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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흐름에 따라 문화와 예술도 변해왔다. 미술과 음악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에 따라 각 시대를 대표하는 예술의 중요한 흐름, 사조가 등장하기도 했다. 그 예술 사조들 중 당대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대중들의 지지를 얻은 것도 있지만, 그때는 인정받지 못하다 후세에 재조명되고 그 가치를 인정받은 사조도 있다. 



그 사조 중 대표적인 사조가 인상주의다. 인상주의는 뚜렷하고 명확한 색채를 강조하는 기조의 회화 기법보다 색채와 색감, 질감에 관심을 두고 시시각각 변화하는 빛과 색채의 변화를 순간 포착해 표현하려 했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매 순간 달라질 수 있는 현상과 사물들을 가능한 사실적으로 그러내려 애썼다. 이에 그들의 작품 소재는 고전과 종교가 아닌 현장, 일상의 모습들이었다. 그들은 작업실을 나와 외부에서 작업했다.



이런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은 당대에는 상당한 비판에 직면했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대중들의 관심을 받고 호감을 얻었다.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은 미술 경매시장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고 매우 높은 가격에 경매가 이루어지고 있기도 하다. 우리나라 미술 애호가들 사이에도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은 높은 평가를 받고 있고 대중들이 알고 있는 화가들 중 상당수는 인상주의 화가다. 

 

 

모네

 

 

모네의 풍경

 

그 인상주의 화가 중 대표적 인물이 클로드 모네다.

 

모네는 1840년 프랑스 파리에서 상인의 아들로 태오나 유년기를 인근 항구 도시 르아브르에서 보냈다. 그곳에서 미술 공부를 한 모네는 1859년 파리로 이동해 여러 화가들과 교류했고 자신만의 화풍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특히, 강렬한 터치와 색채감을 표현과 사회적 논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파격적인 작품을 그려내는 화가 마네의 영향은 모네의 화풍을 점점 주류와 다른 방향으로 이끌었다. 

 

 

청년 모네의 작품, 기존의 뚜렷하고 명확한 색감의 기준 풍경화와 다른 모습이다. 



청년 모네의 삶의 순탄하지 않았다. 1860년 20살 나이에 모네는 군에 징집되어 아프리카 알제리에서 복무했고 장티푸스에 걸려 제대했다. 파리로 돌아온 모네는 그곳에서 뜻을 함께 하는 지인들과 교류하며 미술을 공부했고 자신의 화풍을 본격적으로 만들어갔다. 주류 회화 기법과 다른 자신만의 기법을 만들어간다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모네는 자신의 미술 세계를 만들어가는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연인이자 작품의 뮤즈였던 카미유,

 

1865년 모네는 모델이었던 카미유를 만났다. 첫눈에 반한 두 사람은 연이 되고 결혼을 약속하는 사이가 됐다. 1866년 카이유를 모델로 한 작품 '초록 드레스를 입은 여인' 은 미술계에 모네의 존재를 알리는 작품이었다. 하지만 모네와 카미뉴의 관계는 모네 부모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카미유가  가난한 집안 출신이라는 이유였다. 모네 부모는 이후 모네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끊었다. 



모네와 카미유는 첫 아들을 낳고 1870년, 마침내 결혼식을 할 수 있었지만, 모네 부모님의 축복을 받지 못했다. 두 연인은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경제적 어려움은 피할 수 없었다. 그림을 팔아 생계를 유지해야 했지만, 아직 무명에 가까웠던 모네로서는 당장의 끼니를 걱정해야 했다. 이에 모네는 1876년 카미뉴를 모델 삼아 당시 유럽 예술에 있어 중요한 소재였던 일본풍 가득한 그림인 '기모노를 입은 카미유'를 그리기도 했다. 이 작품은 자신의 화풍을 구현하기보다는 대중들의 취향을 고려한 상업적 작품이었다. 



점점 모네는 화가로서 그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지만, 카미유는 깊은 병이 들었고 1879년 32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모네는 큰 절망에 빠졌다. 모네는 깊은 슬픔 속에서도 임종한 카미유를 화폭에 담았다. 영원토록 카이뉴와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담긴 그림이었다. 

 

 

역동적 도시 파리 



모네에게 파리는 결코 아름다운 추억만 남긴 도시는 아니었다. 그곳에서 연인 카미유를 만나기도 했지만, 그의 작품에 파리 미술계는 냉정했다. 하지만 산업 혁명 이후 산업화와 도시화가 급격히 진행되는 유럽에서 파리는 가장 먼저 변화하는 도시였다. 그 역동성은 모네에게 예술적 영감을 주었다. 



1870년 모네는 프랑스와 프로이센이 대결한 보불 전쟁 당시 징집을 피해 가족과 함께 런던으로 이주한 경험이 있다. 그곳에서 모네는 영국의 대표적 화가 터너의 작품을 접한다. 터너는 강렬한 빛의 대비와 색채, 배경과 인물 사이 경계가 흐린 마치 추상화를 보는 듯한 작품세계를 보였다. 그의 화풍은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모네 역시 터너의 작품을 통해 이상주의 화가로서의 기술적 진보를 이룰 수 있었다. 



모네의 파리를 그린 그림은 사람들은 검은 점으로 표현하고 경계가 명확하지 않은 모네만의 화풍이 그대로 보이고 있다. 하지만 도시에서의 삶에 염증을 느낀 모네는 1879년 만국박람회가 열린 파리의 모습을 그린 '몽토르게이 거리' 작품을 끝으로 파리에서의 생활을 정리했다. 

 

 

인상주의의 시작을 알린 모네의 작품 '인상, 해돋이'


1871년 영국에서 귀국한 모네는 더욱더 인상주의 화가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히 했다. 그는 자신과 무명화가들과 예술가 들과 예술가 협회를 만들고 상호 교류를 활발히 했다. 이들은 주류 화가들이 인정받고 작품을 판매할 수 있는 살롱전을 대신해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모아 전시하는 전시회를 개최했다. 


1874년 제1회 인상파 전시회에서 '해돋이'라는 작품을 출품했다. 이 작품은 평단의 큰 비판을 받았다. 이 작품은 사물 간 경계가 명확하지 않고 수평선도 명확하지 않다. 햇살이 비치는 바다의 모습도 보통의 일출과는 크게 다르다. 인상주의의 큰 특징인 시시각각 변화하는 빛의 인상을 그렸다 할 수 있다. 



이 작품에 대해 한 평론가들은 '인상, 해돋이'라는 작품에 조롱 섞인 평가를 쏟아냈다. 그 과정에서 등장한 '인상'이라는 말은 인상주의 화가들은 대표하는 단어가 됐다. 이렇게 인상주의는 부정적 평가 속에 철저한 비주류 사조로 등장했다. 

 

 

생 라자르 기차역 연작, 순간 피어나는 증기기관차의 연기까지 세세히 그려낸 작품

 

 

포플러 연작, 순간순간 비치는 빛에 따라 달라지는 가로수 나무의 모습들

 

 

루앙 대성당 연작, 같은 건물 다른 느낌

 

 

국회의사당 연작, 빛이 흘러가는 듯한 모습 

 

 

건초더미 연작,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건초더미 


모네는 1883년 파리 근교의 작은 마을 지베르니에서 정착했고 192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그는 그곳에 집을 장만하고 넓은 정원을 가꾸고 작품의 중요한 소재로 삼았다. 한 편으로 순간의 빛을 담으려 하는 인상주의 화가답게 하나의 장면 장면들을 담아내는 연작들을 그렸다. 



그의 연작들은 인상주의 화가로서 자신의 입지를 분명히 해주고 있다. 

 

 

양산을 쓴 여인 

사람의 얼굴조차 희미하게 처리하며 빛에 따라 달라지는 인상을 담으려 했다. 마치 바람에 빛이 움직이는 듯한 모습이다.

 

 

모네를 특징하는 '수련' 연작

 

모네는 지베르니에 살면서 그곳을 중심으로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특히, 지금은 프랑스의 중요한 여행지와 관광지가 된 그의 자택과 정원은 중요한 작품의 소재였다. 특히, 정원 한편의 연못 그리고 수련은 수백 점의 작품으로 연결됐다. 



모네의 수련은 순간순간 빛에 흔들리는 듯 보인다. 모네는 생의 말련에 백내장으로 고통받았고 시력을 잃어갔다. 볼 수 없다는 건 화가에게 치명적인 일이었다. 모네는 희미하게 눈에 들어오는 빛의 움직임을 캔버스에 담고 또 담았다. 그의 수련은 작품마다 다르게 묘사됐다. 수백 점의 모네 수련은 모두 달랐고 그 꽃의 빛도 다르게 보인다. 



모네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작품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제1차 세계대전 시기에는 프랑스 대통령의 부탁을 받고 전쟁에 고통받는 국민들을 위한 대작을 그리기도 했다. 그는 인상주의 화가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인상주의를 벗어난 작품 활동을 하는 와중에서 인상주의 화풍을 지켜 나갔다. 그는 인상주의를 열고 지키고 완성했다. 



그리고 그는 이제 프랑스를 대표하는 화가가 됐고 그의 작품은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고 그의 대표적인 미술 경매시장에서 천억 원 이상을 호가하는 상황이다. 모네와 함께 인상주의 화가들 작품 역시 사후 그 가치를 더 크게 인정받고 있다. 



인상주의는 어쩌면 하루하루가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와 어울리는 미술사조였다. 순간순간의 빛을 담아 가려는 노력은 시대의 변화를 담는 일이기도 했다. 당시 대중들에게는 쉽게 이해될 수 없었지만, 세월이 흘러 후세 사람들에게 그들의 시도는 더 참신하게 다가왔고 더 인정을 받았다. 인상주의를 토대로 미술 사조는 더 다양화되고 초현실주의 등 현대 미술로 발전했다. 그 점에서 모네는 시대를 앞서가는 진보적 화가였다 할 수 있다. 




사진,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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