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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마지막 왕조였던 청나라는 그들의 전신인 후금 시절이었던 1627년 정묘호란과 청나라로 나라 이름을 바꾼 1636년 병자호란까지 두 차례 조선을 침략했다. 그 전쟁에서 조선은 청나라에 패했고 당시 임금인 인조는 청나라 황제에 항복의 예를 하는 치욕을 당했다.

이후 청나라는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의 패권을 장악했다. 조선은 오랑캐의 나라라고 멸시하던 청나라에 무릎을 꿇어야 했고 그들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됐다. 이후 청나라는 데 제국으로 발전했고 번영을 누리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인 흐를수록 지배계급의 부정부패와 전 근대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국가 운영은 서양이 두려워하는 대제국의 강성함에 균열을 발생하게 했다.

쇠락해 가던 청나라는 서구 열강들과 1840년부터 1842년까지 1차 아편 전쟁, 1856년부터 1860년까지 2차 아편 전쟁을 거치며 큰 패배를 당했고 수차례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면서 그들의 영토였던 연해주를 러시아에 빼앗기도 홍콩과 광저우 지역을 영국, 프랑스 등 서구 열강에 내주는 등 사실상의 반 식민지 상태로 접어들게 된다. 

이런 국가적 위기에도 청나라의 집권층은 서구 열강의 침략에 대응하고 나라를 다시 세울 수 있는 해법을 마련하지 못했다. 내부 권력 다툼으로 정치는 불안했고 집권층의 사치와 향락, 무능함은 청나라를 멸망의 길로 인도했다. 그리고 청나라의 멸망을 재촉하는 데 있어 중요한 원인은 제공한 인물 중 한 명이 1861년부터 세상을 떠나는 1908년까지 청나라의 권력을 사실상 장악한 서태후다. 

1836년 태어난 서태후는 17살의 나이에 청나라 황시의 궁녀로 들어가 당시 황제였던 함풍제의 후궁이 되고 아들을 낳게 되면서 세 번째 황후가 된다. 이후 함풍제가 세상을 떠나고 어린 나이의 아들이 황제가 되면서 서태후는 섭정으로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된다. 이후 서태후는 아들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후에도 권력을 놓지 않았고 조카를 황제로 등극시키며 섭정의 지위를 유지했다. 그리고 그 집권기는 47년간 이어진다. 조카 동치제가 세상을 떠나가 서태후에 의해 3살의 어린 나이로 황제로 세워진 푸이는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선통제가 된다. 

 

 

서태후 - 위키백과

 



서태후가 지금까지 중국 역사에서 큰 비난의 대상이 되는 건 비정상적인 장기 집권뿐만 아니라 상상을 초월한 사치와 향락, 국고 탕진, 정치 시스템 자체를 파괴한 권력욕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서태후는 무너져가는 청나라에 필요한 나라 개혁이나 부국강병책에 소극적이었고 권력을 지키는 데만 주력했다. 실제 서태후가 세상을 떠나고 얼마 안 가 청나라는 1911년 쑨원 등이 주도한 신해혁명에 의해 멸망하고 중국에는 중화민국이라는 공화국이 세워진다. 서태후와 함께 중국의 왕조시대도 막을 내린다. 

서태후의 사치와 향락은 역사의 기록에서 자세히 전해진다. 서태후는 엄청난 식탐으로 인해 한 끼 식사에 무려 128가지의 음식을 먹었다고 전해진다. 서태후의 한 끼 식사를 위한 비용은 당시 청나라 농민 1년 치 식량과 맞먹는 금액이었다. 그 음식의 종류는 매 식사마다 바뀌었고 식사 준비에만 최대 100여 명의 요리사가 동원됐다. 

여기에 수천 벌의 의복과 버선, 신발, 각종 진귀한 보석들로 치장하며 그에 필요한 막대한 비용이 소요됐다. 또한, 황실의 정원인 이화원 건립 등에 막대한 예산을 사용하면서 국고를 탕진했다. 절대 권력자 개인을 위해 소진된 나라 예산은 정작 필요한 곳에 예산을 쓸 수 없도록 했다.

단적인 예로 청나라는 아편 전쟁 등을 거치며 서구 열강들에 대항할 군사력 강화의 필요성을 절감했고 국방력 강화를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세계 최강 수준의 해군인 북양함대를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 함대를 유지 운영한 자금이 부족했다. 북양함대는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고 이는 1864년 청. 일 전쟁 당시 일본에 속절없이 패한 중요한 원인이 됐다. 집권층의 무능이 전쟁의 패배로 이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서태후 집권기 청나라는 국운이 향방이 바뀔 수 있는 중요한 시기였다. 아편전쟁 이후 본격화된 서구 열강의 침탈과 신흥 강국인 일본의 등장, 국경을 맞닿은 러시아의 위협이 있었다. 내부의 혼란도 극심했다. 고질적인 부정부패는 민생을 피폐하게 만들었고 반란이 끊이지 않게 했다. 사교 집단인 태평천국의 난은 1850년에서 1864년까지 청나라 전역을 휩쓸었고 수천만명의 사람들이 희생됐다. 서구 열강의 침략에 하나가 되어도 대응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청나라는 국가적 역량을 하나로 모을 수 없었다.

이런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봉건적 지배 체제를 탈피하고 근대화를 이루는 등의 사회 전반의 개혁이 필요했다. 이를 위한 정치 지도자의 리더십은 절대적 요소였다. 이를 위해 군사력 강화를 주 목적으로 하는 근대화 운동이 양무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한족 출신 관료들이 중심이 된 양무운동은 서양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나라를 강하게 만들자는 부국강병 운동이었다. 하지만 기존 모순 가득한 사회질서의 개혁에는 이르지 못했고 이는 개혁의 한계성을 명확히 했다. 결국, 양무운동은 청. 일 전쟁 패배로 인해 실패했다. 

 

 

자금성

 



이후 또 다른 청나라에서는 사회 전반의 개혁을 추진하는 변법자강 운동이 일어났다. 아편전쟁과 청일전쟁 패전 등을 겪으며 국력 약화를 절감한 청나라에서는 이 운동이 큰 공감을 얻었다. 집권층 역시 이에 긍정적이었다. 서태후 역시 초기 변법자강 운동을 지지했다. 캉유웨이 중심으로 시행된 변법자강 운동은 과거제도와 조세제도 개혁, 부패 관료 처단, 경제개혁 등의 내용이 포함된 무술변법의 시행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무술변법은 얼마 안가 좌초되고 말았다. 당시 서태후의 섭정체제에서 벗어나려 했던 서태후의 조카인 황제 광치제는 이를 통해 서태후의 간섭에서 벗어나 황제의 권한을 되찾으려 했고 이를 눈치챈 서태후는 오히려 군벌 등 반개혁 세력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켜 광치제를 자금성에 유폐하는 등 개혁파를 숙청했다. 이로 인해 자주적 개혁 시도인 변법자강운동은 좌초하고 말았다. 

이후 서태후의 권력욕은 더 강해졌다. 서태후는 광서제를 폐위하고 나이 어린 조카뻘의 새로운 황제를 세워 자신의 섭정체제를 공고히 하려 했다. 이 시도는 이미 청나라 내정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서구 열강의 반대로 실행되지 못했다. 광서제는 실권을 모두 잃었지만, 명목상의 황제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 서태후는 분개했다. 이는 외부 세력을 끌어들여 서구 열강의 간섭에서 벗어나려는 잘못된 시도로 이어졌다. 

1900년 중국에서는 무술 수련 집단인 의화단이라는 비밀결사 단체가 등장했다. 이들은 '부청멸양', '청나라를 도와 양인들을 물리치자'라는 구호를 앞세워 빠르게 민중들 사이에서 세력을 키워났다. 당시 청나라는 거듭된 전쟁의 패배로 서구 열강들과 심지어 한때 오랑캐로 취급했던 일본의 침탈이 본격화됐고 청나라 정부는 전쟁  패전으로 막대한 배상금을 부담해야 했다. 이는 국민들의 세금 부담을 가중했다 또한, 서구 열강들의 경제 침탈은 민생을 더 어렵게 했다. 당시 서구 열강에 대한 국민적 반감이 극에 달했다. 의화단의 주장은 큰 호응을 받았다. 

문제는 의화단의 형태가 초법적이고 폭력적이었다는 점이었다. 이들은 서양인들에게 무차별 폭력을 행사하고 살해를 했다. 교회를 습격해 기독교 신자들을 살해하고 심지어 기독교를 믿는 청나라인들도 살해 대상이 됐다. 이들의 행위는 매우 잔혹했고 야만적이었다. 심지어 외국 공사관 등의 습격으로 이어졌다.

이는 서구 열강들의 분노를 불렀다. 서태후의 청나라 조정은 이들을 진압하기 보다 이를 부추겨 서구 열강의 간섭에서 벗어나려는 수단으로 이용하려 했다. 하지만 자국민들이 생명과 재산에 위해를 가하고 사회를 혼란시키는 의화단은 존재는 국가적으로 큰 해악이었다. 의화단에 미온적인 청나라 조정의 태도는 급기야 서구 열강들의 군사적 개입을 불러왔다.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이탈리아, 프랑스, 미국, 영국, 러시아, 일본까지 8개국이 연합한 서구 열강의 군대가 의화단 진압을 위해 청나라에 진입했다. 이 군대는 청나라 수도 베이징을 점령했다. 이들은 의화단원 뿐만 아니라 그들에 동조한 청나라인, 심지어 사건과 무관한 청나라인들에게도 잔혹한 보복을 가했다. 자국민이 살해당한 데 대한 보복이었다. 여기에 더해 각지의 유적지에 방화를 하고 약탈을 자행하기도 했다. 이에 대응하는 의화단은 오합지졸의 군대였고 쉽게 제압당하고 외해 당했다. 

 

 

의화단 운동 당시 상황 그린 그림 - 위키백과

 



서태후는 전쟁 상황이 된 베이징을 광서제와 함께 벗어나 피난길에 올랐다. 정치 지도자의 부대는 베이징을 더 혼란 속으로 빠져들게 했다. 연합군에 의한 청나라 일반 국민들의 피해도 커졌다. 결국, 서태후는 자신의 자리 유지를 전제로 서구 열강들과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신축조약이라 불리는 이 조약으로 청나라에는 다수의 외국 군대가 주둔하게 됐고 서구 열강들은 이전보다 훨씬 많은 이권과 땅을 차지할 수 있었다. 또한, 청나라는 막대한 배상금을 부담해야 했다. 그 배상금은 청나라가 멸망한 이후에도 지급됐다. 자신의 권력을 위해 범죄집단이나 다름없는 세력을 끌어들인 대가는 청나라를 반식민지 상태로 만드는 일이었다. 

이런 거듭된 실정에도 서태후는 최고 권력자의 자리는 공고했다. 서태후는 서양 외교관들의 배우자들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서구 열강의 자신에 대한 부정적 시선을 피했고 왕실의 최고 어른이라는 권위를 십분 활용했다. 여전히 청나라에서 황실은 국민 절대다수의 지지를 얻고 있었고 나라 그 자체였다. 황제의 권위는 절대적이었고 그런 황제를 맘대로 움직일 수 있는 서태후를 흔들 세력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청나라의 다른 권력자들의 입장에서도 서태후를 앞세워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고 이권을 챙기는 게 오히려 더 나은 처세술일 수 있었다.

이에 서태후는 극도의 사치를 지속하며 최고 권력자로 군림했다. 그 사이 청나라는 빠르게 멸망의 길을 걷고 있었다.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이대로는 더 안된다는 여론이 팽배해졌고 기존 정치체제를 바꿀 혁명의 움직임도 점점 힘을 얻고 있었다. 하지만 청나라 조정은 자체적 개혁에 실패했고 서구 열강들에 의해 나라가 예속되는 상황은 해결하지 못했다. 

이제 시간은 19세를 넘어 20세기로 접어들었다. 서태후의 권력욕은 여전했다. 1908년 서태후는 연금 상태에 있어 광치제가 세상을 떠나자 3살 밖에 안된 부이를 새로운 황제로 올렸다. 세간에서는 서태후가 광치제를 독살하고 섭정으로서 권력을 연장하기 위해 또 다른 황제를 세웠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훗날 광치제의 시신을 부검한 결과 그의 몸에서는 다량의 비소, 독극물이 검출됐다. 이는 20살의 나이에 요절한 그전 황제 동치제의 죽음에 대한 의혹과 서태후의 관계도 의심할 수 있는 일이다. 

이렇게 기세 등등했던 서태후였지만, 그 역시 세월을 완전히 거스를 수 없었다. 부이를 황제 자리에 올린 후 며칠 뒤 서태후 역시 세상을 떠났다. 이질에 의한 병사였다. 서태후는 평소 기름지고 무절제한 식사를 했다. 노령의 몸이 더는 그런 식습관을 견디지 못했다. 사후 서태후는 초호화 장례와 함께 영면했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서태후는 최고 권력자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서태후는 죽음을 앞둔 마지막 유언으로 '나처럼 여인이 정사에 나서는 일이 없도록 하라'라는 말을 남겼다. 이는 자신의 악행과 실정에 대한 반성은 분명 아니었다. 자신일 누린 무한의 권력과 권세를 다은 누군가가 누리면 안 된다는 이기심을 생의 마지막 순간에도 버리지 못한 서태후였다.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 - 위키백과

 



서태후가 세상을 떠난 이후 청나라는 더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들었다. 절대 권력자의 죽음은 권력의 공백을 불러왔고 극심한 권력투쟁으로 이어졌다. 서태후의 권위 속에 그나마 유지되던 청나라의 결속력 와해됐다. 각지의 군벌들이 독자적 세력을 형성하며 중앙 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났다. 과거 중국 고대사에서 등장하는 춘추전국시대와 같은 상황이 발생했다. 서태후는 썩은 거목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그 거목마저 무너지자 청나라는 더는 버틸 힘이 없었다. 

결국, 서태후 사후 청나라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멸망하며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다. 이와 함께 서태후는 역사의 악인으로 기록되게 됐다. 서태후는 죽어서 편히 잠들지 못했다. 신해혁명 이후 중화민국이 세워졌지만, 사회 혼란은 여전했고 그 과정에서 다수의 유적과 유물이 도굴되고 약탈됐다. 각지의 황제들과 황족들의 무덤도 안전하지 않았다. 서태후의 무덤 역시 도굴되어 그 안에 부장품이 약탈됐고 그 시신도 크게 훼손되고 말았다. 

어떤 이들은 서태후가 전 근대적인 여성들에 대한 악습인 전족을 폐지하고 여성들의 교육과 인권 향상에 관심을 가지고 노력했다는 점과 근대화에 관심을 가지고 지원을 했음을 들어 긍정적 평가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47년간 사실상의 독재자로 군림하면서 나라 운영을 파행으로 이끌고 사치와 향락으로 국고를 탕진했던 점, 계속된 실정으로 나라를 약하게 만들고 서구 열강의 침략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한 점 결과적으로 청나라 멸망의 마지막 원인을 제공했다는 점은 서태후를 역사의 악인으로 평가하게 충분한 이유다. 특히, 황실에 대한 청나라 국민들의 지지와 충성심을 사적인 권력을 위해 악용했다는 점도 비판받아야 한다. 

이는 우리 역사에도 충분히 적용될 수 있다. 서구 열강과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되던 조선 말 대한제국 시기 권력자들과 집권세력은 그에 맞는 해결책을 내놓지 못했다. 외세의 침략에 맞선 건 일반 국민들이었다. 특히, 흥선대원군의 실각 이후 정권을 잡은 훗날 명성황후가 되는 민비를 중심으로 한 민씨 정권은 매관매직과 최악의 부정부패를 저질러 백성들의 지탄을 받았다. 정권의 실세라 할 수 있는 민비는 그런 정권의 행태를 바로잡지 못했고 오히려 자신이 세자를 위한 기도를 한다는 무속인에 의지했고 막대한 국고를 개인적인 용도로 탕진했다. 

이런 집권층의 부정부패와 무능은 개화 이후 근대화를 이루고 외세 침략을 막을 수 있는 나라를 만들 기회를 잃게 했다. 이는 백성들을 조정과 멀어지게 하게 하나 된 힘으로 외세에 대응할 수 있는 동력을 잃게 했다. 즉, 한 나라의 지도자의 중요성을 서태후 그리고 조선만의 상황 속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그 점에서 그런 권력자의 전횡과 잘못을 국민들의 의지로 막아낼 수 있는 민주주의 체제의 소중함도 느낄 수 있다. 다만, 그 전제는 강력한 권력의 힘과 권위를 무조건 추종하고 순응하지 않는 깨어 있는 국민들의 의지, 그 의지가 합쳐진 힘이라 할 수 있다. 



사진 : 위키백과/ 픽사베이,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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