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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16일 수요일 8시 50분경, 많은 사람들이 하루의 일과를 시작할 시점 진도 앞바다를 항해하던 여객선 한 척이 기울어진 채 바다 한가운데 멈춰 섰다. 그 배는 인천과 제주를 오가는 대형 여객선 '세월호'였다. 세월호는 그 전날인 2014년 4월 15일 오후 9시 476명의 승객과 화물을 싣고 인천항을 출발했다. 안개 등 악천후로 출항은 약 2시간 정도 늦춰진 상황이었다. 

그 배에는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떠나는 안산시 단원고 2학년 학생 325명과 인솔 교사 14명이 승객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학생들은 학창 시절의 추억을 쌓기 위한 설렘으로 그 배와 함께 했다. 서해바다를 지나 제주항으로 향하던 세월호는 진도 인근 해역인 맹골수도를 지나던 도중 방향을 잃고 급선회했고 한 쪽으로 기울어지면서 항해를 더 할 수 없었다. 그 후 얼마 안 가 세월호로부터 조난 신고가 접수됐다. 그전 이미 세월호에 탑승하고 있었던 단원고 학생이 119 상황실을 통해 급박한 신고가 접수됐다. 오전 8시 52분이었다. 

이에 해양경찰을 중심으로 사고 현장을 파악하고 구조 활동을 시작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사고는 그리 심각해 보이지 않았다. 6천톤이 넘는 거대한 배가 쉽게 침몰할 것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배의 고장으로 항해를 할 수 없는 상태로 여겨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방송과 언론에서 세월호의 조난 소식을 특보로 전할 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그 심각성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필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단원고 학생들의 전원 구조 속보가 방송에 뜨면서 학생들이 평생 잊지 못할 수학여행을 하는구나 하는 마음까지 들었다.

하지만 현장 상황은 그와 달랐다. 세월호는 복원력을 잃고 계속 한쪽 방향으로 기울기 시작했고 점점 침몰했다. 빠른 구조가 필요했지만, 크게 기울어진 배에 다른 선박이 접근하기 어려웠다. 헬기 구조도 이루어졌지만, 승객들 대부분이 간판 등으로 대피하지 않았다. 매우 의아한 장면이었다. 뒤늦게 선원들이 안내방송을 통해 승객들에게 객실에서 가만히 대기하라고 방송을 지속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 와중에서 인근 바다에서 조업하던 어민들이 세월호에 접근하며 필사의 구조 작업을 함께 펼쳤다. 하지만 세월호의 침몰 속도를 더 빨라졌다. 결국, 세월호는 많은 이들의 구조 노력에도 불구하고 야속하게도 배의 극히 일부분을 남기고 바가 속으로 사라졌다. 많은 국민들은 그 장면을 실시간 속보로 화면을 통해 안타깝게 지켜봐야만 했다. 세월호는 4월 18일 완전히 침몰하며 시야에서 사라졌다.

구조작업을 통해 구조된 이들은 총 승객 중 일부인 172명에 불과했다. 나머지 단원고 학생들과 교사, 일반 승객을 포함해 304명이 현장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중 5명은 그 해 11월까지 이어진 선채 수색에도 끝내 유해를 찾지 못했다. 

이 사고의 사회적 파장은 엄청났다. 이전에도 대형 해난 사고가 있었지만, 이 사고의 사망자 대부분은 그 삶을 채 꽃피우지도 못한 10대 고교생들이었고 실시간으로 사고의 장면들이 중계됐다. 이전 대형 사고들과 달리 한국이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고 자부하는 21세기 일어났다는 점에도 그 충격이 더했다. 나라 전체가 깊은 슬픔에 빠져들었다. 방송에서는 상당 기간 정규 편성을 중지하고 특보 체제로 전환됐고 각종 행사들도 취소됐다.

국민들의 슬픔은 이내 분노로 변했다. 이해할 수 없는 사고 대응과 속속 밝혀지는 여객선 운영 관리의 난맥상이 없었다면 사고를 충분히 막을 수 있었고 희생자를 줄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선, 사고 당시 세월호 선원들은 승객들에게 객실에서 대기하라는 방송을 하면서 정작 본인들은 먼저 도착한 해경 배에 올라 먼저 대피하는 파렴치한 모습을 보였다. 해난 사고 시 승객들은 보호하고 대피하는 데 힘써야 할 선원들의 비상식적인 행동이었다. 이런 선원들의 구조에만 힘쓰고 정작 승객 구조에는 미온적이었던 해경의 대응도 비판의 대상이 됐다. 사고 대응을 위해 가용 자원을 총동원해야 했지만, 그러지 못한 정부의 위기관리 능력 부재도 큰 비판을 받았다. 

또한, 사고 대처와 관련해 대통령이 상당 기간 부재 상태에 있었고 한참 시간이 지나 대책 본부에 나타난 대통령이 '승객들, 학생들이 구명조끼를 입고 있었는데 발견하기가 어렵냐?' 식의 상황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는 듯한 발언을 한 것이 방송을 타면서 대통령의 상황 인식과 대처에 대해 국민들의 의혹과 분노가 커져갔다. 

 

 

 



훗날 밝혀진 바에 따르면 당시 박근혜 대통령은 사고 발생 후 한참이 지난 10시가 지난 시점이었다. 그 시간이면 배가 상당 부분 기울어 구조에 난항을 겪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 후에도 대통령의 행적은 국가적 재난에 대응하는 것이었는지 의문을 가지게 했다. 그나마도 대통령의 대응과 관련한 보고, 지시 등의 시점도 상당 부분 수정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의문을 더했다. 심지어 관련한 자료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대통령실의 서버 등이 폐기되고 각종 기록물이 봉인되며 당시의 대통령과 대통령실의 대응과 관련한 진실은 상당 부분 묻히고 말았다. 

이후 사고 수습 과정에서도 정부의 대응은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많았다. 구조와 수색 과정 곳곳에서 문제점을 노출했다. 사고의 가장 큰 피해자라 할 수 있는 유족들의 의견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고 사고를 축소하거나 보도를 통제하는 모습도 있었다.

더 큰 문제는 정권이 국민적인 추모 분위기와 이에 파생되는 정부에 대한 비판, 유족들의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 등 요구에 대해 진솔한 사과와 빠른 대처를 하기보다는 이에 대해 정치적 색깔을 입히고 심지어 색깔론을 덧칠하며 왜곡, 비하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점이다. 훗날 밝혀졌지만, 당시 정권은 정보기관을 이용해 유족들과 관련 단체의 움직임을 사찰하고 있었고 별도의 대응책을 시행했다. 대형 참사에 대응하는 일반적인 정부와는 거리가 있었다. 이는 유족 그리고 그 슬픔에 공감하는 국민들의 분노를 더 들끓게 했다. 

이런 정부의 태도는 사고 수급과 사고 원인과 대응과 관련한 진상 규명을 어렵게 했다. 관련 위원회가 구성되고 활동을 했지만, 정부가 이를 방해하고 정부가 원하는 방향으로 운영되도록 압력을 가했다. 정부는 사고가 빠르게 잊히고 추모 분위기를 전환시키는 데만 주력했다. 이를 위한 움직임은 정치적인 활동으로 매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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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관련해 세월호 참사를 추모하고 발언을 하는 건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 되기도 했다. 사회 저명인가는 물론이고 일반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세월호 추모 리본을 부착하고 관련 굿즈를 달고 다니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에 편승해 일부 유투버들과 극단적 성향의 단체들은 유족들의 활동을 폄하하고 돈을 노린 것으로 왜곡하기도 했다 또한, 유족들의 시위에 맞불 시위를 하는가 하면, 단식 농성장에서 음식을 시켜 먹으며 이를 조롱하는 폐륜적인 행위를 하기도 했다. 

사랑하는 가족과 지인들을 잃은 슬픔은 세상 그 어떤 슬픔보다 크고 깊다. 그리고 그 상처는 쉽게 아물 수 없다. 현장에서 친구와 가족들의 죽음을 목격한 생존자들 역시 평생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야 한다.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구조작업에 임했던 잠수사들과 관계자들 역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큰 피로감을 호소했다.

이런 슬픔과 아픔을 보듬고 진심 어린 사과를 바탕으로 사고를 수습해야 할 정부가 그들의 말과 행동을 막고 귀찮은 존재들로 취급하는 대응은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사고로 인한 아픔은 충분한 추모의 시간을 가지게 하고 슬픔을 나누고 진상을 파악하고 잘못된 부분을 고치고 책임자들에게 그 책임을 물어야 치유될 수 있다. 하지만 당시 정부는 빠른 망각만을 강요했다. 

이는 정작 필요한 진상 파악을 어렵게 했다. 사고 원인과 관련해 무리한 선체 구조변경과 화물의 과적과 느슨한 고정, 해류의 움직임이 빠른 해역에서 급하게 배의 방향을 전환한 운행 미숙 등이 제기됐지만, 확실한 결론은 지금도 나오지 않고 있다. 이와 관련해 위원회가 구성되어 활동하고 특별검사까지 임명되어 수사를 진행했지만, 각종 의문들을 해소하지 못했다. 

 

 

 



이 사건과 관련해 세월호를 운행하는 기업의 선주로 지목됐던 인물과 그의 가족들은 이 사건 외에 여러 비리 혐의로 수사를 받고 처벌을 받았지만, 정작 사고와 관련해서는 제대로 단죄되자 않았다. 사이비 종교의 지도자이기도 했던 선주는 수배 중 시신으로 발견되며 의혹을 더했다. 그는 이미 정관계에 상당한 인맥을 구축하고 있었고 재력가이도 했다. 그는 수사가 진행되자 잠적했고 아무 연고도 없는 곳에서 그 사체가 발견됐다.

이런 의혹들은 민간 차원에서 사고와 관련한 여러 추측들을 낳게 했다. 사고 원인과 관련해 기존의 주장과 달리 암초 충돌설과 잠수함 충돌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내부 폭발설도 주장됐다. 이와 관련해 국정원이 세월호 운영 관리에 관여한 정황이 밝혀지면서 의문을 증폭시키기도 했다. 사고 원인 규명을 위해 필수적인 세월호 인양을 정부가 차일피일 미루고 수색작업에 특정 업체를 지정하여 진행하게 하는 것도 의문을 키웠다. 

무엇보다 당시 왜 선원들은 자신들은 급히 탈출하면서 승객들에게 객실 대기만을 방송한 비상적인 행동을 했는지 해경은 그런 선원들의 구조를 서둘러 했는지도 의문이다. 하지만 당시 사고의 책임을 지고 법적 처벌을 받은 선원들은 당시 상황에 대해 속 시원한 답을 주지 않았다. 

이후 박근혜 대통령이 국정 농단 사태 속에서 강한 국민적 저항에 직면하며 국회의 탄핵을 받았고 그는 헌재의 탄핵 인용 결정에 따라 우리 헌정 사상 최초로 대통령직에서 파면됐다. 이를 이끈 촛불 혁명 과정에서 세월호의 진상 규명 문제는 다시 한번 국민들의 공감을 얻었다. 정권교체 후 새롭게 위원회가 구성되고 세월호가 인양되는 등 진상 규명의 기대감을 높였지만,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결국, 사고 발생 후 9주기가 되는 지금까지 세월호 참사의 원인과 대응 과정 등 여러 의문들을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있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세월호 참사도 점점 사람들 기억 속에서 사라져가고 있다. 하지만 뜻있는 이들을 중심으로 세월호 참사는 계속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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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들은 기억을 강요한다는 비판을 하고 있지만, 이는 살아있는 이들이 해야 할 일종의 책무라 할 수 있다. 대형 참사를 잊지 않고 계속 조명하는 건 같은 일을 막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도 하다. 얼마 전 우리는 10.29 참사를 경험하며 또다시 깊은 슬픔에 빠져들어야 했다.

분명 우리는 선진국이 된 것 같은데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이 참사의 희생자가 되는 일은 반복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참사의 대부분은 안전불감증과 상식을 입각하지 않은 대처가 포함된 인재들이었다. 우리가 보다 안전에 경각심을 가졌다면, 그리고 정부가 중요한 책무인 국민의 안전에 대한 역할을 했다면 하는 아쉬움을 가질 수밖에 없다. 2014년 4월 16일과 얼마전 10월 29일 국가는 위급한 상황에 놓은 국민들 곁에 없었다. 여기에 수 많은 의문들에 대한 답을 국민들은 아직 얻지 못했다. 

그 점에서 10.29 참사 이후 맞이하는 세월호 참사 9주기는 결코 쉽게 흘려 보낼 수 없다. 그때 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은 정부의 대응과 사고 희생자들과 유족들에 대한 일부 왜곡된 시선과 행동들은 반복되고 있다. 중요한 건 이런 참사는 언제든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비극이다. 참사는 사람을 절대 가리지 않는다. 참사에 대한 슬픔을 나누고 기억하는 건 더 나은 사회를 위한 일이고 궁극적으로 나를 위한 일이기도 하다. 

4.16 세월호 참사 10주기에는 어둠 속에 갇혀있는 진실들이 어둠을 이겨내고 드러나길 기원해 본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는 말이 꼭 실현되길 바란다. 



사진,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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