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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영국의 증기기관 발명을 기점으로 시작된 산업혁명은 서구 유럽의 사회 전반을 크게 변화시켰다.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물질적 풍요가 현실이 됐고 문명의 발전이 급속히 진해됐다. 이는 인류 문명의 발달사를 순식간에 뛰어넘는 일이었다.



그와 동시에 동양에 뒤처지던 서양이 대항해 시대와 산업혁명을 거치며 동양을 능가하는 힘을 가지고 세계 질서를 주도하게 됐다. 그와 동시에 서구 유럽에서는 기존의 사회 지도층이었던 왕과 귀족의 귄위와 힘이 떨어지고 자본가로 대표되는 부르주아 계급이 새로운 권력층으로 자리하게 된다.



또한, 봉건시대와 절대 왕정 시대를 거치며 억압받았던 일반 민중들도 점점 사회 부조리와 모순을 자각하고 그들의 권리를 신장시키기 위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프랑스 대혁명은 절대 왕정과 귀족 세력을 몰락시키고 국민들의 참여하는 민주주의 시작점이었다. 


 

초창기 증기 기관

 



하지만 이런 변화에도 일반 국민들의 삶은 사회 발전에 비례해 나아지지 않았다. 나라와 사회는 발전했다고 하지만, 부는 일부 계층에 편중되고 부익부 빈익빈의 상황은 더 심화됐다. 특히, 산업혁명 이후 발전한 도시와 달리 농촌지역의 삶은 그 발전이 훨씬 더 더디기만 했다. 도시에서는 화려한 삶이 있었고 풍요로움이 있었지만, 농촌의 삶은 그렇지 않았다. 산업의 중심이 농업에서 상공업으로 변화하면서 농촌 지역은 더더욱 사회 발전에서 소외되어 갔다. 그 속에서 농민들은 여전히 억압받고 착취 받는 계층이었다. 



이런 농민의 삶에 주목한 예술가가 있었다. 프랑스의 화가 장 프랑수아 밀레가 대표적 인물이었다. 1814년 태어나 1875년 세상을 떠난 그는 도시를 떠난 시골의 풍경을 중심으로 한 사실적 풍경화를 그리는 화가들의 모임인 바르비종파의 창립자였고 사실주의와 자연주의를 대표하는 화가이기도 했다. 



그의 화풍은 유럽에서 바로 환영받지 못했다. 산업 혁명 이후, 혁명의 시기를 거치는 와중에서 미술의 중요한 소재는 기독교와 고전, 상류층 취향에 맞는 작품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문화와 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이들은 경제적 부와 여유가 있는 이들이었고 그들의 취향에 따른 작품이 미술계의 주류를 이를 수밖에 없었다. 이  상황에서 농촌과 그곳에서 일하는 일반 서민들의 삶을 그린 그림이 그 가치를 인정받기는 어려웠다. 

 

밀레 사진





하지만 밀레 작품의 가치를 알아봐 준 곳은 따로 있었다. 서부 개척 시대를 활발히 열어가고 있었던 미국이었다. 이민자들이 세운 나라 미국은 나라의 시작부터 개척의 역사였다.



그런 미국 이민 역사의 중심에는 청교도들이 있었다. 청교도들은 종교의 자유를 위해 영국에서 목숨을 걸고 대서양을 건너 낯선 대륙으로 향했다. 생사를 함께 한 청교도들의 결속력을 매우 단단했다. 그들은 이민 초기 공동체를 이루고 그들의 종교관을 실현했다. 청교도들은 금욕적인 삶과 함께 농업을 중시했다.



청교도 사상은 미국에 뿌리를 내렸고 미국 주류 사회에 여전히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런 미국에서 밀레의 작품은 새롭게 다가왔다. 도시화가 진행되는 와중에 고향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작품이기도 했다. 점차 세계 정치, 경제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는 미국에서의 긍정 평가는 밀레의 인지도를 높일 수 있었다. 당연히 작품의 가치도 올라갈 수 있었다. 밀레의 작품은 미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그림이 됐다. 

 

 

만종 (1857 ~ 1859)

 

1) 해가 저무는 들녘에서 기도를 하는 농민 부부의 모습을 매우 성스러운 느낌으로 표현했다. 일설에는 요람이 사실은 아기의 관이고 세상을 떠난 아기의 장례를 치르며 기도하는 장면이라는 설도 있다. 어느 쪽이든 이 작품은 밀레의 농민화가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하는 그림이고 많은 화가들에 영감을 주었다.




밀레의 작품은 농촌을 주 배경으로 사실적인 묘사를 주로 하면서도 농민들의 삶을 그 중심에 두고 있다. 밀레는 그 농민들을 그리면서 그들의 일상의 매우 신성시하고 우아한 화풍으로 그려냈다. 당시 농민들은 하층민에 헐벗고 굶주린 모습을 연상할 수 있었지만, 밀레 작품 속 농민들은 그와 완전히 달랐다. 이런 밀레의 그림은 사회적 편견을 깨뜨리는 독창성이 있었다. 물론, 주류 미술계에서는 환영받지 못했다. 



사회적으로도 진보적 사상의 지지하는 이들에게 그의 그림은 환영을 받았지만, 사회 주류를 이루는 보주주의자들에게는 큰 혹평을 받았다. 여전히 신분제적 질서가 유지되는 상황에서 하층민의 삶을 매우 가치 있게 그려낸 작품은 기득권층에게는 좋게 보일 리 없었다. 

 

 

이삭 줍는 여인들 (1857)

 

2) 농촌의 여인들이 추수가 끝난 밭에서 땅에 떨어진 이삭을 줍는 모습이다. 아름답게 그려졌지만, 이 안에는 사회 비판을 담고 있다. 당시 대 지주들의 대부분의 농토를 소유하는 상황에서 농민들은 대부분 소작농이었고 추수의 상당 부분은 지주들 차지였다. 그림 뒤편 추수한 곡식을 가득 실은 수레는 그 지주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농민들은 지주의 허락을 받고 서야 떨어진 낱알을 주울 수 있었다. 농민들에게는 한 톨의 낱알이 너무나 소중했다. 이삭 줍는 여인들의 모습은 생존을 위한 처절함이 함께 하고 있다. 곡식이 가득 담긴 지주의 수레와 그 옆에서 지주의 수레에 실을 곡식을 수확하는 하얗게 그려진 농민들, 그림 가장 앞에서 한 톨의 곡식이라도 더 줍기 위해 애쓰는 농민의 모습은 당시 큰 빈부격차를 상징하고 있다. 



또한, 낱알을 줍고 있는 여인들의 파란색, 빨간색 두건과 멀리서 일하는 농민들의 하얀색 옷은 프랑스 국기에 포함된 색이고 자유, 평등, 박애의 혁명 정신을 상징하고 있다. 이 그림은 당시 프랑스의 단면과 사회개혁에 대한 화가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결국, 파리에서 활동하던 청년 화가 밀레는 경제적 어려움이 커졌고 그곳에서 정착하지 못했다. 그에게 파리는 화려한 도시가 아닌 모순으로 가득한 곳이었다. 하지만 밀레는 좌절하지 않았다. 밀레는 그의 화풍을 지속적으로 발전시키고 도시를 떠나 시골에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 작품 활동에 매진했다.



그와 뜻을 같이 하는 화가들과 함께 바르바종파를 만들어 활동하기도 했다. 또한, 밀레의 화풍은 대표적인 인상주의 화가인 모네와 고흐 등 당대 화가들과 초현실주의 화가 달리에서 큰 영감을 주기도 했다. 토속적인 화풍의 한국화의 대표 화가 박수근 역시 밀레의 영향을 받았다. 

 

 

씨 뿌리는 사람 (1850)

 

3) 이 작품은 씨를 뿌리는 농민을 그림 전면에 가득 채우면서 거대하게 마치 신처럼 영웅처럼 묘사했다. 이를 통해 밀레는 농사일을 가치를 신성시하는 그의 사상을 화폭에 담았다. 이 그림은 화가 고흐에게 큰 영감을 주었고 고흐는 이 그림을 다양하게 자신만의 기법으로 모사했다. 

 


이렇게 밀레의 그림은 당시 새로운 시도였고 멈추지 않았던 그림의 열정은 미술사의 중요한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특히, 소재나 주제에 있어 세상에 잘 보이지 않은 신의 영역과 높은 곳의 사람들만 바라보던 화가들에게 밀레는 세상에 눈 높이를 맞출 것으로 주장했고 그림 속에 자신의 생각을 담았다.


그림의 영역을 넓히고 전통적인 방식을 벗어나 새로운 그림의 세상을 열었다는 점에도 밀레의 업적은 매우 크다 할 수 있다. 밀레는 예술가 이전에 혁명가이기도 했다. 그의 그림은 예술이 결코 현실과 분리될 수 없고 그 시대의 삶을 담을 때 더 가치 있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예이기도 하다. 


사진 : 픽사베이 / 위키백과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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