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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5월 23일 정말 상상하지 못했던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2003년 3월부터 2008년 2월까지 제16대 대통령을 역임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극단적인 선택을 했고 서거했다는 뉴스가 속보로 전해졌다. 온 국민은 큰 충격에 휩싸였다. 

그는 당시 검찰에 의해 수사를 받고 있었다. 박연차 게이트라 불리는 검찰의 수사에서 그는 포괄적 뇌물죄를 적용받았고 검찰은 그를 소환 조사했다. 전두환, 노태우에 이어 전직 대통령으로서는 3번째 검찰 소환 조사였다. 누구보다 소탈했고 서민 대통령의 이미지가 강했던 노무현, 이전 대통령과 달리 고도의 도덕성을 장점으로 했던 그가 뇌물죄로 수사를 받고 구속 및 기소될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은 온 나라를 들썩이게 했다. 

그가 퇴임 후 머물던 김해 봉하마을 자택은 그의 일거수 일투적을 보도하려는 방송국과 언론사 기자들과 관계자들로 붐볐다. 노무현은 자택에 칩거했다. 언론에서는 선정적 보도가 잇따랐다.  어느 순간 정치의 중심에 다시 섰다. 이는 그가 원했던 삶이 아니었다.

그는 시골의 농부로 살고 싶었다. 이에 노무현은 퇴임 후 이례적으로 그의 고향으로 돌아가 지역사회 발전을 위한 사회 활동가로 제2의 인생을 살았다. 이런 모습과 그의 소탈하고 인간적인 이미지는 재임 당시 대통령으로서 품격이 떨어진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전직 대통령이 된 노무현의 그런 이미지는 국민들에게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가 머물던 김해 봉하마을을 그를 만나기 위해 보기 위해 찾는 이들로 북적였다. 그는 틈만 나면 방문자들과 만
나 소통하는 시간을 가졌다. 방문자들을 그를 보고 반가워했고 열광했다. 그는 재임 후반기 심각한 지지율 하락을 경험했다. 가장 인기 없는 대통령이었던 노무현이었지만, 그는 퇴임 후 인기가 상승하는 기 현상을 보였다. 기존 전직 대통령에게는 볼 수 없었던 일이었다. 김해 봉하마을은 지역의 새로운 명소가 됐다. 

 

환하게 웃고 있는 노무현의 초상화

 

덕수궁 앞 시민 분향소로 향하는 길에 있던 추모 리본

 


하지만 이런 현상은 큰 비극의 서막이었다. 노무현 정권에 이어 집권한 이명박 정권은 집권 초기 인사 난맥상에 광우병 파동을 겪으며 심각한 민심 이반을 겪었다. 정권에 대한 지지율도 급락했다. 이런 상황이라면 국민과 소통하고 국민의 뜻에 부합하는 정책을 펼치고 국정의 성과를 내는 게 가장 좋은 수습책이었다. 이명박 정권의 생각은 달라 보였다. 전 정권에 대한 수사가 전방위적으로 이루어졌고 노무현 전 대통령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느 순간 노무현 대통령에는 뇌물죄가 적용됐다. 검찰의 수사 상황은 시시각각 언론에 보도됐다. 수사의 내용은 아주 상세히 뉴스로 전해졌다. 언론 보도가 노무현의 뇌물 혐의 관련 소식으로 채워졌다. 이에 노무현은 국민들과의 소통의 창을 닫았고 칩거에 들어갔다. 검찰의 소환 조사를 받으러 온 그의 얼굴에는 고단함과  어둠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직접 소환 조사가 있을지 얼마 후 그의 서거 소식이 들렸다. 

과거는 그는 자신의 뜻을 위해 온 힘을 다하는 정치인이었고 계속된 실패에도 좌절하지 않는 강한 의지의 정치인이었다. 실패는 그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고 어려운 길을 자초했다. 그는 모든 사안에 직접 나서 싸웠다. 마치 로마시대 검투사처럼 그는 싸움을 피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소식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라는 깊은 슬픔과 한편에서는 분노로 가득했다.

노무현은 재임 시절 극단적인 여소 야대의 정국 속에 국회로부터 탄핵을 당하고 직무가 수개월간 정지되는 우여곡절이 있었다. 탄핵이 헌법 재판소에서 기각되고 총선에서 그가 만든 여당이 승리하며 복귀했지만, 그의 정치 여정을 여전히 가시밭길이었다. 그가 화려했던 개혁 정책들은 기득권 세력의 저항 속에 잇따라 좌초하거나 변질됐다.

 

시민 분향소로 향하던 행렬



그가 대선 공약으로 내세웠고 야심 차게 추진했던 행정수도 건설 계획도 헌재의 희대의 관습 헌법 위헌 판결로 그 규모가 크게 축소됐다. 헌재의 판결이 없었다면 지금의 대통령 집무실과 관저, 국회, 대부분의 행정부는 지금 세종시에 자리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 외에도 각종 법 개정과 과거사 청산 등의 노력 모두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의 지지세력들은 이에 실망했고 기득권 세력들은 그들대로 그들의 이익을 침해하는 시도에 강력히 저항했다. 어느 순간 노무현은 지지자와 반대파 모두에 비난을 받는 상황이 됐다. 

그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헌법개정과 이를 위한 연립내각 구성을 추진하기도 했고 그의 핵심 지지층들이 반대하는 한미 FTA를 강력히 추진하고 협정을 타결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정치와 언론개혁, 권력기관의 개혁을 위한 시도를 자신이 앞장서 추진했다. 하지만 그가 원하는 결과를 모두 얻지 못했다. 

이런 노무현에 대해 언론의 보도와 기사는 비판, 저주에 가까웠다. 여러 방면에 성과가 있었지만, 그 성과가 부정됐다. 모든 잘못된 일은 노무현 탓이었다. 심지어 길을 가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도 노무현 탓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그는 점점 외로운 섬에 고립된 처지가 됐다. 여기에 임기 중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여당이 최악의 참패를 당하면서 노무현의 정치적 영향력은 사실상 사라졌다. 결국, 노무현이 세운 여당은 그를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노무현은 탈당을 강요받았다. 

이는 어쩌면 그의 정치 역정 속에서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노무현은 기존 정치인과 다른 길을 걸었고 우리 정치의 뿌리 깊은 악습인 지역감정 타파를 위해 노력했다. 그는 편한 길을 버리고 험지에서 정치인생의 이력을 쌓았다. 그 덕분에 그는 선거에서 수없이 낙선을 경험했다 정치인 노무현의 이력을 실패의 연속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민주당 정치인들의 무덤이라 할 수 있는 자신의 고향 부산을 떠나지 않았다. 

김대중 정부 시절 해양수산부 장관을 역임하고 종로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며 중앙 정치 무대에서 뜻을 펼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그는 다시 국회의원 선거에서 승산이 희박한 부산 지역구로 출마했다. 결과는 참담한 패배였다. 그의 진심은 강력한 지역주의 앞에 무력했다. 

 

 

노무현을 추모하는 시민들의 글

 

 

종이학

 


이런 노무현을 그를 알아본 국민들이 일으켜 세웠다. 바보같은 정치인 노무현을 위해 최초의 정치인 팬클럽이라 할 수 있는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 '노사모'가 조직되고 그들을 중심으로 노무현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졌고 그에 대항 응원의 목소리가 커졌다. 노무현은 각 정당의 대표나 기득권층에 의해 만들어지는 정치인이 아닌 국민들이 선택하고 지지하는 정치인으로 성장했다. 이렇게 그는 민주당의 차세대 정치인으로 급부상했다. 

그의 기세는 제16대 대통령의 당내 경선에서 절정을 이뤘다. 그는 승산이 없다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큰 돌풍을 일으키며 당내 주류 세력들의 지원을 받는 유력 후보에 승리했다. 선거 패배를 밥 먹듯이 하는 정치인 노무현이 일약 여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국민들이 만든 후보였다. 

노무현은 이후 대통령 선거에서도 불리할 것이라는 전망을 깨고 후보 단일화를 기점으로 상황을 반전시키며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렇게 노무현 대통령의 시대가 열렸다. 노무현 정부는 참여 정부라는 말 그대로 여전히 우리 사회 곳곳에 남아있는 권위주의를 청산하고 보다 열린 정부를 지향했다. 탈 권위와 함께 지역 균형 발전을 강력히 추진했다. 그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노무현으로부터 우리나라 정치는 큰 변화를 맞이했다. 

지금 그는 없다. 2009년 5월 그는 홀연히 세상을 등졌다. 그 이후 세월은 10년을 훌쩍 넘겼지만, 그를 그리워하고 안타까워하는 이들이 많다. 아직도 그를 마음속 대통령으로 담아두고 있는 이들도 많다. 뒤늦게 사람들은 그의 진심을 알았고 그때 그르 지켜주지 못한 걸 후회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시작한 탈권위 정치, 지역주의 탈피의 정치는 이제 여.야를 포함해 정치의 중요한 키워드가 됐다. 아직 영향력이 있지만, 지역감정을 조장하거나 하는 이들은 정치권에서 그 힘을 잃고 있다. 국민들의 여론과 의견을 무시하는 정치인도 살아남기 힘든 상황이 됐다. 국민들이 선거 외에도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정책의 방행을 바꿀 수 있는 세상이 됐다. 국민의 뜻에 반하는 권력에 대해서는 국민들이 나서 질서 있게 그들을 퇴진시킬 수도 있고 얼마 전 우리는 촛불 혁명을 통해 현실로 만들었다.

 

 

시민 분향소, 서울역 분향소

 


민주주의 발전사에서 노무현의 끼친 영향력을 매우 크다. 이제는 그와 대척점에 섰던 정치세력들도 노무현 정신을 말하고 있다. 그의 서거 후 상당 기간 노무현을 추모하고 긍정적으로 말하는 데 큰 용기가 필요했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는 그런 세상은 아니다. 마음껏 그를 추모하고 그의 치적을 말할 수 있다. 노무현에 대한 평가를 보다 객관적으로 할 수 있는 세상이 됐다. 그러기까지 너무 많은 세월이 흘렀다.

지금도 많은 이들을 생각한다. 그가 왜 그렇게 세상을 떠나야 했을까? 이와 관련해 여러 말들이 있고 음모론도 남무했다. 그는 그가 남긴 유서에서 운명이라고 했다. 끊임없이 기득권과 싸웠고 노무현이었다. 어쩌면 그는 끝나지 않는 싸움에 지쳐버렸을지도 모른다. 자신으로 인해 여러 사람들이 고통받는 상황을 끝내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진심이 묻히고 그와 소통하는 이들이 그를 떠나는 상황이 괴로웠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사회가 우리가 그를 극단적 상황으로 몰고 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떠난 후 세상은 그때 보다 나은 세상으로 발전하고 있다. 물론, 아직 노무현이 이루고 싶었던 세상이 현실이 되기에는 더 많은 시련과 시간이 필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를 잊지 않는 건 그가 원했던 세상에 대한 공감과 긍정의 표현이기도 하다. 

우선 우리가 할 일은 그를 추앙하는 것 이전에 그의 진심과 했던 일을 잘 알리고 객관적인 평가를 받게 하는 일이다. 무한 긍정과 무한 부정이 아닌 그가 전직 대통령으로서 정치인으로서의 발자취가 왜곡되지 않고 제대로 알려지는 게 우선이다. 그를 추모하는 날이, 매년 5월 23일이 진영을 떠나 우리 정치의 축제가 될 수 있는 날이 찾아오기를 소망해 본다. 

 

 

 

 

2009년 5월 담았던 멋 모르고 사진이 좋아 담았던 그때 그 사진을 다시 꺼내 보며 노무현의 이름을 소환해 본다. 

 


사진 ,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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