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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고도 성장의 어두웠던 이면 성수대교,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문화/역사

by 지후니74 지후니74 2021. 6. 16.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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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의 아픔과 해방의 감격, 이후 일어난 6.25 한국 전쟁의 어려움, 이승만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주주의를 쟁취한 4.19 혁명, 그 민주주의를 좌초시킨 5.16 군사정변까지 해방 후 대한민국의 현대사는 크고 작은 사건들로 가득했다.

그 사건들을 뒤로하고 대한민국은 1970년대부터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뤄냈다. 군사독재의 그늘 속에서 인권이 경시되고 민주주의의 가치가 크게 훼손되는 문제가 있었지만, 국민들은 더 나은 삶을 위해 더 잘 살아보기 위해 피땀을 흘렸다. 그 결실은 누구도 이루지 못한 산업화로 이어졌다. 1980년 광주민주화 운동의 아픔과 1987년 6월 민주 항쟁을 거치며 군사독재의 그림자를 걷어냈다. 과거의 완전한 단전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그 어떤 신흥국과는 비교가 안되는 민주화도 이뤄냈다.

1988년 사상 처음으로 신흥 개발도상국이자 분단국인 한국에서 개최된 서울 올림픽은 동. 서 냉전의 분위기가 사라진 달라진 세계 질서를 반영한 올림픽이었다. 이전 모스크바 올림픽과 LA 올림픽이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유민주진영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 진영의 대립 속에 반쪽 올림픽이라는 오명을 썼지만, 서울 올림픽은 양 진영이 모두 참가한 명실상부한 세계인의 축제였다. 서울 올림픽으로 한국은 전 세계에 그 이름을 알렸고 나라의 위상을 높일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한국은 경제와 민주주의 발전을 모두 이뤄낸 국가로 자리했다. 선진국의 꿈도 멀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1990년대 접어들며 급속한 산업화의 부작용이 곳곳에서 드러났다. 빠른 성장에 가려져 있었던 각정 부정과 부패구조와 사회 부조리, 안전 불감증이 대형 사고로 이어졌기 때문이었다. 특히, 고도성장기에 이뤄낸 각종 결과물들이 실은 모래성 위에 지은 건물과 같음을 알 수 있었다. 특히, 군사독재를 완전히 종식시키고 들어선 문민정부 시절인 1993년과 1997년 사이 대형사고는 절정을 이뤘고 수없이 많은 무고한 생명이 희생됐다. 

 

재난 관련 일러스트



대표적인 사고는 1994년 10월 21일 발성한 성수대교 붕괴사고와 1995년 6월 29일 발생한 삼풍백화점 붕괴사고가 있었다. 이들 사고 외에도 1993년 3월 78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구포역 열차 전복사고, 1993년 6월 20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연천 예비군 훈련장 폭발사고, 1993년 7월 68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아시아나항공 733편 추락 사고, 1993년 10월 무려 292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서해페리호 침몰사고 1995년 4월 101명이 사망한 대구지하철 사고 등이 있었다. 이에 문민정부는 사고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써야 했다. 

성수대교 붕괴사고와 삼풍백화점 붕괴사고가 더 충격적이었던 건 사고를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한강의 다리와 거대한 백화점이 무너졌다는 데 있었다. 전형적인 후진국형 사고로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는 자부심을 가졌던 국민들의 자긍심에 큰 상처를 남기는 사건이었다. 두 사건은 모두 민과 관이 연결된 비리 구조와 안전불감증, 사람보다 경제적 이익이 우선인 왜곡된 사회 인식이 빚어낸 사고였다. 

성수대교 붕괴사고는 부실시공이 근본 원인이었다. 성수대교는 1970년대 선진 공법이라 여겨졌던 트러스 공법으로 지어졌다. 이 공법은 철저한 관리와 시공이 필요했지만, 시공 당시 세심함이 부족했다. 용접과 볼트 사용에 있어 허점이 있었다. 더 큰 문제는 이 다리를 유지관리하는 부분에 있었다. 1977년 완공된 성수 대표는 이후 제대로 된 안전점검을 받지 않았다. 당시 성수대교는 개발 열풍 속에 신흥 부촌으로 자리한 서울 강남지역과 강북을 연결하는 다리로 그 통행량이 급속히 증가했다. 이는 애초 설계 시 설정한 통행량의 한도를 초과했지만, 이에 필요한 보강조치나 안전 관리가 부실했다. 여기에 18톤까지 규정한 하중을 무시하고 25톤 이상의 대형 덤프트럭들이 수시로 통행하면서 다리에 지속적인 무리를 줬다. 

이렇게 피로가 누적된 다리는 그 사용연한이 크게 축소될 수밖에 없었지만, 적절한 조치가 없었다. 사고가 임박한 시점에 상판을 철판으로 임시로 연결하는 등 미봉책으로 일관했다. 애초 부실시공된 다리와 부실한 관리는 대형 사고의 시계를 앞당겼다. 사고가 발생하기 전부터 언론을 통해 한강 교량에 대한 안전 문제가 이슈가 됐지만, 경각심을 가지는 이들이 없었다. 사고 당일인 1994년 10월 21일 새벽에도 시간에 다리를 지나는 운전자들이 위험을 감지하고 신고를 하기도 했지만, 조치는 없었다. 그때라도 통행을 막는 조치가 있었다면 참사를 막을 수 있었다.

오전 7시 38분경 성수대교의 상판이 떨어졌다. 그 위에 있던 자동차들도 함께 한강으로 추락했다. 마침 다리를 지나던 시내버스는 사고를 발견하고 멈췄지만, 추락을 피하지 못했다. 그 버스에는 출근길 시민들과 등굣길에 나섰던 무학여중고 학생 9명도 있었다. 그 학생들은 그 자리에서 모두 사망했다. 자신의 인생을 꽃피우지도 못한 학생들의 허망한 죽음에 국민들의 마음은 더 아플 수밖에 없었다. 그 시내버스에는 운전자 포함 31명이 탑승하고 있었고 29명이 사망했다. 성수대교 붕괴 사고 사망자의 대부분이었다. 모두 하루하루 일상은 열심히 살아가던 보통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아무 이유도 모른 채 세상을 떠나야 했다. 

충분히 막을 수 있었던 전형적인 인재였다. 성수대교는 시공 당시 건설사와 감리사의 담합으로 제대로 된 시공관리를 받지 못했고 이후 관리 책임을 진 서울시 역시 관리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 서울의 강북과 강남을 이으며 경제 발전의 상징과도 같았던 다리가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말았다.

이후 사고의 책임을 지고 서울시장이 경질되고 새로운 시장이 임명됐지만, 그 역시 성수대교 시공 당시 서울시 책임자임을 밝혀지면서 사퇴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그때는 아직 지방자치체가 시행되는 이전으로 정부에서 지역 단체장을 임명하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임명된 최병렬 시장은 서울의 마지막 관선 시장이었다.

또한, 부실시공의 책임이 있는 동아건설은 리비아 대수로 공사를 시행하는 등 해외에서도 명성을 쌓은 굴지의 건설사였지만, 엄청난 비난 여론에 직면했다. 이후 동아건설의 사세는 기울었고 IMF 외환 위기를 거치면서 부도 후 해체되는 비운을 맞이했다. 그때 붕괴된 성수대교는 현대건설에서 해체 후 새롭게 시공해 1997년 재 개통됐다. 재시공 때는 공사의 감리업체를 외국 회사로 선정해 국내 업체와 공동으로 감리를 하도록 했다. 비리와 담합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조치였지만, 우리 건설 현장에서 만연된 부조리가 그대로 반영된 일이었다. 이에 더해 한강 교량에 대한 전면적인 안전 점검이 실시되고 많은 다리들이 보강공사와 재시공되기도 했다. 특히, 당산 철교는 심각한 붕괴 위험이 사전에 감지되어 재 시공됐다. 

성수대교 붕괴와 관련한 공사 관계자 공무원들은 법적 처벌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법원은 사상 최초로 과실의 공동정범을 인정하는 판례를 남겼다. 성수대교 붕괴 사고가 누구 하나의 잘못이 아닌 관계자 모두의 잘못이 더해진 결과라는 견해로 공사 관계자와 공무원들은 과실치사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대부분 집행유예의 낮은 형량이었다. 다만, 과실의 책임 범위를 확대하고 형사처벌의 예를 남겼다는 점에게 의의가 있었다. 

이렇게 큰 사회적 파장을 일으킨 성수대교 붕괴사고는 안전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는 계기가 되어야 했지만, 그로부터 8개월 후 한국은 또 다른 대형 사고에 직면해야 했다. 삼풍백화점 붕괴사고였다. 1995년 6월 29일 강남의 명품 백화점을 지향하던 삼풍백화점은 5층 건물이 그대로 주저앉으며 붕괴됐다. 백화점 매장이 있던 A동 건물이 그 대상이었는데 마치 폭격을 맞은 듯 그 모습이 처참했다.

당시 백화점에는 많은 직원들과 고객들이 있었다. 저녁 시간인 탓에 저녁 찬거리를 사려는 주부들이 식품 매장이 있었던 지하에 많았다. 그 때문에 사망자들의 상당수는 직원들과 주부들이었다. 성수대교 붕괴 사고의 아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발생한 이 사고는 온 국민들은 또 한 번 충격에 빠뜨렸다.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 불과 1년 사이에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이 사고로 사망자는 무려 502명에 달했고 끝내 유해를 찾지 못한 실종자도 6명이었다. 그 외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한강 다리 야경 이미지



이 사고 역시 총체적 부실과 부조리가 만들어낸 인재였다. 삼풍백화점은 그 부지가 주거용으로 아파트 건설이 예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부지의 소유자 삼풍 그룹은 뇌물 등으로 관계 기관을 매수해 불법적으로 용도를 변경했다. 애초 그 자리에는 4층 상가로 설계되고 건설이 진행됐지만, 삼풍 그룹 회장의 요청으로 백화점으로 용도가 변경됐다. 최초 시공사는 안전상의 문제를 들어 이에 반대했다. 이에 삼풍 그룹은 시공사를 계열사인 삼풍 건설로 바꾸고 공사를 강행했다. 그 과정 모두 불법이었다. 

애초 부정과 불법으로 얼룩진 삼풍백화점은 건축 과정에서 잦은 설계 변경과 구조 변경이 이루어졌다. 전에 없던 시설이 추가되기도 했다. 그나마도 설계에 있던 중요한 기둥들과 벽을 건축 과정에서 없애는 불법이 추가됐다. 각종 자재들도 부실했고 철근들도 제대로 시공되지 않았다.  건물의 하중을 지탱하는 중요한 구조물이 제거된 백화점은 넓은 매장 공간을 확보했지만, 구조적 결함을 안고 있었다. 

이런 구조적 결함에도 삼풍백화점은 건물 하중에 무리가 되는 시설들을 계속 추가했다. 특히, 5층에 식당가를 추가하면서 건물에 더 큰 무리가 왔고 냉난방을 위한 거대한 냉각탑을 옥상에 설치했다. 건축 당시부터 무리한 하중을 견디고 있었던 건물은 개장 초기부터 미세한 진동이 느껴지고 있었다. 이에 더해 냉각탑을 이동하는 과정에서 건물 하중에 더 큰 무리가 왔고 이는 건물 붕괴의 결정적 원인이 됐다. 

이미 대형 참사의 가능성을 안고 영업을 시작한 삼풍백화점은 준공 검사를 받지 못하고 가사용 승인으로 영업을 개시했다. 하지만 삼풍백화점은 당시 새로운 부촌으로 자리한 강남을 상징하는 랜드마크였다. 삼풍백화점은 해외 명품들을 취급했고 고급스러운 자재를 사용한 인테리어로 고급화 전략으로 손님을 맞이했다. 이 영업전략은 성공적이었다. 삼풍백화점의 입지 역시 강남의 중심부로 접근성도 우수했다. 삼풍백화점은 대기업 백화점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하지만 그 내면에는 엄청난 부실이 숨겨져 있었다. 

삼풍백화점 붕괴사고가 더 안타깝게 다가오는 건 사전에 충분히 사고를 막을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영업 과정에서 삼풍백화점은 곳곳에서 균열이 발생하고 침하 현상이 보였다. 이유 없이 물이 새는 일도 있었다. 분명한 붕괴 조짐이었다. 백화점 근무자들과 안전 관리자로부터 위험에 대한 보고도 있었다. 당장 영업을 중단하고 보수를 하는 등의 조치가 필요했지만, 백화점 경영진은 이를 미루고 또 미뤘다. 영업중단에 따른 손실 우려가 그 이유였다.

사고 당일에는 오전부터 심각한 붕괴 현상이 나타났다. 마지막 골든 타임이었다. 하지만 영업중단 조치는 없었다. 매출에 큰 영향이 있는 1층과 지하층 영업은 계속 됐고 보수 계획만을 협의했다. 그 사이 붕괴는 빠르게 진행됐다. 오후 6시경 5층부터 시작된 건물 붕괴는 백화점 매장이 있던 A동 전층으로 이어졌다. 순식간에 백화점 매장 건물이 사라졌다. 그 시간까지 건물 보수를 협의 중이던 백화점 경영진은 B동에 머물고 있어 화를 면할 수 있었지만, 천명이 넘는 백화점 직원들과 손님들은 건물 잔해 속에 묻히거나 붕괴의 충격으로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었다. 

방송사의 현장 중계를 통해 보인 현장은 처참했다. 폭격을 맞은 듯한 건물은 그 형체가 완전히 사라졌다. 이후 생존자들을 구출하기 위한 구조 작업이 전개됐다. 하지만 대형 건물 붕괴 사고 수습의 절대 부족한 상황에서 사고 수습에 큰 혼선이 있었다. 소방본부를 중심으로 현장 지휘가 이루어졌지만, 체계적이지 않았다. 건물 잔해를 성급하게 정리하면서 다수의 사망자 유해가 난지도 쓰레기 매립지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그런 비참한 상황에서도 죽음의 문턱에서 구조되는 생존자들의 소식은 작은 위안이었다. 10일 넘게 잔해 속에서 견디며 생환한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매몰자들은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됐다. 

사고 후 정부는 이 지역을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하고 사고 수습에 온 힘을 다했다. 각지에서 자원봉사자들이 찾아왔고 성금과 각종 구호물품이 현장으로 왔다. 이 사고를 계기로 소방본부의 역할을 화재진압 외에 구조업무를 더 추가하며 인력과 조직을 재편했다. 119구조단이 신설되며 재난대비를 하도록 했다. 그때까지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했던 응급의학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관련 법률이 제정되고 인력을 양성하는 노력이 시작됐다. 이후 대형 건축물에 대한 일제 점검이 이루어졌고 대부분 건물에서 안전상 문제가 있고 신속한 조치가 필요한 건물도 상당수 드러났다. 사회적으로 안전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는 일이 됐다.  

하지만 그전에 안전에 대한 관심이 있었다면 사고는 발생하지 않았다. 사후 교훈을 삼는다고 하지만, 그 희생이 너무 컸다. 성수대교 붕괴사고 때와 마찬가지로 희생자들의 유족이나 생존자들의 외상 후 장애 등 사후 조치에는 아쉬움이 있었다. 삼풍백화점 자리에는 유족들의 염원했던 위령탑 대신 고층의 주상복합 아파트가 들어서며 그 흔적이 사라졌다. 삼풍백화점 위령탑은 양재동 시민의 숲 한 편에 자리하게 됐다. 성수대교 붕괴사고 위령탑은 도로 교차로 가운에 위치해 사람의 접근조차 어렵다.

사고로부터 교훈을 얻기 위해서는 사고를 계속 알리고 그 원인을 다시 한번 살피는 노력이 필요하지만, 우리는 빠르게 잊히기를 원했다. 성수대교 붕괴사고가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역시 각종 사회적 이슈들에 묻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갔다. 어쩌면 우리는 서로에게 잊힘을 강요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두 사고는 더 큰 위기를 예고하는 일이었다. 그때는 아무도 이를 알지 못했다. 

 

빌딩 이미지



한국은 1996년 OECD에 가입하며 선진국의 되었음을 자축했지만, 얼마 안가 1997년 IMF 외환위기와 함께 한 경제 위기에 직면해 큰 추락을 경험했다. 이후 우리 사회는 준비되지 않은 큰 변화에 직면했다. 온 국민의 힘을 합쳐 이뤄놓은 경제 발전이 실은 사상누각이었고 그 내면이 얼마나 취약했는지 뼈저리게 느껴야 했다. 문제는 그 피해가 열심히 살아온 보통의 사람들이 짊어져야 했다는 점이다. 부익부 빈익빈의 더 심화됐고 경제가 회복된 이후에도 그 격차는 더 커졌다. 우리는 더 심각한 양극화 사회 속에 살고 있다.

1994년과 1995년 우리가 그 사고의 진짜 문제를 파악하고 사회 시스템을 바꾸는 노력을 했다면 지금 우리 삶의 크게 달라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우리는 그 사고에서 진짜 교훈을 얻지 못했다. 이후 안전 불감증이 낳은 대형 사고는 계속 발생했다. 얼마 전 세월호 침몰 사고는 총체적 부실이 그 원인이었다. 성수대교,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의 재현이었다. 우리가 과거의 잘못된 부분을 외면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고도 성장기 우리는 무조건 빨리하고 남보다 앞서가야 하는 삶을 강요받았고 그것이 최선으로 여겼다. 성과도 있었고 경제적으로 더 나은 삶도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성장의 과실은 부익부 빈익빈의 구조를 더 심화시켰다. 삶은 더 나아졌지만, 그 안에 내재된 불공정 불평등이 더 심화되는 부분은 살피지 못했다. 성장의 과실은 특정 계층에게  지나치게 편중됐다. 빠르게 변하고 발전하는 과정에서 부정과 불법이 만연했지만, 사람들은 애써 외면했다. 결과에 과정이 종속됐다. 정말 중요한 사람은 조직과 다수의 이익이라는 논리에 밀려 뒷전으로 밀렸다. 

수많은 고층 빌딩과 건물, 다리가 놓였지만, 사람이 이용할 것이라는 점은 간과했다. 그렇게 사회 깊숙이 펴진 대충대충, 빨리빨리의 문화는 사회 전체를 좀먹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의 참사의 위험에 노출됐지만, 그 위험은 감춰지고 외면됐다. 누적된 부조리는 1990년대 잇따른 대형 참사로 이어졌다. 그런 위험의 고리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이번보다 나아졌지만, 대형 참사 소식은 계속 뉴스에 등장하고 있고 그 원인인 무사안일과 안전불감 등이 원인이 된 인재였다. 아직도 그 아픔이 사라지지 않고 있는 2014년 세월호 침몰 사고도 총체적 부실이 만든 비극이었다. 우리는 재발방지를 다짐하고 책임자를 처벌하며 그 사건들에 대응했지만, 사고의 고리는 끊어지지 않았다. 

최근 방송 프로그램을 등을 통해 다시 언급된 성수대교,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는 그 점에서 여러 생각을 하게 한다. 많이 늦었지만, 우리가 왜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지 말고 다가서서 그 실체를 바라보고 기억해애 하는 이유도 알게 됐다. 그 사고의 피해자가 내가 될 수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사람이 먼저인 세상이 되도록 모두가 관심을 가져야 한다.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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