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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역사에서 큰 전환점이 된 사건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 할 수 있다. 임진왜란은 조선을 그 전후로 조선을 구분하게 하는 사건이었다. 임진왜란을 통해 조선은 세종대왕과 성종의 집권기 전성기 이후 누적된 사회 구조적 문제가 한꺼번에 드러났고 변화의 필요성이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조선의 집권층은 사회 변화보다는 그들의 기득권을 더 강화하는 방향으로 정치를 했고 한층 더 보수화되고 경직된 사회 구조를 만들었다. 임진왜란 전 어렵긴 했지만, 계층 간 이동이 가능했고 유학 외 과학 기술의 발전을 이루는 등 역동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임진왜란 이후 유학은 더 깊은 관념론 속으로 빠져들었고 형식이 강조되는 예학이 더 발전하는 등 실생활과 더 멀어졌다. 또한, 대외 교류의 폭 또한 더 축소되고 고립됐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은 국제 정세에 대한 잘못된 판단으로 또 한 번의 전란에 휩싸였다. 임진왜란 이후 이후 집권한 광해군은 끊임없는 정통성에 대한 위협에도 전후 복구와 함께 제도 개선과 함께 나름 합리적인 정치를 하려 했고 대외 관계에 있어서도 기존 사대를 하던 명나라와 신흥 강국으로 떠오른 훗날 청나라가 되는 후금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하며 국익을 지키고 또 다른 전쟁을 막으려 노력했다.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

 

 


조선을 더 파국으로 몰고간 전쟁, 병자호란 


광해군의 중립 외교는 나름 성과가 있었지만, 광해군은 소수 정권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 광해군은 점점 소수의 측근들에 의존했고 반대 세력에 대한 지속적인 숙청과 옥사가 이어졌다. 또한, 비선 실세의 등장으로 정치 시스템이 왜곡됐다. 결국, 광해군은 반정 세력의 움직임을 읽지 못했고 인조반정으로 권좌에서 물러났다. 

그렇게 집권한 인조 정권은 특히, 외교 부분에서 큰 변화를 가져왔다. 광해군의 중립 외교 노선을 버리고 친명배금 정책을 분명히 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도왔던 명나라에 은혜를 갚는다는 이유였지만, 인조 정권의 반정 명분이었던 명분론에 기초한 정책이기도 했다.

하지만 국력이 쇠약해진 명나라는 점점 후금에 밀려 멸망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고 조선에 원병을 요청할 상황이었다. 조선은 만주 지역을 장악하고 국경을 접하고 있는 후금과의 군사적 충돌에 직접 대응해야 했다. 이미 조선은 광해군 집권기 명나라의 요청으로 후금과의 전쟁에 군대를 파견했고 후금의 강성함을 직접 경험했다.  

인조 정권은 그때의 경험을 교훈 삼지 않았고 후금에 대한 적대 정책을 그대로 유지했다. 무모한 일이었다. 조선의 국력은 후금에 대항하기에 역부족이었고 정예 부대가 지키고 있었던 서북 방어선은 인조 집권 초기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었던 이괄의 난이 겹치면서 크게 약화되어 있었다. 인조 정권은 후금과의 전쟁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는 상황에도 후금 적대 정책을 유지했다. 

명나라의 전쟁을 위해 조선을 견제할 필요가 있었던 후금은 1627년 조선에 대한 침략을 단행했다. 정묘호란이었다. 이 전쟁에서 후금의 군대는 빠르게 조선의 서북 방어선을 돌파해 수도 한양으로 향했다. 조선은 후금의 요청대로 형제의 맹세를 하며 강화에 임했다. 조선은 오랜 세월 오랑캐로 여겼던 여진족의 나라 후금에게 아우의 나라가 됐다. 치욕적인 일이었지만, 조선은 그때라도 보다 현실적인 외교 정책을 펼쳐야 했다. 

하지만 인조 정권은 다시 친명 기조를 분명히 유지했고 후금에 대한 적대 정책을 버리지 않았다. 대안 없는 강경책은 1636년 청나라로 개칭한 후금과의 전면전을 불가피하게 했다. 병자호란의 시작이었다. 뛰어난 기동력의 청나라 기마부대는 조선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매우 빠르게 한양으로 향했다. 조선은 항전을 했지만, 그들의 속도를 이겨낼 수 없었다.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끝까지 항전했지만, 패배를 막을 수 없었다. 청나라 군은 매우 강했고 최신 무기인 강력한 화포 앞에 조선군은 속수무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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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후 더 비참한 상황에 놓인 조선 백성들 그리고 화냥녀라 불렸던 여성들 


인조는 조선의 왕으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청나라 황제 홍 타이지에게 항복의 예를 갖추며 패전국의 치욕을 몸소 경험해야 했다. 이후 조선은 명나라를 멸망시킨 청나라의 사실상 속국이 됐다. 청나라는 이후 조선 후기까지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했다. 

청나라는 전후 조선에 대한 지속적인 인적, 물적 수탈을 자행했다. 특히, 인적 수탈이 극심했다. 전후 많은 조선인들이 포로로 청나라에 끌려갔고 그곳에서 노예가 됐다. 그중에는 전쟁과 무관한 일반 백성들도 상당수 포함됐다. 그 대상도 남성은 물론이고 여성과 아이까지 무차별적이었다. 그들은 노예로 취급되고 사고파는 대상이 됐고 특히, 여성들은 심한 성적 착취의 대상이 되며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다. 

그들 중 일부는 조선에 있는 가족들이 일정 금액을 지불하면 귀환할 수 있었지만, 그 수는 제한적이었다. 여성들은 그 기회마저 제한적이었다. 여성들의 청나라에서의 비참한 생활상이 조선에 알려진 상화에서 청나라에 끌려간 여성들에 대해서는 동정과 연민보다 오랑캐에 몸을 더럽힌 존재로 비난받았다.

이는 양반 가문의 여성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지금도 여성을 비하하는 표현으로 사용되는 화냥녀, 화냥년으로 불리며 가문에서 배제되거나 남편으로부터 이혼을 강요받았다. 심지어 정조를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자결을 강요당하기도 했다. 청나라에서 돌아온 여성들의 문제는 사회적으로도 큰 이슈였다. 이에 인조는 청나라에서 돌아온 여성들이 지금의 서대문구 연신내의 홍제천에서 목욕을 하고 돌아오면 아무런 죄를 묻지 않겠다는 명을 내리기도 할 정도였다. 그만큼 병자호란 기간, 수많은 여성들이 죽거나 살아도 산 것이 아닌 삶을 살아야 했다.

무엇보다 그들의 고통에 대한 사회적 냉대와 멸시, 혐오는 그들을 더 괴롭히는 일이었다. 남성들이 무능한 정치와 그에 따른 전쟁과 패전의 결과로 큰 피해를 입은 여성들이었지만, 그들은 피해자로 보호받지 못했다. 

 

 

남한산성




의순공주에 강요한 희생


이런 여성들의 비극 속에 조선의 한 공주도 포함되어 있었다. 의순공주로 역사에 기록된 그녀는 당시 조선 여인들의 비극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의순공주는 본래 공주의 신분이 될 수 없었다. 그의 공주 직위는 당시 청나라와 조선의 관계, 정치적 고려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된 결과였다. 청나라는 병자호란을 통해 조선을 굴복시킨 이후 조선에 대한 간섭과 함께 노골적인 수탈을 자행했다. 앞선 언급한 인적 수탈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고 그 대상 중 상당수는 여성이었다. 이는 일반 백성은 물론이고 사대부 집안도 다르지 않았다. 

인조가 세상을 떠나고 집권한 효종은 청나라로부터 매우 곤란한 요청을 받았다. 당시 청나라의 실세 줄 실세인 권력자 도르곤이 조선 왕족이나 고위 관료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이고 싶다는 제안을 했기 때문이었다. 도르곤은 황제를 대신해 청나라를 사실상 지배하는 인물로 조선은 그의 제안을 거절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조선에 씻을 수 없는 굴욕을 안겨준 오랑캐의 권력자에게 공주나 관료의 딸을 그것도 첩으로 보내는 건 심정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이에 왕족과 관료들은 자신의 딸을 숨기거나 빠르게 혼인시키는 등의 방법으로 이를 피해 가려 했다.

하지만 도르곤은 자신이 굴복시킨 나라의 공주를 아내로 맞아들이는 것이 일종의 전리품이 될 수 있었고 권력자로서 권위를 높이는 일이었다. 여전히 조선은 청나라에게 조선은 그들의 근거지인 만주를 지배했던 고대 왕국 고구려의 후예이고 또한, 그들이 상당 기간 받들었던 나라였다는 점에서 조선 공주와의 혼인인 그 상징성도 컸다. 

이에 효종은 자신과 먼 친척의 딸을 공주로 삼아 도르곤에게 시집을 보내는 결정을 했고 자신의 9촌 종친인 이개윤의 딸, 촌수로는 10촌 고모뻘이 되는 이애숙을 양녀로 삼고 의순공주라는 작위를 내려 혼사를 진행했다. 의순공주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15살의 나이에 생면부지의 이방인에게 시집을 가는 처지가 됐다. 

 

 

도르곤

 




의순공주 청나라에서 계속된 비운의 삶 


이런 의순공주의 상황에 왕족들은 물론이고 많은 백성들이 함께 슬퍼하며 그를 배웅했다. 그가 청나라로 떠나는 날, 효종은 그를 4대문까지 배웅했고 도성의 백성들도 그 행렬을 지켜봤다. 의순공주는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는 길을 떠났다. 

그렇게 자신보다 한참 나이가 많은 도르곤의 5번째 부인이 된 의순공주는 여전히 조선에 대한 의구심을 멈추지 않고 있는 청나라 조정의 부정적 시선과 낯선 환경 속에서 힘겹게 시간을 보내야 했다. 또한, 조선 조정은 그를 통해 청나라 조정의 상항 등 정보를 얻으려 했을 가능성이 컸다. 의순공주로서는 매일매일이 불안한 나날이었다. 

그대로 청나라 최고 권력자의 부인이 됐다는 건 청나라에 잡혀온 다른 조선 여성들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여건이었지만, 그마저도 어려웠다. 도르곤과 혼인한지 7개월 만에 도르곤이 사냥 도중 사고로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의순공주는 졸지에 청나라에게 아무도 의지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여기에 도르곤 사후 그의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 작업이 이루어지면서 도르곤의 대역죄인이 됐고 그 시신이 부관참시 당하는 일까지 생겼다. 당연히 그의 남은 식구들과 측근 인사들도 화를 면할 수 없었다. 의순공주의 삶이 다시 격랑 속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의순공주는 이후 도르곤의 부하이자 청나라의 권력자였던 보루와 재혼을 하게 됐다. 그는 도르곤에 대한 숙청 작업과정에서 발생한 일종의 전리품 취급을 받았고 보루와의 재혼 역시 원치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보루마저 얼마 안 가 갑자기 사망하면서 의순공주는 다시 홀로 청나라 권력 투쟁의 한 편에 남겨졌다. 

의순공주는 아무도 의지할 수 없고 심지어 무관심과 냉대 속에 힘겹게 하루하루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청나라에서도 의순공주가 더는 필요치 않았고 권력자들과의 관계가 단절된 의순공주는 조선에서도 그 활용도가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의순공주는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잊히는 존재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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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의순공주의 상황은 사신으로 청나라에 온 그의 아버지 이개윤이 청나라 황제에게 의순공주 귀환을 읍소했고 그것이 받아들여지면서 다시 변화를 맞이했다. 의순공주는 그렇게 꿈에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의순공주에 대한 조선의 여론은 과거와 달랐다. 

이미 오랑캐에게 더럽혀지고 또 다른 오랑캐와 재혼을 한 그는 더 이상 연민의 대상이 아니었다. 당시 청나라에서 귀환하는 여성들을 지칭하는 화냥녀 그 이상의 존재가 아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에게 강한 부채의식이 있었던 효종이 그와 그의 가문을 비호하면서 의순공주는 공주로서의 지위를 유지했고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조선 조정은 물론이고 백성들 사이에 강하게 자리한 반청 기류 속에 의순공주의 그의 집안은 점점 정치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몰렸다. 거듭된 탄핵에 그의 아버지 이개윤은 모든 직위를 잃고 도성 밖으로 내쳐졌고 의순공주 역시 곤궁한 상황에 몰렸다. 심지어 그의 공주로서 직위까지 박탈당했다. 

그렇게 모진 편지 풍파 속에 의순공주는 28살의 젊은 나이에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어려서부터 거대한 역사의 변화 속에 홀로 내 던져진 그의 삶 속에 마음의 병이 안 생기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자신의 삶을 건 희생을 했음에도 돌아온 고국에서 그에게 돌아오는 건 화냥녀라는 비판과 혐오 뿐인 환경에서 하루도 마음이 편할 수 없었던 의순공주였다. 

 

 

 




어렵게 돌아온 조선, 그에게 돌아온 건 멸시와 혐오 


사후 의순공주는 지금의 의정부 금오동의 한 야산에 안장됐고 그 묘지가 아직도 남아있다. 하지만 그의 삶은 사후에도 제대로 조명되지 않았다. 백성들 사이에서는 의순공주가 오랑캐와의 혼인을 거부하여 스스로 강물에 몸은 던져 목숨을 끊었고 시신을 찾을 수 없어 묘지에 족두리만 안장되었다는 거짓 야사가 퍼지기도 했다. 지금도 그의 묘소는 족두리 묘로 전해지고 있다. 물론, 지금으로 말하며 가짜 뉴스였다. 

의순공주는 국가를 위해 큰 희생을 한 것이지만, 조선 사회는 그 희생을 기리기보다는 오랑캐의 아내가 됐다는 사실에만 주목했다. 대의를 위해 순응했다고 하여 의순공주라는 작위를 내리고도 정작, 그 희생을 왜곡하고 비난 폄하하는 사회적 위선에 의순공주는 죽어서도 삶을 부정당하고 말았다. 

그의 삶은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전통과 그 속에서 억압받는 여성들의 삶, 무능한 권력자들과 지배층의 나라를 지배했을 때 패해가 고스란히 함축되어 있다. 특히, 당시 조선 백성들과 여성들의 비참한 삶은 최근 큰 인기를 얻고 있는 사극 '연인'을 통해 조명되고 있다. 

실제로 조선은 두 차례 큰 전락 이후에도 이를 사회개혁의 기회라 삼지 못했다. 오히려 집권층의 권력 투쟁은 피의 숙청을 반복하게 했다. 무의미하고 실현 가능성 없는 북벌론은 국력을 소진하고 기득권층은 이를 권력 강화에 이용했다. 신분 질서가 붕괴되고 곳곳에서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왔지만, 정책에 반영되지 않았다. 나라는 더 수구화되고 국제 흐름도 애써 외면했다. 그렇게 역사 발전에서 소외된 조선은 그만큼 발전 속도가 더뎌졌고 앞서 근대화를 이룬 일본에 강제 병합 당하는 비운을 당하고 말았다. 

의순공주는 잘못된 정치의 희생자였고 모순된 사회 구조의 희생자였다. 이 점에서 그의 삶은 역사의 교훈으로 더 알려져야 한다. 하지만 유일한 의순공주의 흔적이라 할 수 있는 그의 묘지는 최근 몇몇 언론의 보도를 통해 크게 훼손되고 심지어 지역의 부동산 개발로 인해 사라질 위기에 몰려있다고 전해진다. 지금이라도 의순공주가 제대로 된 역사적 평가를 받고 보다 편히 쉴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사진 : 위키백과,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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