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농공상의 엄격한 구분 속에 철저한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은 그 체제를 갑오개혁까지 지속했다. 그 중간 신분제가 와해되기도 했지만, 기본 원칙은 허물어지지 않았다. 신분 상승의 기회는 극히 드물었고 양반의 특권은 계속 유지됐다. 조선 후기 두 차례 큰 전락이 온 나라를 휩쓸었던 시기, 전쟁에서 공을 세운 이들이 천민에서 벗어나거나 재력으로 관직이나 족보를 사는 등의 방법으로 신분 상승을 하기도 했지만, 국가 차원에서 신분제에 변화를 가져온 건 아니었다.
이런 조선시대 신분제 질서 속에서 양반도 양인도 아닌 존재들이 있었다. 역사에서 중인으로 배웠던 이들이 그들이다. 중인은 하급 관리나 기술직에 종사하는 이들이 주류를 이뤘다. 그들은 주로 대외 교류 시 통역을 담당하는 역관이나 지금의 의사나 약사라 할 수 있는 의관, 그외 기술직 관리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해당 분야의 전문자이자 실무자로 관료 체제의 허리를 담당하고 있었다.
하지만 중인이라는 말에서 추측할 수 있듯 그들은 양반의 특권을 완전히 가지지 못했고 관직에 있어 승진에도 제약이 있었다. 중인 계급의 인사들은 관리로서 최고 영예라 할 수 있는 정 2품 이상의 당상관, 사극 등에서 대감이라 불리는 직위에 오를 수 없었다. 중인 계급들에게는 보이지 않은 유리벽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에 중인 계급은 역사의 중심에 설 수 없었고 조연에 머물러야 했다.
조선 관료조직의 핵심, 인정받지 못했던 존재 중인 계급
하지만 그들의 조선 사회에서 비중은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지금도 그렇듯 특정 분야의 전문가는 조선에서도 인정을 받았고 이를 이용해 부와 명예를 얻을 기회도 있었다. 그중 외국어 통역 업무를 했던 역관들의 입지는 매우 단단했다. 실제 역관은 대대로 그 역할이 세습되는 일이 많았고 일부는 왕실, 고위 인사들과 연결되며 세도가 못지않은 힘을 가지며 중앙 정치권에서 힘을 발휘하기도 했다.
정치가로서의 면모를 보인 역관 중 한 명은 인조 임금과 숙종 임금 때까지 활약했던 장현을 들 수 있다. 얼마 전 큰 인기를 얻었던 드라마 '연인'의 남자 주인공 이장현의 모티브가 되는 장현은 대중국 교역을 담당했던 역관이었다. 역사 기록에서 장현은 뛰어난 역관으로 기록될 정도로 큰 존재감을 보였다.
그는 역관이기도 했고 반청 운동의 핵심 인물이기도 했다. 국가적 치욕을 당했던 병자호란을 전후해 장현은 청나라에 볼모로 간 소현세자를 보좌하기도 했고 청나라와의 외교관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과정에서 장현은 청나라의 기밀을 수집해 전달하거나 무기 밀매 등의 방법으로 조선을 도왔다. 이를 통해 장현은 왕은 물론이고 고위층의 신임을 얻었고 정치적 역량을 키우는 이유가 됐다.
이를 바탕으로 장현은 대중국 무역에 관계하며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조선의 무역은 중국과의 조공무역이 그 중심에 있었고 여진, 일본과는 제한적 무역을 했다. 특히, 중국과의 조공무역은 사대 관계를 공고히 하는 것 외에 중국의 앞선 문물을 도입하는 통로이기도 했다.
중인 계급의 성장 주도한 역관, 그리고 장현, 변승업, 김근행
또한, 중국에서 큰 인기가 있었던 인삼 판매 등으로 수입을 얻기도 했다. 중국으로 가는 사신들에게 그 경비로 인삼을 주었다는 기록도 있다. 인삼 판매는 중요한 무역 아이템이었고 장현은 인삼 무역을 중계하며 큰 부를 얻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축적한 부는 일종의 정치 자금으로 제공되며 정치적 영향력을 더 높일 수 있었다.
장현은 정치적으로 남인 계열에 속했다. 남인은 서인과 권력 투쟁을 했고 권력 투쟁은 권력을 장악했을 때 상대 당에 대한 대대적 숙청의 악순환으로 이어졌다. 조선의 임금들은 이런 붕당 간의 갈등을 이용해 왕권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남인과 서인의 대결 구도는 효종 사후 현종 임금 당시 예송논쟁으로 절정에 이르렀고 숙종 시기에는 왕이 주도하는 환국 정치 과정에서 서로를 죽고 죽이는 극단적 양상을 보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남인은 최종 패배자가 되며 몰락을 길을 걸었다. 이후 조선의 정치는 강경파 서인인 노론과 온건파 소론이 주도하는 양상으로 변했다.
인조 때부터 숙종 시기까지 왕의 강력한 비호를 받았던 장현 역시 권력 투쟁 과정에서 깊숙이 관여했고 남인의 몰락과 그 운명을 함께 했다. 그는 숙종 임금 당시 궁녀에서 중전이 되고 남인의 중심이기도 했던 장희빈과 같은 집안이었다. 장희빈은 장현에게는 5촌 종질이었다. 장희빈이 궁녀로 궁에 들어간 건 결코 우연이라 할 수 없다. 장현의 정치적 영향력이 매우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그의 입지는 서인을 포함한 반대당의 강력한 탄핵을 불러왔다. 그의 역관으로서의 능력은 정치적 상황 변동에도 그를 지키는 방패가 됐지만, 남인이 완전히 몰락하는 상황에서 그도 버틸 수 없었다. 결국, 숙종이 재위했던 시점에 장현은 노년의 나이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생을 마감한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그의 자손들은 이후에도 역관으로 그 역할을 했고 가문의 역사를 이어갔다.
이런 장현과 달리 조선 후기 3대 역관으로 불리는 변승업과 김근행은 대 일본 무역과 교류에서 역할을 하며 부를 쌓았다. 이들은 중앙 정치와 거리를 두고 그들의 부를 과시하지 않는 처신으로 적을 만들지 않았다. 대신 그들의 부를 정치 자금으로 제공하며 중앙 정치권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했다. 이 둘은 일본과 조선, 중국을 연결하는 중계 무역으로 큰 이익을 남겼다. 또한, 그 과정에서 무기나 화약 밀매 등 조선의 국익을 위한 일에도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렇게 조선의 역관들은 조선 정치나 외교에서 그 비중이 매우 컸다. 전면에 나서지는 못했지만, 외교나 교역에있어 의사소통의 중계자로 각종 현안에 깊숙이 관여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얻은 각종 정보는 그들의 조선 후기 활성화된 대외 무역과 상업 활동에 있어 큰 자산이 될 수 있었다. 또한, 정치권력과의 유착은 그들을 지키는 힘이 될 수도 있었다.
특히, 조선의 외교에서 가장 중요시했던 대중국 관계에서 역관들은 중국 측 인사들과 자주 교류할 수 있었고 다양한 정보를 수집할 수도 있었다. 물론, 일부 역관들은 조선의 정세나 정보를 넘기는 매국 행위를 하기도 했다. 그만큼 역관은 넓은 기회의 문이 있었다.
역관은 고려 시대 역관 양성을 담당하던 통문관의 역할을 이어 받은 조선 초기부터 만들어져 운영되는 사역원을 통해 양성되고 철저한 학습과 시험을 통해 선발됐다. 조선은 과거제에 잡학이라 해서 역관이나 의원이 될 수 있는 시험을 별도로 운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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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관 양성의 중심, 사역원
사역원에서는 중국은 물론이고 일본어와 여진어, 몽골어까지 다양한 외국어를 공부했다. 조선에서 교역을 하는 모든 나라들을 망라한다 할 수 있었다. 이는 조선의 대외 관계에서 중국과의 사대를 중심으로 폐쇄적인 모습을 보였다고 하지만, 대외 교역의 중요성을 무시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사역원은 왕들의 깊은 관심 속에 운영됐고 그 규모가 매우 컸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힘든 교육을 받고 시험을 통해 역관이 되었다 해도 관리로서 승진에는 제한이 있었고 이는 양반들이 역관에 대한 관심을 떨어지게 했다. 이에 역관은 점점 중인들의 대표적 직업이 됐다. 그렇다고 그 역할 비중이 줄어들지 않았고 국가 차원에서 역관에 대한 수요는 계속 있었다. 조선 후기 두 차례 큰 전란을 경험하고 청나라와 일본과의 대외 교역이 활발해지는 상황도 영향이 있었다.
조선에는 병자호란 이후 북벌 운동이 강하게 일어나기도 했지만, 이는 국내 정치적 상황 속에서 발생한 흐름이었고 대외 교역과 교류의 중요성을 인식했을 가능성이 크다. 두 차례 전란으로 큰 피해를 입었던 조선으로서는 또 다른 전쟁을 막는 게 중요했다.
이를 위해 주변 국들과의 외교는 필수적이었다. 속으로는 오랑캐라 멸시했지만, 청나라 일본과의 외교는 불가피한 일이었다. 청나라와의 조공 무역은 여전히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는 창구였고 일본과의 외교는 왜구 등의 노략질을 방지하는 측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상황에서 역관들의 활약은 자연스러웠고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도 있었다.
역관들의 존재감을 조선 후기 사회 변화와도 관련이 있다. 조선 후기 조선의 신분제는 크게 흔들렸고 피라미드 식 계층 구조도 와해됐다. 경제에서도 농업 중심에서 상업과 공업이 발전이 분명하게 나타났다. 농사가 아닌 수단으로 부자가 될 수 있었고 그 부는 권력과도 연결됐다. 역관들은 시대 변화를 누구보다 잘 읽을 수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시대를 앞서가는 큰 무기가 될 수 있었다.
조선사의 빛나는 조연, 역관
역관들을 중심으로 한 중인 세력은 점점 그들만의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독자적으로 문화와 예술을 향유하기도 했다. 서울의 명소인 지금의 서촌 일대는 많은 중인들이 살았다. 중인들은 조선 후기 역사의 조연에서 주도 세력으로 발전해 갔다.
또한, 그들은 통해 서구의 문물이 전파되기도 했다. 조선 후기 전파된 천주교 유입과 확산에도 역관을 포함한 중인 세력의 영향이 컸다. 중국과 일본을 거쳐 유입되는 서구의 과학이나 기술 들로 그들 손을 거쳤을 가능성이 크다. 그 속에서 역관들은 그들이 의도하던 하지 않았던 시대 변화를 이끄는 주체가 됐다. 실제 역관 출신들은 조선 말 개화파에 상당수 속하기도 했다.
이렇게 역관들의 삶은 조선 역사에서 알게 모르게 큰 비중을 차지했다. 드라마 등을 통해 보이는 역관 그 이상의 존재였다. 드라마 '연인'에서는 상당 부분 드라마적 상상력이 더해지긴 했지만, 역관을 주인공으로 삼았고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매우 헌신적인 인물로 묘사했다. 역관의 존재를 매우 크게 부각했다는 점은 분명 의미가 있었다.
이 점에서 조선사를 연구할 때 역관들을 포함한 중인들의 활약상을 살피고 연구하는 건 그들의 활약이 컸던 조선 후기의 사회상과 시대 흐름을 읽어내는 데 있어 중요한 방편이 될 수 있다.
사진 : 픽사베이 / jihuni74,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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