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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역사에서 권력 구조에 극적인 변화가 있었던 시기는 초기 태종 이방원의 집권기와 수양대군 세조의 집권기다. 이들은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지만, 치열한 권력 투쟁 속에서 이복형제와 친 조카를 죽이고 반대파들을 힘으로 제압하고 왕위에 올랐다. 

태종과 세조는 집권 과정에서 정통성을 가지지 못했지만, 왕권을 강화하고 조선의 통치 시스템을 확립하는 한 편 그들 뒤를 이은 세종과 성종 때에 나라의 전성기를 열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태종에서 시작해 세조를 거쳐 성종대까지 조선은 최전성기였다. 철저한 신분제를 표방한 조선이었지만, 이 시기 조선에는 능력이 있으면 출세할 길이 열려있었고 남녀 간의 관계도 차별이 아닌 역할이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조선의 전성기는 성종 사후 최악의 폭군으로 기록된 연산군 시기를 지나 그가 반정 세력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난 이후 권력 지형이 크게 변했고 사회 모순이 드러나면서 점점 그 지속력을 잃었다. 강력한 왕권이 약해지고 신권이 왕권보다 우위에 서기 시작했고 사림 세력들이 새로운 정치의 중심이 됐다.

이들은 부와 명예가 보장되는 한정된 관직을 놓고 치열하게 대결했고 그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지금의 정당과 같은 붕당을 만들었다. 이 붕당정치는 민주적 정치 형태를 보이기도 했지만, 붕당의 이익이 중요한 관심사가 되면서 정치는 권력투쟁이 주가 되고 말았다. 당파싸움이라고 폄하되기도 하는 붕당정치는 조선 정치의 중심이었다. 

 

 

 

 


붕당정치는 큰 대립 속에서도 상대 당의 존재를 인정하고 일정 공존을 모색하기도 했지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큰 전란을 거치면서 상대당에 대한 극단적인 배척과 사생결단의 대결로 치달았고 수많은 사화와 옥사로 많은 이들의 희생됐다. 한 붕당의 집권은 바로 반대 당에 대한 잔혹한 숙청으로 연결됐다. 이런 붕당정치의 폐해를 극복하려는 노력도 있었지만,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이 붕당정치를 조절하고 효율적인 국정 운영을 이끌어야 할 왕들은 그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 강력한 신권에 눌려 힘을 쓰지 못한 면이 컸지만, 오히려 왕이 당쟁을 자신의 왕권 강화를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며 당쟁을 더 격화시키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고도의 정치력을 발휘했다 할 수 있지만, 이는 극단적인 정치 대립을 더 심화시키는 부작용으로 연결됐다.

대표적인 왕이 숙종이었다. 숙종은 조선 왕조에서 왕위 승계가 어려웠던 적장자에 일찍부터 세자 자리에 올라 제왕 수업을 받은 후 왕위에 오른 인물이었다. 그 누구보다 강력한 정통성을 가지고 있는 숙종이었다. 숙종은 이를 바탕으로 신권을 억누르고 강력한 왕권을 부활시키려 했다. 이를 위해 숙종은 서인과 남인으로 나뉘어 대립하던 정치 상황을 이용해 한쪽 세력에 힘을 실어주는 환국 정치로 정국을 자신의 의도대로 이끌었다. 

숙종은 집권 초기 실권을 잡고 있었던 남인들을 실각시키고 서인 정권을 들어서게 했고 이후 서인을 실각시키고 남인 정권을 들어서게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서인들에게 힘을 실어주면서 남인들은 재기 불능의 길을 걸었다. 이런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숙종 시대 중전 자리에 올랐던 두 여인도 비운의 삶을 살아야 했다. 인현왕후와 장희빈이 그들이다.

이들은 자신의 의도하던 하지 않던 서인과 남인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인물이 됐고 당쟁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서인의 지지를 받았던 인현왕후는 숙종이 총애하는 장희빈의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이 원자로 책봉되는 과정에서 이를 반대하는 서인들의 숙청되는 과정에서 중전자를 내놓고 폐서인 되는 아픔을 겪었다. 중전이나 후궁들에 있어 왕의 아들을 낳는 건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할 수 있는 방법이었지만, 인현왕후는 그렇지 못했다. 비운의 왕비는 이후 사가에서 고초를 겪다 서인이 재집권하면서 중전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인현왕후의 복귀는 장희빈에게는 비극의 시작이었다. 장희빈은 숙종의 총애를 받으며 궁궐에서 그 세력을 키웠고 중전 자리에 오르며 남인 세력의 구심점이 됐다. 그의 아들이 원자가 되고 세자가 되면서 그 힘은 더 막강해졌다. 하지만 정치 상황이 급변과 함께 그 위치가 흔들렸다. 중전 자리에서 다시 밀려난 장희빈은 중전을 저주했다는 혐의로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났다. 

이런 숙종과 인현왕후, 장희빈은 이야기는 매우 극적인 내용으로 조선시대 야사에서 비중 있게 다뤄졌고 현대에 와서 사극의 중요한 소재가 됐다. 이와 관련해 수많은 드라마가 만들어졌고 장희빈에게는 최악의 악녀라는 이미지가 덧 씌워졌다. 숙종에게는 우유부단하고 무능한 군주라는 이미지가 생겼다. 반대로 인현왕후는 수많은 역경에도 기품을 잃지 않았던 품위 있는 왕비라는 이미지가 생겨났다.

이는 당시 정치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단편적인 면만을 본 평가다. 숙종은 서인과 남인 두 정치세력을 대표하는 두 여인을 자신의 정치에 이용했고 그 결과 그는 조선 후기 볼 수 없었던 강력한 왕권을 가질 수 있었다. 숙종은 이 왕권으로 사회개혁 조치와 다양한 정책들을 시행했다. 보이는 이미지와 달리 숙종 치세에 조선은 비로소 두 차례 전란 이후 지속됐던 침체 분위기를 벗어나 부흥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숙종 이후 영. 정조 시대의 부흥기는 숙종이 그 기반을 만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그 한편에서 인현왕후에 장희빈은 모두 비운의 삶을 살았다. 인현왕후는 중전 복귀 후 얼마 안 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장희빈은 앞서  언급한 대로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났다. 비정한 정치의 휩쓸린 결과는 비극적이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또 다른 비운의 왕이 있다. 숙종과 영조 사이 4년간 왕위에 올랐던 경종이다. 그는 숙종과 장희빈 사이에 태어난 아들로 숙종의 총애를 받았다. 조선 후기 조선 왕실에 아들이 귀한 탓도 있지만, 장희빈에 대한 숙종의 마음도 작용했다. 숙종은 경종을 빠르게 자신의 후계자로 삼았다. 왕권 강화를 위한 방편이었지만, 이와 관련해 정치적 대립이 격화됐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어머니 장희빈이 사사되는 일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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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종은 어려서부터 피비린내 나는 권력 투쟁의 한 가운데에서 불안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어머니의 비극적 최후를 본 것만으로도 그에게는 큰 충격이 될 수 있었다. 이런 유년기는 그에게 엄청난 스트레스가 될 수 있었다. 경종은 어려서부터 병약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결정적으로 세자로 책봉된 이후 후사가 없었다. 이는 왕실 내 권력관계에서 치명적 약점이 될 수 있었다.

게다가 경종은 몰락한 남인의 지지를 받았다. 이는 그의 정치적 입지도 어렵게 했다. 그 사이 정국의 주도권을 잡은 서인은 남인에 대한 처리를 놓고 강경파 노론과 온건파 소론으로 분화됐다. 노론이 다수파였다. 경종은 다수파 노론에게 견제를 받았다. 경종은 소론과 손을 잡았지만, 정치적으로 소수파였다. 노론은 숙종과 숙빈 최씨 사이에서 태어난 훗날 영조가 되는 연잉군에게 숙종 다음 왕위가 이어지길 원했다. 남인 세력과 연결된 경종은 노론에게는 큰 위협이었다.

이미 조선 역사에서 자신의 어머니 죽음을 이유로 연산군 시절 엄청난 피바람이 불었던 기억이 있다. 경종이 즉위한다면 노론의 입지는 크게 약화될 수 있었다. 하지만 노론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숙종이 말년에 병으로 정치 전면에 나설 수 없었고 경종이 대리청정을 하면서 큰 과오를 범하지도 않았다. 비록, 어머니 장희빈이 죄인이 되어 사사됐지만, 경종은 오랜 세월 세자 자리에 있었다. 세자의 자리를 흔들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일부에서는 숙종과 노론이 세자 교체를 논의하고 실행하려 했다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고 있지만, 큰 과실이 없는 세자의 교체는 엄청난 정치적 부담이 따르는 일이었다. 병약해진 숙종도 이를 추진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결국, 경종은 어렵게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그는 소수파 권력이었고 조선의 정치는 노론이 주도하고 있었다. 또한, 경종은 자신을 이을 후사가 없었다. 이에 양자를 들이는 걸 검토하기도 할 정도였다. 노론은 경종의 이복 동해잉 되는 연잉궁의 세제 책봉을 강력히 주장했고 경종은 이를 받아들여야 했다. 연잉군은 이미 노론과 강력한 연결되어 있었고 자신의 정적이나 다름없었지만, 경종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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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 배경에는 경종과 연잉군의 돈독한 관계가 작용했다. 정치적으로는 대립 관계에 있었지만, 두 사람은 개인적으로 우애가 깊은 형제였다. 각종 역사서에서 이를 알 수 있다. 그 이면에 보이지 않는 암투가 있었을 수도 있지만, 경종은 연잉군에게 호의적이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다시 격화되는 정치적 대립 속에 흔들릴 수 있었다. 소론 세력은 끊임없이 노론 세력에 대한 탄핵을 주장했고 비해해진 노론 세력에 대해 우려하던 경종은 마침내 칼을 빼 들었다. 노론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단행됐고 정국은 소론이 주도하게 됐다. 이는 연잉군에게는 정치적으로 큰 위기가 될 수 있었다.

소론 세력은 연잉군의 제거를 원했다. 마음만 먹으면 역모로 엮어 그를 죽음으로 이끌 수도 있었다. 경종이 이에 동조한다면 이는 더  수월해질 수 있었다. 경종은 연잉군만큼은 보호하는 모습을 보였다. 경종은 연잉군의 세제 자리는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지켜냈다. 개인적인 친분과 신뢰도 있었지만, 더 이상의 정치적 혼란을 원치 않았던 경종의 뜻도 담겨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경종은 자신의 후사가 없는 상황에서 유일한 후계자인 연잉군을 제거한다면 차기 권력 구도가 한층 복잡해지고 이는 왕권의 약화로 이어질 수 있었다. 이는 선대 왕이 이룬 왕권 강화를 위한 노력이 사라지는 일이기도 했다. 경종으로서는 여러 복잡한 정치적 셈법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점에서 경종은 결코 무능하고 존재감 없는 왕으로만 볼 수 없다. 

하지만, 병약했던 경종은 왕위에 오른 지 4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일설에는 영조의 독살설이 강하게 대두됐고 이는 영조가 왕위에 있던 내내 그의 전통성을 흔드는 일이 됐다. 개연성이 있는 일이긴 하지만, 차기 권력으로 확고히 자리한 영조가 무리하게 그런 일을 도모하긴 어려웠다. 소론의 견제를 받는 상황에서 정치적으로 계속 약점이 될 수 있는 일을 실행하기에는 부담이 컸다. 

결국, 경종은 치열한 당쟁 속에서 자신의 뜻을 제대로 펼칠 수 없었다. 혼란한 정치 상황에서 경종은 분명 큰 마음의 짐을 안고 살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 마음의 짐을 경종을 내려놓을 수 없었다. 그는 그의 건강을 크게 악화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의 짧은 치세는 숙종과 영조의 긴 치세 사이에 놓이면서 그의 존재감을 사라지게 했다. 

 

 

 



경종은 세상을 떠나서도 편히 잠들 수 없었다. 경종이 잠들어 있는 의릉은 현재 서울시 성북구 석관동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우리 현대사에서 중요한 장소였다. 5.16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정권에서 의릉에는 정보기관인 중앙정보부가 위치하고 있었다. 중앙정보부는 당시 최고 권력기관이기도 했고 그 위세가 엄청났다. 중앙정보부의 중요 시설이 의릉에 세워졌다. 

이는 의릉의 원형을 훼손하는 일이었다. 의릉 곳곳에 건물이 서고 연못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또한, 정보기관이 있었던 탓에 사람들의 접근조차 허락되지 않는 금단의 땅이 됐다. 이곳에서 중앙정보부는 각종 공작을 했고 그 안에는 불법과 탈법적인 일도 다수 있었다. 1970년대 일어서는 1972년 7월 4일 남북 정부가 통일의 원칙을 최초로 합의한 7.4 남북공동성명이 의릉에 있던 중앙정보부 청사에서 발표되기도 했다. 

이 성명에는 통일의 원칙으로 자주, 평화, 민족 대단결이 제시됐고 남. 북 간의 현안과 통일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남북조절위원회 설치가 들어있었다. 이후 7.4 남. 북 공동성명은 남. 북에 독재권력이 더 강화되면서 남. 북의 대립이 격화되는 상황 속에 더 이상의 진전을 이루지 못했지만, 지금까지도 남. 북한의 통일 관련한 원칙으로 자리하고 있다. 경종의 의릉은 이런 역사의 한순간을 함께 했다. 

이런 수난의 역사를 지나 의릉은 이후 중앙정보부가 안전기획부, 국가정보원 등으로 변모하면서 관련 시설들이 이전하고 복원 공사를 통해 그 모습을 되찾았다. 하지만 그 사이 진행된 서울의 급속한 도시화로 인해 과거의 원형을 완전히 되찾지는 못했다. 대신, 의릉은 우리나라 예술교육의 중추가 되는 한국예술종합학교, 한예종 석관동 캠퍼스가 위치해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장소로 변모했다. 

한예종은 1990년대 들어 예술인들의 양성과 이를 통해 예술의 수준을 높이기 위한 공공교육 기관 설립에 대한 의지와 노력이 더해져 만들어진 예술대학이다. 하지만 설립 과정에서 기존 대학교 내 예술대학들의 강한 반발이 있었고 아직은 예술인들에 대한 인식이 긍정적이지만은 않았던 시절, 어려움이 컸다. 

 

 

 



그럼에도 한예종이 설립될 수 있었던 건 우리나라 최초의 문화부 장관이자 대표적인 지식인이자 저명인사였던 이어령의 의지가 크게 작용했다. 그는 국무회의에서 지금도 언급되는 연설을 통해 한예종의 설립 필요성을 역설했고 이에 반대하던 다른 정부 부처의 찬성을 이끌어냈다.

대학의 기능을 하면서도 대학이라는 명칭을 붙이지 못하고 각종 학교로 분류되는 한계점이 있었지만, 1993년 음악원을 시작을 그 역사를 시작한 음악원 외에 연극원, 영상원, 무용원, 미술원, 전통예술원의 학사 과정을 운영하고 있고 석관동과 예술의 전당이 있는 서초동에 캠퍼스를 운영하고 있다. 이후 한예종에서는 다수의 예술인을 배출했고 그중 상당수가 인기 연예인이나 대중적으로 크게 알려진 스타가 되면서 한예종의 명성을 더했다. 

이렇게 한예종 석관동 캠퍼스와 접하고 있는 의릉은 우리나라 예술의 또 다른 요람으로 기능하고 있다. 이곳에 잠들어 있는 경종은 K 컬처가 전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높인 지금, 우리 문화 예술의 가장 빛나는 순간을 만들어가는 이들과 함께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경종은 누구보다 외로운 왕이었다. 세자 시절 매우 뛰어난 정치력을 발휘했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연인도 희생할 정도로 냉정한 아버지의 모습을 바로 옆에서 봤고 어머니의 애통한 죽음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시간을 보냈다. 청년이 되어서는 불안한 정치적 입지를 지키기 위해 불안한 나날을 보냈고 왕이 된 이후에도 치열한 당쟁 과정에서 자신의 정치를 할 시간을 가지지 못했다.

하지만 경종은 영. 정조 시대의 문을 연 왕이었고 그 역사적 의미가 결코 작지 않다. 사후에도 시련의 시간을 보냈지만, 지금은 누구보다 특별한 곳에 잠들어 있다. 그는 불운했지만, 그 불운이 영원하지는 않다 할 수 있다. 

이 경종과 한국예술종합학교와 관련한 이야기는 아래 링크한 TBS의 역사 기행 프로그램은 '역사 스테이 흔적'에서 보다 자세히 살필 수 있다. 

 

방송링크

 

https://youtu.be/DpsejOzyFpc



사진 : 픽사베이, 문화재청,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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