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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민족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중요한 수단은 말과 그 말을 기록하는 문자, 글이다. 말과 글에는 그 민족의 역사와 문화, 전통이 모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만의 말과 글을 함께 가지고 있는 민족은 의외로 많지 않다. 말은 있지만, 문자가 없는 민족도 다수 존재한다. 그만큼 말과 글을 지키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타 민족과 나라에 의해 지배를 받은 역사가 있다면 더 어려운 일이다. 스스로 다른 문화에 동화되 그들의 말과 글을 잃어버리는 일도 있다. 

이 점에서 우리가 말하고 사용하는 한글은 너무나 소중한 유산이다.

1446년 우리 역사에서 최고 성군 중 한 명으로 칭송되는 조선 4대 임금 세종대왕이 그의 재위 기간 온 힘을 다해 만든 훈민정음의 반포로 한글의 역사는 시작된다. 이 훈민정음에는 말을 할 수 있지만, 그 말과 뜻을 문자로 적지 못하는 대다수 백성들의 안타까움을 덜어내고자 하는 세종대왕의 애민정신이 담겨 있다. 이후 백성들을 자신의 생각을 글로 적을 수 있게 됐고 지식의 전달과 상호 교류 소통이 한 결 원활해졌다. 이는 사회 전체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었다.

또한, 한글은 반포 당시 17개의 자음과 11개의 모음으로 이루어진 표음문자로 세상의 모든 소리를 기록할 수 있고 다양한 표현이 가능한 과학적인 글자이고 만물의 이치가 담긴 철학적인 글자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글자를 만든 이와 반포일, 그 원리를 밝히고 있는 글자로 세계사적으로도 가치가 큽니다. 

 

 

조선어 큰사전 원고 - 독립기념관

 



세종대왕은 중국과의 관계, 성리학적 사고가 지배하는 조선 사회에서 신하들의 극렬한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지만, 이를 물리치고 훈민정음의 반포와 함께 그 보급과 사용을 강력히 추진해 한글이 대중화되도록 했다. 세종대왕의 최대 업적 중 하나인 훈민정음은 이후 일반 백성들과 여성 등 신분과 성별을 초월해 사용됐다. 언문으로 비하되는 등 양반 등 집권층에서도 한들이 배척되기도 했지만, 더 큰 대중성을 바탕으로 우리글로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이 한글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그 존재가 사라질 위기에 놓이기도 했다. 일제는 1930년대 중일 전쟁을 일으키며 본격적인 군국주의 전쟁국가의 본색을 더 확실히 드러냈고 그들의 전쟁에 우리 민족을 동참토록 했다. 그 일환으로 일제는 내선일체, 황국신민화 등의 이유로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파괴하는 민족말살 정책을 본격화했다.

일제는 한일 강제 병합 이후 헌병경찰로 대표하는 무단 통치를 통해 우리 민족을 힘으로 억압했지만, 1919년 3.1 운동을 통해 우리 민중들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했다. 일제는 일종의 유화책인 문화통치를 통해 일부 언론, 출판의 자유, 각종 단체의 조직과 활동을 허용하기도 했다. 물론, 그 이면에는 헌병을 경찰로 대체한 다수의 경찰 조직을 통한 감시와 독립운동 탄압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경제적 수탈도 꾸준히 진행되고 있었다.

1930년대 일제는 전쟁의 원활한 수행을 위해 그들이 식민지 조선의 인적, 물적 수탈을 더 강화했고 더 강하게 이루 민족을 억눌렀다. 일제는 더 나아가 우리 민족의 정신까지 지배하려 했다. 그 과정에서 우리 역사와 문화, 예술의 상당 부분이 왜곡되고 폄하되기도 했다. 지금도 우리 민족의 부정적인 면을 부각하고 영광의 역사를 축소하는 일제 식민사관의 잔재가 남아있는 게 현실이다. 

우리 말과 글인 한글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 일 강제병합 이후 우리 한글은 국어가 아니었다. 일본어가 국어였고 학교 교육에서 한글은 조선어로 취급되고 교육의 비중도 낮았다. 그나마도 학교 교육의 기회가 유지되고 있던 한글은 1930년대 일제 민족말살 정책이 본격화되면서 학교 교육에서 사라지고 일상에서의 사용도 제한됐다. 일제는 더 나아가 우리의 이름까지 일본식으로 사용토록 하는 창씨개명을 강요했고 전국 곳곳의 일본 신사에 조선인들이 강제로 참배토록 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말 대한제국 시기부터 이어진 한글에 대한 연구도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뜻있는 한글 학자들의 노력은 지속됐다. 학자들은 조선어학회를 중심으로 모였다. 조선어학회는 1919년 3.1 운동 이후 1921년 창립된 조선어 연구회를 전신으로 하고 있다.

조선어학회의 연구는 한글의 대중화와 근대화, 표준화를 주창하고 한글 보급운동에 앞장선 선각자 주시경의 맥을 잇는 일이었다. 실제 조선어학회의 중요 인물 중 이윤재와 최현배는 주시경의 제자이기도 했다. 주시경은 1914년 39살의 젊은 나이에 안타깝게 요절했지만, 한글 연구에 큰 업적을 남겼다. 으뜸가는 글, 하나밖에 없는 글, 큰 글의 의미를 지닌 한글이라는 말도 주시경이 주창하여 자리를 잡았다. 주시경은 1907년 한글 연구기관인 국문 연구소를 설립해 운영하기도 했다. 주시경은 한글의 연구와 대중화가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는 일이라 여겼고 이는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의 한 방법이기도 했다. 

 

 

조선어학회 서적 - 우리 역사넷

 



이 점에서 조선어학회의 활동은 큰 위험을 안고 있었다. 당연히 일제는 조선어학회의 활동의 주시하고 감시하고 있었다. 이에 조선어학회는 그들의 순수 학술 단체임을 강조하고 일제의 정치색이 없음을 일부러 라도 보여야 했다. 조선어학회의 중심인물 중 한 명이었던 이극로는 해외 유학파 출신의 언어학자로 그런 이력이 일제의 의심을 덜 받을 수 있는 방편이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조선어 사전 편찬 작업이 한창이던 시점에 간사장, 우리 말고 사무총장 역할을 하며 조선어학회의 일을 총괄하는 역할을 했다. 

아슬아슬하게 은밀하게 조선어학회는 일제의 눈을 피해 한글 연구를 지속했고 성과를 냈다. 조선어학회의 궁극적 목적은 한글 사전, 조선어 사전의 편찬이었다. 이를 통해 한글의 표준을 만들고자 했다. 그전 작업으로 조선어학회는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제정했다.

전국 각지의 방언들을 회원과 그들을 따르는 학생들의 일명 '시골어 캐기' 작업을 통해 다 연간 수집 연구해 표준어를 정하는 작업도 했다. 또한, 각종 외래어의 표기법도 만들었다. 이를 집대성한 사전의 편찬도 활기를 띠었다. 또한, 그 한편에서는 우리 말과 글의 보급에도 힘쓰고 있었다. 

하지만 일제의 우리 민족에 대한 억압은 전쟁이 지속될수록 더 악랄하게 치 치밀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일제는 '조선 사상범 보호 관찰령'과 '치안유지법', '조선 사상범 예방 구금령' 등을 제정해 독립운동을 하는 단체와 개인을 언제든  체포 구금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고 이에 근거해 다수의 지식인들의 단체와 조직이 해체되고 그 회원들이 체포되어 고초를 겪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다수 지식인들과 문화, 예술계 인사들이 친일로 변절하는 일도 발생했다. 

조선어학회 역시 1936년 사전 편찬의 중요한 작업이었던 표준말 사정안을 완성하고 맞이한 한글날 기념식에서 독립운동가 안창호의 축사가 문제가 되면서 해체 위기에 몰렸다. 안창호는 그 축사에서 조선 민족은 조상에서 받은 모든 것을 잃고 조선어만 남았으므로 일치협력하여 이를 발달 보급하여 독립을 이루자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독립운동의 가능성만 보여도 체포 구금이 가능한 상황에서 일제 경찰에게는 큰 빌미가 됐다. 이에 한글날 기념식은 중단되고 다수의 회원들이 연행됐다. 

 

 

한글 캘리그래피

 



이미 회원들 중에는 일제의 감시망에 있는 인사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에 조선어학회는 이극로를 중심으로 일제에 협력하는 모습을 보이고 심지어 친일 단체인 국민정신 총동원조선연맹에 가입하기도 했다. 모두 그들의 마지막 목표인 한글 사전 편찬을 이루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일제의 감시를 이겨내고 속도를 내기 시작한 한글 사전 편찬 작업은 마침내 원고를 완성하고 인쇄 간행할 수 있는 단계까지 이르렀다. 조선어학회는 사전의 편찬과 간행을 조선총독부로부터 허가를 받았고 1942년 4월 인쇄 작업에 돌입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곳에서 변수가 발생했다. 함경도 함흥지역에서 일제 경찰은 고등학생들이 사용이 금지된 한글로 대화를 하는 학생들을 붙잡아 조사를 하던 중 학생들의 집을 강제 수색하는 과정에서 일기장을 압수했고 그 일기장에서 '국어를 사용하다 선생님에게 혼이 났다'라는 문구를 발견했다.

당시 국어는 일본어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일제 경찰은 그 일기장의 문구를 꼬투리 삼아 다수의 학생들을 강하게 취조했고 그 과정에서 조선어학회 사전 편찬 작업을 함께 하던 정태진이 그 학생들의 선생님으로 민족주의 의식을 고취시키는 교육을 했음을 밝혀냈다. 일제 경찰은 정태진으로부터 조선어학회가 민족주의 단체이고 독립운동을 하고 있다는 자백을 받아냈다. 이런 사건의 배경에서 대해서는 그 의견이 엇갈리기도 한다. 분명한 건 일제가 조선어학회를 주시하고 있었고 그들을 탄압할 구실을 계속 찾고 있었다는 점이다. 

일제의 긴 감시에도 조선어 사전 편찬이라는 목표를 위해 온 힘을 다했던 조선어학회의 노력이 순간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일제 경찰은 서울에 있던 조선어학회 회원들과 후원자 등 33명을 검거했다. 조선어학회 사건의 시작이었다. 이들은 혹독한 고문에 시달렸다. 일제 경찰은 이들을 치안유지법에 근거해 내란죄로 처벌하려 했다. 그에 필요한 자백을 얻어내기 위해 무리한 수사가 이어졌다. 이들 중 16명이 재판에 넘겨졌다. 

 

 

한글 캘리그래피

 


하지만 일제 경찰은 무려 2년여의 기간 검거자들을 재판에 넘기에 않고 감독에 가두 고문 등 가혹행위를 일삼는 비인권적인 행위를 했다. 그 과정에서 조선어학회 회원인 이윤재와 한징이 감옥에서 고문 등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결국, 기소된 16명 중 12명이 재판에 넘겨졌고 함흥 재판소에서 재판이 이루어졌다. 1945년 1월, 이 중 5명에게 실형이 내려졌다. 주도자로 지목된 이극로에게 징역 6년, 최현배 징역 4년, 이희승 징역 2년 6개월, 그 외 정인승과 정태진이 징역 2년이었다. 재판부는 '고유 언어는 민족의식을 양성하고, 조선어학회의 사전 편찬은 조선민족정신을 유하는 민족운동이라는 이유 등을 들어 내란죄를 인정했다. 불합리한 판결이었다. 

실형을 선고받은 인사들은 즉시 상고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들의 상고는 1945년 8월 13일 최종 기각됐다. 투옥된 인사들은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고 8월 17일 풀려날 수 있었다. 당시 이들은 홀로 거동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긴 수감생활 동안의 고통을 그대로 보여줬다. 

광복과 함께 조선어학회의 활동도 재개됐다. 이극로가 회장이 되고 조선어학회가 다시 조직됐고 중단됐던 한글 사건 편찬 작업도 재개됐다. 하지만 조선어학회 사건 이후 소실된 방대한 원고의 행망이 묘연했다. 조선어학회 회원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모아온 수십 년의 노력이 그 안에 담겨 있었고 사전 편찬의 기초가 되는 자료가 그 원고였다. 자칫 사전 편찬 작업이 원점으로 돌아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1945년 10월 서울역의 창고에서 조선어학회 사건 때 일제 경찰이 압수했던 원고들이 발견됐다. 그 원고는 사건의 증거로 서울과 재판이 열리는 함흥을 오가던 중 광복이 이루어지면서 서울역 창고에 방치됐다. 사건 조사와 재판이 길어지는 상황이 그 원고가 훼손되거나 파기되지 않고 남게 된 이유가 됐다. 

그 원고를 바탕으로 사전 편찬에 박차를 가한 조선어학회는 1947년 한글날에 조선말 큰 사건 제1권이 발간되면서 오랜 숙원을 이룰 수 있었다. 이후 조선어학회는 한글학회로 그 이름을 바꾸었고 1957년까지 총 6권의 한글 사건을 편찬하며 우리 한글을 표준을 만들었다. 일제 강점기, 이어진 6.25 한국전쟁의 어두운 역사를 이겨내 결과물이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어학회는 이념 대립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었다. 조선어학회를 이끌었던 이극로는 광복 후 극심하는 좌. 우 이념 대립의 상황 속에 월복을 선택했다. 이후 그는 북한에서 문화어로 불리는 한글 연구를 주도했다. 남한에서는 조선어학회의 중심인물 중 한 명이었던 최현배를 중심으로 하늘 연구를 지속 발전시키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렇게 그 길이 달랐지만, 조선어학회에 뿌리를 두는 인사들은 각각 한글의 발전을 주도했다. 

 

 

세종대왕 동상 - 픽사베이

 



한글은 그 창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많은 시련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기득권층인 양반들에 의해 천시됐고 그 영향은 조선 말기 대한제국 시기에도 이어졌다. 주시경 등 선각자들의 노력으로 한글이 바로 설 기회가 있었지만, 일제 강점기는 한글이 그 자리를 잃고 흔들리는 시기였다. 

하지만 조선어학회를 중심으로 한 지식인들의 노력으로 한글이 지켜지고 현대적인 한글의 원형을 만들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한글을 연구했다. 우리 말과 글이 우리 민족정신 그 자체임을 그들을 알고 있었다. 비록, 나라를 빼앗겼지만, 그들은 우리의 정신을 잃지 않으면 언젠가 독립이 찾아온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 믿음은 죽음마저 초월하게 했다. 

이렇게 지켜진 한글은 이제 한국을 넘어 전 세계의 언어로 발전하고 있다. 우리들이 사용하는 한글이 전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사전에 등재되는 등 그 입지가 넓어지고 있다. 우리 문화와 예술이 점점 세계에 알려지고 한류가 세게 문화 예술의 큰 흐름이 되면서 한글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우리말 우리글을 사용하는 게 어디에서도 부끄럽지 않고 당당할 수 있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한때 한글은 지나친 외래어의 남발, 일제 잔재 가득한 용어들, 무분별하게 만들어지는 신조와 속어 등으로 인해 혼란을 겪기도 했다. 그 과정을 거치면서 한글은 다양성을 수용하고 그 외연을 더 확장했다. 재기 넘치는 신조어들을 한글을 더 풍성하게 하고 있다. 

이런 한글의 발전에 있어 잊지 말아야 할 건 이 한글을 지키고 발전시키기 위해 수많은 이들의 희생과 노력이 있었다는 점이다.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 역시 당시 기득권층의 강력한 저항을 이겨내고 반포를 할 수 있었다. 한글에는 강한 투쟁의 역사가 함께 하고 있다. 즉, 한글은 거저 얻어진 우리 말과 글이 아니다.

이제 그들의 노력과 희생의 가치를 알고 한글을 한층 더 소중히 여기고 사용하는 건 우리의 몫이다. 



사진 : 픽사베이 / 독립기념관 외 ,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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