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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3월 6일 한국 정부는 최근 수년간 한국과 일본 양국 정부 간 최대 현안이자 갈등의 중요한 원인이었던 일제 강제징용 배상과 관련한 해법을 발표했다. 중요한 내용은 일제 강점기 일본 기업들이 조선인 강제 징용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금을 한국 기업이 출자하는 한국 재단에서 대신 지급하는 것을 제3자 주 내용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이에 따른다면 정작 배상의 책임이 있는 일본 기업들이 빠지고 그들이 지급해야 할 배상금액을 한국 기업이 대신 지급하는 것으로 가해자의 책임을 피해자가 덜어주는 모양새가 만들어진다. 이는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원하는 일본의 공식적인 사과와 반성이라는 손해배상 소송 청구의 본질이 사라지는 일이다. 

또한, 이런 결정은 1997년 전범 기업인 신일본제철을 피고로 일본 법원에 제기한 소송을 시작되어 2018년 한국 대법원 확정판결까지 20년 넘는 세월을 강제징용 피해자들을 대신해 싸워온 원고들의 노력을 얼마간의 배상금으로 대신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피고측은 재판 과정에서 고의적인 재판 지연 전략으로 일관했고 국내 굴지의 로펌을 대리인으로 선임해 대응했다. 대형 로펌의 로비력은 이 재판과 관련한 소송 거래 의혹까지 불러일으켰다. 이렇게 긴 세월 소송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소를 제기한 4명의 원고 중 3명이 세상을 떠났다. 2018년 대법원의 최종 승소 판결을 접한 이는 단 한 명 뿐이었다. 

피해자들이 오로지 돈을 원했다면 20년이 넘은 긴 세월을 법정투쟁으로 보내지 않았다. 그들이 원한 건 수많은 강제징용 피해자들에 대한 사과와 반성, 사실의 인정, 그리고 이를 통한 역사적 단죄였다. 이 소송은  개인과 기업의 문제 이전에 아픈 과거사의 청산이 그 저변에 있었다. 

 

 

한일기본관계조약문

 



하지만 피고였던 해당 전범 기업과 일본 정부는 강제징용 자체를 부정하는 상황에서 이 판결을 결과를 인정하지 않았다. 일본은 줄 곳 1965년 국교 정상화를 위한 협상 당시 체결된 한. 일 청구권 협정에 따라 추가적인 배상 책임이 없다는 주장을 했고 개인의 손해배상 청구권 역시 인정하지 않고 있다. 민사 채권임을 들어 소멸시효의 완성도 주장했다.

이 소송은 일본 정부에게도 큰 관심사였다. 일본 정부가 오랜 세월 유지하고 있는 식민지 지배의 불법성과 전쟁범죄가 인정되고 대외적으로 알려지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이런 명분 뿐만 아니라 또한, 판결 결과에 따라 향후 이어질 수 있는 손해배상 소송을 사전에 차단하는 의미도 있었다.

이에 일본 정부는 이 문제를 외교적 문제로 보고 총력을 다해 대응했고 우리 대법원의 손해배상 인정 판결이 확정된 이후 더 강력한 무기를 꺼내 한국을 압박했다. 일본은 이를 위해 한국에 대한 경제 제제까지 단행했다. 일본은 한국의 핵심 산업인 반도체 산업에 타격을 주기 위해 관련 산업에 필요한 소재 등에 대한 수출규제 및 수출 관련 화이트리스트에서 한국을 제외하는 조치를 했다. 이는 정치와 경제를 불리하는 원칙에도 위배되는 일이었다. 이에 한. 일 관계는 급속히 냉각됐다.

이에 한국 정부는 일본의 조치에 대해 불공정 무역 행위로 규정하고 WTO에 이를 제소했다. 또한, 한국 정부는 일본을 수출 우대 국가에서 제외하고 군사 협력을 관계를 중단하는 등의 조치로 맞대응했다. 한편으로 일본의 수출규제의 중요 대상이었던 반도체 소재산업을 육성하고 수입선을 다변화하는 등의 조치를 했다. 이를 통해 반도체 소재산업의 국산화율을 높이는 등의 성과를 냈다. 수출규제는 한국을 굴복시키기 위한 나름의 승부수였지만, 오히려 일본 기업들의 판로가 막히면서 그들에게 더 큰 손해로 이어졌다.  

일본의 경제 도발에 한국 국민들도 이에 분노했다. 우리 국민들은 일본 정부의 부당한 조치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일본 상품에 대한 불매 운동에 적극 나서기도 했다.

 

 

 



실제 일본 정부의 조치는 내정간섭이자 한국 사법부의 판결을 무시하는 일이다. 일본의 주장은 삼권분립이 명확한 우리 국가 운영 시스템에서 행정부가 사법부의 판결에 관여하게 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는 행정부가 사법부의 판결을 무시하라는 것을 의미하고 이는 나라의 주권을 침해하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일본이 일제 강점기 강제징용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사법부의 판결 자체를 부정하는 상황, 한국 정부에게 이 문제의 해결을 강요하는 상황 속에서 양국 관계가 정상화되는 건 무리였다.

이 시점에 우리 정부는 일본의 요구 조건을 사실상 모두 수용한 해결책을 발표했다. 일본 내에서도 한국 정부의 조치가 기대 이상이라는 의견이 다수를 이룰 정도다. 대법원 판결 이후 지속된 한. 일간의 대립국면이 사실상 한국의 백기 투항으로 결론지어지는 상황이다. 

우리 정부는 이와 관련해 양국 관계 정상화를 위한 불가피성과 국익을 위한 결정이라는 논리를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서 1965년 한. 일 국교정상화를 위한 협상에서 체결한 각종 협정으로 대일 청구권이 소멸됐다는 일본의 입장을 옹호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이런 일본 편향적인 우리 정부의 태도는 각계각층의 큰 반발을 불러오고 있다. 한국 정부는 3월 6일 해법을 통해 이 문제를 일단락하고 한. 일 간의 미래 지향적인 관계 재 설정을 하려 하고 있지만, 우리 국민들이 이를 그대로 따를지는 아직 미지수다.

이 지점에서 1965년 한. 일 국교 정상화와 관련한 협상과 협정들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본은 강제징용 배상 문제와 관련해 당시 양국 정부가 체결한 청구권 협정을 근거로 한국 정부와 국민들의 일본 정부와 기업, 개인에 대한 일제 강점기와 관련한 청구권이 소멸되었음을 주장하고 있다. 더 나아가 일제 강점기 강제징용,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심지어 강제징용과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그 사실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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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일 양국은 한국의 광복 후 단절된 외교관계 복원을 위한 협상에 들어갔다. 미국 역시 동아시아에서 공산주의 세력 확산을 막기 위해 한국과 일본의 관계 개선이 필요했고 이를 지지하고 지원했다. 이에 이승만 정부에서도 관련 협의는 있었지만, 이승만 정부는 강력한 반일 기조를 유지하고 있었고 식민 지배 배상금 등에서 큰 입장 차를 보이면서 협상에 진전이 없었다. 

양국의 관계는 1961년 5.16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면서 다시 적극적인 협상 기조로 돌아섰다. 박정희 정권으로서는 그들의 정권 기반을 튼튼히 하기 위해 경제발전이 필요했고 그에 필요한 자금이 절실했다. 국내 자본이 절대 부족한 상황에서 일본과의 수교 협상을 통한 식민 지배 배상금은 중요한 재원이 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협상은 일본이 한국에 지급할 돈 문제가 쟁점이 됐다. 이는 한. 일 국교 정상화 협상에서 명확히 해야 할 일제 식민지 지배의 위법성과 폭력성, 인적 물적 피해에 대한 확인과 이와 관련한 일본의 사과와 반성은 협정문에 제대로 명시되지 않았다.  

한. 일 기본 조약은 국교 정상화를 골자로 하는 기본 조약에 더해 4개의 협정으로 구성되어 있다. 4개의 협정은 한. 일 청구권 협정, 한. 일 어업협정, 한. 일 문화재협정, 재일교포 법적 지위 및 대우 협정이다. 이 조약과 협정에는 양국의 해석 차이가 존재하는 조항들이 있다. 

기본 조약 제2조에서 1910년 8월 22일 한. 일 병합조약을 포함해 대한제국과 일본제국 간 체결된 각종 조약과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라고 명시했고 양국의 해석차가 발생할 경우 영문본에 의한다고 했다. 영문본에서는 'already null and yoid'로 이미 무효를 표현했는데 이를 두고 한국은 일제의 한국 대한제국 병탄 자체가 무효이고 불법이라 하지만, 일본은 한. 일 병합조약 자체는 합법이고 한국의 광복을 기점으로 무효하는 해석을 하고 있다. 이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관점을 차이를 분명히 하고 있다. 이는 과거사에 대한 명백한 인식의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이후 과거사 문제의 중요한 원인이 되고 있다. 이 점을 당시 협상에서는 명확히 하지 못했다.

 

 

 



한. 일 어업 협정에서는 독도 인근 해역과 관련해 공동 어로구역으로 명시하며 당장의 갈등을 피해 갔다. 독도는 조선은 물론이고 대한제국에서도 명백한 우리 영토였고 일본의 과거 문헌에서 이를 인정하는 자료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일본은 러. 일 전쟁 당시 독도를 불법 점거한 이후 이곳이 일본의 영토임을 주장하고 있다. 1951년 체결된 연합국과 일본 사이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제2조의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제주도, 거문도, 및 울릉도를 포함한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 권원 및 청구권을 포기한다'라는 규정을 근거로 독도에 이어 포함되지 않아 자신들의 영토라는 것에 근거로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이 주장대로라면 조약에 명시되지 않은 한국의 다른 섬들에 대해서도 일본이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는 것으로 논리적으로 모순된다. 독도는 울릉도의 부속 섬이고 한국이 광복 이후 실효지배를 하고 있다. 일본은 이를 분쟁지역으로 만들려 하고 있지만, 이는 명백한 주권 침해행위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이 독도 문제를 당시 협상에서 명확히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훗날 일본은 독도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지속했고 한. 일 어업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기도 했다. 1998년 잠정 공동수역 안으로 갈등이 봉합되기는 했지만, 갈등의 불씨는 여전히 남아있다. 

이와 함께 문화재 협정에서도 일본이 한국에서 약탈, 반출해간 문화재의 반환을 위한 것이었지만, 반환이라는 표현 대신 인도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반출 문화재 환수를 위해 한국이 일본측에 선의를 기대해야 하는 상황을 만들었다. 또한, 협정 이후 반환된 문화재 역시 극히 일부였다. 이에 우리 국보급 문화재 상당수가 여전히 일본의 보물로 남아있는 실정이다. 

그래도 부족함이 있었지만, 재일교포들이 법적 지위와 권리를 명확히 한 재일교포 법적 지위 및 대우 협정은 중요한 성과였다. 

그럼에도 이 협정에서 가장 큰 아쉬움은 일제 식민 지배와 관련한 배상 문제였다. 전후 배상 문제는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도 다뤄졌는데 당시 조약 체결을 위한 협상에 한국은 6.25 한국전쟁 상황 속에 참석하지 못했다. 당연히 조약 체결에서 한국의 입장은 제대로 반영될 수 없었다. 일제 강점기 한국은 큰 물적, 인적 피해를 입은 피해자였지만, 강화조약에서 이를 인정받지 못했다. 

 

 

일제 강점기 지도

 



1965년 한. 일 기본 조약의 추가 협정에서 이 문제를 논의했고 구체적 금액을 결정했다. 하지만 이 금액의 성격을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배상금이 아닌 경제협력을 위한 목적으로 규정했다. 그러면서 3억 달러 상당의 금액을 무상으로 지급한다고 했고 2억 달러는 차관으로 한국에 지급하기로 했다. 문제는 그 3억 달러를 현금이 아닌 매년 3천만 달러 수준에서 일본에서 생산되는 생산물 및 용역으로 지원한다고 했다. 광복 후 이승만 정부에 일본에 요구한 20억 달러 이상의 배상금과는 큰 차이가 있는 금액이었다. 

이와 함께 청구권 협정 제2조에서는 이 금액으로 한국은 국가와 국민의 대일 청구권을 포기한다는 규정을 추가했다. 일본은 이 규정을 근거로 일본 정부와 기업에 대한 한국 국민들의 추가 청구권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하지만 강제징용과 위안부 문제는 당시 한. 일 협상에서 제대로 논의되지 않았고 그 범위도 극히 제한적이었다. 당시 한국에 지급된 금액 일부가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지급되기도 했지만, 전체 피해자의 일부분이었다. 당시 협상에서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규모는 100만명 정도로 추산됐지만, 실제 강제징용 대상자는 800만 명 이상리라는 게 정설이다. 

또한 일본 정부는 강제 징용자들이 자발적 의사로 취업을 했다는 주장을 하지만, 1938년 일제는 국가 총동원법, 1939년 국민 총동원령을 통해 노동력 징발을 하고 있었다. 이를 통해 노동자들의 직업선택의 자유나 제한했다. 또한, 조선총독부의 주도로 총동원 연맹을 만들어 물자와 인적 자원을 통제하고 동원했다. 전시 상황에서 국가의 통제로 사회 시스템이 운영되는 상황에서 사기업들이 노동자를 모집하고 그 속에서 노동자들이 그들의 선택으로 일본 내 공장과 탄광, 각종 공사장에서 일을 했다는 건 이해하기 힘든 주장이다. 

그나마도 조선인 노동자들은 열악한 노동환경과 비인간적 대우 속에 중노동에 시달렸고 상당수가 병과 사고 등으로 희생됐고 노동의 대가도 제대로 지급받지 못했다. 젊은 청년들은 학도병이라는 이름으로 징집되어 전쟁터로 끌려가야 했고 많은 여성들이 근로 정신대라는 명목으로 노동 현장으로 향했다. 그중에는 위반부로 성 노예가 되어 전쟁터로 끌려가 극한의 고통 속에서 살아야 했다. 

일본은 이런 사실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한. 일 국교정상화 협상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는, 청구권의 소멸 대상에 강제징용과 관련한 사항이 없었음을 의미하다. 식민 지배 당시 불법적으로 이루어진 일에 대한 배상과 위자료 지급 청구권이 사라졌다고 할 수 없다.

이는 일본 전범기업들의 강제 징용 피해자에 대한 손해배상금 지급을 인정한 대법원 판결에서도 명확히 하고 있다. 대법원에서는 1965년 체결된 청구권 협정은 일본의 불법적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을 청구하기 위한 협상이 아니라, 한일 양국 간 재정적, 민사적, 채권 채무관계를 정치적 합의로 해결한 것으로 봤다. 이에 따라 징용 피해 한국인들의 지급받지 못한 미수금 및 보상금 및 기타 청구권, 그리고 강제징용 위자료 청구권이 이에 포함하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지금은 사라진 조선총독부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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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불법적이고 부당한 통치와 이에 따른 피해 보상에 대한 청구권이 마침내 인정되는 순간이었다. 이는 보편적 인권과 상식에 근거한 판결이었다. 새롭게 드러난 불법 행위에 대한 청구권을 요구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는 법과 그에 근거한 협정과 조약 이전에 보편적 가치와 정의를 구현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1965년 국교 정상화를 위한 협상과 협정은 그런 부분을 간과한 불안정한 협정이었고 개정되고 개선되어 할 부분이 많았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경제개발이 시급한 우리 상황 등 불가피성을 이유로 이 불안정성을 덮어두고 협정을 체결했다. 1964년 한. 일 국교정상화 협상에 반대하는 전 국민적 운동인 6.3항쟁을 계엄령 선포로 강제로 억누르면서 이 협정을 강행했다.

물론, 이를 통해 들어온 일본의 경제지원과 차관은 우리 경제 발전에 중요하게 사용된 건 분명하다. 또한, 공산주의 세력의 확산을 막기 위한 동맹국 범주에 한국과 일본을 함께 포함하려는 미국의 외교 정책에도 부합하는 일이었고 미국은 한. 일 국교 정상화를 적극 지지하고 막후에서 이를 지원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를 통해 경제가 일본에 종속되는 현상이 발생했고 지금도 지속 중인 고질적인 대 일본 무역 적자 구조를 만들었다. 과거사 정리를 명확히 하지 않으면서 이와 관련한 갈등이 언제든 재현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했다. 이는 한국이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루고 선진국 반열에 올라서며 더 표면화됐다.

한국에서는 새 시대에 맞는 양국 관계 정립이 필요했고 이를 위해 광복 후 한. 일 관계 정립에 근거가 되는 1965년 체제는 변화는 불가피한 일이었다. 하지만 일본은 여전히 1965년 체결한 조약과 협정의 불가역성만을 주장하고 있다. 그 조약과 협정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고 있다. 무엇보다. 과거 식민지 지배 자체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는 점에서 역사 인식과 관련한 간극을 좁히지 못하고 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가 없다는 말이 있지만, 일본은 그들에게 아프고 불리한 역사를 망각의 강으로 던져버리고 미래로 가기만을 고집하고 있다. 망각의 강으로 던져버린 역사 속에는 많은 무고한 피해자들의 피와 눈물이 함께 하고 있지만, 일본 정부는 역사적 책임을 인정하는 것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일본은 강제 징용과 관련한 사안에 있어 중국과 유럽 국가들에 대해서는 해당 기업들이 사죄와 배상금을 지불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일본 집권 세력에게는 여전히 여전히 한국이 과거 그들이 식민지배를 했던 열등한 나라 열등한 민족이라는 역사 인식이 자리잡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이런 인식 속에 과거사 문제에 대해 보다 전향적인 입장이 나오길 기대하는 건 무리일수도 있다. 

 

 



피해자는 언제든 가해자에게 사과와 반성, 배상을 요구할 수 있다. 한 개인도 마찬가지다. 이는 법적으로 조약이나 협정으로 그리고 누군가에 의해 결정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강제징용 배상과 관련한 문제는 단지 돈으로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고 치유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이는 역사의 정의를 바로 새우는 일이다. 이를 통해 역사는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 이런 역사를 잊고 미래로만 나가자고 강제할 수 없다. 

이 점에서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배상 문제는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우리 정부의 해법 제시에도 일본 정부는 이와 관련한 사실 인정조차 하지 않고 있다. 또한, 경제 보복 조치 역시 유지 중이다. 이 사안이 봉합된다 해도 독도 관련 문제와 다른 과거사 관련 문제들이 계속될 예정이다. 이 한 건으로 양국의 과거사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건 쉽게 동의할 수 없다. 

국익 관점에서도 우리의 양보가 고질적인 대일 무역 적자를 해소하고 수출을 늘릴 것으로 기대되지도 않는다. 한국의 대일 무역 적자는 쉽게 해소될 수 없는 문제고 일본이 우리나라 제품을 크게 수입할 여력도 없다. 대표적으로 세계적인 자동차 메이커인 현대나, 삼성과 LG 제품이 일본에서 판매에 크게 고전하는 건 일본인들의 한국 제품에 대한 낮은 인식도 있지만, 구매 여력도 영향을 주고 있다. K 콘텐츠의 더 활발한 진출 역시 이미 민간 영역에서 잘 이루어지고 있는 일이다.

일본의 수출규제 관련 제품 역시 우리 스스로 취약했던 소재산업을 더 발전시키는 계기도 마련했다. 즉, 명분이나 실리 면에서 우리가 먼저 서둘러 해법을 제시하고 역사적 굴욕을 스스로 자초할 이유가 없었다. 여러 면에서 정부의 조치는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다. 

과연 먼 훗날 2023년 3월 6일을 우리 후손들은 어떻게 기록하고 평가할지 역사에 부끄럽지 않은 국가의 존엄을 손상하지 않은 결정으로 기록될지 복잡하면서도 답답한 마음이 먼저 드는 게 사실이다. 


사진 : 위키백과,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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