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역사에서 왕세자는 차기 권력 1순위였다. 아버지 왕이 있고 왕이 되기 위한 수업도 체계적으로 받았다. 그 왕세자가 중전에게서 태어난 적장자라면 그 권위는 한층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성리학적 세계관이 지배하는 조선에서 적장자의 왕가나 민간에서도 그 위치가 매우 절대적이었다. 현시점에서도 장남은 그 집에서 차지하는 비중이나 권위가 크다.
하지만 그 적장자의 자리가 세자 그리고 왕위로 이어진 사례는 이외로 많지 않다. 중전으로부터 아들이 태어나지 않았던 경우도 있고 차기 권력을 놓고 벌어진 암투 과정에서 밀리기도 했다. 어린 나이에 요절하는 불행도 있었다. 실제 가장 완벽하다 할 수 있는 계승 절차를 밟아 왕위에 오른 이들은 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 숙종, 순종 정도로 요약된다. 이 중 단종과 숙종은 외동아들로 적장자 중의 적장자였다. 단종은 할아버지 세종대왕에 의해 왕세손으로 결정된 적장손에 아버지 문종 때 적장자 왕세자의 과정을 거친 조선 유일의 임금이었다.
이렇게 강력한 권위를 가지고 즉위한 두 임금이었지만, 그들의 운명을 크게 엇갈렸다. 단종은 조선 역대 임금 중 가장 불행한 삶을 살다가 간 비운의 임금이었다. 단종은 만 10세의 나이에 즉위 후, 얼마 안 가 큰 아버지 수양대군에 밀려 선위를 하고 선왕으로 밀려났다. 얼마 안가 일어난 사육신을 중심으로 한 그의 복위 운동이 실패하면서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강원도 영월로 유배 후 사사되고 말았다. 그의 나이 16세 살 때 일이었다.
반대로 14세의 나이로 즉위한 숙종은 무려 45년간 재위하면서 적장자의 권위를 강력한 왕권 확립과 연결한 임금이었다. 그는 수차례 환국 정치로 정치 판을 흔들며 왕권을 강화했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정치를 할 수 있었다. 숙종은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위해 인현왕후와 장희빈 두 사랑하는 여인을 희생토록 하는 냉정함도 있었다. 그만큼 숙종의 왕위로서의 권위는 매우 강했다.
단종의 불행은 이미 세손으로 정해졌을 때부터 정해진 운명이었다. 조선 역사상 최고의 왕이라 할 수 있는 세종대왕은 그 치세에 다방면에서 큰 업적을 남겼고 훈민정음 창제라는 빛나는 결과물도 만들어냈지만, 차기 권력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세종은 장자 상속의 원칙을 강력히 지키려 했다. 그가 왕위에 올랐을 당시 셋째 아들이었던 세종대왕은 그 과정에서 세자였던 첫째 형 양녕대군의 폐세자와 그와 관련한 정치적 격변 상황을 분명 알고 있었다. 그는 큰 아들 문종을 일찌감치 세자로 책봉했고 그의 아들 단종이 태어나자 왕세손으로 책봉했다. 차기 권력을 공고히 하려는 의도였다.
문제는 세자였던 문종이 병약했다는 점이었다. 문종은 세종대왕을 닮고 여러 부분에서 뛰어난 역량을 보였지만, 긴 세자 생활과 세종대왕 말련 대리청정을 거치며 몸이 더 허약해졌다. 지독한 워크홀릭이었던 아버지 세종대왕 아래에서 세자와 대리청정을 한다는 건 그에게 큰 부담이었다. 세종대왕은 세자 문종이 즉위한 이후 빠른 승하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많은 자손을 낳았던 세종대왕에게는 문종 외에 많은 왕자들이 있었다. 세종대왕에게는 자신의 치세를 공고히 해줄 강력한 지원군이었지만, 병약한 문종과 나이 어른 단종에게는 심각한 위협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중 정치적 야망이 큰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의 세력이 매우 컸다.
세종대왕은 이를 염려해 그와 측근 대신들에게 그의 사후 왕위를 잘 지켜줄 것을 당부했다고 전해진다. 세종대왕 승하 후 즉위한 문종 역시 나름 이에 대한 대비를 했다. 무장 출신으로 조정에서 큰 역할을 하던 김종서를 중용했고 집현전 출신 관리들에 힘을 실어줬다. 하지만 단종은 문종과 달리 제왕 수업을 받을 시간이 부족했다. 또한,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닦고 세력을 만들기에 시간이 부족했다.
또한, 그를 지지하고 지켜줄 왕실 내 세력도 없었다. 어린 나이에 즉위한 단종은 왕실의 어른이 수렴청정을 했겠지만, 수렴청정을 할 어머니 대비와 할머니 대왕대비가 없었다. 단종은 강력한 숙부들에 둘러싸인 채 친정을 해야 했다. 김종서를 포함한 세종대왕 시절 측근 대신들이 그를 보필해야 했다. 아직 국가운영에 부족함이 있었던 단종이었기에 대신들을 인사권 행사 등에 있어 그들에 절대 의존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사실상 의정부에서 중요한 사항을 결정하고 단종이 형식상의 추인을 하는 상황도 만들어졌다. 이에 수양대군과 안평대군 등 왕위를 노리는 왕실 세력들은 이에 크게 반발했고 신권을 견제를 정변의 중요한 명분으로 삼았다.
수양대군이 빠르게 움직였다. 수양대군은 그를 따르던 관리들과 무인들을 규합해 계유정난을 일으켰고 김종서를 비롯한 단종 주변의 대신들을 참살했다. 그와 관련한 다수의 대신들도 죽음을 맞이했다. 수양대군은 조정의 실권을 장악했고 얼마 안 가 조카 단종을 밀어내고 왕위에 올랐다. 세조 시대가 열렸다. 사실상의 왕위 찬탈이었다. 이는 곳곳에서 강한 반발을 불러왔고 단종 복위 운동으로 이어졌다.
성삼문 등 사육신이 중심이 되어 단종 복위 세력들은 거사를 도모했지만, 사전에 발각되면서 또다시 피의 숙청이 이어졌다. 세조는 더는 단종을 그대로 둘 수 없었다. 단종은 그의 권력 유지에 있어 큰 위험요소였다. 단종의 운명은 역사의 기록대로 이어졌다. 그는 머나먼 영월에서 한 많은 생을 마쳤다. 이후 그는 조선 역사에서 언급되는 것조차 꺼려지는 임금으로 남았다. 세조의 혈육들이 계속 왕위를 이어가는 상황에서 단종의 신원과 명예 회복은 어려운 일이었다.
이런 단종의 신원과 복권을 이룬 이가 숙종이다. 숙종은 그에 치세에 노산군이었던 단종에게 단종의 묘호를 추서했고 그의 배우자였던 정순왕후도 신원했다. 사육신들의 신원도 숙종 떼 이루어졌다. 인조 때 사사된 비운의 세자 소헌세자의 배우자였던 세자빈 강씨의 신원도 함께 했다. 그의 선대 왕들의 일로 부담이 되는 일이었지만, 숙종은 과감히 이를 단행했고 아픈 역사를 바로잡고 역사적 화해를 도모했다. 이런 큰 정치적 결단을 할 수 있었다는 건 그만큼 그의 왕권이 매우 강했음을 의미한다.
숙종은 외동아들이었던 아버지 현종에 이어 외동아들도 세자에 책봉되었고 어린 나이부터 제왕의 수업을 받았다. 이를 통해 빠르게 국정 운영을 위한 소양을 갖출 수 있었다. 숙종은 14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했다. 수렴청정을 할 왕실 어른들이 있었지만, 숙종은 바로 친정을 했다. 그만큼의 능력과 정치적 세력이 있었다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심화된 당쟁과 그 과정에서 커진 신권을 이겨내야 하는 과제도 있었다. 숙종은 그에게 위협이 될만한 왕자들도 없었고 적장자로서의 강력한 권위는 분명 큰 힘이 됐다.
숙종은 어린 나리에도 그의 권위를 적극 활용했고 정치 흐름을 주도했다. 그는 정치 주도 세력을 왕이 교체하는 3차례 환국을 단행해 정치 주도권을 유지했다. 그 사이 조선 정치 주도 세력은 숙종 즉위 시 남인에서 서인, 남인, 서인으로 변했다. 환국 정치 기간 남인들의 세력을 재기불능 수준으로 몰락했고 서인들이 권력을 장악했다. 서인은 이후 노론과 소론으로 분화됐지만, 이후 조선 말까지 서인 계열이 정치를 주도했다.
이런 환국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서인에 속했던 인현왕후와 남인과 연결된 장희빈은 정치적 상황 변화 속에서 부침을 거듭했다. 인현왕후는 숙종 즉위 시 중전이었지만, 아들을 낳지 못했고 숙종에 눈에 든 장희빈이 아들을 낳으면서 입지가 흔들렸다.
숙종은 장희빈의 소생, 훗날 경종이 되는 아들을 후계자로 지명했다. 이와 관련해 서인들이 반발하면서 환국이 단행됐다. 그 과정에서 인현왕후는 폐비되는 불운을 겪었다. 하지만 남인 정권은 그들의 권력을 지키지 못했고 숙종은 다시 서인에게 국정을 맡기는 환국을 단행했다. 인현왕후에 이어 중전 자리에 올랐던 장희빈은 다시 희빈으로 강등됐다. 장희빈의 시련은 이에 그치지 않고 중전으로 복귀한 인현왕후가 승하하자 그를 주술 등으로 저주했다는 혐의로 탄핵되어 희빈 자리를 잃는 건 물론이고 사사되고 말았다. 정치와 연결될 수밖에 없는 왕의 여인들의 비극이 그대로 드러난 사건이었다.
이런 격변을 거치면서 숙종의 왕권은 매우 단단해졌고 그가 원하는 정치를 할 수 있었다. 붕당의 힘은 여전히 강했지만, 숙종에 감히 대항할 수 없었다. 숙종은 그의 왕권으로 조선의 변화를 이끌었다. 당시 대항해 시대 이후 활발해진 국제 무역과 교역의 조류 속에 숙종은 대. 내외 상업 진흥을 장려했고 화폐 유통이 본격화됐다. 혁명적인 조세제도라 할 수 있는 대동법의 전국적 시행도 숙종 때였다. 그와 동시에 전국적인 양전사업 실시로 토지를 정비했다. 이런 조치들은 국가 재정의 확충으로 연결됐다.
숙종은 군사력 강화에도 힘썼다. 성곽을 쌓고 조선 후기 5군영 체제가 숙종 때 완성됐다. 청나라의 마찰이 생길 수 있었지만, 능수능란하게 이를 시행했다. 청나라와의 외교적 분쟁 사항이었다. 국경 분쟁을 마무리하고 그 증거로 백두산정계비를 남겼다.
또한, 숙종은 민생문제 해결에도 관심이 컸다. 숙종의 치세는 전 세계적인 기상이변이 잦았다. 소빙하기로 불릴 정도로 지구 평균 온도가 떨어졌고 이는 농업 생산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이는 심각한 대기근으로 이어졌다. 곳곳에서 아사자가 속출했고 전염병도 창궐했다. 실제 숙종이 재위한 1695년을 전후로 100만명의 인구가 감소했다는 기록도 있다. 당장은 먹을거리 해결이 급했다. 숙종은 청나라로부터의 쌀을 도입해 기근을 해결했다. 이에는 상당한 반발이 있었다.
청나라는 과거 인조 임금 때 병자호란의 침략국으로 조선 왕이 청나라 황제에 항복을 예를 갖추는 치욕을 겪었다. 그 치욕의 극복은 이후 왕들의 숙원이기도 했다. 여전히 성리학적 세계관이 지배하는 조선에서 청나라는 오랑캐들이었고 그들에게 쌀을 받아 오는 건 또 다른 치욕이었다. 하지만 숙종은 당장의 빈곤을 해결하는 게 급했다. 그는 과감히 쌀 도입을 시행했다. 대신 그는 멸망한 명나라 황실에 대한 제사를 지내는 별도 공간을 만들도록 해 대신들의 반발을 누그러뜨렸다. 숙종이 고도의 정치가이자 실용주의자임을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그는 냉정한 군주였지만, 애민 정신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 또한, 숙종은 조선의 왕으로서는 드물게 고양이를 직접 키우는 애묘인으로도 유명했다.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느낄 수 있는 역사의 장면이었다.
이렇게 숙종은 자신의 권위와 그에 따라 가지게 된 막강한 권력을 적절히 활용했던 임금이었다. 그는 자신의 힘을 권력 강화와 사적인 영역에서 사용하지 않고 나라와 백성들을 위해 사용할 줄 알았던 지혜로운 임금이었다. 재위 후반기에는 한쪽 붕당에 힘을 몰아주면서 극한 대립을 가져온 정치지형에 변화를 주고자 탕평정치를 시도하기도 했다. 그 시도는 실패했지만, 영조와 정조시대 탕평정치는 크게 융성했다. 숙종이 그 계기를 마련했다.
또한, 숙종이 정비한 국가 시스템과 상업 진흥책은 영조와 정조시대 조선의 부흥기를 이끄는 중요한 원동력이었다. 그에 대해 인현왕후, 장희빈 사이를 오간 우유부단한 임금이라는 평가를 할 수 없는 이유다. 이런 숙종이 억울하게 생을 마감한 단종의 신원을 했다는 점은 여러 면에서 의미가 있다. 같은 적장자로서 강력한 권위를 가졌지만, 불행한 임금으로 남았던 단종의 원혼을 적장자로서 성공한 임금이 된 숙종이 어루만져 주었기 때문이다.
숙종과 단종의 삶은 같은 조건이라 해도 시대적 상황과 당시 여건에 따라 언제든 그 과정과 결과가 달라질 수 있는 정치의 유동성을 함께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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