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뉴스에서 경기도 성남시가 자주 오르내리고 있다. 야당 유력 정치인과 관련된 사건이 그 중심에 있다. 그 사건의 배경인 과거 성남시에서 시행된 개발사업은 사건은 이제 웬만한 국민들이 다 안다고 할 정도다. 성남시는 1990년대 초반 그에 앞서 그에 앞서 수도권 제1기 신도시인 분당 신도시로 대규모 부동산 개발 사업이 있었다. 최근에는 IT 산업의 새로운 중심지가 된 판교 개발로 들썩이면서 항상 부동산 이슈가 있었던 곳이었다.
이런 성남시가 2023년 시 승격 50주년을 맞이한다. 성남시는 분당과 판교로 대표되는 여전히 수도권의 대표적 신도시로 그 위상을 유지하고 있고 부촌의 이미지도 강하다. 하지만 성남시의 시작은 지금의 이미지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그 속에서는 부당한 권력의 행태에 저항한 민권운동의 역사도 함께 하고 있다.
성남시가 건설된 1960년대 후반과 70년대 초반, 이곳은 도시와는 거리가 먼 곳으로 허허벌판의 오지였다. 이곳에 사람들이 모여 살게 된 건 정부와 서울시의 빈민 이주 정책에 의해서였다. 당시 서울시는 늘어나는 인구에 대응하기 위해 그 영역을 확장했고 그에 필요한 개발이 진행됐다. 이를 위해서는 개발 예정지에 자리한 판자촌 거주민들의 이주가 불가피했다.
일자리를 위해 농. 어촌 지역에서 서울로 향한 이들은 서울 곳곳에 판자촌을 형성해 모여 살았다. 개발 과정에서 이 판자촌은 강제 철거가 지속됐지만, 삶의 터전이 서울에 있는 빈민들은 서울을 떠나지 않고 또다시 판자촌을 형성하고 그 삶을 영위했다. 서울시는 공권력을 동원해 강제적인 철거로 대응했지만, 계속 생겨나는 판자촌 자체를 사라지게 할 수 없었다. 이와 관련한 문제는 박정희 정권과 서울시를 고심하게 했다.
이 시점에 서울시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냈다. 서울시는 판자촌의 정리를 위해 그 지역 주민들의 서울 근교 지역으로의 이주를 강력히 추진했다. 이를 위해 해당 주민들에게 이주에 따른 혜택을 제공하기로 했고 박정희 정권 역시 이를 지지했다.
서울시는 이주를 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서울 근교의 땅을 한 가구당 평당 2천원에 20평을 분양하고, 분양 대금은 3년 거치 분할 상환토록 했다. 여기에 이주민들의 생활을 위한 도시 기반 시설과 공장 등을 지어 일자리를 제공한다고 했다. 지금의 신도시를 건설하는 것도 같은 내용이었다. 이는 판자촌 거주민들에게는 내 집 마련의 기회가 생기는 희망적인 소식이었다. 이에 청계천, 영등포, 용산 일대 무허가 판자촌에 거주하던 2만 5천여 세대, 10만여 명의 사람들이 이주를 결정했다. 이들은 다시는 서울에 돌아오지 않는다는 서약을 하고 입주 차량에 몸을 싫었다.
이들은 당시 경기도 광주군 지금의 성남시 수정구와 중원구 일대 35만여 평의 일명 광주 대단지로 향했다. 하지만 광주 대단지는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는 벌판이었다. 당연히 생활에 필요한 수도나 전기 등 도시 기반 시설은 없었고 화장실조차 갖추어지지 않았다. 이주민들에게 주어진 건 텐트 한 장뿐이었다. 과거 일제 강점기 연해주 지역의 한인들이 당시 소련의 독재다 스탈린의 명령에 따라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강제 이주되어 황무지에 버려진 것과 같은 상황이었다.
그렇게 광주 대단지에는 거대한 텐트촌이 형성됐다. 6.25 한국 전쟁 때의 피난민 보다 못한 생활 여건에 모든 게 열악했지만, 이주민들은 정부와 서울시의 약속 이행을 믿고 힘든 삶을 견뎌냈다. 하지만 정부와 서울시의 약속 이행은 차일피일 미루어졌다. 당시는 신도시 건설의 노하우도 없었고 관련 정책 시행이 미숙했다. 여기에 1971년 대통령 선거와 총선이 겹치는 정치적 상황이 더해지며 신도시 건설과 이주민들의 생활여건 개선 문제는 정부 정책의 뒷전으로 밀려났다.
이 상황에서 이주민들의 희망을 점점 분노로 변해갔다. 난방이 전혀 안되는 상황 속에 겨울철 동사자가 속출했고 열악한 생활 여건에 사람들은 지쳐갔다. 여기에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공장 등 일자리는 만들어지지 않았고 돈을 벌기 위해 서울로 나갈 수 있는 교통 인프라도 갖추어지지 않았다. 고작 농촌 지역을 오가는 몇 대의 버스가 전부였고 그 교통 비용도 매우 비쌌다.
열악한 주거 환경에 돈벌이도 할 수 없는 상황은 이주민들을 벼랑 끝으로 몰고 갔다. 이에 입주권을 다른 이들에게 전매하고 다시 무허가 판자촌으로 형성해 살아가는 이들이 생겨났고 부동산 시세차익을 노리는 투기꾼들이 몰려들었다. 내 집 마련을 위해 분양권을 사 그곳으로 이주하는 이들도 늘어나면서 애초 계획했던 신도시 건설 취지가 흔들렸다.
이런 상황에서 입주민들의 분노를 더 들끓게 하는 일이 생겼다. 정부와 서울시가 애초 약속했던 입주 조건을 변경했기 때문이었다. 정부와 서울시는 애초 약속했던 가구별로 평당 2천원에 20평 분양 약속을 어기고 분양가를 평당 8,000원에서 16,000원으로 대폭 인상한 데 이어 분양대금을 일시 납부할 것을 통보했다. 이는 개발계획 진행에 따라 지역 부동산 가격이 올라가면서 부동산 개발로 더 많은 이익을 창출하려는 의도가 반영될 결정이었다.
하지만 이는 대단지 입주민의 다수를 차지하는 판자촌 철거민들의 부담할 수 없는 금액이었고 무엇보다 애초 이주에 따른 약속을 저버리는 일이었다. 이미 각종 생활 인프라와 시설 건설, 일자리 제공 등의 요구가 번번이 묵살된 상황에서 입주민들은 대책 위원회를 구성한 데 이어 집단행동에 나섰다.
서슬 퍼런 독재 권력에 맞서는 일은 분명 큰 위험이 따를 수 있었지만, 나락으로 떨어진 삶 속에서 이주민들은 더는 정부와 서울시를 믿을 수 없었다. 그들은 행동으로 그들의 비참한 처지와 주장을 알려야 했다. 그만큼 그들의 상항은 열악했다. 이런 심상치 않은 대단지 내 움직임에 서울시가 협상에 나섰다. 서울시장과 주민 대표들과의 면담이 예정된 1971년 8월 10일, 서울시장을 기다리는 수만 명의 대단지 입주민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큰 희망을 가지고 그 자리에서 원하는 결과가 나오길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열악한 교통상황 속에 서울시장 일행의 현장 방문이 크게 지체됐다. 면담 예정 시간이 크게 지체됐음에도 서울시장이 나타나지 않자 입주민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입주민들의 분노는 폭력 시위 양상으로 변했다. 당시 임시 출장소는 물론이고 기물과 차량 등이 불에 타 전소됐다. 시위대는 지나가는 차량에 방화를 하는 등 격렬한 양상을 보였다.
한 일화로 참외를 가득 실은 소형 트럭 한 대가 시위대에 탈취되는 과정에서 시위대가 그 참외를 나눠가졌다는 사실은 최소한의 생계, 주거환경조차 갖추지 못한 현실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이들의 시위는 폭력적이었고 당시 언론의 보도에는 폭동과 난동으로 표현됐지만, 절박함의 표현이기도 했다. 그들의 행동은 당시 입주민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이었고 10만여 명의 주민들이 함께 하는 시위는 수백 명의 경찰 병력으로는 제어할 수 없었다.
이런 혼란 속에 일부 시위대는 차량을 탈취해 서울로 상경해 시위하는 모습도 있었다. 이제 광주 대단지의 시위는 지역의 문제를 넘어 정권 차원의 문제가 됐다. 그 시위가 정권의 약속 불이행과 부당한 처사에 의한 것이라는 점이 더 많이 알려진다면 정권 유지에도 위협이 될 수 있었다. 3선 개헌과 이어 유신 체제로의 전환을 추진하고 있었던 박정희 정원으로서는 이 문제를 빠르게 해결해야 했다. 강제 진압으로서는 10만명이 넘는 지역민들의 분노를 잠재우기 어려웠다.
결국, 정부와 서울시는 주민들의 요구를 대폭 수용하는 결정을 하면서 시위는 진정됐다. 서울시는 시장의 담화를 통해 관련 문제들에 대한 사과를 표명했고 광주 대단지의 시 승격을 공식화했다. 광주 대단지 입주민들의 시위는 정권을 굴복시켰다.
이후 1973년 성남 출장소가 설치됐던 광주 대단지 지역은 성남시로 승격됐고 성남시의 역사가 시작됐다. 성남시는 초기 중원구와 수정구로 구성됐고 1991년 신도시가 조성된 분당 신도시 지역이 분당구로 시에 편입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후 광주 대단지 사건으로 불렸던 1971년 8월 10일의 민중 봉기는 8.10 성남 항쟁으로 부르자는 주장도 있었고 2021년 성남시 의회의 조례로 8.10 성남 민권운동으로 명칭이 확정됐다. 이와 함께 민권운동이 일어나게 된 배경 등이 재조명되고 있다.
8.10 성남 민권운동은 부당한 권력에 맞서 국민들이 헌법에 명시된 권리를 찾기 위한 항쟁이었다. 헌법에는 모든 국민이 건강하게 쾌적한 환경에서 생활할 권리를 가진다고 했고 국가는 국민이 쾌적한 주거생활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는 모든 사람이 인간다운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최소한의 기준을 충족하는 적절한 주거지 및 정주환경에 거주할 수 있는 주거권에 일맥상통하는 내용이다.
8.10 성남 민권운동이 일어날 당시 지역민들은 정부의 시책을 따랐음에도 최소한의 주거환경조차 갖추지 못한 곳에 내몰렸고 더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마저 산산이 부서지고 있었다. 그들의 분노는 최소한의 인권, 국민으로 가지는 권리를 찾기 위한 일이었다. 방법상의 문제로 그 일이 폄하될 수 없는 이유다.
당시 주민들의 항쟁은 인권운동의 또 다른 사례로 더 알려질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급속한 산업화 시대, 잘 살아보자는 구호 속에 열악한 노동 환경과 주거 환경에도 열심히 일했던 우리 국민들의 노고가 제대로 보상받지 못했던 아픈 역사 속에서 얼마 안 되는 빛과 같은 사건이 8.10 성남 민권운동이었다. 이는 성남시의 자랑스러운 역사이기도 하다.
8.10 성남 민권운동의 가치와 의미가 올바른 방향으로 잘 전해지고 계승되길 기대해 본다. 아울러 이런 투쟁의 역사없이도 국민들의 기본권과 인권이 잘 보호되는 나라가 되길 바란다. 이에 더해 끊임없이 이어지는 부동산 개발이 많은 이들의 주거환경 개선이라는 대 명제에 충실한 목표가 구현되길 함께 기대해 본다.
사진 : 픽사베이,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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