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건국 과정에서 창업 군주들의 신화와도 통하는 부분이 있다. 실제 이런 설화는 동양과 서양을 막론하고 권력자의 권위를 높이는 수단으로 활용됐다. 단적으로 고대 로마제국 역시 고대 그리스 신화를 로마 신화로 재 창조하기도 했다. 즉, 견훤은 과거 역사에 대한 인식이 있었고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정통성 확보에 대한 식견이 있었다.
이와 함께 견훤은 연고가 전혀 없었던 호남 지역의 민심을 얻기 위해 백제부흥을 전면에 내세웠다. 이는 삼국 통일 이후에도 차별받던 과거 백제 지역민들에게는 매우 신선하게 들렸을 것으로 보인다. 통일 신라 후기 극심한 사회 혼란과 불안한 치안, 한층 더 심해지는 신라, 조정과 지역 호족들의 착취 속에서 고통받던 지역민들에게 백제 부흥을 내세운 장군의 출현은 희망으로 다가올 수 있었다. 견훤은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지역민들의 보호자를 자처했고 신뢰를 쌓았다. 보다 나은 삶을 열망하던 구 백제 지역민들에게 견훤의 주장을 큰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
이를 통해 견훤은 그 태생부터 비범한 인물이었고 백제 부흥이라는 명분을 실현시킬 인물로 스스로를 이미지메이킹 했다. 그에 걸맞은 능력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견훤은 자신의 세력 확장을 위해 호남 지역의 호족과 혼인 관계를 맺었고 당나라 유학파 출신의 저명한 지식인이었던 최승우를 영입해 무력에 행정적 역량을 더하며 건국의 기틀을 닦았다.
견훤은 무진주를 장악한 이후 바로 건국을 선포하지 않았고 건국을 위한 작업을 차근차근 진행했다. 그는 치밀하면서도 계획적인 인물이었다. 드라마 등에서 나오는 삼국지의 장비와 같은 저돌적이고 급한 성품의 인물이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주목해야 할 후백제의 외교
이와 함께 견훤의 건국 과정에서 주목할 점은 활발한 외교활동이었다. 견훤은 건국을 준비하는 과정과 그리고 건국 후 중국과의 활발히 교류했다. 특히, 당시 5대 10국으로 분열된 중국의 나라 중 오월과 깊은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면서도 다른 중국의 왕조들은 물론이고 신흥 강국으로 떠오른 거란과도 외교 관계를 맺었다.
이를 통해 견훤은 지금도 통용되는 나라의 구성 요소인 영토, 그 안의 국민과 통치조직까지 3대 요소에 더해 또 다른 요소라 할 수 있는 독자적으로 다른 나라와 관계를 맺으며 국제적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외교 역량까지 갖춘 주권 국가로 후백제의 입지를 대. 내외에 공고히 했다. 이는 후백제가 일부 지역만 장악한 군벌이나 호족 세력을 넘어선 나라임을 명백히 하는 일이었고 이 작업을 견훤은 가장 먼저 해냈다.
힘과 명분, 국가 운영의 역량을 두루 갖춘 견훤의 후백제는 건국 이후 구 백제 지역에서 빠르게 세력을 확장했다. 후백제 등장에 자극받은 궁예는 통일 신라의 북쪽 지역을 장악해 후 고구려를 건국해 후삼국 경쟁 구도가 완성됐다. 이후 신라는 후백제와 궁예의 후고구려를 무너뜨리고 건국된 고려의 틈에서 그 세력이 더 약화됐다.
이후 정세는 견훤의 후백제와 왕건의 고려가 경쟁하는 구도가 됐다. 양국은 고려 건국 초기 우호관계를 형성하기도 했지만, 한반도 일대의 패권 장악을 위한 경쟁에 들어갔고 긴 전쟁으로 이어졌다. 초기 경쟁의 주도권을 후백제에 있었다. 후백제는 빠르게 나라의 기틀을 세웠고 신라를 압박해 그 영역을 넓혀갔다. 고려는 건국 초기 궁예를 추종하던 세력과 지역 호족 세력들과의 관계 정립에 시간이 필요했다.
후백제는 신라의 주요 성들을 점령했고 고려와의 전쟁에서도 거듭 승리하며 후삼국 경쟁의 주도권을 잡았다. 이런 후백제의 압박에 신라는 고려에 구원을 요청하는 등, 친 고려적 성향을 보였다. 쇠락한 신라지만, 경주를 중심으로 많은 인구가 있었고 천년 왕국의 각종 사회, 경제 인프라를 무시할 수 없었다. 신라가 고려와 유착한다면 후백제의 미래가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후백제는 신라와 고려의 관계를 단절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해 견훤은 927년 신라 수도 경주를 기습 공격해 경애왕을 포함해 친 고려 성향을 관리들을 대거 살해하거나 숙청하고 친 후백제 정권을 수립했다. 그리고 그의 손에 의해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이 왕위에 올랐다. 이를 통해 견훤은 신라를 자신의 세력 안에 두려 했다. 또한, 그런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신라 땅으로 진입한 왕건의 고려군을 지근 대구 팔공산 일대에서 궤멸시키며 후삼국 경쟁의 주도권을 더 강화했다. 이 전투에서 왕건은 겨우 목숨만을 부지해 탈출했을 정도였다.
이렇게 후삼국 시대를 주도했던 견훤이었지만, 그의 후백제는 이후 쇠락을 길로 빠르게 접어들었다. 대외 교역의 요충지였던 나주 지역이 고려에 의해 점령당하면서 앞뒤로 협공 당하는 상황이 이어졌고 후삼국 통일의 중요한 조건은 신라 지역 호족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상주 지역 호족이었던 아버지 아자개마저 견훤에 등을 돌리는 상황은 내내 중요한 아킬레스건이 됐다.
그사이 나라 힘을 키운 고려는 더 강하게 후백제를 압박했다. 여기에 신라가 노골적으로 친 고려 성향을 다시 보이면서 후백제는 대외 관계에서 고립되는 상황이 나타났다. 후백제는 한때 수군을 급파해 고려 수도 개경을 기습 공격하며 고려를 궁지에 몰아넣기도 했지만, 고려로 기울어가는 경쟁의 흐름을 되돌리지 못했다.
점점 고려에 밀리는 상황에서 결정적으로 견훤과 그의 장남 신검과의 후계 구도를 둘러싼 갈등은 신검의 정변으로 이어졌고 견훤은 아들에 의해 감금되는 처지가 됐다. 결국, 견훤은 감금된 장소를 탈출해 왕건에 의탁해야 하는 처량한 신세가 됐다. 왕건은 이런 견훤을 어른으로 대하며 우대했다. 비록, 자신의 목숨까지 위협했던 견훤이었지만, 그를 우대하면서 대외적 이미지를 제고하고 후백제의 분열을 유도하는 정치력을 발휘했다.
창업한 나라를 스스로 무너뜨린 비운의 군주 견훤
후백제에 여전히 큰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는 견훤의 고려 투항은 후백제를 더 쇠약하게 했다. 여기에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이 나라를 들어 고려에 스스로 귀부하면서 후백제는 완전히 고립되고 말았다. 결국, 후백제는 견훤이 왕위에서 축출되고 1년 후 고려의 대대적 공격을 받고 멸망했다. 그 과정에서 견훤은 자신이 후백제 공격을 강력히 주장했고 최 선봉에 서서 전투에 나섰다.
견훤의 존재는 후백제 군의 저항 의지를 꺾어 버렸다. 견훤은 자신이 세운 나라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비운의 군주가 됐다. 견훤은 후백제가 멸망한 후 얼마 안 가 한 사찰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사후 그는 왕이었지만, 시호조차 받지 못했다. 자수성가형의 창업 군주였고 후삼국의 패권을 놓고 치열하게 경쟁했던 시대의 영웅이었던 그였지만, 그는 자식들에게 배신을 당하고 경쟁자에게 사실상 항복을 해야 했다. 또한 어렵게 세운 나라의 운명을 스스로 끝낸 비운의 군주이기도 했다.
이런 견훤에 대해 사람들은 그의 일부 부정적인 면만을 바라보는 경향이 강하다. 역사에서 견훤은 패배한 군주이고 포악한 군주로 인식되고 있다. 하지만 그는 혼란한 시대에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고 나라까지 세운 인물이다. 단순히 무력만으로 이룰 수 없는 일이었다. 국가 경영의 비전과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쩌면 우리는 승자의 역사 기록에 의존해 견훤을 너무 모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를 통해 우리는 시대를 잘 살아가는 지혜를 얻을 수 있고 그의 실패를 통해 교훈을 함께 얻어야 한다. 그 점에서 견훤에 대한 평가는 그 시대상과 함께 보다 세밀하게 그리고 보다 객관적이고 입체적으로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사진,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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