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는 물론이고 서양의 문학사에서 가장 위대한 소설가로 기억되고 있는 빅토르 위고는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특히, 1831년 발표된 '파리의 노트르담'과 1862년에 발표된 소설 ' 레미제라블'은 지금도 여러 나라에 번역되어 읽히는 대표적인 고전 작품이고 영화나 뮤지컬, 드라마의 소재가 됐고 되고 있다. 뮤지컬로서 두 작품은 항상 많은 관객이 들어오는 등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이 중 '레미제라블'은 프랑스는 물론이고 서양사의 큰 전환점이 된 프랑스 대혁명의 시기의 사회상과 그 속에서 각개 각층의 대변하는 인물의 삶 속에서 당시 프랑스의 시대상과 각종 모습들을 담고 있다. 무려 65만개가 넘는 단어들도 이루어진 방대한 서사와 세밀한 묘사가 압권이다. 이에 레미제라블은 역사상 그 길이가 긴 소설로서 유명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번역본은 상당부분 편집이 이루어지고 요약된 내용이다.
'레미제라블'의 원뜻은 '불쌍한 사람들'이다. 그 안에는 당시 산업혁명이 진행되고 빠르게 사회가 발전하는 과정에서도 궁핍하고 비참한 삶을 살아가는 일반 대중들 민중들의 삶이 들어가 있다.
1789년 일어난 프랑스대혁명은 소수의 왕족과 귀족들이 국가의 권력과 부를 독점하는 극단적인 빈부격차와 집권층의 부정부패와 무능, 폭정에 저항한 시민혁명이었다. 자유, 평등, 박애의 3가지 가치를 앞세운 이 혁명은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 되는 민주주의 서구 민주주의 발전이 시작점이었다.
하지만 혁명의 정신은 시작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다. 혁명은 통해 절대왕정을 타도하고 공화국이 수립되긴 했지만, 정치는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등장한 자본가 계급 부르주아와 지식인들이 주도했다. 국민들이 주인이 된 공화국이 아니었다. 부르주아들은 새로운 기득권층이 됐다. 권력의 이동만 이루어졌을 뿐 국민들의 삶은 나아지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사회 구조적인 빈부격차 문제 해소와 참정권 확대 등 국민들의 정치 참여에 소극적이었다.
혁명 초기 정권을 잡은 강경파들은 공포정치를 통해 반대파 숙청에만 매달리고 민생에 있어서는 무능했다. 더 나은 세상을 원했던 프랑스 국민들의 정권에 대한 불만이 커졌다. 이런 프랑스 국민들에게 나폴레옹이라는 영웅이 나타났다. 그는 혁명군을 이끄는 장군으로 구체제 복귀를 노리는 왕당파와의 전쟁뿐만 아니라 프랑스 공화국을 위협하는 외국과의 전쟁에서 연전연승하며 프랑스를 유럽의 강대국으로 올라서게 했다.
프랑스 국민들은 나폴레옹의 프랑스 혁명정신을 구현할 수 있는 인물로 큰 기대를 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를 넘어 유럽 전역에 프랑스혁명 정신을 퍼뜨리는 메신저였다. 이에 유럽 각국의 지식인들 민주주의와 공화정을 지지하는 지식인들과 문화, 예술가들도 나폴레옹에게 열광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점점 그 권력을 사유화하고 독재의 길을 걸었다. 나폴레옹은 그에 대한 국민적 지지를 민주주의의 발전 동력으로 활용하기 보다 자신의 절대 권력 강화에 활용했다. 급기야 나폴레옹은 친위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데 이어 1802년 종신 통령직에 올랐고 1804년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이로서 프랑스 대혁명으로 만들어진 프랑스의 제1공화국이 무너지고 새로운 재정시대가 열렸다. 이는 그를 지지하던 많은 이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독일의 대표적 작곡가 베토벤은 그에게 헌정하려던 교향곡 3번의 이름에서 나폴레옹을 지우고 영웅으로 그 이름을 변경했다는 일화도 전한다.
수많은 이들의 희생과 피로 만들어낸 공화정이 사라지는 상황에도 많은 프랑스 국민들은 영웅 나폴레옹이 부강한 프랑스를 만들고 그들의 삶을 나아지게 할 것으로 기대했다. 나폴레옹은 중요한 업적인 민법전을 만들고 프랑스 사회 각 부분에서 성과를 내기도 했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절대 권력은 프랑스 사회의 근본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그 역시 거듭된 대외 원정 실패와 거듭된 패전으로 몰락을 길을 걸었고 황제 자리에서 내려왔다.
이후 프랑스는 혁명으로 물러났던 부르봉 왕조가 부활하는 등 왕정이 복구되는 등 반동의 정치가 있었다. 왕정은 혁명으로 변화한 사회를 다시 과거로 되돌리려 했다. 이와 동시에 언론, 출판 등 각종 자유를 억압하기 시작했다. 이에 반대하는 신흥 정치세력인 부르주아 세력이 반발하면서 정치 혼란이 이어졌다. 정치, 사회의 혼란속에 국민들의 삶은 더 악화됐다.
레미제라블의 주인공 장발장이 이런 혼란스러운 프랑스 혁명기 청년기를 보냈다. 그는 가난한 민중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아무리 일해도 나아지지 않는 삶, 그가 돌봐야 하는 많은 조카들, 그런 조카들의 굶주림은 해결하지 못하는 현실에 장발장을 좌절했다. 결국, 그는 조카들을 위해 빵을 훔치게 되고 그로 인해 죄를 짓고 감옥에 가치는 신세가 됐다. 가족들이 걱정돼 탈옥을 거듭하던 그의 형량은 10년을 넘어 19년이 됐고는 그는 청년기를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법은 가난한 이들에게 가혹했고 자비는 없었다.
장발장은 전과자의 낙인이 찍힌 채 사회로 나왔다. 그런 전과자에서 사회는 냉혹하기만 했다. 이런 사회에 장발장은 원망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는 장발장 마음 속에 남은 선의마저 사라지게 했다. 장발장은 그에게 호의를 배푼 한 성당의 물건을 훔치게 된다. 이로 인해 장발장은 다시 투옥될 위기에 몰렸지만, 성당 주교의 선의로 위기를 모면했다. 한 주교의 선한 마음이 장발장을 변화시켰다.
이후 회개한 장발장은 이름을 개명하고 어느 도시에서 성공한 사업가로 시장으로 성공가도를 걷기 시작했다. 긴 고통의 시간을 이겨낸 그에게 하늘은 행복의 시간을 허락한 것으로 보였다. 장발장은 프랑스 혁명기에 새로운 지배계층으로 떠오른 부르주아가 됐다. 그 시기 장발장에서 과거 궁핍하고 가난했던 과거는 기억에서 사라져 갔다.
하지만 그의 행복은 오래갈 수 없었다. 그를 주시하는 자베르 형사의 감시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고 자신을 대신해 누명을 쓴 이의 재판 소식도 들렸다. 여기에 그가 사장으로 있던 공장의 직공이었던 팡틴과의 만남도 그의 마음 속 양심을 일깨웠다. 팡틴은 홀로 연인에서 버림받고 홀로 딸을 키우며 미혼모라는 사실을 숨기고 공장에서 일하며 살아가고 있다. 팡틴은 그의 딸 코제트를 시골의 한 여인숙 부부에게 맡기도 정기적으로 생활비를 보내는 중이었다.
팡틴은 일반 민중을 대표하는 인물이었고 그 보다 더 억압된 환경 속에서 살았던 여성들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당시 프랑스 여성들은 혁명에 적극 참여하며 혁명의 성공에 큰 역할을 했지만, 사회 개혁 과정에서 소외됐다. 투표권 확대에도 여성들을 베제됐다. 프랑스 여성들은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4년에 가서야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주어졌다. 프랑스 혁명은 민중들의 혁명이었지만, 그 민중 속에 여성은 없었다.
프랑스 혁명시기를 대표하는 그림인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은 당시 혁명의 분위기를 잘 묘사한 그림이었고 그 선두에 여신이 있다는 점이 매우 강렬하게 다가온다. 하지만 그 그림의 여신은 관념상의 존재이지 프랑스 혁명을 함께 했던 동지로서의 여성은 아니었다. 사회적 진보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도 여성들의 인권과 각종 권리는 제대로 보장되지 않았다. 여성은 노동자로서도 상대적으로 낮은 임금과 고된 노동에 시달렸고 사회적 약자로서 여러 불이익을 받아야 했다. 팡틴은 미혼모라는 사실을 숨기고 공장에서 일하다 그 사실이 밝혀지면서 해고를 당했고 직장을 얻지 못하고 삶의 가장 밑 바닥으로 추락하게 된다.
그 사이 그의 딸 코제트는 갖은 학대를 받으며 살아야 했다. 어머니 팡틴은 자신의 긴 머리를 잘라 팔고 매춘을 하면서까지 돈을 벌어 생활비를 보냈지만, 그마저도 끊어지며 그 집의 하인과도 같은 삶을 살아야 했다. 코제트는 산업혁명 이후 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하던 어린이들의 모습이었다. 어른들도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는 현실에서 어린이들은 공장에서 학대에 가까운 상황에서 일해야 했다.
팡틴과 코제트의 삶은 출구가 없는 암흑 속 삶, 혁명의 시기에도 오히려 악화되는 민중들의 삶이었다. 장발장은 팡틴의 임종을 지키며 그의 딸을 잘 키워주겠다는 약속을 한다. 또한, 자신 대신 누명을 쓴 사람의 재판장을 찾아 그의 누명을 벗기고 다시 투옥되는 처지가 된다. 감옥에서 탈출한 장발장은 팡틴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코제트를 여인숙의 악독한 주인 부부에게서 구출해 은둔에 가까운 생활을 했다. 코제트를 키우는 시기 장발장은 세상과는 거리를 둔 삶을 살았다. 코제트를 딸처럼 키우며 세상의 평지 풍파로 부터 자유로운 시기가 장방장의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였을지도 모른다.
장발장의 이 시기는 작가인 빅토르 위고가 프랑스 제2 공화국 대통령 되었다 공화정을 무너뜨리고 황제 자리에 오른 나폴레옹 3세에 반대해 투쟁하다 망명을 떠나 창작에 집중하던 시기를 상징할지 모른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 시기에도 빅토르 위고는 끊임없이 글로써 자신의 메시지를 전하고 작품을 통해 현실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었다. 몸은 프랑스를 떠났지만, 빅토르 위고는 마음은 프랑스에 남아 있었다.
장발장이 은둔하던 시기 프랑스 정세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나폴레옹의 실각이후 왕정이 다시 복구됐지만, 왕정의 반동 정치는 부르주아 계급과 민중들의 반발을 불러왔고 시민들이 파리 시내에서 바리케이트를 설치하고 강렬히 저항한 1830년 7월 혁명과 함께 혁명에 우호적인 왕족이었던 루이 필립의 즉위로 이어졌다.
이렇게 세워진 입헌 군주제 성격의 7월 왕조는 이전보다 자유주의적이고 전향적인 대내 정책을 펼쳤지만, 일반 민중들의 참정권 확대와 생활 개선 등의 조치에는 성과를 내지 못했다. 이는 또 다른 갈등의 요인이 됐다. 여기에 파리 일대에 창궐하던 콜레라로 많은 이들의 목숨을 앗아갔고 사회적 불안감이 극에 달했다.
보다 진보적인 사회를 원했던 젊은 대학생들과 민중들의 불만은 1832년 6월 봉기로 분출됐다. 파리시내에 바리케이크가 다시 설치되고 정부군과 혁명군의 대치가 있었다. 레미제라블은 이 시기를 중심으로 숨가쁘게 스토리를 전개한다.
장발장의 의붓딸 코제트의 연인인 청년 마리우스가 그 6월 봉기에 참여했고 그는 큰 부상을 당하고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한다. 장발장은 혁명군에 참여해 마리우스를 구출한다. 그 과정에서 장발장이 의식을 잃은 마리우스를 업고 파리의 지하 하수도를 헤매는 장면은 이 소설의 또 다른 백미다.
장발장은 애초 마리우스가 탐탁치 않았다. 자신의 모든 걸 바쳐 키워온 코제트를 잃을 수 있다는 위기감도 있었고 마리우스가 귀족 집안 출신으로 이들의 만남이 신분 차이로 인해 코제트를 불행하게 할 수 있다는 걱정도 있었다. 장발장 자신이 전과자이자 탈옥수로 쫓기는 몸이라는 점도 문제였다.
마리우스는 당시 고뇌하는 청년들의 모습이었다. 마리우스는 나폴레옹 시대 장교로 활약했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가 못마땅하다 못해 경멸하는 왕당파 외할아버지 사이에서 갈등하는 청년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실체를 모르다 우연히 알게 되고 공화주의자로 노선을 정하고 외할아버지와 결별한다. 그는 혁명군에 가담하면서도 사랑하는 연인 코제트와 사랑 사이에 큰 고뇌를 한다.
결국, 마리우스는 혁명 동지들과 죽음을 무릅쓴 항전을 하게 된다. 그의 모습은 사회적 지위를 불문하고 혁명정신의 구현을 위하 고군분투하던 지식인들과 청년들의 모습이었다. 빅토리 위고 역시 소설가 이전에 공화정을 적극 지지하는 사회 운동가로서의 면모를 생전 내내 유지하는 참여하는 지식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마리우스를 구해낸 장발장은 이후 마리우스에게 자신의 과거를 털어 놓고 사라진다. 그 과정에서 장발장은 그를 끈질기게 추적하던 자베르 형사와 조우한다. 장발장은 그 전 혁명군에 잡혀 처형될 위기에 있었던 자베르 형사를 살려주기도 했다. 자베르는 마리우스의 안위를 부탁하고 순순히 체포에 응하려 하는 장발장의 선한 마음에 감화된다. 그는 장발장을 체포하지 않고 보내준다.
자베르는 법을 근거로 정의를 구현하는 게 최고의 선이라는 신념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는 그의 직분에 충실했지만, 그가 추구하는 정의가 무조건 옳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갈등한다. 장발장의 희생과 헌신, 용서는 그가 지금껏 겪지 못했던 일이었다. 결국, 자베르는 인간적 고뇌 끝에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된다.
이것으로 자베르와 장발장과의 악연이 끝나는 것으로 보였지만, 장발장은 자베르 살해 누명을 쓰게 되고 전과자인 사실이 드러나면서 잠적하게 된다. 마리우스는 이런 장발장이 자신의 생명을 구한 은인임을 모르고 그를 외면하게 된다. 다시 외할아버지와 관계를 회복하고 회복되고 상류층 사회로 돌아온 그에게 장발장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인물이었다.
하지만 우연히 모든 사실을 알게 되고 코제트와 함께 장발장을 찾지만 장발장은 임종 직전에 있었다. 장발장은 그가 목숨을 바쳐 그 인연을 이어준 코제트와 마리우스가 지켜보는 가운데 세상을 떠났다. 작품상에는 7월 왕조가 자리잡은 1833년의 일이었다.
평생을 가난과 싸워야 했던 하층민, 자주성가한 사업가, 사회적 편견과 싸워야 했던 전과자, 목숨을 바쳐 소중한 이들을 구한 휴머니스트까지 다양한 삶을 산 장발장의 최후는 외롭지 않았다. 그의 임종을 지킨 코제트, 마리우스는 계층간의 화해, 새 시대 희망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장발장의 희생의 산물이기도 하다.
프랑스의 정치 상황은 1848월 2월, 7월 왕조를 무너뜨린 2월 혁명으로 다시 격변기를 맞이한다. 2월 혁명은 전과가 없는 21세 이상 남성들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폭넓은 참정권 허용과 식민지에서의 노예제 폐지, 사형제 폐지 등 보다 진보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프랑스 혁명 정신인 자유, 평등, 박애의 사상이 구현되는 모습이었다. 프랑스의 2월 혁명은 프랑스뿐만 아니라 전 유럽에 자유주의적 사상 확산을 가져왔고 구체제를 옹호하는 유럽의 반동체제를 무너뜨리는 계기가 된다.
2월 혁명으로 수립된 제2공화국 체제에서 나폴레옹의 조카 나폴레옹 3세가 국민들의 선거에 의해 대통령이 당선된다. 하지만, 그는 독재의 길을 걷는다. 그는 국민 투표를 통해 황제가 되고 2공화국은 막을 내린다. 나폴레옹 3세는 파리의 현대화를 이루고 각종 제도와 사회 시스템을 개선하는 등의 성과를 내고 대외 문제에 있어서도 프랑스가 강대국의 위상을 가지도록 하는 등 업적을 남겼지만, 집권 말기 거듭된 실정과 프로이센과의 전쟁 패배 등으로 권좌에서 밀려내 영국으로 망명을 떠나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나폴레옹 3세의 실각 이후 1870년 프랑스는 제3 공화국 시대를 열었다. 이후 프랑스에서 왕정을 완전히 폐지되고 공화정의 진정한 공화정의 시대가 열렸다. 빅토르 위고는 제3공화국이 열리고 나서야 19년의 망명생활을 끝내고 프랑스로 돌아올 수 있었다. 빅토르 위고는 이후 소설가이지 정치가로서 사상가로서 프랑스 공화정에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는 정치인으로 활약하기도 했고 행동하는 지성으로 대중들은 큰 지지를 받았다.
그는 사회진보에 대한 긍정을 유지했고 인간의 선한 본성을 신뢰했다. 레미제라블은 아픈 사회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다루고 있지만, 그 안에서 희망이라는 단어를 절대 놓치지 않았다. 실제 프랑스는 혁명과 반동의 치열한 투쟁을 거치며 사회가 발전했고 민중들에게는 희망의 단어인 자유, 평등, 박애의 정신이 뿌리를 내렸다.
프랑스의 국가 '라 마르세예즈'는 1792년 군가로 만들어진 이후 혁명시기 개사와 편곡을 더해지며 프랑스 혁명을 대표하는 곡에서 국가로 자리를 잡았다. 그 가사 내용의 과격함으로 인해 왕정 복고와 공화정이 교차하는 시기 국가로서의 지위를 잃기도 했지만, 제3공화국이 자리하면서 국가로서 그 위치를 확고히 하며 오늘날에 이르고있다.
제3공화국 시기에는 왕정복고를 기대하는 왕당파의 계속된 저항과 이념적 대립을 겪었지만, 19세기 후반 반 유대주의와 군국주의 왜곡된 애국주의에 근거한 국가의 인권유린 사건인 드레퓌시 사건을 겪으며 한 단계 더 발전했다. 그 사이 극심한 사회 갈등도 있었다. 하지만 억울하게 간첩 누명을 쓰고 투옥된 유대인 장교 드레퓌스에 대한 당대 프랑스 최고 문호인 에밀 졸라를 포함한 지식인들의 구명운동과 이에 동조한 진보 세력, 공화파 세력들의 노력으로 1906년 재심을 통해 무죄가 입증되는 과정을 통해 프랑스는 더 건강한 사회로 발전했다.
그 사건 이후 프랑스의 왕당파 세력을 몰락했고 왕당파에 우호적이었던 종교세력도 정치와의 연결이 차단됐다. 이들은 왕정복고를 위해 반 유대주의와 군국주의에 근거한 애국주의를 옹호하고 이를 선동하기도 했다. 드레퓌시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면서 그들 세력도 힘을 잃었다.
이후 프랑스의 공화정은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이후 100여년 흐른 이후의 일이다. 그만큼 프랑스 대혁명의 성공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고 수많은 이들의 희생이 뒤따랐다. 역사의 흐름을 되돌리는 수많은 시도도 있었다. 하지만, 각 개인의 인권을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고 사회적 차별을 해소하는 국가의 역할이 강조되는 진보적 변화의 흐름은 흐르는 강물처럼 멈춰지지 않았다.
빅토르 위고는 이런 흐름의 원천을 인간 마음속에 있는 선한 마음, 진보에 대한 낙관적인 마음, 더 나은 사회를 위한 국민 마음속 열망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레미제라블의 등장 인물이 이를 대표하고 있다. 그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거대한 국가 시대 흐름속에서 나약해 보이기도 하지만, 스스로의 힘으로 어려움을 극복하고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주변을 변화시키기도 했다. 갈등도 있었지만, 마지막에 그들은 화해하고 이해하며 하나가 된다.
지금의 우리 사회도 프랑스 혁명시기와 다르지 않다. 1960년 독재 권력을 몰아낸 4.19 혁명 이후 우리 사회는 독재와 반독재의 대결이 이어졌다. 1987년 6월 항쟁은 길었던 독재의 사실을 끊고 대통령 직선제와 민주주의 복원을 이뤄냈다. 몇 년전 있었던 광장의 촛불 혁명은 시대 흐름을 되돌리려는 권력을 법과 제도, 민주주의 시스템을 통해 몰락하도록 했다. 이로서 우리 민주주의는 한층 더 성숙하고 발전했다.
하지만 아직 국민이 진정한 주인이 되는 민주주의가 완성되었다고 하기는 어렵다. 아직도 구체제로의 복귀는 꿈꾸는 기득권의 힘은 강하고 광복 후 청산하지 못한 친일 세력의 존재도 무시할 수 없다. 과거와 같은 국민들을 직접적으로 억압하는 형태는 아니지만, 법과 제도의 이름으로 기득권을 공고히 하고 국민들을 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선동하는 시도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어쩌면 민주주의 혁명은 아직 진행형이라 할 수 있다. 레미제라블에서 보여지는 시대상은 지금 우리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조금은 암울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그 소설안에는 역사의 계속된 진보를 가능하게 하는 희망이라는 단어가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그 희망이 우리 민주주의에도 지속적으로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길 기대해 본다.
사진 : 픽사베이,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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