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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현대사에서 1968년은 특히, 남북 관계에 있어 위기가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였다. 그 해 1월 북한은 124군 소속 특수부대원 31명을 남파시켜 청와대 습격을 시도했다. 1.21사태로 불리는 그 사건에서 북한 특수부대는 청와대 수백미터까지 접근했던 소탕됐다. 31명의 부대원 중 28명이 군경에 의해 사살되고 1명은 실종, 또 한 명은 북으로 도주했다.

단 한 명의 부대원 김신조만이 생포됐다. 그는 기자회견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목을 따러 왔다는 말을 거침없이 하면서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이 외에도 1968년 1월 23일 원산 바다에서 첩보 활동을 하던 미국 군함 푸에블로호를 납북해 수십 명의 선원들을 억류했다. 그해 10월과 11월에는 동해진 울진, 삼척지역에 100명이 넘는 북한은 울진 삼척지구에 침투시켜 게릴라전을 전개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남북은 휴전선 일대에서 수백여 차례에 걸쳐 교전을 하기도 했다. 언제 전쟁이 나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 

특히, 대통령을 직접 겨냥한 1.21 사태는 당시 박정희 정권에 큰 충격이었다. 이에 박정희 정권은 북한에 대한 보복을 계획했다. 하지만 전시 작전권이 미국에 있는 상황에서 독자적인 군사작전을 불가능했다. 이미 월남전에 대규모 군대를 파견하는 등 큰 전쟁 중이었던 미국은 한반도에서 전쟁 발생 가능성을 차단하는데 주력했다. 미국으로서는 월남전 상황도 그들의 뜻대로 전개되지 않고 장기전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미국은 두 지역에서의 전쟁 수행이 큰 부담이었다. 이에 미국은 박정희 정권의 독자적 보복에 대해 강하게 반대했다. 이는 한미간 대립을 불러왔다. 미국은 한국에 대한 원조와 지원으로 이를 무마하려 했다. 

 

 


미국의 원조의 지원을 바탕으로 한국은 방위 체제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우선 병사들의 복무 기간이 늘어났다. 당시 병사들의 복무 기간은 줄어드는 추세였지만, 그 방향이 달라졌다. 장교 육성을 위해 기존 육군사관학교 외에 3사관 학교가 창설됐다. 대통령 경호 강화의 필요성으로 인해 북한산과 인왕산 일대와 청와대 앞길의 일반인 출입이 금지됐다. 이 출입통제는 최근에 와서야 풀렸다. 

이에 더해 예비역 군인들을 활용하는 향토 예비군이 창설됐다. 각 직장과 지역에 예비역 군인들의 군사 조직이 생겼다. 이들은 생업에 종사하다 비상상황 발생 시 군사조직으로 변모했고 지금도 그 체제가 이어지고 있다. 향토예비군은 이후 북한의 무장공비 침투 등 이 있었을 때 후방지역의 경계와 전투에도 참여했다. 

이런 예비군의 창설과 함께 고교와 대학에서는 교련 교육 과목이 신설됐다. 고교에서 남학생들은 총검술 및 제식훈련 등 군사교육을 했고 여학생들은 응급처치 등을 교육받았다. 유사시 고교생들도 동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기도 했고 안보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교련 과목은 1990년대 문민정부가 들어서는 등 민주화가 촉진되고 공산권의 몰락이 급속히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폐지됐다. 

또한, 간첩 색출과 국가의 통제 강화를 위해 전 국민 주민등록 제도가 도입됐다. 그때부터 국민들은 출생과 동시에 관공서에서 일련번호가 부여되고 그 번호는 평생 그 사람의 신분을 증명하는 번호가 됐다. 복지적 측면에서 유용한 측면도 있지만, 주민등록 제도는 국가의 편의에 의해 생겨난 제도였다. 당시에는 국민적 통제의 수단으로 활용됐다. 

이렇게 1968년을 기점으로 남북의 대립은 군사적 충돌의 가능성을 높이며 극단으로 치닫고 있었다. 북한은 월남전 본격화되 시점에 남한 침공의 적기로 판단했다. 당시 북한은 군사적으로도 경제적으로 남한보다 그 힘에서 우위에 있었다. 또한, 북한은 그들과 우호관계에 있었던 북베트남의 미국과의 전쟁에 도움을 주는 측면에서 남한에 대한 도발을 가속화하는 측면도 있었다. 이를 통해 미국의 전력을 분산시키고 베트남에 많은 군대를 파견하고 있었던 한국의 추가 파병을 제한하는 효과도 있었다. 연평균 수만 명의 군대를 파견했던 한국의 군사력이 약화된 상황도 고려한 도발이기도 했다.

이런 북한의 지속적인 도발에 박정희 정권은 독자적인 보복을 계획했다. 정규군을 활용하는 건 미국의 반대와 감시로 불가능했다. 이에 박정희 정권은 1.21 사태를 일으킨 북한의 특수부대와 같은 대북 공작부대를 만들어 보복하려 했다. 그 중심에는 중앙정보부가 있었다. 군사조직이 직접 움직이기에 제한이 많았던 탓에 비밀리에 작업이 이루어져야 했고 빠르고 일사불란한 움직임 필요했다. 이는 박정희 정권에서 가장 큰 힘이 있었던 중앙정보부가 이를 주도하도록 했다. 

중앙정보부는 육군과 공군, 해군에 특수전 부대를 창설토록 했다. 이 중에서 공군 산하로 창설된 684부대 실미도 부대가 대표적이었다. 1986년 4월 창설되어 684부대라는 명칭이 붙었다고 전해지는 이 부대는 무인도인 실미도에 1.21 사태 당시 청와대 인근에 침투했던 북한 특수전 부대원 31명과 같은 31명으로 구성됐고 이들을 훈련시킬 정규군이 포함됐다. 중앙정보부는 이 부대를 평양에 침투시켜 김일성을 암살하고 주요 시설을 파괴하는 임무를 하도록 했다. 

하지만 이 부대는 원천적으로 큰 문제가 있었다. 부대원의 구성이 정상적이지 않았다. 이 부대는 중앙정보부의 모집책에 의해 비밀리에 모집됐다. 모집책들은 높은 급여와 혜택을 빌미로 젊은 청년들을 회유했다. 영화 실미도 등에서는 사형수가 무기수 등 흉악범이 상당수 포함됐던 것으로 묘사하기도 했지만, 실상은 보통의 청년들이 대부분이었다. 훗날 1968년 충북 옥천에서 발생한 마을 청년 7명의 실종 사건의 인물들도 이에 포함되어 있었다. 실미도 684부대원들은 대체로 가난한 형편으로 높은 보수와 혜택이면 자신과 가족의 삶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안고 부대에 참여했다. 이들은 그들의 진짜 목적이 무엇인지 그것을 위해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 몰랐다.

 

 


이들은 일체의 연락이 통제된 외부와 단절된 무인도 실미도에서 혹독한 훈련을 견뎌야 했다. 중앙정보부는 수개월의 훈련 후 작전을 수행토록 하려 했다. 이들은 정식 군인도 아니었고 비공식 대북 공작원이었다. 이들은 기본적인 인권과 존엄을 인정받지 못했고 인간병기로 단련됐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훈련이 이어졌다. 구타와 가혹행위는 일상이었다. 이는 영화 실미도에서도 보인다. 훈련 과정에서 사망한 이들도 생겨났다. 훈련을 견디지 못하고 탈영을 감행하도 사살되는 이도 있었다. 일부 인원의 일탈을 처벌하는 과정에서 사망자도 나왔다. 애초 31명으로 시작한 부대원은 훈련 막바지 24명으로 줄었다. 

참담한 현실을 견디던 부대원들은 1969년 평양으로의 출동 명령이 내려왔다. 이들은 북한과 인접한 백령도에서 대기하며 작전 실행 날짜만 기다렸다. 이들은 기구를 활용한 공중 침투를 시도하려 했다. 이들이 공군 소속이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하지만 작전은 차일피일 미뤄졌고 그마저도 무기한 연기되면서 부대원들은 실미도로 복귀했다. 평양 침투 작전만을 위해 달려왔던 부대원들에게는 허망한 순간이었다. 

이후 실미도 684부대는 정권에서 관심 밖의 대상이 됐다. 지원도 크게 줄었다. 그들에게 지급되는 급료도 수개월만 지급이 되고 끊겼다. 684 부대원들을 꽉 막힌 실미도에서 고립되어 궁핍한 하루하루를 견뎌야 했다. 무엇보다 그들은 목적 없는 하루하루가 견디기 어려웠다. 그렇게 실미도 684 부대는 무의미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이는 한반도와 주변을 둘러싼 국제정세 변화와 국내 정치 상황의 급변이 영향을 주었다. 1969년 미국 대통령은 닉슨은 새로운 외교정책 방향인 닉슨 독트린을 발표했다. 주요 내용은 미국의 타지역 군사 분쟁에 대한 개입을 최소화하고 동맹국들의 안보에 있어 동맹국 스스로의 역할 강화를 그 골자로 하고 있다. 이는 베트남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물적 인적 손실이 극심한 미국이 베트남전에서 발을 뺄 수 있는 근거가 됐다. 또한, 미국의 외교 방향이 국제분쟁 개입을 크게 축소할 것임을 천명하는 것으로 한국의 국가 안보에도 큰 변화를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북한관의 군사충돌에 대한 박정희 정권이 보다 신중해 질수밖에 없었다. 

또한, 이어진 미국과 중국의 데탕트 분위기 조성과 함께 미국과 소련 중심의 냉전구도가 변화했다. 남북 모두 이런 대화 분위기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군사적 도발은 국제적 고립을 자초하는 일이 될 수 있었다. 이에 한국 정부는 1970년 돌연 평화통일 방침을 천명하는가 하면 남북 당국자 회담을 추진했고 적십자 회담이 열리는 등 남북의 대화 무드가 조성됐다. 이런 대화 분위기는 1972년 7월 자주, 평화, 민족 대단결의 평화통일 원칙에 합의한 7.4 남북 공동성명으로 연결된다. 또한, 박정희 정권은 헌법을 개정하며 3선 개헌을 강행하여 이를 실현시키는 등 여야의 극한 대립도 커졌다. 

실미도 684 부대 창설과 지원을 주도하던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의 실각은 결정적이었다. 김형욱은 중앙정보부의 막강한 권한을 등에 업고 정권의 실세였다. 그는 국내 정치와 대북 공장에 있어 강경노선을 주도하며 위세를 떨쳤지만, 3선 개헌이 성공한 이후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중앙정부부장 자리에서 경질됐다. 그 자리는 비서실장 출신의 온건파 김계원이 이어받았다. 군사적 충돌 가능성은 사라졌고 이를 억제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이런 변화 속에 실미도 684 부대는 그 존재 이유가 살라졌다. 

이 상황이라면 부대 해체나 부대원들을 정식 군인으로 인정하고 활용하는 방안이 나와야 했다. 부대 차원에서 월남전 파병 등의 안이 보고되기도 했지만, 묵살됐다. 필요한 조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어느새 실미도 684 부대는 정권 차원에서 존재 자체가 부담스러운 존재가 됐다. 이는 684 부대원들이나 그들을 관리 통제하던 일반 기간병들도 다르지 않았다. 목표가 사라진 무료한 시간이 지속하면서 부대원들의 불만은 쌓여갔고 부대원과 기간병의 갈등도 커져만 갔다. 부대원들의 절망감은 깊은 무망감으로 변했다. 이는 그들을 벼랑 끝으로 몰았다.

1971년 8월 23일 684 부대원들은 오래전 품고 있었던 실미도 탈출의 결심을 실행에 옮겼다. 이들은 무기를 탈취하고 기간병들을 살해하고 썰물시간에 실미도를 탈출해 무의도로 향했다. 이들은 특수부대 행세를 하며 바다를 어선을 빌려타고 바다는 건너 인천에 상륙했다. 이들은 인천에서 버스를 탈취해 자신의 억울함은 알리기 위해 청와대로 향했다. 이들을 태운 버스는 서울 대방동까지 이르렀지만, 이들의 존재를 파악한 군경에 의해 저지됐다. 서울 시내에서 684부대와 군경의 시가전이 일어났다. 그 과정에서 큰 인명피해가 발생했고 민간인들도 이에 포함됐다.

치열한 시가전 이후 포위된 684 부대원들은 더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상황에서 자폭을 택했다. 23명의 부대원 중 대부분은 그 자리에서 사망했고 4명은 생포됐다. 대북 공작을 위해 창설된 특수부대의 비참한 최후였다. 이들은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극단적인 방법을 택했다. . 이들 역시 그 끝을 충분히 예상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죽음보다 더 큰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생존한 4명 역시 군사재판을 통해 사형을 선고받고 한 많은 생을 마쳐야 했다. 그들은 조사와 재판 과정에서 관계 기관의 회유와 협박을 받았다. 그들로 인해 조금이나마 684부대의 실상이 알려질 수 있었지만, 범위는 아주 제한적이었다. 그나마도 그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면서 진상 규명은 불가능했다. 

애초 1971년 정부의 발표에서 이들은 무장공비였다. 이후 그 실체가 야당 등에 의해 알려지자 공군에서 관리하는 특수범으로 발표 내용이 달라졌다. 이후 이 부대의 존재는 철저히 은폐되고 왜곡됐다. 관련 기록도 사라지고 지하 깊숙한 곳으로 사라졌다. 684 부대원들의 절절한 외침은 묻히고 수십 년의 세월이 흘러야 했다. 그들은 긴 세월이 흘러도 특수범들의 난동으로 기억됐고 그나마도 잊힘을 강요받았다. 

 

 


이 사건이 재조명된 건 2000년대 들어서 일이다. 극적인 장치가 더해지며 사실과 다른 내용도 있지만, 영화나 소설 등에서 그 존재가 알려지고 대중들이 관심을 가지면서 진상 규명의 목소리가 커졌다. 노무현 정부 시절 구성된 과거사위 등에서 실미도 684부대에 대한 진상 규명 작업이 이루어졌고 그 존재가 세상에 알려졌다. 당시 실미도 684 부대에서 생존한 기간병들의 증언은 사실을 뒷받침했다. 긴 세월 실미도 684부대원들이 왜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했는지 알지 못했던 가족들은 긴 세월이 지나 진실과 마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부대원들을 지금 이 세상에 없고 그들의 원통함은 완전히 치유받지 못했다. 그들은 남북의 극한 대립 속에 자신의 삶을 포기해야 했고 그 존재마저 인정받지 못했다. 사건 당시 생존 부대원들은 사형선고와 집행이 이루어지는 상황에서 작전에 투입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야 하는 현실을 원통해했다. 그들은 국가권력의 큰 피해자였지만, 그에 대한 원망보다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절망감이 더 컸다. 

최근 과거사 위원회가 다시 조직되고 실미도 684 부대사건을 포함해 과거 국가 권력의 국민들에 대한 폭력과 억압의 사건들이 재조명되고 진상이 규명될 기회가 생겼다. 방송과 언론을 통해서도 그 실상이 알려지고 있다. 이번에는 실미도 684 부대의 진상이 완벽히 밝혀지고 그들의 유해나마 수습되어 가족들에게 돌아가야 한다. 또한, 부대원들과 함께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실미도의 참혹한 현장에 있었고 사망한 기간병들, 그때의 아픔을 마음에 품고 숨죽이며 살아온 생존 기간병들에 대한 명예 회복도 함께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때 무리하게 실미도 684 부대가 조직되지 않았다면 비극적인 사건은 일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의 사건 이후 많은 시간이 흘렀다. 이제는 아픈 과거사를 숨기고 외면하기보다는 진상을 알리고 후대에 교훈으로 삼는 노력도 병행돼야 한다. 이는 피해자들의 희생과 눈물, 원통함 위에서 풍족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 해야 할 의무이기도 하다. 


사진,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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