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자동차 산업을 두고 종합산업이라는 말을 한다. 자동차 산업을 차를 생산하고 판매하는 데 있어 여러 부품의 제조와 완성차 조립, 판매 그와 관련한 금융과 할부 서비스 등 다양한 산업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이 때문에 자동차 산업은 한 국가의 산업 전반에 미치는 영향과 경제 효과가 매우 크다. 그 산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대량 생산과 판매가 이루어지는 규모의 경제가 뒷받침돼야 한다. 대신 그만큼 시작하기도 유지하기도 어려운 산업이다.
이에 자국에서 자동차를 생산하고 관련 산업을 유지하고 있는 국가는 손에 꼽을 정도다. 수차례 세계적인 경제 위기를 겪으며 자동차 산업 전반에 큰 구조조정이 있었고 대형 자동차 업체들을 중심으로 산업이 재편되고 있기도 하다. 그 속에서 한국은 자동차 산업의 후발 주자였지만, 이제는 세계에서 상위권의 자동차 산업 국가이기도 하다.
그리고 한국의 자동차 산업 발전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 '포니'다. 포니는 1974년 현대 자동차에서 내놓은 국내 기술로 만든 국산 자동차였다. 포니는 당시 정부가 원하는 자동차 산업 발전방향에 부합하는 높은 국산화율과 대량 생산체계를 갖춘 모델이기도 했다. 이 포니를 시작으로 한국 자동차 산업은 한국의 수출을 주도하는 등 비약적인 발전의 길로 들어섰다.
포니의 등장 배경에는 1970년대 들어 정부 차원에서 강력히 추진한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이 자리하고 있다. 5.16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집권 초기부터 강력한 수출 드라이브와 경제발전을 위한 계획을 정부 주도로 시행했다. 이를 위해 4.19 혁명 이후 집권했던 장면 내각에서 마련했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이어받아 1962년부터 시행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중간 그 명칭이 달라지긴 했지만, 1996년까지 총 7회에 걸쳐 지속됐다.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실행을 통해 경공업 중심의 산업 체제를 만든 박정희 정권은 빠른 산업화와 경제 발전을 위해 산업의 고도화를 추진한다. 이를 위해 박정희 정권은 1970년 들어 중화학 공업 육성을 위한 의지를 보였고 국가 주도로 이를 강력히 진행했다. 중화학 공업은 많은 자본이 소요되지만, 높은 부가가치와 이익 창출이 가능했다. 수출을 통한 경제 발전을 추진하던 정부로서는 중화학 공업 육성이 필요했다. 이에 기계, 조선, 철강, 석유화학 산업이 발전했다.
이를 위해 박정희 정권은 관련 회사를 만들고 운영할 수 있는 대기업들에게 막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해외에서 도입된 막대한 차관도 관련 산업 발전을 위해 투자됐다. 이 과정에서 대기업들은 큰 특혜 속에 빠른 성장과 함께 그 덩치를 키우고 나라의 수출을 주도하는 대표 선수로 성장했다. 한국 경제에서 보이는 특이한 형태의 재벌기업들의 등장과 발전의 시작이었다.
이는 압축 성장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기는 했지만, 자본과 부의 편중으로 인한 부의 불평등, 관치금융과 정경유착으로 대표되는 왜곡된 경제구조를 만들었다. 정부의 지원 속에 무한 성장을 거듭한 재벌 기업들은 차입에 의존한 무리한 사업 확장과 각 계열사들 간 순환 출자를 통해 자본금을 늘려가는 방식으로 무수히 많은 자회사를 거느린 선단식 경영을 했고 대외 변수에 취약한 체질로 스스로를 만들었다.
또한, 막대한 지원과 특혜로 확보한 자금 상당 부분을 부동산 투자 등으로 전용하는 등으로 경쟁력을 키우는 일에 사용하지 못했다. 박정희 정권 시절에도 대기업들의 이러한 행태는 문제가 됐다. 실제 경부고속도로 개통 당시 그 주변 땅에 다수의 대기업들 부동산을 구입한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부터 이어진 또 다른 군사정권까지 기업들의 체질 개선에 대한 정책을 시행하지 않았다. 당장의 실적이 우선이었고 대기업 중심의 경제체제는 모래성 위에 쌓은 성이 되고 말았다.
이런 경제 구조는 1990년 대 후반 IMF 경제 위기의 중요한 원인을 제공했다. 이로 인해 우리 사회는 큰 변화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갔다. 수많은 기업들이 무너졌고 실직자들이 나왔다. 그 속에서 국민들의 삶은 극한으로 몰렸다. 이에 재벌 중심의 경제구조에 대한 재편과 개혁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커지고 이와 관련한 조치들이 나오기도 했지만, 여전히 우리 경제는 재벌 중심의 불평등 구조가 사라지지 않았다. 경제 위기 당시 막대한 공적자금을 지원받았던 대기업들은 잘못된 기업지배 구조를 개선하지 않았고 나라의 부를 독점하고 있다. 압축 성장의 어두운 단면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
자동차 산업도 다르지 않았다. 앞서 언급한 대로 종합산업인 자동차 산업은 막대한 자본과 기술이 필요했고 1970년대 우리 경제 여건상 접근하기 어려운 산업이었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자동차 산업에 대한 강력한 의지가 있었다. 그에 앞서 박정희 정권은 당시로는 무리한 사업이라 할 수 있었던 서울과 부산을 연결하는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착수해 1970년 고속도로를 개통했다.
이는 서울과 부산까지 이동 시간을 회기적으로 단축시키는 것과 동시에 전국을 1일 생활권으로 만들었다. 경부 고속도로는 건설 당시 무리한 공기 단축과 만은 인명 피해가 있었고 이후 유지 보수에 막대한 비용이 소요되는 등의 문제가 있었지만, 국토의 대동맥으로 경제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줬다. 또한, 대규모 토목, 건설은 전체주의, 독재 정권에 있어 중요한 치적으로 홍보되는 사업이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당시 정권 차원에서도 중요한 사업이었다.
문제는 이런 고속도로를 이용할 자동차가 당시로는 많지 않았다는 점이다. 정부의 역량을 쏟아부었고 그에 따른 막대한 자본을 투입해 만든 사회 인프라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는 건 국가적으로 큰 낭비였다. 당연히 자동차 산업 발전에 대한 필요성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자본이나 기술이 부족한 우리 현실에서 선뜻 그 사업에 뛰어들 기업이 없었다. 당시 한국의 자동차 산업은 미국이나 일본차를 들여와 판매하는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국내 기술로 자동차를 생산하는 건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이 상황에서 경부고속도로 공사를 통해 크게 성장한 현대건설이 급 부상했다. 현대건설은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 건설 시장에서 많은 실적을 쌓았고 그 인지도를 높이는 중이었다. 이런 건설업을 바탕으로 현대는 재벌기업으로 성장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마침,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을 강력히 추진하는 정부 정책에 따라 조선소를 설립하는 등 관련 산업에서 투자를 하는 중이었다.
현대는 기존 미국 포드사와의 기술 이전 및 제휴관계가 종결된 이후 독자적인 자동차 모델 개발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는 국산 자동차 개발에 관심이 큰 정부의 경제 정책에도 부합하는 일이었다. 현대는 이를 위해 막대한 자금을 자동차 개발에 투자했다. 정부 역시 적극적으로 이를 지원했다. 1972년 정부는 대통령 긴급명령을 통해 기업들의 사채를 동결하고 상환 기간을 유예하는 사채 동결 조치를 단행했다. 이를 통해 금융권의 높은 문턱으로 인해 자금 조달에 있어 사채에 상당 부분을 의존하고 있는 대기업들의 자금 사정이 한결 나아졌다. 현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안팎의 지원 속에 현대는 이탈리아의 유명 자동차 디자이너인 조르제토 쥬지아로에게 당시로는 파격적인 금액인 120만 달러를 지불하고 신차 디자인을 의뢰하기도 했다. 자동차 회사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 연간 수십만 대의 생산 능력을 갖추는 게 필요했고 이는 국내 수요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다. 현대는 수출까지 고려한 신차 개발을 하고 있었다.
한편으로 현대는 기술의 습득을 위해 직원들의 해외 연수를 적극 진행하고 신차명을 공모를 통해 결정하는 등 대중성을 갖춘 자동차를 개발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등장한 자동차 명이 조랑말을 뜻하는 포니다. 그만큼 처음으로 생산하는 국산 자동차의 성공을 위해 온 힘을 다했다. 정부의 강력한 지원도 이런 현대의 모험적인 시도를 뒷받침했다.
1974년 11월 포니의 콘셉트 자동차가 이탈리아 토리노 모터쇼에서 선을 보였다. 한국 국산 자동차의 첫 시작이었다. 포니는 1975년부터 본격 양산에 들어갔다. 엔진이나 변속기 등 자동차의 플랫폼은 기술제휴 회사인 일본 미쓰비씨의 기술을 기반으로 했지만, 부품 등에서 높은 국산화율을 보였다.
포니는 최초 판매가가 2,289,200원 정도로 당시 강남의 아파트 한 채 가격이 5,000만원 수준이었음을 고려하면 만만치 않은 가격이었다. 하지만 포니는 출시부터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포니의 시장 점유율은 50%에 육박했다. 당시 서울 시내에 다니는 차의 둘 중 하나는 포니였다. 포니는 또 다른 자동차 생산업체는 기아산업의 브리사와 함께 한국을 대표하는 승용차가 됐다.
포니는 이후 새로운 시리즈와 모델이 지속적으로 출시되고 국민차로 자리를 잡았다. 1980년대 국민소득이 비약적으로 높아지고 저유가가 지속하면서 열린 마이카 시대와 함께 개인 승용차로도 각광을 받았다. 포니의 성공은 현대를 나라를 대표하는 자동차 생산회사로 발전시켰다. 이런 성공을 바탕으로 포니는 해외 시장에도 적극적으로 진출했다. 남미와 중동지역을 시작으로 수출을 시작한 포니는 우리나라 최초의 수출되는 국산 자동차이기도 했다.
이렇게 한국은 세계에서 16번째, 아시아에서는 두 번째로 자체 생산한 고유 모델의 자동차를 가진 나라가 됐다. 이후 우리 자동차 산업은 현대를 중심으로 기아와 대우가 삼각 구도를 형성하며 가파른 성장세를 보였다. 이런 경쟁은 자동차 산업 발전의 또 다른 요인이 됐다.
하지만 IMF 경제 위기 속에 자동차 산업을 큰 위기를 맞이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자동차 산업의 한 축을 담당하던 기아와 대우가 무너졌다. 결국, 기아는 현대에 인수됐고 대우는 미국 자동차 회사 GM에 매각됐다. 그 시기를 기점으로 국내 자동차 산업은 현대의 독과점 구조로 변화했다. 현대는 막대한 생산력을 확보하며 글로벌 자동차 회사로 성장했지만, 국내 소비자들의 선택의 폭이 제한되는 등의 문제는 피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이제 자동차 산업은 국경 없는 경쟁 시대로 돌입했다. 메이저 자동차 회사들이 중심이 되어 자동차 산업 전반에 인수 합병이 활발히 진행됐다. 자동차의 생산 유통망이 더는 한 국가에 국한되지 않은 세상이다. 국내 소비자들도 이전보다 한결 부담 없이 외국 자동차를 선택할 수 있다.
또한, 전기차가 급속히 시장 점유율을 높이며 기존 자동차 회사들의 변화를 이끌고 있다. 전기차의 약진은 자동차 산업 전반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있다. 자동차는 점점 가전제품이 되어가고 있다. 탄소 중립이 세계의 중요한 목표가 되는 시점에 이제 자동차 산업은 전기차로 급속히 그 중심이 이동하고 있다. 이런 변화에 우리 자동차 업계가 비교적 빠르게 대응하고 있다는 건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사실상 무에서 유를 창조한 자동차 산업의 시작과 그 시작을 함께 한 '포니'라는 국산 자동차의 존재가 있었다. 포니는 단순히 자동차 회사의 브랜드가 아닌 우리 경제 발전사의 명. 암을 모두 담고 있는 역사적 상징물이라 할 수 있다.
사진 : 픽사베이 / 위키백과 / jihuni74,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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