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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8월 15일은 77주년 광복절이다. 광복절은 한자어로 빛을 되찾는다로 해석할 수 있다. 나라의 국권을 일제에 의해 완전히 상실한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일 이후 35년간 지속되어온 일제 강점기 역사가 마침내 끝나는 순간이 1945년 8월 15일이었다.

일제 식민지 역사는 우리 민족에는 암흑의 시간이었다. 우리 말과 글, 문화, 전통 모든 것이 말살되고 일제의 억압과 수탈의 시간을 보내야 했던 우리 민족이었다. 일제는 독일, 이탈리아 두 전범국과 연합해 제2차 세계대전의 원흉이 됐다. 중일 전쟁에 이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며 침략 야욕을 드러냈다. 이는 무모한 전쟁이었다.

일제는 전쟁 수행을 위해 국가 총동원령이라는 미명 하에 식민지 조선의 인적, 물적 수탈을 심화했다. 조선에는 나는 쌀은 군량미로 놋그릇과 제기 등 일상품은 무기 재료로 소나무 송진도 기름 추출을 위해 수탈의 대상이 됐다. 많은 사람들이 강제 징용으로 병사에 전장에 끌려갔고 강제 노역에 시달렸다. 여성들은 위안부로 끌려가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받았다. 조선 땅에 남아 있는 이들도 계속된 수탈에 삶이 피폐해지고 빈곤 상태에 빠졌다. 

그럼에도 전세는 점점 일제의 패망으로 기울어져갔다. 일제는 마지막까지 저항했다. 조선 역시 일제의 병참 기지를 넘어 일본 본토를 방어하는 요새로 변모했다. 곳곳에 지하 군사시설과 병참 시설이 지어졌다. 그 흔적은 제주와 인천 등에 아직도 남아있다.

하지만 일본은 미국에 의해 두 번의 원폭 공격을 받았고 소련이 본격적으로 아시아 전선에 참전하면서 더는 버틸 수 없었다. 1945년 8월 15일 중대 발표가 있을 것이라는 발표가 있었다. 마침 히로시마 원폭 당시 피폭되어 사망한 조선 이우 왕자의 시신이 국내로 돌아와 장례식이 열리는 날이었다. 일제는 그 장례식을 연기했다. 그만큼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드디어 정오 일왕의 항복 발표가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왔다. 마침내 일제 강점기의 역사가 끝나는 순간이었다. 

 

 

광복 다음 날 서대문 형무소를 나온 독립운동가 환영인파

 



이 순간 수많은 국민들이 거리로 나와 독립만세를 외치며 거리를 가득 메우는 게 보통이라 할 수 있었다. 수많은 인파가 모여 환호하는 사진 기록도 남아있다. 실상은 그와 달랐다. 1945년 8월 5일 당일, 서울의 거리를 여느 때와 같이 조용하고 평온했다. 광복의 기쁨으로 가득한 풍경과는 거리가 있었다. 

이유가 있었다. 당시 라디오는 부유층의 전유물이었다. 일반 국민들이 라디오를 접하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일왕의 발표 내용을 들을 수 있는 이들이 제한적이었다. 또한, 일왕의 발표 내용도 명확하지 않았다. 무조건 항복을 했다고 했지만, 실상은 그 의미가 애매모호한 문어체 표현으로 내용을 발표했다. 일본인들조차 그 뜻을 파악하기 어려웠다. 연합국의 공동선언을 수락한다는 일왕의 말의 진위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결국, 광복절 당일 수도 서울과 한반도 일상은 이전과 다르지 않았다. 

이런 평온함에 속에 분주한 일들이 있었다. 일제 총독부와 일본군,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이었다. 일제의 패망과 함께 그들은 당장 그들의 안위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였다. 이미 연합국의 일원인 소련의 군대는 한반도에 진입해 남하를 지속하고 있었고 미군의 진입도 얼마 남지 않았다.

여기에 광복 사실을 인지한 조선인들의 일본인들에 대한 보복도 문제였다. 실제 광복 후 조선인들의 일본인과 일제의 앞잡이로 악행을 저지른 친일 경찰 등 민족 반역자들에 대한 보복이 곳곳에서 있었다. 조선의 일본인들에게는 가능한 빠르게 안전하게 그리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재산을 유지하며 본국으로 돌아가는 일이 급선무였다.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본국의 지침이나 훈령도 전달되지 않았다. 두 방의 원폭을 맞고 급히 항복한 일본 정부는 식민지 조선에 대한 조치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이끌었던 독립운동가 여운형

 



이에 조선 총독부가 빠르게 움직였다. 1945년 8월 15일 오전, 총독부의 고위 인사가 국내에서 가장 큰 신망을 얻고 있는 민족 지도자 여운형과 면담했다. 총독부로서는 광복 후 조선인들의 보복을 피해 일본인들이 무사히 귀환하기를 원했고 조선인들의 보복을 막고 일본인들의 안전한 귀환에 협조해 줄 민족 지도가가 필요했다.

이에 여운형은 총독부의 제안을 수용하는 한편 그에 필요한 요구 조건을 제시했다. 중요한 내용은 전국적으로 정치, 경제범, 일제에 저항하는 독립운동가들의 석방과 함께 서울에 3개월 분의 식량 공급, 건국을 준비하는 정치활동이나 학생과 농민, 노동자 청년 등의 활동과 결사를 방해하지 말 것이 주 내용이었다. 

일제는 여운형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여운형은 이미 해방 전 조직해 준 비밀 결사조직 조선 건국동맹을 기반으로 8월 15일 저녁,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발족해 활동에 들어갔다. 줄여서 건준이라 불렸던 이 조직은 전국 곳곳에 지부가 있었고 행정과 치안의 업무를 담당했다. 아울러 일제가 장악했던 방송과 언론의 기능도 정상화했다. 

1945년 8월 16일 아침, 독립운동가들에게 악명 높았던 일제 강점기 억압의 상징인 서대문 형무소의 문이 열렸다. 그곳에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형무소를 나와 그들을 기다리던 가족과 지인들과 재회했다. 석방된 독립운동가와 그들을 환영하는 인파는 시내로 행진했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해방이 된 다음날 마침내 대한독립만세를 국민들이 외칠 수 있었다. 그 소문은 삽시간에 서울과 지방으로 퍼져 나갔다. 건준에서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 광복의 사실을 알렸다. 전국 각지에서 만세 행렬이 만들어졌다. 

1919년 3월 1일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독립의 의지를 전 세계에 알렸던 국민들이 35년이 지나 마침내 해방된 조국에서 대한독립 만세를 외칠 수 있었다. 그 시기 국민들은 새로운 나라에 대한 기대와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이렇게 일제의 패망과 해방의 사실이 알려지면서 조선에 있는 일본인들은 그 급해졌다. 건준을 중심으로 치안과 행정이 유지된다고 했지만, 한계가 있었다. 일본인들의 친일 경찰 등 일제 앞잡이들에 대한 보복이 잇따랐다. 이때 데 일제 경찰 조직에 있던 상당수 조선인들이 몸을 숨겨야 했다. 

 

 

건국준비위원회 명단 발표한 신문기사

 



일본인들은 급히 그들이 돈을 현금화하기 위해 은행으로 몰려들었다. 대량 인출 사태, 뱅크런이 일어났다. 이에 총독부는 사태를 진정하기 보다 대량의 화폐를 발권하여 그 수요를 충족시키려 했다. 통화량의 급격한 증가는 물가 상승을 불러왔다. 이미 전쟁 과정에서 물자 부족 현상이 심각한 조선이었다. 엄청난 인플레이션이 국민들의 삶을 더 힘들게 했다. 

여기에 애초 총독부의 약속과 달리 건준을 포함한 한국인들에 의한 행정과 치안 유지도 혼선이 발생했다. 조선에 주둔하고 있었던 일본군이 이에 반발했다. 미군이 아직 들어오지 않은 상황에서 일본군은 여전히 중무장을 하고 있었고 무력으로 상황을 통제하려 했다.

일본군은 다시 언론과 방송국을 장악했고 조선인들에 대한 경고를 담은 유인물을 지속적으로 살포하는 등의 여론전을 전개하기도 했다. 그렇게 일본군은 힘으로 치안유지권을 가져왔다. 그들은 논란을 피하기 위해 경찰과 함께 치안유지권이 있는 헌병들을 동원했다. 일본군은 헌병의 수를 급격히 늘려 치안을 유지했다. 패전국 일본이 여전히 조선을 지배하는 상황이 연출됐다. 한편 지방에서는 건준을 중심으로 한국인들의 행정과 치안유지의 역할을 유지하는 상황이었다. 행정과 치안 관련 업무가 이원화되는 혼선이 벌어지며 혼란이 가중됐다. 

이런 혼돈의 한반도 상황 속에 일본에서 귀국하려는 조선인들이 줄을 이었다. 수십만 명의 일본, 그리고 동남아시아 등 해외 조선인들이 귀국길에 올랐다. 대부분은 전쟁 과정에서 강제 징용되어 병사로 노동자로 일했던 이들이었다. 그들은 비인간적이고 열악한 대우를 받으며 힘겹게 하루하루를 견디다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 귀국길에 큰 비극이 발생했다. 1945년 8월 24일 8천여 명의 조선인들을 태운 일본의 수송선 우키시마호가 일본 바다에서 폭파되어 침몰했다. 이 일로 수천 명의 조선인들이 사망했다. 일본은 이 사건을 미군의 기뢰에 의한 폭침이라고 발표했지만, 실상은 그와 달랐다.

훗날 우키시마호를 인양해 조사해 본 결과 폭파는 외력이 아닌 내부에서의 폭발이었고 이에 고의 폭침설이 힘을 얻었다. 일본의 군사시설 등 건설에 주로 동원했다 강제 징용자들이 일본의 군사기밀을 누설할 수 있어 그들을 수장하려 했다는 주장도 있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이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 생사를 오가는 고통을 견디며 귀향길에 올랐던 조선인들의 원통한 죽음이었다. 우리를 더 분노하게 하는 건 일본이 침몰한 우키시마호를 인양한 이유가 그 고철을 한국에 수출하기 위함이었다는 사실이었다. 이렇게 일제는 패전 이후에도 반성과 사죄는 없었고 여전히 우리 민족을 억압하고 있었다. 

결국, 총독부는 미군이 한반도에 진입한 9월 초까지 조선의 통치권을 사실상 유지했다. 한반도에서 소련의 빠른 세력 확대를 경계한 미국은 38도 선을 경계로 한반도의 분할 점령을 소련에 제안했고 소련도 이를 받아들였다. 군사적 목적에 의해 그어진 38도 선이 결과적으로 한반도 분단의 시작이었다. 

 

 

대한민국 공군의 시작, 미주 한인비행학교 자료

 



미국은 안심할 수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빠르게 재편된 국제질서와 냉전 체제 속에 미국인 공산주의 세력의 확대를 막아야 했다. 한반도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 미군의 빠른 진입이 필요했지만, 일본을 점령한 미국은 일본 내 상황 정리로 소련보다 한반도 진입 시기가 늦어졌다. 그 사이 38도 선 이하의 상황을 통제할 세력이 필요했다. 이에 일본은 조선 내부 정보를 미국에 제공하고 소련의 남하 가능성을 언급하며 미국의 신뢰를 얻었다. 

미국은 그들의 한반도에 진입하기 이전에 38도 선 아래 지역의 통제권을 일본군이 유지하도록 용인했다. 미국은 일본군이 중심이 된 치안, 행정 시스템을 유지하도록 했다. 이는 범죄의 가해자가 피해자를 통제하는 일이었다. 그러면서 미국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등 조선인들의 자치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미군이 한반도에 진입한 9월 8일까지 38도 선 이남 지역은 일제 강점기가 지속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심지어 일본군은 9월 8일 인천항에 입성한 미군을 환영하는 조선인들을 향해 질서 유지라는 명목으로 총을 난사하며 민간인이 사망하는 사건도 일어났다. 이에 미국인 일본군의 행위를 지지하며 패전국 일본과의 돈독한 모습을 보였다. 미국에 조선 주둔 일본군은 38도 선 이남 남한 지역의 원활한 점령과 통치를 위한 협력자였다. 38도 선 이북을 점령한 소련이 일본군들의 무장을 즉시 해제하고 상당수를 시베리아 지역에서 강제 노역을 하게 하는 등 강하게 대응했던 것과는 크게 대조적이었다. 

이렇게 일본군의 협조 속에 남한에 진입한 미군은 곧바로 미 군정을 실시해 남한을 통치했다. 1945년 9월 9일 총독부에서는 별도의 항복 조인식이 있었고 일제는 그제서야 한반도에 대한 통치를 끝냈다. 그렇게 일제 강점기는 끝났지만, 그 자리는 미 군정이 대신했다. 이후 조선의 일본인들은 1945년 말까지 대부분이 편안히 일본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역사상 가장 평화로운 패전국의 귀환이었다.

이렇게 1945년 8월 15일은 진정한 해방이 아니었다. 해당된 당일 우리 민족은 그 사실을 알 수 없었고 다음날이 돼서야 입에서 입으로 그 사실이 알려져 환호할 수 있었다. 그 누구의 말처럼 도둑처럼 찾아온 광복이었다. 그렇게 나라를 되찾았지만, 우리 민족은 우리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었다. 민족을 대표하는 임시정부와 국내 자치 조직이 그 정당성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중국에 있던 임시정부 인사들은 모두 개인 자격으로 국내로 돌아와야 했다. 남한을 통치한 미 군정은 민족 지도자들과 독립운동 세력들의 정치활동만을 허용했다. 

 

 

국외 항일 독립운동가들

 



광복군의 국내 진공을 작전을 준비하던 임시정부 지도자 김구 선생이 일본의 항복 소식을 듣고 기쁘기보다는 복합한 심경을 보인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김구 선생은 임시정부가 승전국의 지위를 얻고 국제적으로 그 지위를 인정받길 원했다. 국내 진공작전은 소중한 기회였지만, 그 기회가 살라졌다.

해방 후 발생한 권력의 공백을 우리 민족 지도자들이 채울 수 없었다. 미 군정이 실시되기 전까지 일제가 그 역할을 대신했다. 일제는 패전국이 아닌 정권의 인수 인계자로 조선에 남을 수 있었다. 그 사이 친일파 세력들은 친미 반공의 깃발을 들고 기사회생의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친일 세력들은 이후 미 군정과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도 사회 각 분야의 지도층으로 자리하며 일제 강점기 쌓아온 부와 명예를 대대손손 유지할 수 있었다. 그렇게 무너진 정의는 지금까지 우리 사회의 큰 짐이 되고 있다. 도둑처럼 찾아온 광복이 결과적으로 진짜 도둑들을 살려주고 말았다. 

해방 후 우리 민족은 미. 소 냉전 시대의 최전선에서 강한 좌. 우 이념 대결 속에 남북 분단을 맞이했고 6.25 한국전쟁의 민족적 비극이 더해지며 남북 분단이 고착되고 말았다. 지금도 남. 북은 군사적 대립을 지속하고 있다. 1945년 8월 15일 당일, 마음껏 외치지 못했던 대한독립 만세의 장면은 어쩌면 우리 민족의 또 다른 비극을 예고하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이 점에서 광복절은 다양한 관점에서 그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 민족이 하나가 되고 함께 대한독립 만세를 외칠 수 있는 날이 찾아오기를 소망해 본다. 

 


사진 : 나무위키/ 지후니 74,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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