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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근. 현대사의 암흑기였던 일제 강점기는 해방이 된 지 70년이 넘어 80년이 다 되어가고 있지만, 여전히 그 아픈 흔적이 우리 삶 곳곳에 남아있다. 일제의 잔재는 우리 사회 곳곳에 존재하고 있고 그 시대 피해를 입은 이들의 상처도 완벽하게 치유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역사의 가해자인 일본의 진심 어린 사과와 반성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 일 간의 역사 인식에 대한 차이는 국가 간 갈등의 중요한 원인이 되고 있다. 

그리고 또 하나 일제 강점기 민족을 배신하고 자신의 영달을 위해 그들에게 협력한 친일 매국세력들의 청산은 여전히 우리 역사의 숙제로 남아있다. 해방 이후 반민특위를 통해 반민족 행위자들에 대한 처벌이 이루어지기도 했지만, 정치적 상황과 이어진 냉전시대의 도래, 6.25 한국 전쟁 등을 거치며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이후 일제에 협력했고 그 대가로 호의 호식했던 이들은 단죄되지 못했다.

이들 상당수는 대를 이어 사회 지도층에 자리했고 부와 명예를 대대손손 지켜가고 있다. 뒤늦게 친일 행위자들의 재산 환수 등 반민족 행위에 대한 단죄와 역사적 평가가 이루어지기도 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고 친일 세력의 입지는 여전히 공고하다.

그들에 대한 단죄가 사실상 어려워진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들의 반민족 행위에 대한 철저한 검증과 그들의 행위를 밝히고 알리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최소한 그들이 무슨 일을 했는지 그것이 왜 반민족 행위인지를 알리고 또 알리고 역사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 

이런 반민족 행위자 친일 매국노들을 대표적 인물은 단연 이완용이다. 이완용은 1905년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는 을사늑약과 1907년 군대 해산이 이루어진 한. 일 신 협약, 1909년 사법권 박탈이 이루어진 기유각서 등 일제의 대한제국 주권 찬탈 과정에서의 각종 조약과 협정을 주도했다.

 

 

 



이완용은 1910년 8월에는 대한제국 조정의 대표 대신으로 한일 강제병합 조약이 체결된 경술국치에 있어 중심적 역할을 했다. 그는 일련의 매국에 대한 대가로 일제 강점기 귀족의 지위와 함께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여타 친일 매국 행위자들이 많았음에도 이완용은 단연 매국노의 대표적 인물로 인식되고 있다. 그만큼 그는 독보적이었다. 

또한, 이완용 매국의 역사는 변절의 역사이기도 했다. 시대적 흐름에 따라 그는 권력의 최상층부에서 벗어나지 않았고 자신의 지위와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그에게는 민족과 나라보다는 자신의 영달이 더 소중했다. 이는 나라까지 팔아먹는 매국 행위로 이어졌다. 그는 당시 지식인, 사회 지도층의 부도덕함을 상징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이완용이 권력의 중심부에 자리하게 된 건 미국과의 수교가 중요한 계기가 됐다. 고종 즉위 후 조선의 실권자로 권력의 중심에 있었던 그의 아버지 흥선 대원군의 실각 이후 조선은 쇄국 정책을 버리고 개화정책으로 대외 정책의 변화를 시도했다. 1876년 조선은 일본과의 강화도 조약을 통해 개항을 했고 대외에 문호를 개방했다. 이런 조선을 상대로 서구 열강들은 수교를 위한 움직임을 빠르게 진행했다. 

조선은 그중 신흥 강국으로 떠오르고 있는 미국과의 수교에 큰 관심을 보였다. 조선은 신흥 공업국으로 큰 발전을 하고 있는 일본, 수백 년간 조선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청나라, 북쪽에서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러시아까지 주변 강대국들을 견제할 힘이 필요했다. 특히, 러시아의 위협은 조선 조정에 큰 고민이었다.

1880년 일본에 수신사로 파견되었다 돌아온 개화파 대표 인물 김홍집이 조정에 전한 조선책략에는 러시아의 위협에 대해 친중, 결일, 연미를 통해 견제할 것을 주장했다. 이 조선책략은 청나라 인사에 의해 작성되었고 그들의 시각이 강하게 반영되었지만, 조선의 대외 정책에 큰 영향을 줬다. 이후 청나라의 실력자 이홍장의 주선으로 조선은 1882년 5월 인천 제물포에서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에는 조선에 불리한 미국에 대한 최혜국 대우와 치외법권 등의 불평등한 내용이 다수 포함됐지만, 미국이 조선이 다른 나라로부터 압력을 받을 때 미국이 이를 주선한다는 조항을 넣었다. 강대국의 위협에 미국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됐다. 이후 조선은 서구 열강들과 잇따라 수교를 하고 국제 외교 무대에 본격적으로 들어섰다. 

미국과의 수교 이후 조선은 빠르게 개화정책을 강하게 추진했다. 조선 정부는 미국에 일종의 사절단인 보빙사를 파견해 미국의 문물을 보고 배우는 기회를 가졌다. 국내에서는 신 문물을 받아들이고 근대화를 추진하려는 노력이 이어졌다. 1886년 이를 위한 교육기관으로 정부 주도의 교육기관인 육영공원이 설립되기도 했다. 육영공원은 최초의 공립 근대교육 기관으로 근대화에 대한 강한 의지를 상징했다. 육영공원에는 양반 자제들과 젊은 관료들이 입학했다. 그들은 외국인 교수들과 함께 영어로 수업을 진행했다. 이전에는 없었던 서구식 근대 교육이었고 영어로 진행되는 수업은 일종의 파격이었다. 

 

 

 



이 육영공원에 이완용이 입학했다. 이는 그의 인생에서 큰 전환점이 됐다. 신문물과 문화를 배우고 익힐 수 있었고 미국이라는 나라를 알 수 있는 기회였다. 개화파로서 그의 정치적 노선이 분명해지는 계기가 됐다. 이 육영공원은 입학 대상이 양반들로 제한되었고 우리 실정에 맞지 않는 교육방식 등으로 국민들의 계몽과 개화사상의 확산이라는 본래 의도를 실현하지 못했고 재정난으로 1894년 폐교하긴 했지만, 의미 있는 시도였다. 

이렇게 서구 문물과 접한 이완용에게 외교관으로서 역량을 키울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이후 조선은 미국 수도 워싱턴에 공사관을 설치하고 미국에서의 외교 활동을 전개했다. 하지만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려 했던 청나라는 조선의 미국에 대한 독자적 외교활동을 방해하고 간섭했다. 그 과정에서 초대 주미 전권공사로 임명됐던 박정양이 뜻하지 않게 귀국해야 하는 일도 생겼다. 공석이 된 주미 전권공사 대리로 여러 인물들이 임명됐고 이완용도 그중 한 명이었다. 이완용은 1888년 12월 주미 전권공사 대리로 임명됐고 1890년까지 일했다.

긴 기간은 아니었지만, 이완용은 미국의 정관계 인사들과 교류할 수 있었고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더 깊이 있게 알 수 있었다. 이후 그는 대표적인 친미파 정치인, 개화파 정치인으로 자리했다. 대비 외교에 큰 관심을 보였던 고종은 대표적인 미국통인 그를 요직에 기용하며 큰 신뢰를 보냈다. 이로써 이완용은 권력의 상층부로 올라설 수 있었다. 또한 이완용은 서구 열강들의 공사관이 밀집한 정동 일대에 만들어진 외교관계자들의 모임인 정동구락부에 소속되어 여러 인사들과 교류했고 이는 그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는 일이 됐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완용은 고종의 측근으로 친미 정치인의 길을 걸었다. 이후 조선이 은 격변의 시간을 보내는 와중에도 이완용은 고종의 곁에 머물렀고 친미 인사로 남았다. 친일파로서의 길을 걷지 않았다. 그는 고종이 일본에 의해 신변의 위협을 받는 상황에서도 고종을 지키기도 했다. 

1894년 청. 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노골적으로 조선에 대한 주권 침탈을 자행했다. 고종은 일본과 일본 영향력 아래 있는 친일 내각에 포위되어 그 입지에 흔들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종과 명성왕후 민비는 조선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한 또 다른 강대국 러시아에 접근해 일본의 견제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은 명성왕후 민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고종은 사실상 궁에 연금되는 상황에 놓였다. 이완용은 친일 내각에 의해 쫓기는 상황에 됐고 미국 공사관으로 피신해 안전을 도모해야 했다. 

이완용은 연금된 고종을 구출하기 위해 군사를 조직해 탈출 작전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완용은 미국의 힘을 빌려 상황을 해결하려 했지만, 여의지 않았고 조선 문제에 적극적인 러시아와 접촉해 고종의 탈출을 감행했다. 1896년 2월 고종은 극적으로 궁을 탈출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향했다. 일종의 정치적 망명이었다. 아관파천이었다. 

이후 일본의 조선 조정에 대한 영향력이 줄었다. 조선의 내각은 친일파에서 친러파로 재편됐다. 이완용은 다시 위기에서 벗어나 권력의 정점에 자리했다. 1897년 고종이 황제에 권력을 집중하는 전제국가인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 자리에 오르면서 이완용의 정치적 입지는 한층 더 강화됐다. 그는 그 시기 독립협회 활동에도 관여했고 일본에 적대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표면적으로 그는 황제에 충성하는 충직한 대신이었다.

 

 

 



하지만 그의 영광은 그에 대한 각종 비리와 이권개입 등 횡령 등의 문제가 불거지면서 사라졌다. 그는 중앙 정계에서 축출되며 권력에서 멀어졌다. 그의 고종에 대한 충성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라기보다는 개인의 영달과 이익 추구의 측면이 더 강했다. 

이렇게 정치인 이완용은 점점 잊혀가는 듯 보였다. 하지만 조선의 대외 상황 변화가 이완용에게 기회가 됐다. 조선에 대한 주도권을 놓고 러시와의 일본의 대립이 본격화되고 그 속에서 조정은 친러파와 친일파로 대립했다. 강대국의 대립은 전쟁으로 이어졌다. 1904년 일본은 러시아에 대한 선전포고를 했고 러. 일전쟁은 발발했다. 

대한제국은 애초 이 전쟁에 대해 중립을 유지하려 했다. 고종 황제는 두 강대국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미국의 힘을 이용하려 했다. 고종은 친미파 인사인 이완용을 특진관으로 임명해 미국과의 외교 교섭을 맡기려 했다. 하지만 내각의 친일파 인사들에 의해 그의 정계 복귀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미 일본은 미국과의 밀약을 통해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았고 미국은 대한제국의 바람과 달리 대한제국의 문제에 있어 일본에 친화적인 입장이었다. 고종의 외교적 애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일본은 러. 일 전쟁 발발 이후 침략을 노골화했다. 1904년 한. 일 의정서를 통해 대한제국 내 군사기지 사용권을 얻었다. 대한제국의 중립 원칙도 무너졌다.

러. 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차 한. 일 협약을 통해 대한제국의 재정과 외교 부분에 일본이 지정한 고문을 파견토록 했다. 사실상 대한제국의 내정을 일본이 장악했다. 이제 일본의 대한제국에 대한 주권 침탈은 본격화됐고 이를 막을 이들도 없었다. 대한제국의 외교 노력도 소용없었다. 이미 서구 열강들 역시 이런 일본에 우호적이었다. 

이런 정세 변화에 이완용도 빠르게 대응했다. 그는 친일 인사들과 접촉했고 일본 정부와 강하게 연결됐다. 이완용은 친일 인사로 변신했다. 이완용은 변절을 넘어 적극적으로 친일 행각을 이어갔다. 그는 당시 일본의 유력 정치인 이토 히로부미의 신임을 얻었고 이를 바탕으로 내각에서도 중요한 요직에 기용됐다. 그는 이를 바탕으로 거침없는 매국 행위를 했다. 그의 변절은 순식간이었고 행동은 번개처럼 빨랐다.

1905년 11월 18일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내용의 을사늑약 체결 시 이완용은 을사 오적의 일원으로 조약 체결을 주도했다. 고종은 조약의 체결을 차일피일 미루며 대응했지만, 조약 체결을 위해 서울에 온 이토 히로부미는 군대를 동원해 궁궐을 포위하고 조정 대신들을 겁박하는 등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며 조약체결을 압박했다. 결국, 을사늑약은 이완용을 포함한 5명의 대신들을 주도하에 체결되고 말았다. 

이후 대한제국의 일본에 의한 강제병합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1907년 고종은 일본의 대한제국 침탈에 대한 실상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비밀리에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 네덜란드 헤이그에 특사를 파견하는 승부수를 던졌지만, 일본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헤이그 특사사건은 고종의 강제 퇴위로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이완용은 고종의 강제퇴위를 주도했다. 이후 일본의 대한제국의 강제병합을 위한 각종 조약 체결을 이끌었다. 그는 더는 대한제국의 대신이 아닌 일본의 대신이었다.

이완용은 1909년 그의 든든한 정치적 후원자인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 의사에 의해 척살되고 그 자신도 이재명 의사에 의해 피습을 당해 몇 군데를 칼로 찔리는 중상을 입었지만, 기적적으로 생환했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흉부외과 수술을 받는 등 당시로는 최고의 의학적 진료를 받았다. 결과적으로 적극적인 친일행위가 그를 죽음의 문턱에서 벗어나게 하는 일이 생겼다. 

 

 

 



일제 강점기 이완용은 막대한 재산을 축적하고 우리나라 최고 부자 반열에 올랐다. 그는 일제에 의해 기사 작위를 받고 귀족이 됐다. 친일 매국의 대가는 너무 달콤했다. 그의 친일행각은 인생 말련에도 이어졌다. 그는 1919년 3.1운동 당시 3.1 운동에 대한 경고문을 신문에 발표하기도 했다. 그에게 더는 민족이 없었다. 

1926년 이완용은 세상을 떠났다. 개인적으로 권력의 중심에서 부귀영화를 누린 삶이었다. 그의 장례는 일제에 의해 그 누구보다 화려하게 치러졌다. 그의 부는 자손들에게 전해졌다. 

하지만 이완용에게는 최고의 매국노라는 역사의 준엄한 심판이 내려졌다. 그는 무수히 많은 친일 인사들 중 가장 주목을 받는 인물이 됐고 지금도 친일파의 대명사다. 역사에서 이완용은 최고의 악인이다. 

이완용이 살아있다면 그는 이렇게 항명할지 모른다. 자신은  '시대 흐름과 대세를 따랐고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한 것뿐이었다.'라고, '내가 아니어도 친일 매국노는 나왔을 것이다. '라고 왜 나만 가장 큰 비난을 받아야 하는지 등등 그의 삶의 궤적을 보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 그는 자신을 위한 최선의 선택을 했다. 어쩌면 자신의 선택이 나라를 위한 길이었다는 판단을 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 선택은 우리 민족을 큰 불행 속으로 몰아넣었다. 이는 이완용을 포함한 다른 친일 매국노들에게도 적용된다. 

이제는 더는 이런 매국노들이 나와서는 안 된다. 그런 상황이 만들어지지 않도록 우리나라가 더 강하고 튼튼한 나라가 되는 게 우선이고 과거 매국 행위를 지속적으로 알리고 전해지도록 해야 한다. 그 점에서 이완용을 삶을 되돌아보는 일은 무의미한 일이 아니다. 이완용의 친일 매국 행위의 역사는 역사 예능프로그램 '벌거벗은 한국사'를 통해 살필 수 있다. 



사진 : 픽사베이,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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