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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발발해 1598년 종결된 임진왜란은 우리 역사상 최악의 전쟁 중 하나다. 이 7년간의 전쟁으로 조선은   사회, 경제적으로 막대한 타격을 입었고 나라의 근간마저 흔들렸다. 인구는 크게 감소했고 국가 경제의 중요한 기반이었던 농토도 대부분 황폐해졌다. 사람과 농토의 상실은 나라의 재정을 궁핍하게 했다.

백성들의 삶은 전쟁 이후 더 비참한 상황으로 내몰렸다. 특히, 17세기는 전 세계적으로 이상기후 현상이 지속되고 소 빙하기라 불릴 정도로 지구의 평균 기온이 내려간 시기였다. 농업 생산에는 최악의 환경이었다. 그 속에서 대 기근과 전염병, 자연재해 지속적을 발생했다.

이런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사회개혁과 변화가 절실했지만, 조선의 집권층은 성리학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들은 변화를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찾기보다는 집권층의 기득권을 공고히 하는 데 더 주력했다. 그 결과 성리학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던 제례 등 예학이 더 강조되고 남녀 차별이 더 극심해지고 신분제를 더 강화하는 등의 퇴행적인 모습을 보였다. 대동법의 시행 등 조세개혁 등이 있기도 했지만, 조선 중기부터 드러난 사회의 구조적 문제는 여전히 유지됐다. 

한편에서 실사구시를 통해 사회 개혁을 모색했던 실학의 대두되기는 했지만, 그런 주장을 하는 이들은 대부분 정계에서 비주류 인사였고 근본적인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강력한 왕권을 구축한 숙종과 영조, 정조시대 반전의 가능성을 보였지만, 사회의 긍정적인 발전으로 연결되지 못했다. 마지막 개혁군주라 할 수 있는 정조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이후 조선은 정치마저 실종되는 세도 정치기로 접어들었고 더 깊은 침체의 길로 접어들었다. 

 

 

청나라의 시조 누르하치 초상

 



이런 조선의 안타까운 상황과 함께 임진왜란은 중원에도 큰 변화를 몰고 왔다. 조선이 건국한 이후 사대 관계를 유지했던 명나라가 몰락하고 만주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선 여진족의 나라 청나라가 중권의 패권을 차지했다. 요동과 요서지역에 분포되어 부족 형태로 존재하는 여진족은 그 힘을 모아 금나라를 건국하고 중국을 위협하기도 했지만, 이후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명나라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었다, 조선 역시 건국 초기부터 여진족에게 강. 온 양면 전략을 사용하며 그들을 관리했다. 명나라와 조선에 있어 여진족은 미개한 오랑캐였다.

이런 여진족에게 임진왜란은 그들 역사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명나라와 조선이 일본의 대규모 침략에 대응하느라 국력을 소진하는 사이 여진족의 근거지였던 요동지역은 힘이 공백이 발생했다. 그 사이 여진족에는 누르하치라는 강력한 지도자가 등장했다. 누르하치는 요동지역을 관할하던 명나라 관리와 우호관계를 형성하며 교역권을 얻었고 그 바탕 위에 자신 부족의 힘을 키웠다. 이후 여진족 내부에서 치열한 정복 활동을 벌이며 세력을 통합해 나갔다. 

임진왜란 이후 명나라는 누르하치의 움직임을 주목했지만, 힘으로 그들을 제압하기가 어려웠다. 명나라는 임진왜란 당시 막대한 군비를 소진했다. 최 정예 부대가 조선 원정을 떠났고 그에 필요한 군수 지원이 필요했다. 애초 명나라 군대는 그들 나라에 풍부한 은으로 조선 현지에서 물자를 조달하려 했지만, 조선은 물물의 교환 수단이 아니었다.

결국, 명나라는 중국에서 물자를 조달에 보급해야 했다. 한편으로는 조선 백성들에 대한 노략질도 필요한 물자를 충당하기도 했다. 실제 명나라 군대에 의한 수탈은 일본군 그 이상이었다. 이에 조선 백성들은 침략자인 일본군은 물론이고 명나라 군대에도 고통받는 이중고를 겪어야 했다. 

명나라는 임진왜란 참전 외에도 변방의 이민족들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서도 상당한 군비를 소모했다. 군대의 파병과 유지에는 지금도 막대한 자금이 소요된다. 명나라 역시 다르지 않았다. 이런 거듭된 전쟁은 그들의 화폐교환 수단인 은의 소모와 부족을 불러왔다. 

 

 

광해군 묘

 



당시 명나라는 전 세계 은인 다 모이는 곳이었다. 유럽의 국가들은 중국의 특산물을 수입하면서 은을 교환 수단으로 지불했다. 유럽과 중국의 무역은 중국의 갑의 위치였다. 명나라에는 막대한 은이 유입됐고 자연스럽게 은 본위 화폐제도가 정착됐다. 문제는 은의 지속적인 소진과 함께 유럽 내에서 계속된 패권 전쟁으로 무역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은의 유입이 급속히 감소했다는 점이었다.

당시 유럽 상인들은 자체 생산한 은을 물론이고 세계 최대 은 생산국인 일본과의 무역으로 매입한 은으로 명나라 무역을 했다. 그 은이 유럽에서 소진되고 임진왜란으로 일본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상황에서 은의 명나라 유입이 크게 줄었다. 통화의 공급이 급격히 감소하면서 명나라는 디플레이션이 지속되고 경기 침체가 이어졌다. 불안한 경제는 나라 전체를 흔들었다. 무너진 경제는 명나라 멸망의 결정적 요인이 됐다. 

명나라가 점점 그 영향력이 축소되는 틈을 누르하치의 여진족은 제대로 활용했다. 그들은 세력을 모으고 몽골과의 우호관계를 유지하며 북방의 새로운 국가로 거듭났다. 누르하치는 과거 금나라의 영광을 재현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국호를 후금이라 칭하고 요동지역에 새로운 여진족의 나라를 건국했다. 이제 명나라는 만리장성 넘어 강력한 이민족 국가를 상대해야 했다. 

명나라로서는 후금이 더 강해지기 전에 그 싹을 잘라야 했다. 이에 다시 한 번 대규모 원정부대를 편성해 여진 토벌에 나섰다. 명나라는 조선에 파병을 요청했다. 당시 조선의 임금은 광해군이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반발한 해 급하게 세자에 올랐고 전장에서 아버지 선조를 대신해 분조를 이끌며 고군분투했다.

광해군은 이 과정에서 전쟁의 참상을 몸소 체험했다. 광해군은 조선이 다시 전쟁에 휘말리는 상황을 원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조선은 7년간의 큰 전쟁을 치른 후 전후 복구에서 벅찬 상황이었다. 광해군은 나라의 제도를 정비하고 무너진 국가 시스템을 바로 세우는 한편, 나라 재건에 성과를 내고 있었다. 전쟁 파병은 회복되던 국력을 크게 소모하는 일이었다.

 

 

정묘호란, 병자호란을 일으킨 청나라 홍타이지

 



또한, 광해군은 변화하는 국제 정세를 읽고 있었다. 새롭게 일어난 여진의 신흥국의 장차 조선에 큰 위협이 될 수 있음을 그는 알고 있었다. 또한, 명나라의 쇠퇴 또한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당시 분조를 이끌며 군 통수권자의 역할을 했고 명나라 군의 실상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명나라군은 선진 군사 시스템을 조선에 전수하는 등 나름 긍정 역할을 하긴 했지만, 실제 전투에서 초반을 제외하면 큰 성과를 내지 못했다. 명나라는 전란의 상당 시간을 일본과의 강화협상에 소비했다.

광해군은 명나라 군대의 문제들을 파악하고 있었고 명나라와 누르하치의 후금과의 전투에서 명나라가 승산이 크지 않음을 예측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광해군은 파병군의 사령관 강홍립에게 밀명을 내려 상황에 따른 유연한 대처를 지시했다. 그의 예상대로 후금의 군대는 매우 강력했다.

후금의 군대는 정예 기마병을 앞세워 매우 빠른 기동력으로 명나라와 조선의 군대가 모여 연합 작전을 하기 이전에 각개 격파하는 전략으로 맞섰다. 이에 명나라와 조선의 군대는 애초 계획했던 포위작전을 하기도 전에 각각 궤멸되고 말았다. 조선군 역시 마찬가지였다.

조선은 임진왜란을 전후로 조총부대를 중심으로 군 편제를 개편하고 훈련도감 등을 통해 상비군을 유지하고 있었다. 조선은 그 상비군을 파병했다. 조선군은 후금 군대와의 결전에서 조총부대를 중심으로 맞섰지만, 조총의 위력이 무력화되는 기후 조건에 후금 기병의 기동력에 밀려 참패했다.

결국, 1만 5천명의 조선군은 반 이상의 후금과의 전투에서 전사했다. 나머지 병력은 후금군에 투항했다. 더 이상의 희생을 막기 위한 조치였고 이는 광해군과 파병군 사령관 강홍립 사이에 약속된 일이기도 했다. 조선군의 투항과 함께 명나라 군대도 대패당하면서 후금은 명나라의 파병군에 대승을 거두고 그들 나라의 입지를 더 공고히 했다. 1619년 있었던 사르후 전투의 결과였다. 이후 후금은 명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 독립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고 명나라와의 관계 역시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될 수 있었다. 명나라는 만리 장성을 중심으로 후금의 침략을 막아내야 하는 수성에 더 중점을 둘 수밖에 없었다. 

이런 국제 정세 변화 속에 강홍립은 누르하치에게 조선군의 파병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도운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키기 위한 파병으로 조선은 후금과 대립할 의사가 없다는 광해군의 생각을 전했다. 강홍립은 이후 후금에 머물며 후금의 동향과 지역의 정세를 광해군에게 밀지로 보고했다. 이는 광해군의 외교 전략 수립에 큰 도움이 됐다. 광해군은 뜨는 태양인 후금과 저물어가는 해 명나라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하며 전쟁을 피했다. 나름 현명한 외교 전략이었고 이로 인해 조선은 한동안 전쟁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광해군은 후금의 침략에 대비해 국경의 수비와 군대를 강화하는 등의 군사적 조치도 병행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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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의 명장 원숭환

 



하지만 성리학적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조선의 사대부 세력들은 명나라와의 의리를 강조하며 끊임없이 친명배금의 외교정책 강화를 주장했다. 명나라는 조선에 지속적으로 파병을 요청했지만, 광해군은 이런저런 사정을 이유로 이를 거부하는 중이었다. 광해군의 실리, 중립 외교는 안팎의 압력에 흔들렸다.

이와 함께 광해군은 북인을 중심으로 한 소수 정권으로 그 권력기반이 튼튼하지 않았다. 북인 세력은 그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반대파를 힘으로 억압하는 정국 운영을 했고 영창대군 등 권력에 위협이 되는 세력을 사사하는 등 무리한 정적 제거에 나서기도 했다. 광해군 역시 세자 시절 그리고 집권 초기의 총기를 읽고 정국의 흐름을 놓치고 말았다. 이는 반정 세력의 규합으로 이어졌고 1623년 서인이 주도하는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은 권좌에서 물어나 긴 유배생활을 하고 말았다. 긴박하게 돌아가는 국제 정세 속에 조선은 내부의 권력 투쟁으로 효과적인 대응을 하지 못했다. 

그 사이 후금과 명나라의 대결은 만리장성을 넘으려는 후금과 이를 막아내려는 명나라의 치열한 공방전으로 전개됐다. 명나라는 비고 그 힘이 쇠퇴하긴 했지만, 만리장성이라는 강력한 방어막이 있었다. 요동과 요서 지역 방어 책임자인 원숭환이라는 명장이 있었다. 

원숭환은 명나라의 수도 북경으로 향하는 중요한 길목에 있는 요충지 산해관을 굳건히 지켜냈다. 더 나아가 요서 지역에 전진기지인 영원성을 구축해 후금의 침공을 막아냈다. 패배를 모르던 장군이기도 했던 누르하치 역시 원승환의 방어선을 돌파할 수 없었다.

명나라 군은 서양의 기술을 도입해 만든, 당시로는 신무기라 할 수 있는 강력한 대포인 홍이포를 적절히 활용해 후금군의 공세를 막아냈다. 아무리 빠른 후금의 기병대라 할지라도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긴 사거리와 파괴력을 가진 홍이포의 위력 앞에는 속수무책이었다. 결국, 누르하치는 산해관을 넘기 위해 벌인 영원성 전투에서의 패전 이후 얼마 안 가 세상을 떠났다. 그 전투에서 입은 부상과 패전에 따른 극심한 스트레스가 그의 생을 단축시켰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누르하치의 사후에도 후금의 명나라에 대한 공세는 계속됐다. 2대 왕에 오른 홍타이지는 명나라 공격과 함께 그들 배후에 자리한 조선에 대한 공격도 병행했다. 마침 조선은 광해군이 반정에 의해 실각한 후 집권한 인조와 서인 정권이 강력한 친명배금 외교노선으로 변화하며 대립각을 세우는 중이었다. 이는 후금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사르후 전투 재현도

 



서인 정권은 후금의 공세에 대비한 역량이 없었음에도 전쟁을 불사하는 강경노선을 견지했다. 그러면서 논공행상의 불만으로 촉발된 이괄의 난이 일어나며 이괄 군대의 중심이었던 평안도 지역의 군 조직이 붕괴되며 서북지역의 방어망이 더 허술해지고 말았다. 서인 정권은 최소한 이 방어선을 다시 구축하는 기간만이라도 후금을 자극하지 않는 외교전이 필요했지만, 노골적인 친명배금으로 일관했다. 이는 후금의 조선 침략의 빌미를 제공했다. 

1627년 후금의 홍타이지는 조선을 침공했다. 정묘호란의 시작이었다. 후금의 군대는 빠른 기동력을 앞세워 빠르게 조선 서북지역 방어선을 돌파하고 수도 한양으로 향했다. 인조는 급히 강화도로 피신했지만, 전황은 조선에 크게 불리했고 조선은 후금과 형제의 나라가 되는 화친을 맺어야 했다. 당연히 형은 후금, 동생은 조선이었다. 조선이 역사적으로 오랑캐라 업신여겼던 여진족에게 사실상 무릎을 꿇는 사건이었다. 

후금은 조선 침공을 통해 부족했던 여러 물자를 약탈함과 동시에 명나라와의 관계 악화로 단절된 명나라와의 무역을 조선을 통해 재개하는 효과도 누릴 수 있었다. 배후의 위협을 제거한 후금은 더 강력하게 명나라를 압박했다. 후금은 원숭환이 지키는 영원성과 산해관을 방어선을 우회해 만리장성을 넘어 북경을 공략하면서 명나라를 위협했다.

원숭환의 영웅적인 항전으로 명나라는 위기를 넘겼지만, 이 과정에서 명나라 조정의 권력 다툼이 일어났고 최고의 명장 원숭환은 역적의 누명을 쓰고 처형되고 말았다. 임진왜란 당시 나라를 구한 최고의 장군 이순신 장군이 모함으로 삼도수군통제사의 자리를 잃고 백의종군하는 상황을 연상하게 하는 일이었다.

당시 조선의 임금 선조는 이순신의 목숨까지 빼앗으려 했지만, 이를 반대하는 뜻있는 대신들의 구명 노력으로 이순신은 죽음의 위기를 벗어나 재기의 가능성을 열어둘 수 있었다. 그때 목숨을 구한 이순신은 이후 명량해전의 기적 같은 승리를 지휘하고 조선 수군을 재건해 조선의 바다를 지키고 일본군의 재침을 막아냈다. 하지만 명나라는 최고의 장수를 허무하게 잃었다.

 

 

명나라 전성기 영락제 시대 영토

 



이 과정에는 후금의 치밀한 계략이 함께 했다. 후금은 원숭환이 후금과 연결되어 있다는 일종의 가짜 뉴스를 통해 명나라 조정을 흔들었고 마침 계속된 승전으로 백성들로부터 신망이 두터웠던 원숭환을 경계하던 명나라 황제의 마음까지 흔들었다. 원숭환의 허무한 최후는 단단하던 명나라의 요동, 요서 방어선의 붕괴를 불러왔다. 그 지역의 명나라 군 상당수가 후금에 투항하기도 했고 군 조직력도 와해됐다. 명나라로서는 그들의 멸망을 스스로 재촉한 셈이었다. 

후금의 또 다른 소득은 그들의 두려워하던 명나라의 신무기 홍이포를 수중에 넣었다는 점이었다. 후금은 명나라 침공 시 홍이포 기술자들을 포로로 잡은 데 이후 투항하는 명나라 군대를 통해 홍이포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후금은 얼마 안 가 그들 자체 기술로 홍이포를 생산하고 실전에 배치할 수 있었다. 이는 명나라와의 전쟁에서 후금이 주도권을 가져오는 계기가 됐다.

이렇게 자신감이 커진 후금의 왕 홍타이지는 1636년 5월 국호를 후금에서 대청으로 고치고 황제 자리에 올랐다. 이제 후금은 변방의 나라가 아닌 여러 민족을 함께 아우르는 제국을 선포했다. 이는 중원에 두 개의 태양이 뜬 셈이었고 두 태양 중 한 태양이 사라져야 함을 의미했다. 

홍타이지의 청나라는 명나라에 대한 전면전 이전에 조선에 대한 완벽한 지배관계를 공고히 하려 했다. 조선은 정묘호란 당시 형제의 맹약을 했지만, 친명배금의 외교정책을 유지했고 청나라에 대한 적대감을 버리지 않았다. 조선의 집권층은 여전히 중화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변화한 국제질서를 읽지 못하거나 외면했다. 이는 청나라와의 일전을 각오한 일이었지만, 조선의 군사력이나 국력은 신흥 강국 청나라에 크게 미치지 못했다.

실력은 없으면서 허세만 가득한 조선의 외교정책이었다. 인조와 서인 정권은 취약한 그들의 권력 기반을 공고히 하기 위해 외교 강경노선을 유지했다 할 수 있다. 명나라에 대한 의리와 사대 관계 유지는 역대로 조선 왕조의 외교 정책이었고 사대부는 물론이고 일반 백성들 역시 이에 동조하고 있었다.

정묘호란에서의 형제의 맹약은 조선에는 치욕적인 일이었고 이런 오랑캐와 강하게 맞선다는 건 명분 있고 여론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에 상응하는 국가적 역량은 조선에 없었던 정권의 실력도 한참 부족했다. 서인 정권은 인조반정의 중요한 명분이었던 친명배금 정책의 유지에만 집착했다. 이는 나라의 실리와 이익 추구와는 한찬 거리가 있는 일이었고 결과적으로 조선 역사상 가장 치욕스러운 역사의 한 장면을 만들었다. 

제국을 선포한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공격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1636년 12월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는 직접 친정에 나서며 조선을 공격했다. 청나라의 기마병들은 빠른 속도로 조선의 서북 방어선을 돌파해 도성인 한양으로 향했다. 그들의 속도는 청나라의 침공을 파악하고 이를 도성에 알리는 조선의 파발보다도 빨랐다. 조선 조정은 그들의 선발대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조선 조정이 청나라 침공을 인지하고 왕실의 강화도 이전을 추진했을 때는 이동로가 적에게 선점당한 이후였다. 

 

 

명나라 때 축조된 자금성

 



인조와 세자는 강화도행을 포기하고 지금의 경기도 광주의 남한산성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인조는 한 달 넘게 항전했지만, 청나라군은 무리한 공격보다는 촘촘한 포위 전략으로 남한산성을 고립시키고 조선의 항복을 유도했다. 조선은 한 겨울 속 항전을 지속했고 남쪽 지방에서 근왕군을 조직해 남한산성을 구원하려 했다.

하지만 고립된 남한산성의 군량미가 모두 동이 나고 구원군 마저 패전을 거듭하는 상황에서 조선은 항전의 의지가 꺾이고 말았다. 이에 더해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화포인 청나라 군의 홍이포 포격에 남한산성이 속절없이 파괴하는 상황에서 조선은 더 버틸 수 없었다. 여기에 강화도가 적의 수중에 들어가고 그곳으로 피신한 왕족들이 적의 포로가 되면서 조선의 항전 의지는 완전히 상실됐다. 

해를 넘겨 1637년 2월 24일 조선의 임금 인조는 남한산성을 나와 지금 서울의 송파구에 있는 삼전도에서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에게 삼궤구도두례, 머리가 땅에 닿을 만큼 3번 절을 하는 동작을 3회 반복하는 항복의 예를 갖춰야 했다. 조선 역사에서 가장 굴욕적인 순간이었다.

이는 스스로를 소중화의 이룬 나라로 여기던 조선이 오랑캐들에게 머리를 조아린 일로 당시 집권층은 물론이고 백성들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 항복의 예를 도성이 아닌 당시로는 외딴곳인 삼전도에서 했다는 점이다. 이는 조선과 청나라의 협상의 결과물이기도 했고 청나라가 나름 조선을 배려한 결과였다.

하지만 굴욕적인 사건이라는 점은 달라지지 않았다. 청나라는 그 자리에 홍타이지의 공덕을 찬양하고 병자호란의 정당성을 내용으로 하는 삼전도비를 세우도록 명령했고 지금도 삼전도비는 역사의 흔적으로 남아있다. 특히, 삼전도비는 지금은 사라진 여진족의 글인 만주어가 병기되어 만주어 연구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이후 조선은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볼모로 청나라로 향했고 끝까지 항전을 주장한 주전파 대신들이 죄인으로 청나라에 압송되는 한편 극심한 물적, 인적 수탈에 시달려야 했다. 임진왜란 이후 채 전후 복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조선에는 또 한 번 치명적인 일이었다. 

조선을 완전히 그들 영향력 아래 두게 된 청나라는 본격적으로 명나라 공격에 나섰고 명나라는 거듭된 청나라의 공세에 허물어져 갔다. 여기에 지도층의 내분과 반란이 겹치면서 멸망의 길을 가게 됐다. 결국 명나라는 1644년 이자성의 난으로 사실상 황실이 붕괴됐고 마지막 황제 숭정제가 스스로 목숨을 끊고 청나라가 수도 북경에 입성하면서 멸망하고 말았다. 중국의 마지막 전제 군주국가인 청나라 역사의 시작이었다. 

 

 

명나라 마지막 황제 숭정제

 



이렇게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구원했던 명나라의 멸망에는 50여 년의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미 임진왜란을 전후에 명나라는 쇠퇴의 조짐이 있었지만, 임진왜란의 참전은 명나라의 국력 약화를 촉진했다. 이 점에서 임진왜란은 조선과 일본의 전쟁이었지만, 국제적이었고 결과적으로 동아시아의 질서를 흔든 일대 사건이었다. 이런 국제 정세의 변화에서 조선은 기민하게 대응하지 못했다. 그나마 중립 외교를 펼치던 광해군이 물러나면서 조선은 시대에 뒤떨어진 사고와 그에 근거한 외교로 또 한 번의 전란을 자초했다.

물론, 중립외교를 했다 해도 청나라와의 전쟁이 발생할 수도 있었다. 또한, 청나라에 대한 사대 관계를 피할 수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상황에 맞는 외교를 했다면 전쟁을 피하거나 그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 보다 조선에 유리한 청나라와의 외교관계 수립도 가능했다.

하지만 조선의 집권층은 이런 유연한 외교를 하지 못했고 조선의 후반기를 더 어두운 그림자 속으로 몰고 갔다. 문제는 이런 전란의 책임을 집권층은 전혀 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역사상 최악의 굴욕을 당한 인조와 서인 정권은 건재했고 서인 정권은 이후 전혀 현실성 없는 북벌론으로 그들의 권력 기반을 단단히 하는데 이용했다.

서인 세력은 이후 노론이라는 강력한 붕당을 형성하고 조선의 정치를 주도했다. 노론의 수구적인 정치는 조선은 변화하는 국제질서에도 더 멀어지게 했고 근대화를 더 더디게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책임지지 않은 정치의 폐해가 어떤 것인지 조선의 역사는 증명하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능수능란한 외교가 나라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도 명. 청 교체기의 중원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다. 이는 현재 미국과 중국 양대 강국 사이에 놓여있는 우리의 상황과도 너무 닮아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알 수 있듯이 먼 나라에서의 일이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실감하는 요즘이다. 이를 통해 역사는 끊임없이 반복되고 그 역사를 통해 교훈을 얻어야 한다는 진리를 다시 한 번 느낄 수밖에 없다. 


사진 : 위키백과,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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