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728x90
반응형
728x170

 

조선의 국가 통치 이념 중 중요한 한 가지는 숭유억불 정책이었다. 유교를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삼은 조선은 그들의 무너뜨린 고려의 사회, 문화 전반을 지배했던 종교였던 불교의 영향력을 축소시키는데 주력했다. 이를 위해 국가 차원에서 불교를 억압하고 배척했다. 이로 인해 조선에서 불교는 종교활동 전반에 제약을 받게 된다. 

하지만 민간에서 불교는 여전히 그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었고 조선 왕실에서도 불교에 귀의한 이들이 존재했다 세종대왕 역시 그중 한 명이었다. 불교의 영향력은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조선 사회에서 종교적 존재감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 불교가 조선 최대 국난이라 할 수 있었던 임진왜란 때 다시 한번 크게 빛났다. 당시 불교는 살생을 금하는 불교 교리마저 접어두고 침략자들에 맞섰다. 나라가 없다면 그리고 그 나라의 백성들이 없다면 수행도 무의미하다는 마음은 또 다른 형태의 의병인 의승군을 조직하게 했다. 그 의승군은 전장의 곳곳에서 일본군과 맞서 용맹하게 싸웠고 전공을 세웠다. 그리고 그 중심에 있었던 인물 중 한 명이 사명대사, 유정스님이었다. 

사명대사는 1544년 대대로 관직을 역임했던 양반 사대부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임응규였다. 사명대사는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했다고 전해지고 있고 유교를 배워 유학자로서 관직에 진출하려는 꿈을 가지고 살았던 유년기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10대의 나이에 그의 부모님이 모두 세상을 떠나면서 그의 인생은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사명대사

 



어린 나이에 세상에 홀로 남겨진 그에게는 두려움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지독한 고독이 그를 괴롭혔을 수도 있다. 이런 상황은 그에게 삶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하도록 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에 사명대사는 17살의 나이에 사찰로 들어가 불교에 귀의했고 승려가 됐다. 이후 유정이라는 법명을 얻은 사명대사는 경북 김천의 직지사에서 승려 생활을 시작했다. 

속세와 인연을 끊고자 했던 사명대사였지만, 그와 속세를 연결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의 나이 18살 되던 1561년 사명대사는 국가가 주관하는 승려들을 대상으로 하는 일종의 과거 시험인 승과시험에 응시에 합격했다. 이 승과시험은 조선 초 시행됐지만, 유학이 나라의 이념 및 통치의 기반으로 자리하면서 폐지됐다. 이후 명종 임금 때 국정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문정왕후에 의해 부활되어 시행됐다. 

문정왕후는 대표적인 친 불교적 성향을 가진 인물로 그가 신뢰하는 승려는 국정 운영에 활용하기도 했고 불교 진흥을 위한 정책을 시행했다. 그 과정에서 폐지됐던 승과시험이 다시 시행됐다. 이미 어려서부터 유학 공부를 했던 사명대사에게 승과시험은 타 경쟁자들에게 비교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사명대사는 이 승과 시험에 당당히 합격했다. 

승과시험에 합격한 승려는 국가가 관리하는 각 사찰의 주지 스님이 될 자격이 있었고 당대 관료들과 학자들과 교류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이는 불교계에서 그 영향력을 크게 할 수 있는 배경이 될 수 있었다. 18살에 사명대사는 그 큰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이렇게 승려로서 성공 가도를 달리던 사명대사가 32살이 되던 1575년, 조선 조정은 그를 조선의 중요한 사찰 중 하나인 한양 인근, 지금의 강남에 자리한 봉은사의 주지 스님으로 임명했다. 이는 그에게는 매우 영예로운 일이었고 불교계 중요 인사로 자리할 수 있는 차원이 다른 기회였다. 

 

 

서산대사

 



하지만 사명대사는 이 제안을 거부했다. 그는 수행에 정진하기 위해 당시 최고 고승으로 존경을 받고 있던 서산대사, 휴정스님을 찾아 그의 가르침을 받기를 청했다. 이후 그는 서산대사의 수제자로 수행에 더 매진했다. 그는 큰 명예를 포기했지만, 세속의 욕심을 버리는 과감한 결정으로 명망가로서 자리할 수 있었다. 

이런 사명대사의 삶에 또다시 큰 파란이 일어났다. 1592년 금강산의 사찰에 머물던 그에게 급보가 전해졌다. 일본군이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조선을 침략한 임진왜란의 발발과 함께 침략군에 맞서기 위해 모집하는 의승군 참여를 요청하는 그의 스승 서산대사의 격문이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사명대사는 개전 초기 파죽지세로 북쪽으로 진격하는 일본군에 의해 자신이 머물던 사찰이 약탈당하고 승려들이 살해당할 위기를 겪었었다. 사명대사는 그 일본군을 이끌던 장군에 필담을 주고받으며 당당하게 그들의 행위를 꾸짖었고 이에 감복한 일본군 장교는 군대를 거두어 사찰을 떠났다. 일본군은 떠나면서 사명대사가 머물던 사찰에 고승이 머물고 있으니 일본군이 접근하지 말아는 문서를 격문을 붙이고 떠났다. 야사에서 전해지는 이야기지만, 사명대사의 평소 성격과 인품을 유추할 수 있는 일화라 할 수 있다. 

그만큼 정의롭고 불의에 눈 감지 않은 인물이었던 사명대사였지만, 의승군 참여는 불교의 교리를 어기는 일이었다. 그의 평생을 이어온 신념을 버리는 일을 쉽게 결정할 수 없었지만, 침략자들에게 유린당하는 백성들의 참상을 외면할 수 없었다. 평소 존경하는 스승, 서산대사의 요청을 거부할 수 없었다. 결국, 사명대사는 의승군을 이끌고 참전을 결정했다. 평소 사명대사를 존경하던 승려들이 속속 가세하면서 의승군의 수는 금세 천명을 넘어섰다. 사명대사의 의승군은 서산대사가 이끌고 있던 의승군 부대와 합세했고 그 수는 수천명에 이르렀다. 

사명대사는 이후 서산대사의 명을 받아 의승군의 총 대장으로 임명됐고 전장에 나가 일본군에 싸웠다. 의승군들은 평소 수행을 통해 신체를 단련한 이들이었고 산악 지역에 사찰이 주로 자리한 탓에 험준한 산악 지형에 능숙했다. 이를 바탕을 의승군들은 유격전을 전개하며 일본군에 맞섰다. 

 

 

 



사명대사가 중심이 된 의승군들은 이후 명나라 군의 참전 이후 평양성 전투에 참전해 평양성 탈환에 큰 역할을 했고 선조 임금을 호위하는 임무도 수행했다. 일본군의 빠른 북상에 의주까지 피신했던 선조는 일본군이 한양에서 철수한 이후 한양으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의승군의 호위를 받기도 했다.

이런 의승군의 활약은 의병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의승군이 왕의 지근거리에 있었다는 점은 그만큼 사명대사와 그의 스승 서산대사가 조선 사회에서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고 관료들 역시 그들에게 큰 거부감이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숭유억불 정책이 국가의 기본 정책이었던 조선에서는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승과 시험을 통해 그 학식이나 능력을 인정받고 조선 조정과 교류를 했던 것이 이에 긍정적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 사명대사는 의승군을 이끌고 전장을 누비며 많은 공적을 세웠다. 임진왜란 초기 조선은 부족한 군사력과 부실한 대비로 크게 밀렸지만, 전국 곳곳에서 일어난 의병과 이순신 장군의 거듭된 해전 승리로 전장의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었다. 사명대사의 의승군의 역할은 그만큼 중요했다.

사명대사는 전장에서 장군으로도 활약했지만, 협상가로서의 면모도 보였다. 개전 후 소강상태가 된 상황에서 조선에 구원병을 파견한 명나라와 일본은 조선을 배제한 강화협상을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명나라의 협상을 이끄는 심유경과 일본의 협상 대표 고니시는 조선의 입장을 무시한 채 조선 영토의 분할 등을 강화협상의 논의 대상으로 올리는 등 월권을 행사했다. 조선으로서는 이런 불합리한 협상의 내용을 알 수 없었다. 

 

 

반응형

 



이 시점에 고니시와 라이벌 관계에 있었던 일본군의 또 다른 장군 가토가 조선과의 강화협상을 제안했다. 고니시를 견제하고 자신만의 공적을 세우기 위한 술책이었지만, 조선 조정은 일본군의 상황을 탐색하고 명나라와 일본의 강화협상 정보를 얻기 위해 이에 응했다. 그리고 그 협상을 위한 대표로 사명대사가 나섰다. 

사명대사는 포악하기로 이름난 가토와의 협상에 목숨을 걸고 나섰다. 다행히 가토는 천주교 신자였던 고니시와 달리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 조선의 명망 있는 스님이 협상 대표로 나선다는 점은 협상 분위기를 주도하는 데 도움이 됐다. 사명대사는 당당히 협상에 임했고 그 과정에서 명나라와 일본의 강화협상 내용을 파악해 그 정보를 조선 정부에 알리고 대응책을 마련할 수 있게 했다. 또한, 가토의 불합리한 요구에도 강하게 대응하며 맞섰다. 

이 협상 과정에서 유명한 일화가 전해지는데 가토가 조선의 가장 큰 보물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사명대사는 가토의 목에 엄청난 돈이 걸려있음을 이유로 최고의 보물이 가토라고 말하며 그를 탄복하게 했다. 이 일화는 일본에도 전해져 훗날 사명대사가 일본에 사절단으로 파견될 당시 일본인들의 존경심을 얻도록 하는 데 영향을 줬다.

결국, 명나라와 일본의 강화협상은 심유경과 고니시의 거짓 밀약이 양국에서 발각되면서 깨지고 말았다. 1597년 일본은 다시 한번 전면전을 감행했다. 정유재란의 시작이었다. 정유재란은 이전 전쟁과 달리 철저히 약탈과 수탈이 목적이었다. 조선의 수많은 문화재와 서적들이 약탈당하고 많은 조선인들이 학살되거나 노예가 됐다. 조선인 노예들은 일본에 끌려가거나 심지어 유럽의 노예시장에까지 팔려갔다.

 

 

300x250

 



이에 더해 이순신의 활약으로 지켜졌던 호남 지역마저 일본군의 이간책과 이에 편승한 조선 조정의 이순신 숙청, 그를 대신해 조선 수군을 이끌었던 원균의 무능에 기인한 수군의 궤멸로 일본군에 짓밟히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런 위기에 사명대사의 의승군은 다시 최 전방에서 일본군에 맞섰다.

사명대사의 의승군은 영남에서 한양으로 북상하는 길목에 자리한 대구 팔공산 일대에서 북상하는 일본군과 치열한 접전을 펼치며 그들의 북상을 막는 전공을 올렸다. 그 전투에서 조선의 관군들은 일본군의 기세에 밀려 사분 오열하며 흩어졌지만, 의승군들의 용맹하게 맞섰다.

이후 정유재란은 임진왜란 개전 당시와 달리 철저히 일본군의 재침에 대비해 군사력을 비축한 조선군의 반격과 백의종군에서 돌아온 이순신의 수군이 명량해전 승리를 기점으로 다시 바다 재해권을 장악하면서 일본군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결국, 임진왜란은 전쟁의 원흉이라 할 수 있는 일본의 최고 실력자 도요토미의 사망과 함께 일본군이 철수하면서 조선의 승리로 종결됐다.

전쟁은 종결됐지만, 사명대사는 사찰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는 대 일본 외교교섭의 최 일선에서 역할을 했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의 권력을 장악한 도쿠가와가 이끄는 애도 막부는 조선과의 관개 개선을 강력히 추진했다. 그들은 끊임없이 교류 재개를 요청했다. 조선 정부로서도 향후 우려되는 왜구들의 침략 등을 고려해 외교 교섭을 재개하기로 결정했고 일본 애도 막부와의 협상을 위한 사절단의 중심인물로 사명대사를 파견했다.

이미 일본에서도 큰 명성을 얻고 있었던 사명대사의 방일은 협상에서 조선이 더 힘을 얻을 수 있는 요인이 됐다. 이와 관련해 야사에서는 사명대사의 능력을 시험하기 위해 일본이 그가 있는 방에 불을 무한정 떼거나 하는 등의 온갖 술책을 행했지만, 사명대사가 이를 여유 있는 대처했고 이에 감복한 일본이 사명대사를 더 존경하게 됐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만큼 사명대사의 존재는 조선의 백성들에게는 매우 특별했다고 할 수 있다. 전쟁을 제대로 대비하지 못했고 그들의 안위를 위해 도망가기 바쁜 모습을 보였던 왕과 관료들의 행태에 조선 백성들은 크게 분노하고 실망했다. 그들에게 목숨을 아끼지 않고 침략군에 맞선 의병장들의 존재는 영웅이었다. 특히, 세속과 거리를 두고 수행에 전념하던 고승의 의병장 참전은 신선한 충격이 될 수밖에 없었다. 사명대사는 지금으로 비교하면 슈퍼 히어로 같은 존재였다. 그에 대한 각종 야사가 전해지는 것도 그의 백성들 사이에 존재감이 매우 컸음을 의미하고 있다. 

사명대사는 1605년 일본과의 외교 교섭을 성공리에 마무리했고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 노예로 끌려간 조선인 수천 명을 이끌고 귀국했다. 당연히 그에 대한 조선 백성들의 존경심은 더해질 수밖에 없었다. 사명대사는 일본에서 돌아온 후 얼마 안 된 1610년 열반에 들었지만, 그에 대한 백성들의 경외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조선 조정 역시 그의 공적을 무시할 수 없었다. 이에 숭유억불 정책의 나라에는 이례적으로 서산대사와 함께 그의 공적을 기리는 사찰이 지어지고 공적비가 세워졌다. 이후 사명대사는 호국불교의 상징으로 조선 시대 그리고 지금도 언급되는 인물이 되고 있다. 

사명대사의 삶은 종교의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한 고찰을 하게 한다. 정의를 위해 불의에 맞선 사명대사의 삶은 비록 종교적 신념을 어기는 일이었지만, 백성들 지키고 더 나아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의로운 삶이었다. 이는 사회 지도층의 사회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이기도 했다. 또한, 국가적으로 억압받던 불교 지도자의 나라를 위한 헌신이라는 점에서도 존경받아야 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이에 사명대사는 사리사욕에 눈이 먼 사회 지도층들의 뉴스를 수없이 접하는 현실에서 더 큰 가치로 다가온다.


사진 : 위키백과, 글 : jihuni74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댓글
반응형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   2024/04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