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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안산시와 화성시가 접하는 곳, 거대한 시화방조제와 시화호가 접하는 곳에 자리한 섬 대부도는 멋진 바다 풍경을 항시 즐길 수 있는 수도권 근교 여행지로 많은 이들이 찾고 있다. 이제는 시화방조제와 다리가 연결되고 간척 공사로 섬이라는 말이 무색한 곳이 됐지만, 여전히 사람들에게는 대부도라는 말이 더 익숙하다. 

이 대부도에 정확히 말해 간척 사업으로 대부도와 연결된 섬인 선감도에서 국가 권력이 자행한 추악한 폭력과 인권 유린의 현장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많지 않다. 선감학원, 선감원이라 불렸던 이곳은 일제 강점기 조선 총독부에 의해 1941년 설립됐다. 이곳에는 부랑아로 지목된 소년 수백 명이 강제로 수용된 일종의 수용소였다. 거리의 고아나, 불량배, 범죄자는 물론이도 독립운동을 했거나 정치적 이유 등으로 수용소로 끌려온 이들도 있었다.

일제가 정한 부랑아의 개념은 매우 추상적이었고 판단 기준도 모호하고 주관적이었다. 선감원은 일제 강점기 민족말살 정책이 더 강하게 시행되고 중. 일 전쟁에 이어 태평양 전쟁까지 침략 전쟁을 지속하기 위해 조선에 대한 인적, 물적 수탈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우리 민족을 억압하고 사회 통제를 강화하려는 수단으로 악용됐다. 

 

 

대동여지도 속 선감도 인근

 

 

일제 강점기 부랑아 강제 수용시설이었던 선감원


이곳으로 끌려온 아동들은 대부분 초등학생이나 10대 청소년이 대부분이었다. 일제는 이들에게 교육을 시킨다고 했지만, 실제는 억압된 분위기 속에서 강제 노역에 시달렸고 자신의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거나 반발을 하는 아이들에게는 어른들도 견디기 힘든 잔혹한 고문을 했다. 이 과정에서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사망하거나 선감원을 탈출하다가 목숨을 잃는 아이들이 부지기수였다. 하지만 이 사실은 철저히 은폐됐다. 오히려 부랑아들에 대한 복지 시설로 선전되기도 했다. 

이렇게 일제 강점기 우리 민족을 억압하는 아픈 역사의 현장이었던 선감원은 광복 후 마땅히 사라져야 했지만, 광복 후에도 미군이 포로수용소 등의 이곳을 사용했고 경기도로 관리권이 넘어온 이후에는 선감원에서 선감학원으로 이름만 바꾸었을 뿐, 일제 강점기와 같은 부랑아 수용시설로 그 기능을 유지했다. 또한, 일제 강점기와 같이 반인권적, 비인간적이고 폭력적 운영 행태도 그대로 계승됐다. 이 점에서 선감학원은 청산하지 못한 일제의 잔재였고 창살없는 감옥이었다. 

이후 선감학원은 부랑아 수용시설로 기능하며 20세 이하의 남자 원생들이 있었다. 그들은 가혹한 노동에 시달렸고 잔혹한 고문과 폭력도 매일 행해졌다. 그들에게 제공되는 식사는 부족했고 그 질도 형편없었다. 원생들은 항시 영양 부족에 시달렸고 쥐나, 벌레를 잡아먹으며 연명해야 했다. 문제는 이곳에 수용된 부랑아 중 상당수는 가족과 연고가 있는 이들이었다는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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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설 유지를 위한 수용 인원을 채우기 위해 많은 무고한 어린이들이 일상생활을 하다 끌려와 강제 수용되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들은 외부와 철저히 통제된 생활을 했고 자신의 억울함을 얘기할 방법이나 기회도 없었다. 영문도 모른 채 포로수용소보다도 못한 환경 속에서 선감학원 원생들은 인간 이하의 삶을 살아야 했다.

몇몇은 탈출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당시 사방이 바다였던 섬을 헤엄쳐 건너는 건 무리가 있었고 개펄을 통과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에 탈출 과정에서 다수 사망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수용소에 있는 이들 역시 지속적인 폭력과 가혹행위에 시달리다 질병으로 사망하는 이들이 많았다. 

훗날 선감학원을 극적으로 탈출한 이들의 증언 등을 종합하면 수용소가 운영되는 기간 수백 명이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들은 대부분 암매장되어 그 사실이 은폐됐고 선감학원의 실체도 외부에 알려질 수 없었다. 오히려 박정희 정권 시절 선감학원은 모범 복지시설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 시설을 소개하는 영상은 철저히 왜곡 조작됐다. 또한, 선감학원 관련 문서 등 자료 역시 철저히 은폐되고 파기됐다.


일제 강점기 잔재를 계승한 정부 그리고 선감학원


이곳의 실체가 알려진 건 이곳을 탈출한 이들의 증원과 일부 언론사의 보도에 의해서였다. 이를 통해 선감학원의 추악한 실체가 조금씩 세상에 알려졌다. 하지만 선감학원은 1982년까지 운영됐고 조용히 문을 닫았다. 선감학원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과 명예 회복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곳에 수용됐던 이력이 있는 이들은 부랑아라는 낙인이 찍혔고 쉽게 자신의 피해를 알릴 수 없었다. 오히려 선감학원에서의 이력을 숨기고 숨죽여 살아야 했다. 그러면서도 사회와 오랜 세월 단절된 삶을 살았던 탓에 사회 적응이 어려웠고 정상적인 삶을 살기도 힘들었다. 상당수는 트라우마 등 후유증에도 시달렸을 것으로 보인다. 

피해자들이 비참한 삶을 살아가는 와중에도 선감학원의 운영자들과 책임자들은 우리나라의 사회복지 분야의 1세대 지도자로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삶을 살았다. 이들은 선감학원에서의 이력을 숨겼고 그 책임 역시 제대로 지지 않았다. 선감학원의 기억은 점점 사람들 속에서 사라져 갔다.

선감학원과 관련한 진실이 다시 세상에 드러난 건 한 일본인의 용기 있는 행동 때문이었다. 일제 강점기 선감원 부원장의 아들이었던 이하로 히로미츠가 이곳의 실상을 바탕으로 하는 소설을 일본에서 발표하고 그 진상을 밝히면서 선감학원의 어두운 이면들이 사회 공론의 장으로 나왔다. 히로미츠는 일본에서 관련 강연을 이어갔고 위령비 건립 등에도 적극 참여했다.

 

 

일제 강점기 선감원

 

 

한 일본인의 참회와 사죄를 바탕으로 한 노력은 사회적 반향을 얻었고 언론 등에서 선감학원에 대해 주목하기 시작했다. 관련 취재와 방송이 만들어졌고 대중들은 그제야 선감학원의 진실과 마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선감학원 피해자들에 대한 구제는 2000년대 들어서야 구체화됐다. 원통하게 세상을 떠난 이들의 넋을 기리는 위령비도 2014년에 가서야 건립됐다.

마침내 2022년,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에서 진실 규명 결정을 했고 희생자들의 유해가 매장된 곳으로 추정되는 곳의 발굴 작업도 진행됐다. 실제 그곳에서 희생자의 뼈 등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너무 늦은 진상 규명으로 인해 그 유해의 흔적이 상당 부분 훼손되고 말았다. 

같은 해 과거사위는 조사 보고서를 통해 선감학원이 일제에 의해 자행된 일제 강점기 부당한 부랑아 수용정책을 답습한 시설이었고 인권침해가 지속되었음을 밝혔다. 또한, 시설 운영 과정에서 경찰과 공무원 등이 공권력과 권한을 남용해 조직적으로 아동들을 강제 연행해 구금했음을 명확히 했다. 아울러 선감학원의 원생들은 철저히 격리됐고 굶주림과 강제 노역, 폭언과 폭행, 각종 가혹행위에 시달렸라는 사실을 더했다. 이를 근거로 선감학원 원생들은 아동학대 인권 침해 사건의 피해자로 인정됐다. 

이렇게 긴 세월이 흘러 선감학원과 관련한 진상 규명과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의 길이 열렸다. 하지만 너무 긴 세월이 흐른 탓에 피해자들 상당수가 세상을 떠난 이들도 있고 여전히 피해자임을 알리지 못하는 이들도 존재한다. 피해자임을 드러냈을 때 자신에 쏠릴 부랑아라는 시선도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 가족과 지인들이 이 사실을 아는 게 불편한 이들도 있을 수 있다. 여전히 우리 사회는 인권침해 피해자들을 따뜻하게 보듬지 못하고 있다.

 

 

 

 

선감학원의 비극은 국가 폭력에 의한 인권침해 사건은 1980년대 삼청교육대,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과 유사하다. 삼청교육대는 전두환 정권이 사회 정화와 불량배 소탕을 명분으로 진행했다. 이 과저에서 무고한 시민들이 다수 삼청교육대에 입소해 가혹한 훈련과 노력, 폭력에 의해 고통받았다. 삼청교육대 사건은 이후 그 불법성과 비 인권적 운영이 드러나며 제5공화국의 대표적 폭정의 사례가 됐다.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은 대형 부랑자 수용시설인 형제복지원에서 정권의 비호 아래 각종 폭력과 살해, 암매장, 강제 노역 등 인권침해가 자행된 사건으로 과거사위 조사 등을 통해 무고한 이들이 다소 이곳으로 납치 수용됐고 수백 명이 살해되어 암매장됐음이 밝혀졌다. 어처구니가 없었던 건 형제복지원을 운영했던 원장과 그 가족들은 이를 통해 막대한 부와 함께 지역 저명인사로 군림하며 살았다는 점이다. 형제복지원과 관련한 진실이 드러난 이후에도 원장은 가벼운 처벌만 받았고 기존의 부와 명예를 유지하며 천수를 누렸다. 그 가족들 역시 여전히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다. 

 

긴 세월이 흘러 밝혀진 진실, 그리고 교훈

 

 

인근 탄도항 일몰

 

 

이 사건들의 공통점은 피해자들은 존재하지만, 가해자들이 없고 있다고 해도 권력과 돈의 힘으로 그 죄가 제대로 단죄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고통은 오로지 피해자들의 몫이었고 지금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또한, 가해자들이 지탄을 받아야 하지만, 사회적 비난을 피해자들이 받아야 하는 현실도 마찬가지다. 여전히 상당수 사람들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 피해자가 됐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한편에서는 긴 세월이 지난 일을 들추는 것에 대한 거부감도 있다. 

하지만 이는 전쟁범죄 등 과거사의 잘못을 인정하거나 사과하지 않고 오히려 은폐하고 심지어 왜곡하는 일본 정부와 이를 옹호하는 일본 극우 세력들의 논리와 다를 게 없다. 진실을 밝히는 것이 불편하고 고통스럽더라도 이를 밝히고 피해자들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보상하는 건 앞으로 국가폭력에 의한 인권침해 등 또 다른 피해자를 막는 일이다. 그 피해자는 자신이 될 수도 있다.

이 점에서 선감학원의 역사는 외면돼서는 안되고 기억되고 알려져야 한다. 이를 위해 과거 이곳을 관리 운영했던 경기도 진실을 밝히는 데 적극적으로 나서고 선감역사박물관을 건립 운영하는 건 긍정적인 일이다. 아프고 부끄러운 역사도 역시 중요하기 때문이다. 


사진 : 위키백과, jihuni74,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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