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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1월 1일, 프랑스 파리 도심 곳곳에 붙은 연극 포스터가 큰 화제가 됐다. 이전의 포스터와 달리 사람의 실물 크기의 거대한 포스터는 매우 아름다웠고 인상적이었다. 사람들은 이 포스터를 떼어가기 바빴다. 그리고 이 포스터를 그린 이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도 커졌다. 그 속에서 현대 미술의 한 획을 그은 화가, 알폰스 무하가 세상에 그 이름을 드러냈다. 

무하는 1860년 7월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이 지배하고 있었던 현 체코 공화국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그림과 노래에 재능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그림에 전념했지만, 프라하의 예술 아카데미 입학을 번번이 거절당하는 아픔이 있었다. 하지만 무하는 오스트리아 빈으로 이주해 그곳의 그림 공방에서 일하며 연극 등 무대 화가로 일하며 그림을 배웠다. 

이런 무하에게 1882년 쿠헨 벨라시 백작과의 만남은 화가 인생에 큰 전환점이었다. 그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게 된 무하는 체계적으로 그림을 배우며 작품 활동을 할 수 있었다. 그의 지원으로 무하는 1888년 당시 예술가들에게는 동경의 도시였던 파리에 입성할 수 있었다.

그 시점에 쿠헨 백작은 그 시점에 재정적 지원을 끊었고 무하는 파리에서 스스로 삶을 영위해야 했다. 무명 화가였던 무하는 생계를 위해 잡지나 각종 서적의 삽화를 그리는 지금의 일러스트레이터로 일했고 그 분야에서 나름 인정을 받았다. 또한, 무대와 무대 의상 디자인 등에 참여하며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청년 시절 이런 경험은 그가 훗날 상업 화가로 성공하는 데 있어 중요한 밑거름이 됐다.



 




1894년 크리스마스의 기적, 성공한 상업화가 알폰스 무하의 등장 


하지만 바쁜 일상이 이어지는 상황에도 그의 생활은 풍족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무명의 화가였다. 그런 무하에게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일생일대의 기회가 찾아왔다. 1894년 12월 크리스마스를 앞둔 시점에 무하는 파리의 한 인쇄소에서 교정업무를 하고 있었다. 그는 그 인쇄소에서 일하던 친구가 휴가를 떠난 자리를 그의 부탁으로 메워주고 있었다. 

그 인쇄소는 당대 최고 인기 여배우이지 대중 스타였던 사라 베르나르가 출연하는 연극의 광고 포스터 제작을 의뢰받았지만, 주인공 베르나르를 만족시킬 수 있는 포스터를 만들지 못하고 있었다. 다음 해 1월 4일 연극이 개막하는 상황에서 인쇄소 측은 마음이 급할 수밖에 없었다. 인쇄소 운영자는 어떻게 보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무대 화가로 다년간 경험이 있는 무하에게 포스터 제작을 의뢰했다. 무하에게는 첫 도전이었지만, 무하는 그 기회를 완벽하게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그는 당시 유행하던 미술 사조인 아르누보 양식을 과감히 적용한 실물 크기의 포스터를 그림을 그렸고 베르나르를 매료시켰다. 아르누보 양식은 '새로운 미술'을 뜻하는 프랑스 말로 당시 유행하던 정형화된 아카데미 미술, 고전주의 미술에 반기를 들고 순수미술과 응용미술의 경계를 허무는 시도였다. 아르누보 양식을 그러면서 작품의 소재를 그리스, 로마 예술 등 과거가 아닌 자연에서 찾았다.

 

 

무하 시대를 연 베르나르의 연극 포스터

 

 

아르누보 작품들

 



특히, 꽃이나 식물 덩굴 등을 아름답게 형상화하는 것이 특징이다. 아르누보 양식은 미술은 물론이고 예술 전반에 영향을 줬다. 건축에서도 아르누보 양식이 크게 유행했다. 당대에는 물론이고 사후에도 최고 건축가로 칭송받고 있는 스페인의 건축가 가우디 역시 아르누보 양식에 영감받은 건축물을 남기기도 했다. 

무하는 배르나르를 신비로운 분위기와 함께 여신과 같이 형상화했고 이전에 없었던 독특한 연극 포스터를 창조했다. 그의 포스터는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고 무하는 일순간에 유명 화가 반열에 올랐다. 무하는 베르나르와 장기 계약을 통해 그의 작품 포스터와 무대, 의상 디자인을 전담했다.

이를 통해 무하는 경제적으로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이와 함께 무하의 명성은 다수의 광고 포스터 제작 의뢰가 이어지게 했고 그의 아르누보 작품이 일상 곳곳에서 대중들에게 알려질 수 있었다. 이렇게 성공한 상업화가의 길을 걷게 된 무하는 당시 세계 문화, 예술의 중심지로 새롭게 떠오르는 미국 뉴욕에서 진출해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1895년 베르나르의 포스터로 시작해 1900년대 초까지 이어지는 기간 무하는 부와 명예를 모두 가지는 성공의 길을 걸었고 이 기간은 그의 생애에서 최 전성기였다. 

 

알폰스 무하의 삶, 예술세계 담은 EBS 콘텐츠 링크

 

https://jisike.ebs.co.kr/jisike/vodReplayView?siteCd=JE&courseId=BP0PAPB0000000009&stepId=01BP0PAPB0000000009&lectId=20349928

 

알폰스 무하 1부 - 아름다운 그림의 주인

아무도 몰랐던 아름다운 그림의 주인, 알폰스 무하의 작품 세계...

jisike.ebs.co.kr

 

https://jisike.ebs.co.kr/jisike/vodReplayView?siteCd=JE&courseId=BP0PAPB0000000009&stepId=01BP0PAPB0000000009&lectId=20349929&searchType=&searchKeyword=&searchYear=&searchMonth=

 

알폰스 무하 2부 - 무하 이후의 체코

대중을 위한 그림을 그리던 알폰스 무하, 조국을 위한 그림을 그리다...

jisike.ebs.co.kr

 




성공한 화가, 마음속에 담아둔 민족애 그리고 고난의 시기 


이런 화려한 삶 속에서도 무하의 마음속에서 순수 미술 그리고 그의 고국인 체코, 슬라브 민족을 위한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열망이 가득했다. 그가 태어나 자란 체코는 오랜 세월, 강대국의 지배 속에 있었다. 그 과정에서 핍박과 차별을 받아왔다. 체코인들의 마음속에는 독립된 나라에 대한 열망이 있었다. 무하는 이러한 국민, 민족적 열망을 작품에 투영하고자 않다. 이를 통해 민족적 자긍심을 높이고 독립 의지를 고취시키려 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오랜 세월 마음속에 담았던 열망을 그림을 통해 표출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뉴욕 활동 시 만난 한 사업가의 후원 약속을 받고 진정 자신이 하고자 했던  그림을 그리기 위해 체코로 돌아오는 결정을 했다. 

1910년 체코에서 작업실을 차린 무하는 슬라브 민족의 역사를 초대형 캔버스에 담은 20점의 연작 '슬라브 서사시' 작업을 시작했다. 그 안에는 슬라브 민족의 영광과 비극, 슬픔과 기쁨의 역사가 함께 담겼다. 이 작품을 통해 무하는 기존의 감각적이고 화려하면서 신비로운 느낌의 아르누보 양식의 화풍을 버리고 장엄하고 어떻게 보면 무겁게 보이는 화풍으로 변화했다. 이는 무하의 정체성을 완전히 바꾸는 일이었고 부와 명예와 멀어지는 일이 될 수 있었다. 또한, 변화한 화풍에 대해 대중들이 지지를 보낼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무하는 민주주의적 색채가 강한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신념을 위해 화가로서의 삶을 새롭게 리셋했다. 마침 그의 변신은 당시 크게 유행하던 아르누보 사조가 쇠퇴하는 시기와도 맞물려 있다. 무하는 시대의 흐름에 순응하기보다는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구현하려 했다. 

'슬라브 서사시' 작업은 18년간 이어졌고 1928년 20점이 연작이 완성됐다. 무하는 자신의 모든 예술혼을 담은 그 작품을 조국에 기증했다. 그러면서 무하는 그의 재능을 살려 체코의 우표와 지폐, 각종 문서 등의 디자인도 담당했다. 그는 자신의 작품 세계를 구현하면서도 국가와 민족을 위한 실용 미술에서도 역량을 발휘했다. 이를 통해 그는 예술과 현실이 결코 동떨어져있지 않고 함께 해야 한다는 또 다른 신념을 구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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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그가 '슬라브 서사시' 작업에 몰두하던 시기에 체코는 1918년 종전된 1차 세계대전 이후 패전국이 된 오스트리아 제국의 지배를 벗어나 독립을 쟁취했다. 이는 그의 오랜 염원이 이루어진 일이었고 무하가 작업에 더 의욕적으로 임하는 계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자신의 모든 역량을 다한 역작을 그려낸 무하지만, 그의 인생 말년은 순탄치 않았다. 어렵게 독립을 이뤄낸 체코였지만, 1938년 체코는 그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에 휘말리며 뮌헨 협정에 따라 나치 독일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소련의 세력 팽창과 함께 여타 동유럽 국가들과 함께 공산주의 진영에 속하며 소련의 위성 국가로 전락한다. 

이런 시대 분위기 속에 민족주의 화가는 고난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체코를 지배하게 된 나치 독일은 무하를 위험인물로 간주했고 무하는 나치 비밀경찰에 연행되어 심문을 받는 등 고초를 겪었다. 70대 고령의 무하는 이로 인해 건강이 급속히 악화됐고 1939년 7월 14일 폐렴으로 사망했다. 누구보다 나라와 민족을 사랑했던 화가의 안타까운 죽음이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이후 나치 독일은 그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 자체를 막으려 했지만, 그의 장례식에는 무려 10만여 명의 인파가 운집에 그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나치 독일 치하에서 억압받고 있었던 체코 국민들에게 무하는 매우 상징적인 인물이었고 그의 죽음에 깊은 슬픔을 행동으로 보였다. 

사후 무하의 작품은 나치 독일에 의해 격하됐고 공산주의 체제 체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고 평가 절하됐다. 그의 아르누보 작품들 역시 상업주의, 감각주의 등 저급한 작품으로 취급받았다. 하지만 시대가 흘러 1960년 대 이후 무하는 재평가 받았다. 

 

 

슬라브 서사시 연작

 




현대에 재 평가된 알폰스 무하 


그의 아르누보 작품들이 새롭게 조명됐고 그 작품들은 현대 일러스트 작품들에 큰 영감을 주고 응용됐다. 또한, 전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얻었던 일본 애니메이션 작품 등에 그의 화풍에 근거한 캐릭터나 배경 등이 사용되면서 대중적인 관심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또한, 현대로 넘어와서도 그의 아르누보 작품들은 유행을 타지 않고 우하고 격조 있는 작품으로 인식되고 있고 일상 곳곳에서 그 흔적들을 만날 수 있다. 또한, 그의 역작이었지만, 시대적 상황 속에 빛을 볼 수 없었던 '슬라브 서사시' 역시 2000년대 들어 새롭게 조명되면서 그의 작품 세계를 더 확장하게 했다. 이를 통해 무하는 현대 미술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그 이름을 남겼다. 

이렇게 늦긴 했지만, 무하는 상업미술과 순수미술 모든 분야에서 모두 성공을 거둔 화가로 대중들 속에 자리하게 됐다. 또한, 무하는 매우 복잡한 여성 편력으로 지탄받았던 많은 남성 예술가와 달리 모범적인 가정생활을 했고 작품 활동 외에 큰 이슈를 만들지 않았다. 그 점에서도 무하는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다. 

무하의 삶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상업적 성공 뒤, 현실 참여 예술가로 민족주의 화가로의 변신은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고 사후 작품성과 예술관이 긍정 평가를 받고 있다는 점도 남다른 점이다. 무엇보다 미술사의 전환기 그 흐름을 이끈 인물이었다는 점은 그의 가치를 더 높이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아울러 그의 삶은 예술과 현실 참여와 관련해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본 게시글은 EBS 스토리 기자단 18기 활동으로 작성하였습니다. 

 


사진 : EBS /지후니,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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