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은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을 선포한 이후 공산당의 1당 독재체제가 공고하게 이어지고 있다. 이 중국식 사회주의는 정치 체제는 사회주의 경제는 자본주의가 양립하는 그들만의 시스템을 만들었다. 현재 중국은 미국과 쌍벽을 이루는 G2 국가로서의 위상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중국이 세력 확대는 세계 최 강대국인 미국과의 갈등을 더 키웠다. 현재 미국과 중국의 대립과 긴장관계는 전 세계 국가들에게는 큰 외부 변수가 되고 있다. 그만큼 중국은 세계 정치, 경제적으로 그 영향력이 매우 큰 나라다. 이런 중국이지만, 현대 중국의 발전사는 그리 길지 않았다.
19세기 후반, 20세기 초반 중국을 지배하던 마지막 왕조 청나라 말기 극심한 사회 혼란과 서구 열강들의 침탈로 중국은 반식민지 상태에 있었고 신해혁명으로 공화정이 시작됐지만, 각 지역의 군벌들이 득세하는 혼란이 이어졌다. 이후에는 일제의 침략을 받아 중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들었다.
중국은 일제의 전쟁에서 승리하며 제2차 세계대전 승전국의 지위를 얻었지만, 이어진 공산당과 장제스 국민당 정부와의 국. 공 내전을 거치며 다시 한번 변화를 맞이했다. 이 내전에서 공산당이 승리했고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는 타이완, 대만으로 쫓겨가는 신세가 됐다. 중국은 공산당 일당이 지배하는 사회주의 체제가 들어섰다.
중국 공산당 정권은 외국과의 교류를 철저히 통제하는 일명 죽의 장막을 쌓는 폐쇄적인 통치를 했다. 중국은 1970년대 후반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과감히 도입하는 개혁, 개방 정책을 추진하면서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했다. 세계 최대 인구 대국과 넓은 영토는 최대 규모의 시장이 됐고 엄청난 제조업의 생산력은 중국을 세계의 굴뚝으로 만들었다. 세계 경제에서 중국은 최대의 소비자로 최대의 생산자로 자리했다.
이런 중국 현대사에서 있어 꼭 언급해야 할 인물이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이다. 이들은 1927년 중국 공산당이 창당된 이후 공산당의 지도자였고 중국을 이끄는 권력자들이었다. 이들은 공산당이 중국 대륙을 차지하는 과정에서 동지로서 함께했고 지도부에 함께 자리했지만, 노선의 차이로 대립하는 정적이 되기도 했다.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이 중국을 통치하던 시기 수차례 숙청되는 등 정치적 위기를 겪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중국이 부강한 나라가 발전하는 데 있어서는 덩샤오핑의 리더십이 큰 역할을 했다.
마오쩌둥은 공산당의 창립멤버로 공산당이 중국 장제스 국민당 정부의 경쟁과 내전에서 승리하는 데 있어 공산당의 지도자로 큰 역할을 했다. 1930년대 공산당의 지도자가 된 마오쩌둥은 1949년 10월 1일 중국이 사회주의 국가인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한 시점부터 최고 권력자에 있었고 197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최고 권력자로 중국을 통치했다. 이런 이력 탓에 마오쩌둥은 지금도 중국에서는 국부로 추앙되고 있다.
하지만 마오쩌둥의 통치기는 명과 암이 교차하는 시기였다.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당은 창단 초기 그 세력이 크지 않았고 국민당 정부군의 공세에 존폐의 위기까지 몰리기도 했다. 마오쩌둥은 위기의 공산당을 이끌었다. 공산당은 특히, 그들이 통치하는 농촌지역에서 농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하는 강력한 토지 개혁을 시행해 농민들의 지지를 이끌었고 이런 농촌지역의 지지는 공산당이 국. 공 내전을 승리하는 데 있어 큰 힘이 됐다. 그럼에도 중국 공산당은 국민당 정부군의 공세에 밀려 긴 거리를 이동하며 버텨야 했다. 그들은 이를 대장정이라 했다.
중국 공산당에게 1937년 발발한 중. 일 전쟁은 새로운 전환점이 됐다. 외세의 침략에 중국에서는 국민당 정부와 공산당이 힘을 합쳐 대응해야 한다는 여론이 강하게 일어났고 이는 두 차례 국. 공 합작으로 이어졌다. 이를 통해 공산당은 항일 전쟁에 나서는 한편 그들의 세력을 키우고 확장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마침내 일제가 패망하고 중국에 평화가 찾아왔지만, 공산당과 국민당 정부의 내전이 이어졌다. 전력상 국민 정부는 월등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우세를 이어가지 못했다. 오랜 세월 이어진 부정부패와 무능은 국민당 정부로부터 민심을 떠나가게 했다. 결국,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은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를 타이완으로 밀어내고 중국을 통치하게 됐다. 이는 마오쩌둥 장기 집권의 시작이었다.
마오쩌둥은 평등의 가치를 바탕으로 한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다. 6.25 한국전쟁 참전을 통해 대내외적으로 자신의 위상을 높이고 권력을 더 강화한 마오쩌둥은 강력한 개혁을 추진했다. 토지개혁을 통해 토지를 농민들에 고루 분배했고 봉건적 구습을 타파하고 여성들의 인권을 증진했다. 국민들의 문맹 퇴치와 복지 증진을 위한 정책도 시행했다. 국민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는 일들이었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1950년 후반부터 자신의 절대 권력을 잘못된 방향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마오쩌둥은 농업생산력 증대와 공업화를 함께 이루기 위한 목적으로 대 약진 운동을 강력히 시행했다. 문제는 그 정책이 세심한 검토 없이 절대 권력자의 의지와 지시에 따라 졸속으로 시행됐다는 점이었다.
쌀 증산에 방해가 되다는 이유로 참새들을 대량으로 포획 박멸하는 운동을 하면서 오히려 해충들이 창궐하는 부작용이 일어나기도 했고 철강 생산을 늘리기 위해 농촌 마을 곳곳에 용광로를 설치하고 생활필수품들로 철강을 생산하는 사업도 시행됐다. 그렇게 생산한 철강은 품질이 떨어졌고 실제 산업 생산에 사용하기 부적절했다. 또한, 분배된 토지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의 차이로 인한 빈부격차 발생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명분으로 시행된 집단 농장 체제는 오히려 농업생산력을 급감시켰다.
이럼에도 이런 정책의 문제에 대해 마오쩌둥에게 직언을 할 이들이 없었다. 절대 권력자에 순응해 그가 제시한 목표에만 공산당 정권을 매달렸다. 이를 위해 통계와 정보 조작이 이루어지고 현장과 정부의 통계의 큰 괴리가 발생했다. 여기에 가뭄과 홍수 등 자연재해가 겹쳤다. 국민들을 더 잘 살게 하고 중국을 공업국가로 변모시키기 위해 시작한 대장정 운동은 국민들은 더 궁핍하게 만들었다. 대 약진 운동은 이상과 현실이 결코 일치할 수 없음을 보여주며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 중국 공산당의 노선은 덩샤오핑 등 실용주의자들이 주도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마오쩌둥은 권력의 중심에서 멀어지는 듯 보였지만, 그는 다시 돌아왔고 그의 복귀는 또 한 번의 큰 폭풍을 몰고 왔다. 1966년 70대의 나이에 대중들 앞에서 건재를 과시한 마오쩌둥은 중국 현대사의 큰 암흑기인 문화대혁명을 주도하며 다시 한번 공산당 권력을 장악했다.
마오쩌둥은 실용주의 시장경제 체제 도입을 이끄는 당시 공산당 지도층을 강력히 비판했다. 그는 사회주의 노선의 강화를 주창하며 그런 그의 주장을 뒷받침할 세력으로 청년들을 주목했다. 당시 중국의 청년들은 여전히 마오쩌둥을 사회주의 혁명의 영웅, 국부로 여기고 있었고 그의 말은 그들에게 큰 힘을 발휘했다.
마오쩌둥은 청년들이 또 다른 혁명의 주체로 치켜세우며 그들의 행동을 유도했다. 홍위병이라 불리는 중국 청년들은 공산당 간부들과 지도자, 지식인들을 반혁명 세력으로 규정하고 그들의 숙청을 주도했다. 그 과정에서 봉건적 구습 타파라는 명분으로 중국의 각종 문화재와 예술품 등도 파괴됐다. 기존의 문화, 예술, 전통은 구습으로 매도되고 스포츠 등 각종 여가선용의 행위들도 금지됐다. 마치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의 지배하는 그런 사회 분위기가 형성됐다. 마오쩌둥은 자신의 사회주의 이념과 이상을 실현한다는 명분으로 청년들을 선동하고 이용했다.
홍위병들의 행태는 매우 폭력적이었고 비이성적이었다. 홍위병들은 타도의 대상이 정해지면 다수의 힘으로 그들을 억압하고 재판 과정 없이 린치를 가하거나 단죄했다. 많은 이들이 자아비판과 자기반성을 강요당해야 했다. 그 대상은 홍위병들의 친척이나 가족, 스승, 직장 상사 공산당 간부 등 구별이 없었다. 심지어 홍위병들 내부에서도 고발이 이루어지면 단죄의 대상이 됐다.
그들은 마오쩌둥은 말을 신의 계시처럼 여겼고 절대적은 충성심을 보였다. 문화대혁명은 사실상의 친위 쿠데타였고 중국의 역사를 퇴행시키는 일이었다. 그 과정에서 마오쩌둥은 다시 한번 자신의 권력 기반을 더 공고히 할 수 있었다. 폭력과 야만의 시대였던 문화대혁명은 10년 가까이 중국 사회를 뒤흔들었고 수많은 희생자를 양산했다.
그렇게 목적을 달성한 마오쩌둥은 더 강력한 철권통치를 했다. 심지어 문화대혁명에 앞장선 홍위병들의 주체인 청년들조차 지식인과 청년들이 노동자, 농민들과 결합해야 한다는 이유 등으로 농촌지역으로 보내 노동을 하도록 했다. 상산하향 운동이라 불리는 이 조치는 또 다른 숙청의 수단이었고 홍위병들 상당수도 이에 해당됐다. 전형적인 토사구팽이었다.
다시 절대권력자의 위상을 회복한 마오쩌둥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철권통치를 이어갔다. 자신의 이상과 가치를 국민들이 절대적으로 신봉하게 했다. 이는 중국을 대외적으로 고립되도록 했다. 죽의 장막이라는 말이 등장하는 이유였다.
하지만 이런 중국의 빗장을 푼 것도 마오쩌둥이었다. 그는 1972년 미국과 비밀리에 외교교섭을 했고 미국 닉슨 대통령의 베이징 방문을 이끌어냈다. 강력한 보수주의자에 반공 주의자였던 닉슨의 중국 방문은 큰 사건이었다. 6.25 한국 전쟁 당시 적으로 수많은 희생자를 발생하며 치열하게 싸웠고 이후 적대적 관계를 유지했던 미국과 중국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미국과 소련으로 대표되는 냉전체제를 변화시키는 일이기도 했다.
중국은 공산주의 진영의 맹주인 소련과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독자 노선을 걷기 시작했고 대외 관계에 있어 보다 유연한 자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서방과의 관계 개선을 시도했다. 미국인 좀처럼 승기를 잡지 못하고 있는 베트남 전쟁의 상황을 변화시키기 위해 사회주의 북 베트남과 연결된 중국과의 관계 개선이 필요했다.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소련을 견제하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었다. 이런 두 나라의 이해관계는 전격적인 닉슨 대통령의 중국 방문과 관계 개선으로 연결됐다.
중국은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조건으로 하나의 중국 정책을 미국이 인정하고 대만과 미국의 상호방위조약 파기와 대만에서의 미군 철수, 유엔에서 대만 축출 등을 조건으로 내세웠다. 미국은 애매한 외교적 수사로 명확한 답을 하지 않았지만, 중국의 요청을 대부분 수용했다. 그 결과 중국은 대만을 밀어내고 유엔 상임이사국 자리에 올라 국제사회에 화려하게 등장했다. 대만은 유엔을 탈퇴했다. 사실상 중국이 주장하는 하나의 중국 정책을 미국이 인정한 셈이었다. 이런 변화는 거대한 중국 시장을 고려한 경제적 측면도 분명 있었다.
이런 미.중 관계 개선은 한반도 정세에도 영향을 줬다. 절대적 우방이라 여겼던 미국과 중국이 가까워지면서 남한과 북한의 독재 권력자들은 스스로 그 권력을 강화할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다. 남한에서는 박정희 정권의 유신이 이루어졌고 북한에서는 김일성 유일 체제가 더 강화됐다. 미. 중 관계 개선이 남북한의 독재권력을 더 강화시키는 나비효과로 연결됐다.
마오쩌둥은 이 외에도 핵무기, 인공위성 개발과 함께 중국의 군사력을 발전시키고 국력을 강화하며 중국을 세계게의 강대국으로 변모시켰다. 이는 지금도 중요한 마오쩌둥의 업적으로 중국에서 인식되고 있다. 하지만 그의 통치 기간 수많은 이들이 그의 정책 실패와 숙청 등의 과정에서 희생되고 피해를 입었다. 6.25 한국전쟁 때는 중국군의 참전을 결정하며 우리나라와 군사적 충돌을 하기도 했다. 마오쩌둥은 중국은 물론이고 세계사적으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었다.
이런 마오쩌둥에 이어 등장한 중국의 권력자 덩샤오핑은 중국은 이전과 전혀 다른 길로 이끌었다. 그는 다른 중구 공산당 지도부 인사들과 달리 젊은 시절 유럽으로 유학을 떠나 공부했고 노동자로 일하며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해 공산당에 입당했다. 그는 사회주의의 철저한 신봉자였지만, 서구의 발전상을 몸소 체험한 인물이었다.
이는 중국 공산당에서 시장경제 도입 등의 실용주의 노선을 이끄는 인물이 되도록 했다. 그는 아울러 관료로서도 경력을 쌓았고 마오쩌둥의 측근 인사로 권력의 중심부에 오랜 세월 자리했다. 하지만, 문화대혁명 기간 덩샤오핑의 실용주의 노선은 큰 비판에 직면했고 덩샤오핑은 숙청을 피할 수 없었다. 그의 아들은 홍위병에게 쫓기는 과정에서 높은 곳에서 추락해 하반신 마비 장애를 입는 등 가족이 고초를 겪기도 했다.
그런 고난 속에서도 덩샤오핑은 살아남았고 마오쩌둥이 세상을 떠나고 문화대혁명의 광풍이 잦아들면서 정치 일선에 복귀했다. 그가 다시 공개 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건 문화대혁명 기간 열리지 못했던 축구 경기장의 귀빈석이었다. 이는 중국의 새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정계 복귀 후 당과 정부의 중요 요직을 거친 덩샤오핑은 1981년 6월부터 1989년 11월까지 최고 권력자로 군림했다. 실제는 1970년대 후반부터 1997년 그가 사망할 때까지 중국은 덩샤오핑의 시대였다. 덩샤오핑은 그가 원하는 인물을 후계자로 올리고 세상을 떠났다.
덩샤오핑의 정책은 실용주의 노선에 근거한 개혁과 개방, 현대화, 경제발전을 통한 중국의 선진화였다. 덩샤오핑은 이를 위해 집권 이후 적극적으로 서방과의 관계 개선에 나섰다. 유엔에서 중국을 대표해 연설을 하기도 했고 1979년 미국을 방문해 당시 미국 대통령 카터와 회담하기도 했다. 이런 노력은 미국과 중국의 정식 수교로 이어졌고 공산당이 지배하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중국을 대표하는 합법 정부로 전 세계에서 인정받도록 했다.
이를 바탕으로 덩샤오핑은 대외 개방과 시장경제 도입을 더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상하이 등 남부 해안지대를 중심으로 각종 혜택을 주며 해외 자본을 투자를 적극적으로 유치했고 수많은 다국적 기업들의 공장이 중국에 지어졌다. 이는 중국의 공업화를 빠르게 촉진했다. 저렴한 임금과 정부의 지원은 기업들에게 중국을 매력적인 투자처로 만들었다. 사회주의 국가 내에서 중국은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공존하는 독특한 구조가 만들어졌다.
중국은 이를 바탕으로 연평균 엄청난 경제 성장을 하며 급속한 경제발전을 이뤄냈다. 이 과정에서 덩샤오핑이 말한 흑묘백묘론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만 잘 잡는 고양이가 좋은 고양이'라는 말이 크게 회자되기도 했다.
덩샤오핑의 개혁은 중국의 현대화로 연결됐다. 그는 농업, 공업, 국방, 과학기술의 현대화를 중요한 목표로 삼고 이를 위해 나라의 역량을 집중했다. 이를 위해 자금 확보를 위해 시장경제 도입에 속도를 더했다. 덩샤오핑은 중국 국민의 생활수준을 끌어올리고 중국을 현대화하려 했고 상당 부분 성과가 있었다. 가난한 농업국가였던 중국은 세계 제1의 제조업 국가가 됐다.
하지만 덩샤오핑의 개혁 개방정책은 경제 부분에만 국한된 것이었다. 덩샤오핑은 공산당 1당 독재체제를 포기하지 않았고 경제발전에서 파생되는 민주화 요구에는 강경하게 대응했다. 1989년 베이징에서 일어난 대학생 청년들을 중심으로 한 대규모 시위였던 텐안먼 사태의 유혈 진압이 단적인 예라 할 수 있다. 덩샤오핑은 공산당 1당 독재체제를 흔드는 시도를 인정하지 않았고 강경파의 손을 들어줬다.
이는 중국 개혁개방 정책의 후퇴로 이어질 수 있었지만, 덩샤오핑은 1990년대 초반 놀라운 경제발전을 이뤄낸 중국 남부 도시들을 순회하면 그가 추진한 개혁, 개방정책의 결과를 적극적으로 알리고 그 정책에 힘을 실어줬다. 그 결과 공산당 내 강경파의 힘이 위축되고 덩샤오핑은 자신의 정책을 계승할 수 있는 인물인 장쩌민을 후계자로 올려놓을 수 있었다. 또한, 덩샤오핑은 후계체제를 자신의 원하는 대로 완결한 이후 최고 권력자의 임기를 3연임 이상 하지 못하도록 제한하고 공산당의 세대교체를 단행하는 등 권력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기도 했다. 덩샤오핑 사후 이런 전통은 계속 이어졌다.
덩샤오핑은 개혁 개방 정책을 추진하면서 대외적으로 홍콩 반환을 이끌어내고 한 나라에 두 체제가 존재하는 '일국양제' 체제를 주창하며 이를 홍콩에 적용했다. 홍콩은 중국에 반환된 이후에도 영국이 지배하던 시절의 통치 시스템을 유지토록 하겠다는 게 중요한 골자였다. 이를 통해 홍콩에 투자한 자본의 이탈을 막고 하나의 중국 정책이 더 힘을 받도록 했다. 그 결과 난항을 거듭하던 홍콩의 중국 반환 협상이 완결될 수 있었다.
덩샤오핑은 그가 생전에 보기를 소망했던 1997년 2월, 1997년 7월 이루어진 홍콩의 중국 반환을 지켜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지만, 홍콩의 중국 반환은 아편전쟁 후 영국과의 조약으로 이루어진 영국의 홍콩 점령과 지배의 역사를 끝낸, 중국이 서구 열강에 의한 침탈의 역사를 끝내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이렇게 중국은 국제 사회의 큰 거인으로 이끈 덩샤오핑은 자칫 마오쩌둥의 이상주의적 사회주의에 빠져들 수 있는 중국을 새롭게 한 인물이었다. 지금의 중국이 있게 하는 데 있어 덩샤오핑은 가장 큰 역할을 했다. 즉, 마오쩌둥은 중국을 세웠고 덩샤오핑은 중국을 부강한 나라로 만들었다.
하지만 중국은 전 세계 어디에도 없는 사회주의 시장경제 체제 속에서 강대국이 되긴 했지만, 극심한 빈부 격차와 사회적 불평등에 직면해 있다. 평등을 최고 가치로 여기는 사회주의 국가 중국에서의 큰 아이러니다. 사회주의 중국이 건국되는 데 있어 큰 역할을 한 농민들이 오히려 경제발전에서 소외되고 더 궁핍한 생활을 하는 모순적 상황이 나타나고 있다.
또한, 중국 공산당은 하나의 특권층으로 변질됐다.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수혜를 소수의 공산당과 그들과 유착된 자본가들이 크게 누리는 불평등의 구조는 향후 중국에 큰 부담이 될 수 있다. 여기에 중국의 현 지도자 시진핑은 덩샤오핑이 만든 권력의 선순환 구조를 무시하고 3연임을 통하 종신 집권의 길로 가고 있다.
시진핑은 중화주의를 바탕으로 커진 그들의 힘을 이용해 주변 국들을 억압하는 등 무리한 세력 확장을 하고 있다. 최근 대두되는 배타적인 중화주의는 중국에 대한 대외 이미지를 크게 떨어뜨리고 있다. 또한, 최근 미국과의 정치, 경제적 갈등은 세계 정치 경제의 큰 리스크가 되고 있다. 시진핑은 이런 대외적 갈등을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 수단으로 삼고 있고 배타적 애국주의에 근거한 신 홍위병들을 양산하며 시진핑을 우상화 하면서 과거 마오쩌둥의 길을 가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는 중국 역사의 퇴행이라 할 수 있다. 그 결과는 이전 마오쩌둥의 생애에서 알 수 있었다. 중국은 이전 그들의 중요한 지도자인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의 생애를 통해 무엇이 그들을 모든 나라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진정한 강대국이 될 수 있는 길인지 다시 살펴봐야 한다.
사진 : 픽사베이,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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