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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12월 25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크리스마스, 성탄절이다. 고대 로마에서 기독교인들의 축제였지만, 수백 년 세월 로마 제국에서 박해를 받았던 기독교가 313년,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의 밀라노 칙령에 의해 기독교가 정식 종교로 공인되고 그 세력이 급속히 확대되는 과정에서 종교를 초월한 기념일, 축제로 변모했다. 

기독교가 세계 각지로 전파되면서 크리스마스는 여러 나라에서 중요한 기념일로 자리했다. 연말연시의 들뜬 분위기와 이를 이용한 마케팅이 활성화되는 상황과 맞물며 크리스마스는 종교적인 색채보다는 축제의 의미가 강해졌다. 크리스마스는 연중 가장 거리가 북적이고 상권이 활성화되는 시기다. 이와 관련한 각종 마케팅이 전개된다. 크리스마스를 기점으로 연말연시의 분위기가 크게 고조된다.

이 크리스마스를 대표하는 캐릭터는 단연 산타클로스다. 풍성한 몸매에 빨간 곳 흰 덥수룩한 흰 수염의 할아버지인 산타클로스는 크리스마스 전날 밤, 크리스마스이브에 사슴이 끄는 그것도 하늘을 나는 썰매를 타고 전 세계를 누비며 착한 일을 한 어린이들에게 선물을 나눠 준다는 전설의 인물이기도 하다.

산타클로스가 굴뚝을 통해 들어가 어린이들이 잠든 틈에 선물을 받기 위해 걸어 놓은 양말에 선물을 넣어준다는 스토리는 동심 가득한 어린이들에게는 신화와 같은 이야기다. 물론, 최근에는 굴뚝 있는 집이 거의 사라진 탓에 산타클로스가 문을 여는 비밀번호를 다 알아야 한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어린이들은 산타클로스의 선물을 기대라며 크리스마스 전날 밤을 보낸다. 이런 동심을 지켜주기 위해 부모들은 산타클로스 역할을 대신하기도 한다. 그런 산타클로스가 사실은 부모님이라는 사실을 아는 순간의 충격을 어린 시절 경험한 이들도 많다. 

산타클로스의 유래는 고대 로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속에서 교회 성직자였던 성 니콜라우스는 인물이 등장한다. 270년 태어나 343년 세상을 떠난 것으로 전해지는 청빈한 삶을 살며 가난한 이들의 구휼에 평생을 바친 성직자였다. 

 

 

성 니콜라우스 초상

 



그는 지금의 튀르키예 지역의 부유한 집안의 상속자였지만, 그 재산을 모두 가난한 이들을 위한 자선사업에 사용했고 교회의 주교가 됐다. 그는 로마제국의 기독교 박해 당시 고초를 겪기도 했다. 이후 그는 주교로서 수많은 선행을 행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선행과 관련한 일화는 전설이 되어 사람들에게 구전되었고 그의 사후에도 크게 칭송받도록 했다. 그는 사후 성인으로 추증되었고 오래 세월이 흘러 자신의 지역에서 그 유해가 지금의 이탈리아 항구 도시 바리로 옮겨졌고 그곳에 그의 유해가 안치된 예배당이 만들어져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성 니콜라우스는 성직자로서의 모범적인 삶을 살았고 실천하는 성직자였다. 바꿔 말하면 가난한 이들에게 다가가고 그들을 위한 삶을 살았던 성직자가 많지 않았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일반 민중들은 힘겨운 삶을 사는 그들을 어루만져 줄 구원자를 간절히 원했지만, 구원자는 찾아오지 않았다. 예수가 하나님 앞에 평등을 내세우며 민중의 구원자로 나타났지만, 그의 사후 또 다른 메시아에 대한 갈망은 실현되지 못했다. 성 니콜라우스는 민중들이 원하는 메시아 같은 인물이었고 그의 삶이 전설이 된 이유였을지도 모른다. 

그의 삶은 훗날 교회에서 가난한 아이들에게 그의 축일인 12월 6일을 전후에 선물을 나눠주는 전통을 만들었다. 이런 전통은 크리스마스, 성탄절에게 어린이들에게 선물을 주는 문화를 만들었고 그런 선물을 전해주는 이가 산타클로스가 된 유래가 되었을 수도 있다. 

그의 거룩한 삶은 지금의 산타클로스와는 분명 거리가 있다. 그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선행과 헌신을 한 인물이었지만, 지금의 산타클로스는 지나치게 상업화된 측면이 강하다. 그 이미지도 마케팅적 측면을 고려해 크게 변형됐다. 성 니콜라우스를 그린 고대 그림들과 지금의 산타클로스의 모습은 큰 차이가 있다. 산타클로스는 그의 이름이 영어식으로 변형된 것 외에 공통점이 많지 않다. 크리스마스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성 니콜라우스라는 인물에 대해 우리가 좀 더 세심하게 알 필요가 있다. 

조선시대에도 성 니콜라우스와 같은 존재가 있었다. 개인의 운세를 점치는 데 있어 중요한 지침서로 전해지는 토정비결의 저자 이지함이 그 인물이다. 그는 조선 선조 임금 시대 선비로 성리학은 물론이고 다방면에 해박한 지식이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는 당대 최고 학자인 서경덕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고 율곡 이이와 조헌 등 유명한 성리학자들과 교류했다. 그는 그들로부터 뛰어난 인재로 평가받았지만, 벼슬길에는 오르는 걸 한사코 거부하며 야인의 삶을 살았다. 이는 출사하지 않고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만 평생을 힘썼던 그의 스승 서경덕의 삶과 비슷했다. 

그는 이런 남다른 삶과 함께 기인의 면모가 가득했다. 그는 당시 양반 사대부로서는 이례적으로 상업에 종사하며 큰 재능을 발휘했다. 그렇게 모은 재산을 그는 가난한 이들의 구휼에 활용했다. 그러면서 그는 당시 나루터가 있었던 마포에 흑집을 짓고 청렴한 삶을 살았다. 그의 호가 토정이 된 이유였다. 

그는 뒤늦게 지역의 현감이 되어 벼슬길에 올랐다. 그는 지역에서 걸인청을 만들어 가난한 이들을 적극적으로 돌보는 한 편, 상업 진흥을 통해 나라를 부강하게 해야 한다는 자신만의 국부론을 강력히 주창했다. 그는 임금에게 자신의 주장을 담은 상소를 올려 그 주장을 세세히 밝혔다. 

그는 농업이 중심인 조선에서 오히려 상공업을 진행해 오히려 농업이 이를 보완해애 한다는 본말 상보론을 주장했고 나라를 부강하게 할 수 있는 세 가지 대책을 내놓았다. 첫 번째는 나라가 창고를 열어 백성들이 아낌없이 쓸 수 있도록 배불러야 한다고 했다.

경제에 있어 국가의 역할을 강조한 것인데 이는 당시 시대상이 빈부의 격차가 점점 극심해지고 일반 백성들의 삶이 점점 궁핍해지는 현상을 경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시 토지는 점점 소수의 양반들에 의한 대토지 소유 현상이 분명해지고 있었고 조세 제도가 왜곡되고 변질되면서 백성들은 과도한 세금 부담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지함은 이런 백성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국가나 나서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이는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첫걸음이었다. 

이를 위해 이지함은 두 번째로 훌륭한 인재들은 적재적소에 배치에 국가 경영을 효율적으로 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이를 위해 인재 등용에 편견을 가지지 말고 그 문호를 활짝 열어야 한다고 했다. 지금도 많이 사용되는 인사가 만사, 인재 경영을 그는 그 당시 이미 주장했다. 

 

 

이지함 초상

 



세 번째로 이지함은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방법론으로 육지와 바다를 이용해 온갖 재물을 생산해야 한다고 했다. 이는 엄격한 신분제와 함께 직업의 귀천을 두고 상업과 공업을 천시했던 조선에서는 파격적인 주장이었다. 이지함은 상공업 진흥을 통해 국부를 창출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또 다른 상소에서 서해 바다의 섬들을 활용해 어업과 염전 사업을 하고 그를 통해 생산된 생산물을 적극적인 상업 활동을 통해 부를 축적해야 한다고 왕에게 간언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당시 조선은 민간영역에서 점점 발전하기 시작한 상공업의 발전을 억압하는 정책을 펼쳤다. 또한, 이지함이 주장한 바다를 이용한 무역과 상거래 진행에도 소극적이었다. 이런 조선의 상공업 억제 정책은 계속됐고 이는 조선의 산업화를 더디게 하고 변화하는 세계 질서에 뒤처지게 하는 원인이 됐다. 이지함의 주장은 그 시대를 한참 앞서간 주장이었다. 

이런 그의 사상과 상업에 직접 종사하는 등 실천가로서의 삶은 백성들 사이에도 크게 알려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그에 대한 많은 야사들을 만들었다. 야사에서 이지함은 손수 상업에 종사에 수 년 내 막대한 쌀을 축적해 이를 백성들에게 나눠 주고 홀연히 사라졌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바다 한가운데 무인도에 들어가 박을 심어 바가지를 만들어 막대한 수익을 만들어냈다는 일화도 있다. 야사에서 이지함은 바다를 자유자재로 오가는 도인으로 묘사된다. 한 편에서는 무조건적이 구휼만 하지 않고 백성들이 더 잘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오늘날의 컨설턴트의 모습도 나타난다. 

이런 이지함의 이야기는 그의 사후 백성들 사이에 퍼지고 퍼져 이지함의 존재는 특별하고 여겨졌을 가능성이 크다. 이런 이지함의 애민정신과 실천력은 앞서 언급한 산타클로스의 원형인 성 니콜라우스와 너무 닮아있다. 조선 시대 이지함은 힘겨운 삶을 사는 백성들에게는 구원자 같은 존재였다. 성리학적 관념론에 빠져 백성들의 삶과 동떨어진 정치를 했던 사대부 양반과는 크게 비교되는 이지함이었다. 

그의 애민정신과 삶은 조선왕조 실록에서 명확하게 요약되어 있다. "백성을 다스림에 있어서는 돌보는 정성을 다했으며, 맑은 마음에 욕심이 적고 뛰어난 식견을 가졌다." 

그의 사상은 훗날 조선 후기 상공업 진흥을 주창한 중상주의 실학과 연결된다. 조선 후기 실학은 성리학의 한계를 극복하고 보다 현실의 삶을 발전시키고 나라를 부강하게 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 실학의 주류 정치에서 배척되고 실질적으로 구현되지 못했지만, 변화하는 조선을 상징하는 사상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지함은 수백 년 전 실학자들과 같은 주장을 한 시대를 앞서간 인물이었다. 

조선 후기 유명한 실학자였던 박지원의 유명한 소설인 허생전의 주인공 허생은 이지함을 모티브로 한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이지함은 실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또한, 기인으로서의 삶은 토정비결의 저자로 그가 자리하는 이유가 됐다. 토정비결은 그의 사후 한참을 지나 만들어진 도참서로 이지함이 저술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가 유고집에서도 토정비결과 관련한 내용은 없다. 일각에서는 그가 남몰래 저술한 토정비결이 긴 세월이 지나 알려졌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지만, 가설에 불과하다.

 

 

박지원의 열하일기

 



토정비결은 백성들 사이에서 널리 알려진 이지함이라는 인물의 인지도를 이용했을 수도 있다. 이지함이 역학 등 다양한 학문에 능통했었다는 점과 그가 초야에 묻혀 지낼 때 처가가 사화에 연루되어 큰 화를 입을 것으로 예견했다는 일화 등이 더해져 백성들에게 이를 믿게 되었을 수도 있다. 

토정비결의 저자이든 아니든 이지함은 성리학적 세계관이 지배하는 조선의 변화를 꾀하고 백성들의 삶을 너 나아지게 하려 했던 인물이었고 선각자였다. 그의 말대로 조선이 변화했다면 조선은 나라의 발전을 역행하게 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참상을 피하고 부강한 나라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당연히 백성들의 삶은 한층 더 윤택해질 수 있었다.

역사에 만약은 부질없지만, 이지함과 이후 조선의 실학자들과 같이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인지하고 이를 바꿔보려는 노력이 더 힘을 얻었다면 어떠했을까 하는 아쉬움은 조선의 역사를 살피면 항상 남는다.

분명한 건 이지함의 사상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큰 교훈이 된다는 점이다. 이지함의 주장대로 나라가 국민들의 삶을 잘 보살피고 인재들이 마음껏 자신의 주장을 펼칠 수 있고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방법론들이 잘 실현된다면 이보다 좋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세상이 된다면 1년에 한 번 산타클로스를 기다릴 것 없이 모두 행복한 세상이 만들어질 수 있다. 


사진 : 픽사베이,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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