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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의 최 북단에 위치한 도시 익산은 후기 백제의 정치 중심지였다. 그 흔적은 삼국시대 건립된 사찰 중 가장 큰 규모로 추정되는 미륵사 터와 주변의 유적과 그 지역으로 중심으로 출토된 유물들을 통해 입증되고 있다.

아직도 대중들은 백제 역사에서 그 중심지는 초기 서울을 중심으로 한 한성, 후반기 부여와 공주로 알려져 있지만, 익산의 존재감도 무시할 수 없다. 

그 익산과 연결되는 가장 중요한 인물은 백제 제30대 왕이었던 무왕이다. 600년부터 641년까지 오랜 기간 통치했던 무왕은 나제 동맹이 신라의 배신으로 파국으로 이어지고 신라와의 전쟁에서 성왕이 전사한 이후 움츠러들었던 백제의 국력을 회복하고 활발한 대외 외교를 전개했다.

또한, 회복된 국력을 바탕으로 신라를 향해 적극적인 군사 활동을 전개해 영토를 수복하고 수세적이었던 대 신라 관계를 대등하게 돌려놓기도 했다. 또한, 강력한 왕권을 구축했고 그 바탕 위에 대규모 토목 공사를 통해 왕실의 위험을 드높이기도 했다.

 

 

 

 


익산은 무왕 시대 지어진 미륵사는 물론이고 그 시대 유적지가 곳곳에 있다. 무왕의 능 역시 익산에 자리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무왕이 당시 수도였던 부여에서 익산으로 천도를 추진했을 것이라는 가설이 큰 설득력을 얻고 있기도 하다. 천도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그의 능까지 위치한 것을 고려하면 익산은 무왕의 중요한 정치적 기반이었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또한, 무왕은 익산을 중심으로 한 호족 세력의 지원을 받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익산의 미륵사지 석탑의 해체 복원 과정에서 발견된 금제 사리병과 사리봉영기 등의 유물을 통해 사실로 굳어졌다. 그 봉영기에는 왕후가 발원하여 미륵사 건립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왕후가 백제 후기 익산을 중심으로 큰 세력을 형성했던 사택씨 가문 출신임을 알 수 있었다. 무왕은 자신을 지원하는 강력한 호족세력과 함께 왕권을 강화했고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무왕의 치세 때 백제는 부흥기를 맞이할 수 있었다. 

이 점에서 미륵사는 백제 후기 역사에서 중요한 장소라 할 수 있다. 현재 미륵사 터에는 세월의 흐름 속에 크게 훼손됐던 미륵사지 석탑이 해체 복원되어 자리를 잡았고 과거 문헌 등을 토대로 재현된 또 하나의 석탑과 국립박물관이 만들어져 중요한 역사, 문화 탐방을 할 수 있는 장소가 됐다. 현재도 미륵사지 일대는 유물 발굴 작업이 지속되고 있어 또 다른 역사의 기록들을 발견될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가지게 하고 있다. 

 

 

다시 우뚝 선 미륵사지 석탑

 

 

다른 방향에서

 

 

미륵사지 흔적

 


이렇게 백제 역사의 중요한 인물인 무왕은 선화공주 설화를 통해 현재도 대중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선화공주 설화에서 무왕은 마를 캐 팔던 가난한 집의 아들이었지만, 신라의 공주 선화공주와 혼인을 하게 되고 이후 백제 왕위에 오르게 된다.

이 과정에서 등장하는 향가 서동요는 서동이 일부러 아이들을 시켜 부르게 한 노래로 그 내용이 선화공주가 남몰래 서동과 정을 통하고 만난다는 내용이었다. 이는 지금으로 말하면 가짜뉴스였지만, 이 노래가 신라 전역에 퍼지고 왕에게까지 알려지면서 선화공주는 궁궐에서 쫓겨나 귀양을 떠나게 됐다. 그 과정에서 서동은 귀양을 떠나는 선화공주를 만나 교감하고 정식 부부가 되고 이후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인심을 얻어 왕이 되고 지금의 미륵사를 창건했다는 줄거리를 담고 있다.

삼국유사에 있는 이 설화로 인해 무왕과 신라 선화공주가 왕과 왕비였다는 게 일반적인 역사였지만, 앞서 언급한 미륵사지 석탑에서 발견된 사리 봉영기로 인해 선화공주 설화 속 무왕과 선화공주의 로맨스의 진위 여부에 대한 논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미륵사지 추정 모형, 일제에 의해 보수됐던 미륵사지 석탑 모형

 

 

수막새

 

 

꽃무늬 수막새

 

 

얼굴이 새겨진 수막새

 


하지만 미륵사와 익산이 무왕의 치세가 중요한 장소와 지역임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고 무왕이 백제 후기 역사에 중요한 인물인 것도 분명하다. 즉, 후기 백제의 역사는 익산을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다. 또한, 익산은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그 왕족들과 유민들이 신라의 지원으로 세운 보덕국이라는 자치국이 자리했었다.

보덕국은 신라 영토 내에 있었지만, 자치권을 가지고 외교활동을 하기도 했다. 이후 보덕국은 왕이었던 안승이 신라 귀족에 편입되면서 소멸되고 고구려 부흥의 역사도 함께 사라졌다. 익산은 백제는 물론이고 고구려의 역사도 함께 품고 있는 곳이다. 그 점에서 익산의 미륵사지 터와 복원된 석탑, 그곳에 자리한 박물관은 소중한 역사 공부의 장소라 할 수 있다.

미륵사는 신라시대는 물론이고 불교를 숭상하던 고려, 조선시대 중기까지도 사찰을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기간에도 미륵사는 굳건했지만, 조선 후기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후 관리하는 이가 없어진 이 사찰은 방치되고 파괴되고 폐허가 되어 그 흔적만 남았다. 조선시대 내내 지속된 숭유억불 정책 속에 대형 사찰이 유지되기가 어려웠을 가능성이 크다.

 

 

금제 사리병과 사리 봉영기

 



이제는 미륵사지 석탑만이 이 사찰의 역사를 대변하고 있다. 수천년의 역사가 담긴 익산 미륵사지 석탑의 온전한 보존은 장기간에 걸친 작업이었고 최근에서야 그 결과물을 만날 수 있었다. 미륵사지 석탑의 복원은 이전 유적과 유물의 신속한 발굴에 주력하면서 보존에 취약했던 우리 문화재 관리의 문제점을 극복한 결과이기도 하다.

미륵사지 석탑은 새롭고 보기 좋게 만들어지지 않고 파괴된 그 원형을 그대로 복원했다. 세월의 흐름 속에 파괴되고 변해간 모습을 다시 재현했다. 역사의 흐름을 그대로 담고 있다는 점에서 복원된 미륵사지 석탑은 큰 의미가 있다. 이제는 그 모습이 잘 보존되고 백제의 역사의 상징으로 오랜 세월 그 자리를 지킬 것으로 보인다. 

아쉬움이 나라 백제다. 고도의 문화와 문명을 가지고 있었고 활발한 대외 활동을 했던 강성한 나라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백제 문화는 이후 통일신라로 수용되고 궁극적으로 우리 문화의 발전에 중요한 자양분이 됐다. 익산의 미륵사 일대는 백제를 기억할 수 있는 장소라 할 수 있다. 

 

 





사진,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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