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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자 독립군 장군이었던 홍범도와 관련한 논란이 커지고 있다. 불과 얼마 전 그는 머나먼 나라 카자흐스탄에서 그 유해가 나라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의전 속에 국내로 봉환됐고 그가 그토록 원했던 독립된 나라의 국립묘지에 안정됐다. 이와 관련해 홍범도의 삶과 업적과 관련한 다양한 다큐멘터리가 방영됐고 그가 주도했던 독립운동사의 중요한 승전인 봉오동 전투는 영화로 만들어져 흥행에 성공하기도 했다. 

그의 유해 봉환은 1987년 6월 항쟁을 통해 쟁취한 민주화, 그리고 대통령 직선제 선거를 통해 선출된 노태우 정부가 1990년 지금은 사라진 구 소련과 수교를 하면서 추진됐고 30여 년의 세월이 흘러 문재인 정부 때 결실을 맺었다. 이 과정에서 북한 역시 그의 연고지가 북한임을 들어 북한으로의 봉환을 주장했다. 하지만 역대 한국 정부의 오랜 노력과 한국의 국제적 지위 향상 등의 요소들이 더해지며 국내 봉환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의 유해 봉환은 한 독립운동가의 귀환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이는 독립운동사를 대한민국의 역사로 편입하게 하고 헌법에 명시된 3.1 운동의 정신과 이를 계기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더 강화 시키는 일이었다.

 

 

홍범도

 




이해하기 힘든 홍범도 장군과 관련한 이념 논쟁


홍범도 장군은 불운한 환경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일제의 침략에 그 역사가 저물어 가는 조국의 현실에 분개해 국내에서 의병운동을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이 세상을 떠나는 고통 속에서도 의병 운동을 만주에서의 무장 독립투쟁을 전환시키며 독립군 장군으로 활동했다. 그가 주도한 봉오동 전투와 김좌진 장군 등과 연대해 싸운 청산리 전투의 승전은 독립운동사의 빛 나는 순간이었다.

이후 그는 노년의 나이에 소련 스탈린의 조선인 강제 이주 정책으로 본거지인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는 고통을 겪었지만, 그 지역에서 새롭게 정착한 조선인들, 고려인들은 정신적 지주로 구심점으로 살다 1943년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삶은 정부의 이념 성향과 상관없이 칭송됐다. 박정희 정부는 1962년 그에게 건국훈장(대통령장)을 추서했고 얼마 전 집권했었던 박근혜 정부에는 2016년 3월 새롭게 새롭게 건조된 해군 잠수함을 홍범도 함으로 명령했다. 그리고 그런 노력들의 결실을 2021년 8월 15일 그의 유해를 봉환해 안치하는 것으로 완성됐다. 

그런 홍범도가 갑자기 이념 논쟁의 대상이 됐다. 육군사관학교에 독립운동가 이회영, 김좌진, 이범석, 지청천과 함께 흉상으로 세워져있던 홍범도 장군의 공산주의 전력을 문제 삼아 그의 그의 흉상을 제거하고 외부로의 반출이 결정됐다. 아울러 다른 4명의 독립운동가들의 흉상도 육군사관학교의 다른 한편에 별도로 자리할 예정이다.

이들 5인은 대한민국 군군의 뿌리가 되는 무장독립운동과 독립군, 광복군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상징하는 인물들이다. 그런데 이들 5인이 돌연 그 자리를 내줘야 하는 상항이 됐다. 홍범도는 그에 더해 공산주의자라는 낙인과 함께 그의 흉상이 갈 곳을 잃은 처지에 몰렸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다. 홍범도 장군은 역대 정권에서 위대한 독립운동가이자 독립군 장군으로 인정받았고 포상도 수여됐다.

심지어 현 정부에서는 민족 시인인 윤동주 시인 등과 함께 타국에서 세상을 떠나면서 국내에 호적을 남기지 못한 독립운동가의 호적, 즉 가족관계증명서를 독립기념관 주소로 부여하는 명단 중에 홍범도를 포함하기도 했다. 불과 얼마 전 일이다. 

그런 홍범도가 돌연 공산주의자로 몰리고 그의 공적이 격하되고 언급조차 하지 말아야 할 인물이 됐다. 이념을 떠나 독립운동가들의 공적을 찾아 기렸던 건 일관된 정부의 방침이었지만, 그 방침이 순식간에 바뀌는 일이 벌어졌다. 쉽게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자칫 다른 독립운동가들 역시 강력한 이념의 잣대로 평가되고 그 업적이 폄하되는 일이 계속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생긴다. 

 

 

청년 박열




독립운동가 박열


이 시점에 그동안 역사적 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했던 독립운동가 한 명이 떠오른다. 일본에서 치열한 법정 투쟁을 벌이면서도 의연함을 잃지 않았고 민족적 자존감을 보여줬던 박열이 있다. 그는 1923년 히로히토 일본 황태자의 혼례식 때 그의 암살을 시도한 대역죄인으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고 이후 수십 년의 옥고를 치른 후 풀려나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정치인으로 재일 한국인들을 위한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그의 법정 투쟁은 일본 내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가 스스로 암살 계획을 밝히고 체포되어 재판을 받은 것 자체도 놀라웠고 파격적인 행동과 거침없는 발언들까지 20대 초반의 청년 박열의 법정 투쟁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이는 그의 삶을 궤적을 살피면 이해할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박열은 1902년 한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넉넉한 가정 형편은 아니었지만, 박열은 세상의 변화를 읽어냈고 지적 호기심이 많았도 미래 삶을 스스로 개척하려는 진취적인 성격이었다. 그는 어린 나이에 그의 본명인 박준식 대신 박열로 스스로 개명을 했다. 그 열자는 한자로 메우다 세차다의 의미가 있었다. 이 이름은 앞으로 그가 어떤 삶을 살아갈지에 대한 일종의 예언이었다. 

그는 보다 넓은 세상에서 공부하길 원했고 초등학교에서 공부를 한 후 15살의 나이에 서울의 사범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그는 어린 시절 독립운동에 뜻을 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학창 시절 조선인에 대한 차별을 스스로 경험하며 식민지 국민의 설움을 느낄 수 있었고 조선인 선생님을 통해 숨겨져 있었던 조선인으로서의 민족적 자긍심도 다시 끌어올릴 수 있었다. 이와 함께 1919년 3.1 운동 만세운동에 함께 했던 경험은 그의 항일 독립운동의 의지를 뜨겁게 하는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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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새로운 세상을 꿈꾼 박열


만세운동 참가를 이유로 다니던 학교에서 퇴학당한 박열은 그 길로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돈을 벌어 학비를 내고 생활을 해야 했다. 그는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그 속에서 하층민들의 삶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고 불평등한 사회의 구조적 문제에도 관심을 가지게 됐다. 

이후 그는 일본 내 조선인을 물론이고 조선의 독립운동에 공감하는 일본인들과 교류하며 인맥을 넓혀나갔고 노동자들의 권익 보호를 내세운 단체를 조직해 운영했다. 그 과정에서 신문을 발생하며 자신의 생각을 기고하고 사상적 역량을 키웠다. 박열은 사회운동가로 점점 그 이름을 알렸고 극단적인 무정부주의를 표방하는 아나키즘에 매료되어 흑도회라는 아나키즘 단체를 조직하기도 했다. 아나키즘은 국가권력이나 자본, 종교, 정치 등 인간의 삶을 지배하고 제약하는 모든 것을 부정하고 이를 위해 폭력 사용도 서슴지 않는 과격함도 있었다. 

이는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들 중에도 이를 신봉하는 이들이 있었고 문화, 예술에도 영향을 줬다. 또한, 아나키즘은 세게 여러 나라에서 관심을 가지는 사상으로 일본에서도 그 신봉자들이 있었다. 박열과 일본 내 아나키스트들과도 연대했고 그들에게 일본 제국주의는 타도해야 할 대상이었다. 

이런 박열의 마음은 그가 어려서부터 부당한 권력과 불평등한 사회에서 살면서 이런 문제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방법을 찾았고 그 방향을 무력을 이용한 아나키즘으로 잡은 것으로 보인다. 이를 위해 박열은 꾸준히 해외에서 일본으로 폭탄을 반입할 시도를 했다. 하지만, 일제의 삼엄한 감시 속에 원하는 목표를 이룰 수 없었다. 박열의 무력 투쟁은 그와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무력 투쟁 단체인 의열단과 연결되도록 했다. 이는 최근에 그 연구가 이루어졌다. 

 

 

간토 대지진 사진




간토 대지진 그리고 조선인 대량 학살 


이렇게 나름의 방법으로 무력 투쟁을 모색하던 박열에게 그를 추종하는 여성인 일본인 후미코가 다가왔다. 평소 박열의 사회활동을 지켜봐 왔던 후미코는 박열에게 적극적인 구애를 했고 두 사람은 바로 연인이자 아나키즘을 실현하기 위한 동지가 됐다. 후미코는 불행한 유년기를 보내는 과정에 조선에서 살았던 경험이 있었고 조선인들의 처지와 그들의 독립운동을 공감했다. 그 와중에서 박열을 알게 됐고 그를 이성으로 그리고 동지로 흠모했다. 훗날 후미코는 박열의 법정 투쟁의 동반자로 함께 했다. 

이런 박열에서 강한 투쟁의 의지를 다지게 한 사건이 있었다. 1923년 9월 1일 일보 수도인 도쿄 일원을 강타한 간토 대지진으로 일대가 초토화됐기 때문이다. 이 지진은 지금도 일본 역사에서 최악의 지진 중 하나로 언급되고 있다. 문제는 이 지진이 일본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에 대한 무차별 학살로 이어졌다는 점이었다. 

엄청난 자연재해에 삶 자체가 무너진 재난 상황에 일본 정부는 상황을 빠르게 진정시킬 방법을 찾았고 당시 일본 내 약자였던 조선인들을 사회적 불만을 해소할 수단으로 삼았다. 일본 정보의 묵인과 비호 아래 일본인들도 조직된 자경단은 조선인들을 무차별 학살했다. 당시 일본에서는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키고 우물에 독을 탔다고 하는 등의 유언비어가 난무했다. 이를 통해 지진으로 인한 피해 상당 부분이 조선인에 의한 것인 듯 호도했다. 이는 일본인들을 더 흥분시키는 일이었다.

이런 상황을 막아야 할 일본 정부는 조선인들이 방화를 일으키고 폭탄을 가지고 있다는 발표는 하는가 하면 조선인의 행동에 대해 엄하게 단속해 달라는 발표를 하면서 조선인에 대한 폭력을 조장했다. 이는 중세 유럽에서 사회적 불만을 돌리기 위해 무고한 이들을 희생시킨 마녀사냥이나 나치 독일의 유대인에 대한 대량 학살과 같은 일이었다.

이미 조선인들은 당시 일본에서 혐오의 대상이었고 잠재적 범죄자로 인식됐다. 일본 내에서 조선인들을 심한 차별과 멸시 속에 주로 매우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며 하층민의 삶을 살았다.

이런 조선인들은 사회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증오의 대상이 됐고 대규모 학살이 자행됐다. 이로 인해 사망한 조선인들의 수는 최소 6천명에서 수만명에 이른다는 게 중론이다. 희생자는 남. 녀 노소가 따로 없었고 임산부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자경단들은 조선으로 의심되는 이들이 있으면 외국인들이 발음하기 힘든 일본어를 말하도록 해 조선인임을 확인하고 학살을 자행하는 악랄만을 보였다.

이 과정에서 조선으로의 오인돼 일본인과 중국인들 일부도 학살의 대상이 됐다. 간토 대지진과 관련한 조선인 대학살은 관련 증거나 관계자인 증언이 다수 존재함에도 일본 정부는 아직도 인정하지 않고 있고 학살과 관련한 역사마저 부정하는 게 현실이다. 올해 9월 1일은 우리가 관동 대지진으로 많이 알고 있는 간토 대지진 100주년이 되는 날이고 관동 대학살, 간토 대학살이 일어난 지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자국에서 일어났던 역사적 사실마저 부정하는 일본의 형태는 세월이 아무리 흐른다 해도 지탄받아 마땅한 일이다. 

 

 

조선인에 대한 가짜 뉴스로 채워진 간토 대지진 당시 일본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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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열의 법정 투쟁


이렇게 조선인들에 대한 극도의 반감과 이를 조장하는 일본 정부의 행태 속에 이미 반 정부적인 사회 활동가였던 박열은 위험인물, 불량 선인으로 일제 경찰의 감시를 받고 있었다. 간토 대지진의 혼란 속에 박열은 위험을 조장하는 불순분자로 체포되어 구금됐다. 그의 연인 후미코도 마찬가지였다. 

이 과정에서 박열은 자신이 계획하고 있던 황태자 암살사건의 범인임을 스스로 밝혔다. 이와 관련 일제 경찰에 의한 사건이 조작되고 왜곡됐다는 의견도 있지만, 박열과 후미코는 이를 인정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죄를 인정하고 선처를 구하는 것이 아닌 정당한 재판을 요구했다.

박열은 재판정에서 조선식 의복을 입을 수 있도록 하고 자신의 발언권을 보장하는 한편, 조선말만을 사용할 수 있도록 통역을 배치할 것과 재판장과 동등한 자리 배치 등을 요구했다. 일반 범죄자의 자세는 아니었다. 재판장 역시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지만, 재판장은 그에게 조선 의복을 착용하고 발언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이는 박열이 대역죄인이지만, 그런 죄인도 정식 재판을 통해 처벌함으로써 일본이 문명국이고 법치를 실현하는 나라임을 대외에 보여주려 했다. 또한, 간토 대지진 당시 자행된 조선인 학살과 관련해 해외의 비판 여론이 커지는 상황에서 중죄인에게 관대함을 보이며 이를 무마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이와 함께 재판장은 박열의 요청에 따라 그와 후미코가 함께 기념사진을 촬영할 수 있는 기회까지 제공했다. 두 연인은 당시로는 매우 파격적인 거침없는 포즈로 이에 응했고 이 사진이 보도되면서 일본 사회를 다시금 충격에 빠뜨렸다. 

하지만 박열은 거침없는 행동과 발언으로 법정을 뒤흔들었다. 재판관의 심문에서 그는 당당했다. 그 과정에서 간토 대지진 당시 자행된 조선인들에 대한 학살과 일제의 부당함을 강력히 주장했다. 이에 재판장은 공개 재판을 비공개 재판으로 전환했다. 일제의 의도와 달리 박열의 재판은 그들의 치부를 드러낸 결과로 이어졌다. 이와 관련해 일본내 비판 여론이 들끓었고 이는 당시 일본 내각의 총사퇴까지 이어지며 일본 정치권까지 흔들었다. 

박열은 그의 의연하고 적극적인 법정 투쟁으로 조선인으로서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일제는 조롱하는, 누구도 할 수 없는 독립운동을 했다. 그리고 그의 법정투쟁에는 일제 강점기 일본과 조선에서 활동했던 일본인 인권 변호사 후세 다쓰지의 조력이 큰 힘이 됐다. 후세 다쓰지는 조선 독립운동가의 변론에 매우 적극적이었고 일제의 제국주의 적 속성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일제 강점기는 물론이고 광복 이후에도 한국을 오가며 인권 변호사로 활동했다. 그는 한국의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4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옥중에서 촬영한 박열과 후미코 사진

 




사형 선고 그리고 투옥과 출옥 


이러한 박열의 법정투쟁은 죽음을 각오한 일이었다. 대역죄인인 그와 후미코에게 내려질 판결은 예상했던 대로 사형이었다. 하지만 박열은 이에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의지와 생각을 마음껏 알릴 수 있었고 독립운동가로서 순국할 수 있는 게 더 자랑스러웠다. 

하지만 일제는 일왕의 이름으로 박열과 후미코를 무기징역으로 감형해 수감했다. 이는 그들의 관대함을 보여주는 일이었지만, 자칫 그들을 사형시키면 독립운동 또 다른 상징이 될 수 있음을 우려한 일이었다. 박열과 후미코는 살아도 사는 게 아닌 시간을 보내야 했다. 얼마 안 가 박열은 후미코가 감옥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인은 자살이었지만, 여러 가지로 의문이 큰일이었다. 

후미코의 시신은 후세 다쓰지에 의해 수습되어 박열의 선산이 있는 경북 문경에 묻혔다. 후미코는 생전에 박열과 함께 하면서 그의 이름을 한국식인 박문자로 개명할 정도로 박열에 대한 큰 애정을 보였었다. 세상을 떠난 이후 조선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박열에게 후미코의 죽음은 큰 충격이었다. 두 사람은 감독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혼인 신고를 하면서 정식 부부가 된 상황이었다.

그들은 이후 각자의 감옥에서 기약 없는 이별을 했지만, 언젠가 만날 수 있는 희망으로 수감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후미코의 죽음은 박열이 살아갈 이유를 사라지게 했다. 박열은 단식을 하며 강력히 저항했다. 일제는 강제로 박열에서 음식을 먹게 하면서 그의 수감생활을 이어가도록 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22년이 지났다. 

20대 초반의 청년은 40대 중년이 됐다. 그에게 1945년 8월 15일 조국의 광복 소식이 들렸고 그는 드디어 세상으로 다시 나올 수 없었다. 이런 박열은 우리 민족은 잊지 않았다 그가 출옥하는 날 수많은 환영 인파가 그를 맞이했다. 그는 광복된 조국에서도 큰 환영을 받았다. 

 

 

일본인 인권 변호사 후세 다쓰지




광복 후 활동 납북  


박열은 광복 후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대표적인 우익 인사로 활동했다. 청년 시절 무정부주의자였던 그였지만, 광복 후 그는 김구 등 민족주의 진영 인사들과 이승만 등과 교류했고 반공 노선을 분명히 했다. 또한, 남한만의 전부 수립도 지지했다. 일본에서는 재일 한국인들의 권익을 지키는 일에도 노력했다. 재일본 조선 거류민단, 훗날 재일본 대한민국민단 조직하고 초대 단장이 되기도 했다.

무엇보다 일제 강점기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였지만, 그 유해가 일본에 있었던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의사의 유해를 김구의 부탁으로 일본 현지에서 발굴해 한국으로 봉환하는 일을 주도했다. 이 세 명의 의사는 김구에 의해 지금의 효창공원에 안치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런 공적에도 열의 말년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그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귀국해 정치인의 삶을 살았지만, 1950년 6.25 한국전쟁 중에 납북되어 북한에서 노년을 보냈다. 그는 북한이 만든 선전단체에 소속되긴 했지만, 활동 내용은 없다. 분명한 반공주의자였고 누구보다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인 박열이 북한의 김일성 유일체제에 동조했을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박열은 과거 아나키스트 활동과 납북되어 북한에서 생을 마감한 이력으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 오히려 공산주의자로 오인되기도 했다. 그가 공적을 제대로 인정받은 건 민주화가 진전된 1990년이었다. 그때에서야 박열은 애국지사에 수여되는 건국훈장을 수여받을 수 있었다. 또한, 그의 부인인 후미코, 박문자는 2018년에 가서야 앞서 언급했던 인권 변호사 후세 다쓰지에 이어 일본으로서는 두 번째로 애국 훈장이 수여됐다. 

박열과 후미코의 일제에 대한 저항과 독립운동은 긴 세월이 흘러 마침내 대중들에게 알려지고 인정받을 수 있었다. 이들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영화 '박열'을 통해 보다 많은 대중들이 박열의 삶을 함께 할 수 있었다. 박열의 삶은 폭풍 같았고 강렬했다. 그의 광복을 향한 마음은 누구보다 뜨거웠다. 

 

 

중년의 박열




자랑스러운 우리 역사, 독립운동사


이렇게 일제 강점기 우리 민족은 치열하게 독립을 위한 투쟁을 했다. 박열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 역시 영웅이었고 독립운동에 헌신한 모두도 영웅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그 공적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지속적으로 숨겨진 독립운동의 역사를 찾아가는 노력이 이어지고 있지만, 부족함이 많다.

이런 상황에서 독립 영웅 중 한 명인 홍범도에 대한 논란은 안타까운 일이다. 일제 강점기 그 이념이 무엇이었던 독립운동가들의 목표는 조국의 광복이었고 그 목표를 위해 힘을 합쳤다. 그들의 사는 나라와 상황에 따라 불가피하게 사회주의 노선을 따르는 상황도 있었다.

하지만 독립운동은 그 자체로 가치 있고 대한민국의 소중한 역사다. 그 역사까지 포용하고 우리의 역사로 만드는 건 대한민국이 우리 민족의 역사를 잇는 국가임을 분명히 하는 일이다. 독립운동의 부정은 결국, 우리 민족의 역사를 부정하는 일이다. 우리 역사를 파괴하는 일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된다.   



사진 : 위키백과,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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