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역사에서 영조와 정조 임금 통치기는 조선의 마지막 부흥기로 기억되고 가르쳐지고 있다. 실제 영. 정조 시대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큰 전쟁을 치른 이후 회복되지 못했던 국력을 회복했고 흐트러진 국가 시스템을 복원하며 재 도약을 시도했던 시기였다.
정치적으로는 극심한 붕당의 대립을 극복하려는 탕평책이 왕권을 회복한 왕의 주도로 시행되면서 극단적인 대립이 조금은 완화되기도 했다. 이 시기 조선은 농업 중심의 경제체제에서 상공업이 발전하고 화폐 경제가 활성화되는 등 자본주의 경제체제로의 발전 가능성도 보였고 견고한 신분제 역시 변화의 조짐을 보였다.
그 한편에서는 서양의 문물이 중국을 통해 유입되며서 기존의 관념론적인 성리학을 극복하려는 실학 등의 새로운 사상적 흐름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런 흐름이 이어졌다면 조선은 대항해 시대 이후 동. 서양의 교류가 활발해지고 서양의 힘이 동양을 압도하기 시작하는 시대의 변화를 읽고 사회를 그에 맞게 변화시킬 가능성을 찾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조선의 변화를 이끌던 정조 임금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조선은 다시 보수 반동을 길을 걸었고 세계정세의 변화에 대응할 기회를 잃고 말았다.
이는 성리학에 근거한 사회 시스템의 한계와 각종 부조리를 극복한 기회 상실로 이어졌고 안동 김씨로 대표하는 소수 세도가가 나라를 지배하는 왜곡된 정치 시스템의 고착화시켰다. 이는 조선의 부흥 가능성을 완전히 사라지게 했다. 권력을 독점한 세도 가문들은 나라의 미래에 대해 관심이 없었고 그들의 권력을 공고히 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데만 몰두했다. 이런 집권층에게 사회 개혁과 국제 정세에 대한 능동적 대응을 기대하는 건 불가능했다.
이런 조선 후기 상황을 말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우리 현대사에서 개혁 군주로 칭송받고 있는 정조의 측근이었던 정약용이 그 주인공이다. 정약용은 조선 후기 대표적인 실학자이자, 사상가, 정치가이기도 했고 과학자와 저술가로서의 면모도 함께 보인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다.
그는 정조의 개혁 정치를 뒷받침하고 실행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했고 많은 저서를 통해 그의 업적들을 후대에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는 인생의 절정기를 대부분 유배지에서 보내야 했던 비운의 정치인이기도 했다. 정약용의 삶은 조선 후기 잠시 왔다가 사라진 부흥기, 조선판 르네상스를 상징한다고도 할 수 있다.
정약용은 1762년 지금의 남양주시의 한마을에서 부친 정재원의 4남 2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8대에 거쳐 왕에 대한 자문과 언론의 기능을 담당한 홍문관의 관리로 일했던 학문적 역량이 뛰어난 가문이었다. 이에 정약용의 집안은 팔대 옥당이라 불리며 명문가문으로 인정을 받았다.
하지만 그의 가문은 정치적으로 남인에 속해 있었고 그 남인이 숙종의 환국 정치의 과정에서 몰락했다. 이에 그의 가문은 정치적 소용돌이를 피해 가문의 근거지인 남양주에 낙향해 살았다. 정약용의 부친 정재원 역시 관직에 뜻을 두지 않았지만, 가문이 오랜 세월 관직에 오르지 못하고 경제적 여건이 어려워지자 관직에 나서 요직에 기용되기도 했다. 붕당은 그 세력이 크게 약해진 남인이었지만, 가문의 학문적 역량이 긍정적으로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약용은 어려서부터 이런 가문의 운명이 정치적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상황을 몸소 경험했고 이는 정치 감각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됐을 것으로 보인다.
정약용은 어려서부터 매우 영특하고 학문적인 능력을 보였다고 전해진다. 그는 특별한 스승이 없었고 부친에게 수학하며 학문을 익혔지만, 4살 나이에 천자문을 익히고 7살 나이에 시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그만큼 정약용은 천재성을 지니고 있었다.
1776년 혼례를 올린 정약용은 이후 한양을 오가며 대표적 실학자인 성호 이익의 학문을 접하고 그를 따르는 인사들과 교류하게 된다. 이는 그가 훗날 성리학의 한계를 뛰어넘는 실사구시의 학문 실학자로서 발전하는 데 큰 계기가 된다. 그 한편으로는 서학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에 소개된 서양의 문물을 접하며 학문적 소양의 넓힐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서학 안에는 서양의 종교인 천주교가 포함되어 있었고 그가 교류하는 인사들 중에서 천주교 신자들도 다수 있었다. 이는 정약용이 천주교에 관심을 가지고 실제 천주교 신자가 되도록 했다. 천주교인으로서의 이력은 정약용이 천주교의 교리에 반대하고 배교를 한 이후에도 반대파가 그를 탄핵하는 중요한 빌미가 됐다. 결국, 천주교는 정약용이 숙청의 칼날을 맞고 권력의 중심에서 멀어지는 것은 물론, 장기간의 유배생활을 하게 만들었다.
정약용은 1783년 과거에 응시했고 성균관 입학 자격이 주어지는 생원시에 합격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정약용은 정조와 운명적인 만남을 했다. 정조는 정약용의 가문과 그의 능력을 알고 있었다. 성균과 시절부터 정조는 정약용에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정약용은 성균관에서도 매우 뛰어난 성적을 유지했고 정조는 그런 정약용을 매우 아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당시 집권세력은 서인 중 노론 강경파에게 세손 시절부터 극심한 견제를 받았고 신변의 위협을 수차례 겪기도 했다. 어렵게 영조에 이어 왕위에 오르긴 했지만, 노론 세력은 그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정조로서는 자신의 왕권을 굳건히 하기 위해 노론에 대응할 수 있는 정치세력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 정조는 같은 서인이지만, 온건파인 소론은 물론이고 서인과의 당쟁에서 패하며 몰락한 남인들도 등용하며 정치 세력 간 균형을 유지하려 했다. 또한, 자신의 정치 철학을 이해하고 오랜 기간 함께 할 수 있는 젊은 정치세력의 확충을 위한 노력도 병행했다. 정약용은 젊고 뛰어난 능력에 집권세력인 노론과 대척점에 있는 남인 인사라는 점에서 정조가 관심을 가질 만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1789년 정약용은 마침내 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 대과에 합격하며 정치인의 길을 걷게 된다. 그리고 그의 길에는 정조가 함께 했다. 정조는 정약용을 각종 요직에 기용했고 다양한 분야에서 일할 수 있도록 했다. 이를 통해 정조는 정약용이 국정 전반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 큰 정치인으로 성장할 기회를 제공했다.
이는 정약용에게는 큰 기회였지만, 정조와 대척점에 있던 노론 등 반대파들의 극심한 견제로 이어졌다. 반대파는 정약용의 천주교 관련 이력을 중심으로 그를 지속적으로 탄핵했다. 하지만 정조는 그때마다 정약용을 든든히 지켜주며 강한 신뢰를 보였다. 이는 그만큼 정약용이 그의 일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정조는 문무에 매우 능한 임금이었고 직접 문신들을 가르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유학자이기도 했다. 또한, 지독한 워크홀릭이기도 했다. 이런 정조에 인정을 받았다는 건 정약용의 능력을 보여준다 할 수 있다.
정조와 정약용의 강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 역량이 함축된 결과물은 수원화성이었다. 정조는 그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이 있는 수원에 수도 한양에 버금가는 도시를 건설하려 했다. 수원화성은 그 프로젝트를 완성하는 일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대규모 토목공사를 해야 했다. 국가의 역량을 집중하는 토목공사였고 정권의 성패를 좌우하는 일이기도 했다. 정약용은 수원화성을 축조하는 공사에 핵심 역할을 했다. 평소 익힌 과학 기술 등을 바탕으로 공기를 앞당길 수 있는 기계인 거중기 등을 고안했고 실제 거중기는 공사 기간을 크게 단축하도록 했다.
1794년 착공된 수원화성은 완공 예정 기간을 크게 앞당기며 1796년 완공됐다. 정조는 완공된 수원화성에 별도 행궁을 설치하고 수시로 이곳으로 행차했고 그 일대를 농업과 상공업이 함께 공존하는 제2의 수도로 육성했다. 수원화성은 정조의 꿈이 집약된 도시였고 강력한 왕권의 상징이기도 했다. 그런 정조의 프로젝트에 정약용이 함께 했다.
하지만 정약용은 천주교의 과거 관계를 이유로 한 반대파의 지속 탄핵에 시달리며 정치적 입지가 점점 흔들렸다. 여기에 1800년 정조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면서 정약용은 더 큰 위험 속에 내 던져지고 말았다. 1801년 정조 이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순조를 대신해 수렴청정을 하는 정순왕후와 그를 중심으로 조정의 실권을 장악한 노론 세력은 신유박해로 역사 기록된 대대적인 천주교 박해를 단행했고 이는 천주교 신자가 많았던 남인에 대한 전방위 숙청으로 이어졌다.
정약용도 이를 예상하고 관직을 버리고 고향에 머물며 집권세력에서 사실상 백기 투항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노론 세력을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노론에게 정약용은 아직 젊고 유망한 남인의 미래 정치인이었고 그 싹을 잘라야 했다. 그들은 정약용과 그 형제들의 목숨을 노렸다.
하지만 국문 과정에서 정약용이 천주교와 관계를 정리한 증거들이 지속적으로 나오면서 정약용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대신 끝까지 천주교 신앙을 버리지 않았던 정약종은 참수형으로 생을 마감해야 했다. 정약용은 그의 둘째 형 정약전과 함께 머나먼 유배길에 올라야 했다. 함께 남쪽으로 향하던 두 형제는 정약용이 전남 강진으로 정약전이 흑산도로 그 길이 엇갈리면서 기약 없는 작별을 고해야 했다.
신지도를 거쳐 흑산도에 유폐된 정약전은 그곳에서 조선 최초의 해양생물학 전문서인 자산어보 등 여러 저서를 집필했다. 이런 업적에도 정약전은 끝내 유배지를 벗어나지 못하고 1816년 흑산도에 세상을 떠났다.
강진에 유폐된 정약용은 권력의 상층부에서 언제 죽음에 이를지 모르는 죄인의 신세가 된 상황에 좌절할 수 있었지만, 이를 그동안의 쌓아온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한 저술 활동을 하거나 가르침을 베풀며 가치있게 만들었다. 1818년까지 18여 년 동안 이어진 유배생활 동안 정약용은 그의 3대 저서라 할 수 있는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 등의 저서를 남겼다.
목민심서는 백성들을 다스리는 지방 목민관의 치세와 관련한 사항과 필요한 자세 태도 등을 기록한 지침서이고 흠흠신서는 과거 지방관으로 일하던 당시 겪었던 각종 사건을 바탕으로 살인 등 각종 형사사건과 관련한 사항을 다룬 형법서다.
경세유표는 국가 경영에 필요한 법과 제도의 개혁 등을 담은 저서다. 이 밖에도 정약용은 다방면에서 저서를 남겼다. 그의 저서 중에는 홍역 치료와 관련한 저서인 마과회통도 있다. 마과회통에는 당시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홍역 예방법인 종두와 관련한 내용도 담겨 있다. 이는 과거 어린 시절 정약용이 천연두를 알아 고통받았던 경험이 계기가 됐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정약용은 다양한 분야에서 전문가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또한 정약용은 당시로는 매우 진보적인 농지 정책인 정전제를 주장했고 양반 사대부들이 천시하던 과학 기술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수원화성 축조 당시 그가 고안한 거중기는 이에 근거한 결과물이었다.
1818년 유배에서 풀려난 정약용은 이후 고향인 남양주에 은거하며 여생을 보냈고 1836년 7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말 그대로 파란만장한 삶이었다. 젊은 나이에 왕의 측근으로 권력의 중심에 서기도 했고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권력의 몰락과 함께 긴 유배생활을 하며 장년기를 보내야 했다. 그 사이 가문의 몰락도 함께 해야 했다. 또한, 자신의 업적이 부정당하는 아픔도 겪었다.
이런 정약용의 영광과 좌절은 사회의 변화로 이어지지 못한 조선 르네상스를 보는 듯하다. 서양의 르네상스는 사회를 변화시키고 발전시키는 계기가 됐지만, 영. 정조 시대의 부흥기는 지속력을 가지지 못했다. 그 기간 나타났던 새로운 학문적 흐름과 진보적 가치들은 집권층에 의해 그 힘을 잃고 말았다. 이후 조선은 시대 흐름에 역행하는 은둔의 국가가 됐고 궁극적으로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비운을 맞이한다.
만약, 영. 정조 시대 조선이 기존의 틀을 깨고 변화를 했다면 정약용 같은 인물이 큰 정치세력으로 성장해 오랜 세월 국정을 이끌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물론, 정약용과 그의 큰 후원자였던 정조가 성리학적 가치관 속에서 변화와 발전을 도모했다는 한계점이 있지만, 그들은 열린 사고를 가진 인물들이었다. 속도의 차이는 있지만, 조선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호시킬 수 있는 인물이었다.
정약용은 삶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 사회를 변화시키고 개혁을 하는 데에 얼마나 많은 노력과 정성이 필요한지 그에 따른 저항을 이겨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 수 있다. 우리 현대사를 살펴봐도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시도가 기득권의 벽에 막혀 좌절됐던 순간을 봐왔다. 정약용의 성공과 실패는 그 점에서 중요한 가르침이 될 수 있다.
사진 : 위키백과 / jihuni74,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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