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나라의 국호인 대한민국, 줄여서 한국이라는 말이 처음 등장한 건 1919년 3.1 만세운동 이후다. 그전까지 우리나라는 조선이었다. 그 조선은 그 역사의 끝자락에서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변경하고 자주국임을 알렸지만, 얼마 안 가 일제의 침탈에 제국의 역사를 더는 이어갈 수 없었다. 일제 강점기 지금의 한국인들은 조선인이었다. 그 조선이라는 말에는 왕이 지배하는 나라라는 말이 함께 하고 있었다.
우리 민족의 역사는 왕의 역사였고 그 왕을 중심으로 역사의 기록이 남겨졌다. 각 시대별로 뛰어난 영웅이 등장하고 유능한 인재들이 역사의 한 부분을 차지하긴 했지만, 조선은 왕의 나라였다. 산업혁명 이후 시민들의 권리가 점점 강화되고 민주주의 발전했지만, 조선은 그렇지 못했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제의 강압적 통치의 대상이었다. 조선인들은 2등 국민이었고 감시와 통제, 착취와 억압의 대상이었다. 그 속에서 민주주의 발전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많은 지식인들과 독립운동가들은 변화하는 국제 정세와 시대 흐름을 잘 읽고 있었다. 해외 독립운동이 활발히 진행되는 상황에서 점점 가장 근대적인 국가 형태인 민주주의 공화정을 실현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1919년 3. 1 운동은 민주 공화정의 시작점이 됐다.
3.1 운동 현황도
외신에서 보도한 3.1 운동 (위키백과)
일제에 의해 자행된 제암리 학살 현장 사진 (위키백과)
3.1 운동은 일제의 압제를 반대하는 독립운동이었고 거국적인 저항운동이었지만, 시민운동의 성격도 강했다. 민족대표 33인이 중심됐다고 하지만, 3.1 운동 당일 만세 운동을 이끈 이들은 젊은 학생들이었고 독립선언서가 낭독되는 현장에 있었던 일반 대중들이었다.
그들은 하나가 되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 만세 운동은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 나갔고 1달 이상 계속됐다. 일제의 폭력적인 진압에 만세 운동은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지만, 우리 독립 의지를 국. 내외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일제의 강압적인 통치와 탄압에 힘을 잃어가던 독립운동이 다시 활력을 얻는 계기가 됐다.
이런 독립의 의지는 해외 무장 독립투쟁은 물론이고 다양한 방법으로 독립운동을 이어지게 했다. 또한, 우리만의 정부를 수립하자는 움직임으로 발전했다. 그 속에서 해외에서 수립됐던 임시 정부가 통합됐고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될 수 있는 임시정부가 수립됐다. 1919년 4월 11일의 일이었다. 임시정부는 우리나라의 이름을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임을 선포했다. 아울러 입법, 행정, 사법의 3권 분립제 확립과 함게 대한제국의 계승을 명시했다. 단절된 우리 역사의 복원이었고 국민이 주인 되는 민주주의 국가의 시작이었다.
이 임시정부는 독립운동의 구심점으로 그 역할을 했고 광복 후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로 그 역사가 계승됐다. 대한민국 헌법에도 대한민국은 3.1 운동의 정신과 이로 인해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이는 시대별 정부의 성격이 변함에도 변치 않았다. 즉,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민주주의 대한민국의 근본이라 할 수 있다.
건물 외관
임시정부의 역사를 형상화한 외부 작품
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역사를 한자리에 살필 수 있는 곳이 있다. 또 다른 역사 유적지인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 인접해 지어진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이 그곳이다. 2022년 3월 1일 개관한 이 기념관은 여러 박물관과 기념관에 파편처럼 흩어져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관련한 사료들을 모아 정리해 전시하고 있다. 또한, 우리 독립운동사를 살필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임시정부의 수립 과정을 형상화한 3차원 미디어 영상 작품
대한민국의 시작을 알린 지금의 국회 격인 임시의정원 회의 장면을 재현한 영상 자료
임시정부 인장, 안창호를 중심으로 임시의정원 인사들
여성 독립운동가들
중국 상해 프랑스 조계지에 세워졌던 임시정부 청사
상해는 국제도시로 세계 각국의 외교관들이 상주하고 있어 외교 활동에 유리했고 치외법권 지역인 조계지는 일제의 힘이 상대적을 덜 미치는 지역으로 신변의 안전과 함께 자유로운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임시정부의 개헌, 임시의정원 의장
요인들의 신변과 교민들의 안전 보호 활동, 국. 내외 정보 수립과 일제 밀정 색출 처단하는 임무를 수행했던 임시정부 경무국, 지금의 경찰인 경무국은 대한민국 경찰의 시작이었다. 초대 경무국장은 백범 김구였다.
임시정부는 수립 후 일제의 지속적인 방해와 압력, 자금난과 노선 갈등이 겹치며 존립 자체를 위협받는 상황에 몰린다. 초대 임시정부 대통령에 올랐던 이승만은 이런 임시정부 상황에도 미국에 머물며 임시정부 활동에 미온적이었고 임시정부 자금의 주 재원이었던 미주지역의 교포 성금을 독점하며 사적으로 사용하며 임시정부 인사들의 비판을 받았다.
결국, 1925년 임시정부 의정원은 이승만의 탄핵을 결의하고 이승만은 대통력직에서 축출됐다.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에서 이승만은 첫 번째로 탄핵된 대통령이었다.
이후 임시정부는 주요 인사들이 이탈하면서 와해 위기에 몰렸다. 이 위기에서 임시정부는 의열 투쟁을 통해 돌파구를 찾았다. 김구를 중심으로 한인 애국단을 조직하고 일제 요인 암살 시도가 이루어졌고 이 과정에서 이봉창, 윤봉길의 의거가 있었다. 이들은 모두 거사 후 죽음을 맞이했지만, 이들의 희생을 헛되지 않았다.
이는 임시정부의 존재감을 높이는 한편 국. 내외의 지원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특히, 1936년 윤봉길의 상해 홍코우 공원 폭탄 의거는 일제의 본격적인 중국 침략으로 인해 고통받던 중국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장개석 정권이 임시정부를 적극 지지하고 지원하는 계기가 됐다. 이를 통해 임시정부는 독립운동의 구심점으로 자리했다.
대한민국 공군의 시작
임시정부는 현대전에서 공군의 중요성을 일찍이 인식하고 있었고 항일 전쟁을 위해 공군부대 창설을 시도했다. 이를 위해 미국의 비행장에서 비행기를 구입하고 교관을 모집해 한국 젊은이들을 공군으로 양성하는 노력을 했다. 그 과정에서 설립된 윌로우스 비행학교는 대한민국 공군의 시초가 됐다.
그리고 이 비행학교 설립에 자신의 사재를 털어 재정적 지원을 했던 김종립은 해외 이민으로 미국에 이주해 일용직으로 시작해 대 농장을 소유하여 거부가 된 입지전적 인물이기도 했고 그렇게 모은 재산을 독립운동을 위해 아낌없이 내 놓은 숨은 독립운동의 영웅이었다.
자금 마련을 위해 임시정부에서 발행한 애국 공채
임시정부의 지속적인 외교 활동을 증명하는 자료들
중일 전쟁이 격화되고 일제의 중국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임시정부는 일제에 저항하기 위해 수차례 수도를 옮기며 장개석 정권을 따라 이동을 거듭했다. 상해에서 충칭까지 그 여정은 매우 길었다. 신변의 위협은 지속됐다. 하지만 임시정부 인사들의 독립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대일 선전포고 광복군 창설과 광복 전쟁
임시정부는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일제에 선전포고를 하고 중국 각지에서 활약하던 독립군을 규합해 광복군을 창설했다. 광복군은 중국 각지에서 중국군과 연합 작전을 했고 연합군과도 합동 작전을 하기도 했다. 이 광복군은 대한민국 국군의 시작이었다.
광복과 환국
1945년 8월 15일, 일제는 패전이 명확한 상황에도 연합군의 무조건 항복을 거부하며 저항했지만, 두 번의 원자폭탄에 굴복해 연합군에 항복을 선언했다. 일제 강점기가 끝나고 광복이 찾아온 순간이었다.
하지만 임시정부 인사들은 광복이 기쁘기도 하면서 안타까운 순간이었다. 미군과 함께 준비했던 광복군의 국내 침투 작전의 시행을 눈앞에 둔 시점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작전이 시행되고 광복군이 국내에 잠입해 작전을 성공했다면 우리는 승전국의 지위를 더 명확히 할 수 있었고 임시정부가 그 대표성을 확실히 할 수 있었다.
광복 이후 남한에는 미국이 북한에는 소련이 진출했고 우리 민족은 38도선을 기점으로 남북으로 분단되는 현실을 맞이했다. 임시정부 역시 광복 후 들어선 미 군정에 의해 대표성을 인정받지 못했다. 임시정부 인사들은 모두 개인 자격으로 환국해야 했다. 그럼에도 임시정부 인사들의 환국에는 전국에서 모여든 수많은 인파들이 그들을 환영했다.
임시정부의 사상, 이념을 기초한 인물 조소앙의 육성이 담긴 레코드판 그리고 축음기
조소앙은 대한민국 헌법의 근본이 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임시헌장을 기초했고 임시정부의 사상적 이념적 기초를 마련한 인물이었다. 또한, 외교 활동의 중심인물이었다. 그의 사상은 삼균주의를 근간으로 한다. 삼균주의는 개인 간, 민족 간, 국가 간 균등 그리고 정치적, 경제적, 교육적 균등을 포함하고 있다.
이를 위한 방편으로 보통선거제 확립, 주요 산업의 국유화, 의무교육제도를 주창했다. 이는 임시정부의 중요한 이념이었고 매우 진보적인 내용이었다. 조소앙이 광복 후 주요 우익 정치인으로 활약했음을 고려하면 임시정부는 이념적 성향과 상관없이 평등의 가치를 더 중요하게 여겼음을 알 수 있다.
조소앙은 남한에서 정치인으로 활동했고 국회의원에서 당선됐지만, 6.25 한국 전쟁기간 납북되어 북한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김일성의 북한정권에 협조하지 않고 지식인의 삶을 살았다. 조소앙은 남한과 북한에도 모두 존경받는 보기 드문 인물이기도 하다.
임시정부의 역사를 살핀 후 또 다른 기획전을 찾았다. 임시정부 인사들의 일상, 그리고 일제 강점기 해외로 이주한 이들의 삶의 기록을 담은 전시였다.
더 나은 미래, 희망을 찾아 불확실성 가득한 미지의 땅으로 떠난 사람들
해외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됐던 중국, 프랑스, 그리고 미국 하와이, 멕시코와 쿠바까지 이어진 해외 이주
중국 상해
프랑스 파리
하와이
열악한 노동 환경을 이겨내고 뿌리내린 멕시코, 쿠바
그들의 흔적
이 전시에서는 당시 해외로 떠났던 이들의 삶과 조명되지 않았던 일상과 그와 관련한 기록들을 만날 수 있었다.
군주의 나라에서 국민의 나라로, 이 말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의미를 축약하고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시작으로 우리는 민주주의 국가가 됐고 그렇게 만들어진 공화국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그 중간 6.25 한국전쟁의 아픔도 있었고 극심한 이념 대립 속에 큰 희생을 치르기도 했다.
불의한 권력에 민주주의가 훼손되고 그 역사가 퇴행되는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국민들은 그때마다 하나로 뭉쳐 그 권력에 대항하고 맞서 싸웠다. 그 사이 민주주의 혁명의 과정을 거쳐 더 발전된 민주주의 국가가 됐다. 이 점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역사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지키고 그 역사를 지탱하는 뿌리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최근 이 임시정부의 역사를 폄하하거나 심지어 부정하는 움직임도 볼 수 있다. 헌법에도 명시된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무시하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일인 1945년 8월 15일을 대한민국의 역사 시작으로 하는 건국절 논란은 이해하기 어렵다. 이 논리면 일제 강점기 우리 독립운동의 의미도 퇴색하고 일제 강점기 대한민국의 역사는 긴 공백기를 가질 수밖에 없다. 이는 어렵게 쌓아온 민주주의 역사를 순간 무너뜨리는 일이다.
지금의 민주주의 발전은 수많은 이들의 희생이 있어 가능했다. 그리고 그 역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로부터 시작됐다. 이는 자랑스러운 우리 역사다. 이 역사를 더 공부하고 알리는 노력은 우리 정체성을 지키는 일이다. 이 점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관은 가치 있는 장소다. 이곳이 우리 현대사의 뿌리를 지키고 발전시키는 구심점이 되길 기대해 본다.
사진 :위키백과 / jihun74, 글 : jihuni74
'문화 >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역사] 드라마 '연인' 속 병자호란과 비참한 조선 백성의 삶 상징하는 인물 의순공주 (54) | 2023.10.16 |
---|---|
[역사 이야기] 조선인의 긍지 버리지 않은 불꽃같은 삶 살았던 독립운동가, 박열 (42) | 2023.09.02 |
[역사 이야기] 세상을 떠나서도 편히 잠들지 못했던 불운했던 임금 경종과 의릉, 한예종 (14) | 2023.07.23 |
역사 이야기, 조선 후기 르네상스의 주역이자 비운의 정치인 정약용 (28) | 2023.07.09 |
역사 이야기, 국난 극복 위해 종교적 신념 접은 승병장이자 협상가였던 사명대사 (12) | 2023.06.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