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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와 근. 현대사를 통틀어 가장 역동적이고 드라마틱한 시기는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팽팽히 맞섰던 삼국시대가 먼저 떠오른다. 삼국은 경쟁과 협력 배신의 관계 속에서 함께 경쟁했다. 그 속에서 나라를 발전시키고 독창적인 문화와 예술을 발전시켰다. 삼국시대 문화, 예술의 유산은 이후 통일신라 시대에 융합되어 한층 더 독창적인 형태로 나타났고 우리 민족 문화, 예술의 원류가 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삼국시대의 역사 사료는 부족하고 그 기록의 상당 부분은 중국과 일본의 역사 사료에 근거해야 한다. 삼국시대 역사를 비교적 상세히 기록한 김부식의 삼국사기 역시 중국의 사료를 상당 부분 참조했고 국 유사는 삼국 시대 역사의 또 다른 면을 살필 수 있지만, 불교와 신라 중심을 기술로 한계점이 있다.

이런 역사 기록은 특히, 삼국시대 경쟁의 패배자인 고구려, 백제 역사기록의 부실로 이어진다. 상대적으로 부족한 사료로 인해 역사의 실체에 접근하지 어렵다. 고구려는 그 위치가 쉽게 닿을 수 없는 북한과 중국에 속해 있어 연구에 제약이 크다. 고구려를 계승하며 통일 신라와 남. 북국 시대를 열었던 발해 역시 상항은 다르지 않다.

이는 신라를 제외한 역사적 인물들에 대한 평가에 있어 잘못된 편견을 불러올 수 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인 탓에 멸망한 고구려, 백제의 인물들 상당수는 부정적 평가를 피할 수 없다. 물론, 위대한 정복 군주인 고구려 광개토대왕은 자랑스러운 민족의 역사로 남아있지만, 그 역사 역시 그의 업적을 적은 광개토대왕비의 조작설로 인해 그 업적이 가려지거나 왜곡되었을 가능성에 대한 의문이 남아있다.

그리고 도 한 명의 인물 고구려 후기 절대 권력자로 자리했던 연개소문에 대해서도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그동안 연개소문은 부정적 평가가 더 우세했다. 642년 당시 고구려 영류왕과 자신과 대립관계에 있던 대신 100여명을 살해하고 권력을 장악하는 쿠데타를 일으켰고 이후 666년 사망할 때까지 왕을 능가하는 절대 권력을 휘둘렀다. 이 사실만으로 연개소문은 극악무도한 독재자의 이미지가 강했다. 유교적 사고가 정치와 사회 전반을 지배하면서 그의 권력 찬탈 행위는 더 큰 비판의 대상이 됐다. 

 

 

 



하지만 연개소문에 대한 평가는 독재자 외에 다른 입체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당시 시대상과 국제 정제 정치 상황 등을 고찰해야 그에 대한 온전한 평가가 가능하다. 그 과정을 거치면 왜 연개소문이 역사의 악인이 되었는지 최근 재평가를 받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다. 

642년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킨 시점으로 돌아가면 연개소문은 정치적으로 큰 어려움이 처해 있었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고구려에서 권력의 중심부에 자리한 유력 가문이었다. 그의 할아버지 아버지도 고위 관직에 있었다. 당시 고구려는 아버지의 관직과 지위를 사후 그 아들이 이어받는 전통이 있었다. 귀족 연합체로 운영되는 국가 시스템 속에서 각 세력의 기득권을 인정하는 정치 지형이었다. 

연개소문은 그의 아버지 사후 그의 자리를 모두 물려받고 정계에 진출해야 했다. 하지만 다른 관리들과 귀족들의 반대가 컸다. 그의 가문이 그만큼 힘이 강했고 견제를 받았다. 역사서에서는 그의 성격이 포악하여 반대했다고 했지만, 이를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연개소문은 귀족들과 다른 가문에 읍소를 한 후에야 자리를 승계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정치세력들이 그를 강하게 견제하는 상황에서 정치적 입지는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고구려 왕 영류왕과 다른 신하들은 연개소문을 제거하려 했다. 연개소문은 당나라의 침략에 대비해 고구려가 요동지역에 축조하는 천리장성의 건설 책임자로 나설 예정이었다. 이는 그를 중앙 정계에서 멀어지게 하고 추후 제거를 원활하게 하기 위한 일종의 음모였다. 이에 연개소문은 먼저 행동에 나섰다.

그는 그의 군사들의 사열식을 이유로 연회를 열었다. 다수의 관리들과 귀족들을 초청했다. 그 자리에서 연개소문은 반대파를 모두 살해했다. 기록에 따라 다르지만 그 수는 100명을 크게 넘어섰다. 연개소문은 이에 그치지 않고 고구려 영류왕까지 살해하며 권력을 장악했다. 유혈 쿠데타였다. 이제 고구려에서 그를 막아설 이는 없었다. 연개소문은 영류왕의 조카를 왕으로 옹립했다. 고구려 마지막 왕 보장왕이었다. 이후 연개소문은 최고위 관직을 마들어 스스로 대막리지가 되어 조정의 모든 실권을 장악했다.

642년 일어난 일이었다.  연개소문은 고구려 역사를 통틀어 가장 강한 힘을 가진 권력자였다. 하지만 여전히 지역의 귀족과 가문들의 힘이 강했고 요동 지역의 성주들을 중세 영주와 같이 지역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중앙 정치는 연개소문이 장악했지만, 그의 권력이 지속 가능한 권력이 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벽이 있었다. 대외 현안도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수나라를 밀어내고 중국을 장악한 당나라,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는 백제 신라와의 관계 설정이 필요했다. 당나라는 왕조 초기 혼란이 수습된 이후 대외 확장을 활발히 전개했고 그들 나라 주변의 이민족들을 차례로 정복했다.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고 중국에 사대하지 않는 고구려 역시 정복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당나라는 수나라의 멸망 원인 중 하나였던 고구려 정벌 실패의 역사를 알고 있었다. 당나라는 서두르지 않았다. 

마침 고구려 영류왕은 보다 유화적인 대외 정책을 지속했고 당나라와의 관계도 온건노선을 지속했다. 이에 형식적이지만, 당나라의 책봉을 받는 등의 사대 관계를 유지했다. 당나라에서 유행하던 도교를 받아들이기도 했다. 물론, 그 이면에는 당나라의 침략에 대비한 천리장성 구축 등의 조치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고구려 조정의 노선 변화는 강경파 세력에 큰 반발을 불러왔다. 수나라와의 전쟁 등을 통해 그 세력이 강해진 군부에서는 이런 외교가 달갑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정치적 대립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연개소문은 이런 대외 강경파로 그 세력을 대표하고 있었다. 이런 강경 노선이 당나라와의 대립을 심화시켰다. 연개소문은 집권 초기 도교를 더 활성화하는 등의 대 당나라 유화책을 펼치기도 했지만, 그 이면에는 고구려 내에서 그 세력이 큰 불교 세력의 견제 의미도 강했다. 

이런 상황에 대외적 변수가 발생했다. 당나라의 3대 황제 즉위하면서 당나라의 고구려 침략이 본격화됐다. 당 태종은 연개소문의 권력 찬탈을 이유로 들었다. 물론, 내정 간섭이었고 고구려를 그들의 속국으로 보는 명분이었다. 그것이 아니었다 해도 당나라의 고구려 침략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나라와의 긴장이 고조되는 사이 신라에서는 고구려와의 동맹을 요청했다. 신라의 유력 정치인 김춘추가 사신으로 연개소문을 찾았다. 당시 신라는 의자왕의 백제에 영토 내 수십 개 성을 빼앗기는 등 큰 압박을 받고 있었다. 수도 경주로 가는 길목의 요충지 지금의 경남 합천 지역의 대야성마저 백제에 점령당하면서 나라 전체에 큰 위기감이 형성됐다. 만약, 백제와 고구려가 연합해 신라를 압박한다면 신라는 국가 존립의 위기로 이어질 수 있었다.

 

 

 



김춘추는 먼저 움직여 고구려 실력자 연개소문을 만났다. 김춘추는 신라와 고구려가 연합해 백제를 공격하기를 청했다. 김춘추는 대야성 전투에서 그의 사위와 딸이 백제군에 전사하는 아픔이 있었고 백제에 대한 원한이 매우 컸다. 이런 개인적 원한 외에도 신라로서는 고구려, 백제의 연합을 막아야 했다. 연개소문의 고구려는 이에 대해 신라가 점령하고 있는 한강 유역을 고구려에 돌려준다면 연합에 응하겠다고 했다. 사실상의 거부 표시였다. 

한강 유역은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고 신라가 당나라 등 대외 교류를 위해 꼭 지켜야 하는 곳이었다. 결국, 협상은 결렬됐고 신라는 당나라와의 연합에 온 힘을 다하게 됐다. 연개소문으로서는 아직 권력을 장악한지 얼마 안 되는 시점에 오랜 세월 적대관계였던 신라와 연합을 하기는 부담이 있었다. 또한, 자신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더 강경한 대외 정책을 보였을 수도 있다. 이미 고구려와 신라는 한강 유역 등의 패권을 놓고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고 수많은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신라에 대한 신뢰가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당나라와의 전쟁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신라와의 연합은 후방의 안전을 도모할 수 있는 일이기도 했지만, 신라는 고구려와 수나라와의 전쟁 시 고구려 영토를 공격해 장악한 전력이 있었다. 신라와의 연합이 안전을 도모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지 못했을 가능성도 크다. 대신 고구려는 신라를 강하게 압박하던 백제와 연합해 신라가 장악한 한강 유역을 공격했다. 백제 역시 고구려와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았지만, 양국의 이해가 맞아떨어졌다. 신라는 나라의 존립을 위해 더 필사적으로 당나라와의 연합에 매달려야 했다. 이는 나당연합으로 이어졌다. 

이 지점에서 만약 그때 연개소문이 외교술을 발휘해 신라와 원만한 관계를 만들었다면 하는 가정이 생긴다. 결과적으로 나당 연합은 백제에 이어 고구려의 멸망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 연합으로 고구려는 북쪽과 남쪽에서 적을 맞이해야 했다. 고구려로서는 백제의 멸망을 고려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신라를 궁지에 몰아넣었던 백제가 그렇게 쉽게 멸망할 것이라는 예상을 하기 어려운 상항이기도 했다. 하지만 적절한 등거리 외교로 삼국의 균형을 맞추는 시도를 하지 못한 건 결과론이지만, 외교적 아쉬움이었다. 

이런 신라, 백제와의 관계 설정 이후 고구려는 당나라의 전면전에 들어갔다. 645년 당 태종이 이끄는 수십만의 정예 부대가 고구려를 침략했다. 1차 고당 전쟁의 시작이었다. 당태종의 당나라 군대는 그 수가 수나라의 고구려 침략 때보다 적었지만, 훨씬 체계적으로 운용되는 정예군대였다. 고구려 성을 대비한 최신의 공성무기도 갖추고 있었다. 당태종의 군대는 철옹성 같았던 고구려 요동지역의 성을 차례로 점령했다. 

특히, 요동지역의 중요 거점이었고 가장 큰 성이었던 요동성의 함락은 고구려에 큰 충격이었다. 당나라 군은 요동성을 점령과 함께 수많은 포로와 수십만석의 군량미를 확보할 수 있었다. 요동 방어선의 핵심을 잃어버린 고구려로서는 전쟁의 주도권을 내줘야 했다. 기세가 한층 오른 당나라 군은 인근 성을 차례로 장악하며 고구려 평양성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들의 진군은 안시성에 막혔다. 당나라 군은 천혜의 요새인 안시성의 입지와 민관군이 함께 하는 강력한 저항에 직면했다. 이 안시성을 구원하기 위해 고구려의 대규모 군대가 향하기도 했지만, 그 군대는 미숙한 전술 탓에 당나라 군에 패퇴했고 안시성은 고립상태에 빠졌다. 그럼에도 안시성의 항전은 이어졌다.

당나라 군 일각에서는 안시성을 우회해 평양성으로 향하는 방법을 논의하기도 했지만, 이는 자칫 후방을 공략당할 위험이 있었고 명분이 떨어지는 일이었다. 전투는 지속됐다. 당태종이 야심 차게 건설했던 토성마저 고구려 군에 장악되자 당나라는 더는 싸울 의지를 잃었다.

수개월에 걸친 전투로 당나라 군의 보급에도 차질이 생겼고 추운 겨울이 찾아올 시점이었다. 결국, 당태종은 철수를 명령했다. 어떤 역사에서는 당태종이 철수하면서 안시성의 성주에 비단을 선물하며 경의를 표했다는 기록도 있지만, 그 진위를 확인하긴 어렵다.

그만큼 안시성의 항전은 위대했다. 안시성은 연개소문이 고구려 권력을 장악할 당시 그에 반대해 대립했던 곳이었다. 하지만 외침에는 한마음으로 맞섰다. 실패했지만, 연개소문은 안시성의 지원을 위해 대군을 파견하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당시 성주와 관련한 정부는 거의 없다. 양만춘이라는 이름도 훗날 한 책에서 나온 이름이다. 

이 안시성 전투의 결과는 1차 고당 전쟁을 고구려의 승리로 이끌었다. 일부 역사서 등에는 당나라의 패전이 그 극적으로 그려졌는데 일설에는 당나라 군을 추격한 고구려 군이 지금의 북경지역까지 당태종을 추격했다고 전해진다. 중국 역사서에서는 당나라 군의 철수 시 긴 늪지대를 건너게 됐는데, 당태종이 늪지대 통과를 위한 임시 통로 부설 시 직접 참여해 일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들의 철수 상황이 여유롭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연개소문이 무시무시한 존재로 그려지는 경극이 있는데 이는 1차 고당 전쟁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많다. 그만큼 1차 고당 전쟁을 통해 연개소문은 당나라에서 그 존재감이 뚜렸해졌다. 

이렇게 큰 위기를 넘겼지만, 고당 전쟁은 끝이 아니었다. 당태종과 그의 사후 왕위를 계승한 아들 당이 고종에 이르기까지 당나라는 지속적으로 고구려를 침략했다. 나당 연합은 점점 고구려에 큰 위협이 됐다. 지속적인 전쟁으로 고구려의 국력도 소진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연개소문의 고구려는 항전을 멈추지 않았다. 당나라는 전면전 대신 국지전을 지속하면서 고구려의 힘을 빼는 전략으로 맞섰다. 

그 사이 국제 정세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660년 나당 연합군은 백제를 침공했고 백제는 나당 연합군에 멸망당했다. 한때 신라를 크게 위협하며 위세를 떨쳤던 백제였지만, 의자왕의 실정과 지도층의 분열이 겹치며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지 못했다. 백제의 멸망은 고구려에게는 외교적 고립으로 이어졌다. 고구려는 당나라와 신라의 침략을 모두 대비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당나라는 백제를 멸망시킬 때 활용했던 대규모 상륙전을 고구려 침략에도 적용했다. 강력한 요동 방어선을 돌파하기 보다 대군을 고구려 수도 평양성으로 상륙시켜 도성을 장악하는 전략이 이후 고당 전쟁에서 활용됐다. 이 대규모 상륙전은 660년 2차 고당 전쟁에서 현실이 됐다.

압록강 하구로 상륙한 당나라 군은 연개소문의 첫째 아들 연남생의 군대를 격파하고 평양성으로 진군해 포위했다. 수도를 직접 노린 당나라 대군과 연남생의 패전, 고구려의 위기였다. 하지만 고구려에는 연개소문이 있었다. 연개소문은 전쟁을 장기전으로 이끌었다. 당나라 군은 장기전에 대비하지 못했고 보급에 큰 어려움이 발생했다. 여기에 혹독한 추위가 닥쳐왔다. 당나라 군에게 고구려 군과 추위라는 또 다른 적이 생겼다.

연개소문은 한 편으로 당나라 내 이민족과 교류하며 그들의 거병을 유도했다. 대군이 고구려에 발이 묶인 상화에서 이민족의 반란은 당나라에는 큰 위기였다. 고구려 침략군 상당수가 급히 철수했고 남아있던 부대는 고구려의 반격에 전멸했다. 당나라 군은 이끌었던 장군과 아들들로 모두 몰살당했다. 평양성 전투, 사수대첩이라 불리는 이 전투는 2차 고당 전쟁을 고구려의 승리로 이끌었다.

이후에도 당나라는 지속적으로 고구려를 침공했지만, 성과가 없었다. 그만큼 고구려는 강했고 끈질겼다. 당나라는 고구려를 정복할 수 없는 존재로 인정하고 화해의 손짓을 내밀기도 했다. 이렇게 고구려의 역사는 계속 이어지는 듯 보였다.

하지만 666년 연개소문이 사망하면서 고구려에 암운이 드리워졌다. 절대 권력자의 사망은 필연적으로 내부 권력 투쟁을 불러온다. 고구려도 마찬가지였다. 연개소문은 그의 집권 시 권력을 자신과 가족들이 독점하도록 했다. 이런 권력의 집중은 권력을 지키는데 유용했지만, 내부적 불만을 가중시키고 정치 상황 변동 시 큰 혼란을 불러올 수 있었다. 연개소문도 그런 걱정이 있었는지 그는 마지막 유언으로 연남생을 포함해 그의 자리를 물려받을 3형제의 단합과 우애를 당부했다.

그의 당부와 달리 이들 3형제는 극심한 권력 투쟁을 시작했다. 주변 세력들 역시 분란을 조장했다. 이런 내분은 고구려의 국력은 급격히 쇠약하게 만들었다. 권력투쟁에서 밀린 연남생은 정치적 재기가 어려워진 상황에서 당나라에 투항해 나라를 배신하고 말았다. 연남생과 그를 따르는 세력은 그들의 칼날을 고구려로 돌렸다. 견고하던 요동 방어선의 성 일부도 이에 가세했다. 당나라는 요동에 그들의 근거지를 마련하고 고구려를 침략할 수 있었다. 이어 더해 연개소문의 동생이었던 연정토가 그를 따르는 세려과 고을을 이끌고 신라에 투항하며 고구려의 내분은 더 커졌다. 

 

 

 



668년 나당 연합군의 고구려 침공이 시작됐다. 나당 연합군은 이전보다 수월하게 평양성을 포위 공격했다. 고구려는 강하게 저항했지만, 대세는 이미 기울었다. 결국, 중국과 당당히 맞서며 만주지역을 호령하던 700년 역사의 고구려는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 멸망이 지도층의 내분이었다는 점은 안타까운 일이다.

이를 두고 연개소문의 독재정치가 이런 내분의 원인이 되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실제 연개소문 권력을 사유화했고 국가 운영 시스템을 왜곡했다. 당나라의 전쟁을 효율적으로 대비하는 측면도 있겠지만, 그 효율성은 강한 권력의 힘에 의한 것이었고 그 힘이 사라졌을 때 시스템이 무너질 수 있는 위험성이 있었다. 그의 사후 지도층의 내분은 3형제의 대립이기도 했지만, 억눌린 불만의 표출이었다. 3형제의 분란이 없었다 해도 연개소문 세력에 반대하는 세력들과의 대립이 일어날 수 있었다. 

결국, 연개소문은 2차례 고당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웅이기도 했지만, 고구려의 멸망을 불러온 원흉이라는 비판을 함께 받을 수밖에 없다. 그가 집권 시 보다 유연한 정치력을 발휘해 국가를 통합하고 정상적인 국가 운영 시스템을 만들었다면, 후계 구도를 명확히 하고 안정화시켰다면, 고구려의 운명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결과를 가지고 말하는 결과론이다. 연개소문에 대한 평가는 보다 않은 연구와 필요하다. 그를 영웅으로 악인으로 규정하기에는 당시 고구려의 정세와 대외 상황이 복잡하다. 그는 치열한 권력 투쟁에서 승리했고 중국의 침략을 막아낸 인물임에 틀림없다.

독립운동가이자 사학자인 신채호는 그의 역사서 조선 상고사에서 연개소문을 혁명가로 또 다른 독립운동가이자 역사학자인 박은식 역시 연개소문을 독립 자주의 정신을 가진 우리 역사상의 일인자로 평가했다. 중국 사료에 근거한 우리 역사서에서 부정적 평가와 결이 다르다. 시대상에 따라 연구에 따라 인물에 대한 평가가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앞으로 고구려 역사가 보다 체계적이고 상세히 이루어져 연개소문의 평가에 필요한 객관적 사료가 많이 나오길 기대해 본다. 



사진,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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