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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용산구에 자리한 도심 속 공원, 효창공원은 다양한 시설들과 추모비가 혼재하는 곳이다. 1960년대 지어진 효창운동장은 과거 한국 축구의 요람으로 많은 경기가 열렸고 현재는 사회인 축구의 중요한 경기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또 한편에는 일제 강점기 임시정부를 이끈 해외 독립운동의 대표적 인물인 김구 선생의 묘와 우리 독립운동사에 남을 의거를 행했던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의사를 포함한 삼의사들과 임시정부 주석을 역임했던 이동녕, 군사부장을 역임했던 조성환, 또 다른 임시정부 요인인 차이석까지 독립운동가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1909년 일제의 조선 침탈을 이끌었던 일본의 권력자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 역에서 처단한 안중근 의사의 묘도 그곳에 있다. 하지만, 안중근 의사는 그 유해를 아직 찾지 못한 탓에 가묘 형태로 삼의사 묘역 옆에 가묘 형태로 자리하고 있다. 


 

효창공원 삼의사 묘

 




이처럼 독립운동가들의 다수 잠들어 있는 효창공원은 독립지사 묘의 면모를 갖추고 있지만, 그 공원에는 앞서 언급한 효창운동장을 포함해 반공투사 위령탑, 원효대사 동상, 여타 공공시설물이 혼재되어 위치하고 있다. 효창공원의 원형이 상당 부분 파괴되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음을 짐작하고 한다. 

효창공원은 본래 조선 후기 영조와 함께 조선의 부흥을 이끌었던 개혁 군주 정조가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문효세자와 그의 생모였던 의빈 성씨의 묘로 만들었다. 정조는 그곳을 효창원이라 했다. 용산은 사대문 안에 위치한 궁궐과 크게 멀지 않았던 곳으로 이 용산에 묘역을 조성했다는 건 정조의 문효세자와 의빈 성씨에 대한 각별한 마음을 느끼게 한다. 의빈 성씨는 최근 인기리에 방영됐던 사극 속 주인공의 실존 인물로 정조가 오랜 세월 의빈 성씨의 마음을 얻기 위해 정성을 다했던 여인이었다.

정조는 의빈 성씨 사이에서 얻은 아들을 세자로 책봉할 정도로 아끼고 사랑했다. 하지만, 그 세자가 5살 어린 아니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얼마 안 가 의빈 성씨마저 세상을 떠났다. 정조로서는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여인과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을 모두 잃은 것이 큰 슬픔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효창원은 그런 정조의 사랑하는 이들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담겨 있는 곳이라 할 수 있다. 그 때문인지 효창원은 왕의 능이 아니었음에도 매우 광활한 면적을 차지하고 있었다. 지금의 규모는 애초 효창원으로 조성되었을 당시보다 그 규모가 크게 축소됐다.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의사 유해 봉환

 

 

하지만 효창원은 그 원형을 그대로 유지할 수 없었다. 그곳은 일제의 조선에 대한 침탈이 본격화되고 한반도가 열강들의 대결장이 되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외국 군대의 주둔지로 사용됐다. 이미 고려 시대 고려를 수십 년간 침략한 몽골군의 그 지역에 주둔했고 1894년 발발한 청. 일 전쟁 당시에는 일본군의 숙영지로 활용됐다. 이후에도 일본군이 이곳에 주둔했다. 최근까지도 외국군의 주둔지로 사용됐던 용산의 역사 속에 지금의 효창공원은 함께 했다. 

효창원의 수난은 계속됐다. 일제는 효창원이 있는 부지를 골프장으로 개발했다. 인근에 지어진 호텔의 투숙객들을 위해 지어진 골프장은 묘소를 그대로 두고 조성됐다. 이에 그치지 않고 일제는 효창원에 잠들어 있던 문효세자와 의빈 성씨, 훗날 이곳에 묻힌 다른 왕족들의 묘를 모두 서울 인근의 다른 능으로 이장했다. 이후 효창원은 그 이름을 잃고 효창공원으로 불리게 됐다. 

이 효창공원에 독립운동가들의 묘소가 조성된 건 해방 이후였다. 해방 후 귀국한 김구 선생은 해외 애국지사들의 유해 봉환을 적극 추진했고 우선 일본 땅에 잠들어 있던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의사의 유해를 봉헌해 효창공원에 묘역을 조성했다. 이후 그와 함께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인사들이 이곳에 잠들었다. 또한, 안중근 의사가 유언이었던 독립한 고국 땅에 그를 안치하기 전 그의 가묘를 조성했다. 안타깝게도 김구 선생을 포함해 많은 이들과 역대 정부의 노력에도 안중근 의사의 유해는 찾을 수 없었고 여전히 그의 묘는 가묘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곳에 애국지사들이 묘역이 조성된 건 일제에 의해 파괴된 효창원의 복원과 함께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려는 김구 선생의 의지가 투영되었다 할 수 있다. 김구 선생 역시 1949년 6월 안두희의 흉탄에 서거한 이후 국장은 거쳐 효창공원에 안치됐다. 

 

 

백범 김구

 



이렇게 효창공원은 과거 임시정부 인사들을 중심으로 한 독립지사들의 묘역으로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해방 이후 효창공원은 계속된 개발 압력에 시달려야 했다. 사회 각개의 반대에도 1960년대 효창운동장이 건립됐고 이후에도 골프장 건립과 개발사업을 위한 시도가 이어졌다. 이곳을 확고한 독립지사 묘역으로 조성하려는 시도는 지역민들의 반대로 제대로 실행되지 못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는 장소지만, 그 정체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돈의 논리에 잠식되며 이도 저도 아닌 상태로 효창공원은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이에 효창공원에는 앞서 언급한 대로 다양한 동상과 위령탑, 공공시설이 공존하는 공원이 됐다. 이런 상황은 효창공원에 잠들어 있는 애국지사들을 고려하면 안타까운 일이다. 

또한, 정조의 아픈 가족사가 함께 하는 효창공원이 그 원형을 역사적 흐름 속에 잃어갔다는 점은 우리의 아픈 역사를 상징한다는 점에서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앞으로 용산 지역에 개발 압력이 더 거세지는 상황에서 효창공원이 또다시 그 모습이 변하는 게 아닐지 하는 걱정도 생긴다. 

효창공원은 우리 독립운동사를 다시 한번 느끼게 할 수 있는 소중한 장소다. 그 점에서 효창공원은 우리 근. 현대사에 있어 큰 상징성이 있다. 아픈 역사가 그 안에 많이 담겨 있지만, 그 또한 우리의 역사다. 한편으로는 그 아픈 역사를 극복하기 위해 헌신한 인물들의 이야기가 담겨있는 곳이 효창공원이기도 하다. 효창공원이 그 역사적 의미를 잃지 않고 대중들과 호흡할 수 있는 장소로 유지되길 기대해 본다.

 

 



사진 : 위키백과,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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