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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은 2차, 3차 고려 거란 전쟁을 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에 당시 왕이었던 현종과 3차 전쟁의 대승을 완성했던 귀주대첩의 영웅 강감찬이 이야기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또한, 현종을 왕위에 옹립한 정변을 일으킨 강조와 2차 전쟁의 영웅 양규가 극 초반을 이끌고 있다. 

하지만 2차와 3차 전쟁 이전 거란의 1차 침략을 극복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 있었다. 우리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외교를 했다고 추앙받는 서희가 그 인물이다. 서희는 1차 전쟁 당시 거란의 장군 소손녕과 담판을 통해 거란의 침략을 멈추고 강동 6주의 지배권을 확정해 영토까지 넓히는 성과를 만들었다. 각종 역사서나 위인전에서 서희가 이룬 성과는 지금도 자주 언급되고 있다.

서희는 이런 외교적 성과와 함께 고려가 획득한 강동 6주의 지배권을 공고히 하고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하는 데 있어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고 강직한 성품으로 고려 조정을 잘 이끈 행정가이기도 했다. 고려 최고의 성군인 성종 시기 서희는 성종의 큰 신임을 받는 중요 관료였다.

그가 소손녕과의 담판에 나서고 강동 6주 개척 등에 주도적 역할을 한데는 성종의 지지가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성종과 서희의 관계는 2차와 3차 전쟁의 주역인 현종과 강감찬의 관계와 비슷하다. 공교롭게도 성종과 서희, 현종과 강감찬의 비슷한 시기 세상을 떠났다. 국난 극복이라는 중요한 사명을 띠고 태어난 동반자이자 운명 공동체라 해도 될 정도다.

 

 

조선에서 편찬한 고려 역사서 고려사 -  위키백과

 

 

고려의 북진 정책, 거란과의 갈등 


서희는 강력한 왕권을 구축한 광종 시대 과거를 통해 관직에 진출했다. 광종은 과거제 도입과 노비안검법 실시로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이후에도 강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던 호족들을 대거 숙청, 굴복시키고 자신의 친위 세력을 적극 등용하던 시기 조정에 들어왔다. 서희는 어쩌면 광종의 정치를 지탱하는 신흥 정치 세력의 일원이라 할 수 있다. 이후 서희는 광종의 유지를 이어받아 고려의 체제를 정비하고 중앙집권 시스템을 확립하는 데 있어 중요할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서희가 역사의 전면에 나온 건 993년 있었던 거란의 1차 침입이었다. 거란은 고려가 건국하고 후삼국을 통일하던 시기 만주지역의 패권을 장악하고 만리장성을 넘어 송나라 영토를 그들의 영토에 편입하는 등 동북아시아의 강국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거란은 936년 5대 10국의 혼란기에 있었던 중국의 한 나라인 후진을 지원하는 대가로 베이징 일대의 연운 16주를 획득했다. 이 지역은 비옥한 평야지대로 농산물의 생산량이 막대했고 거란을 부강하게 하는 원천이 됐다. 이를 기점으로 거란은 국호를 요로 변경하고 독자 왕국으로의 입지를 공고히 했다. 이 936년은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를 무너뜨리고 후삼국을 통일한 시기와 맞물린다. 고려와 거란의 성장기는 거의 일치한다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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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태조 왕건 때부터 북진 정책을 중요한 국시로 삼았다. 그 과정에서 거란에 멸망한 발해의 유민들을 대거 받아들여 세력을 확장했다. 고려로서는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과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하기 힘들었다. 고려는 거란과의 적대정책을 지속했다. 이는 5대 10국의 혼란기를 끝내고 중국 통일 왕조로 들어선 송나라와의 적극적 외교 관계로 연결됐다.

송나라는 건국 후 만리장성 안쪽에 자리한 연운 16주의 수복을 위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는 거란과의 불편한 관계를 불가피하게 했다. 거란에게 고려와 송나라의 연합은 압 뒤에서 적을 상대하는 일이었다. 고려와 송의 연결을 막을 필요가 있었다. 거란이 건국 직후부터 고려와 관계 개선을 시도한 건 이유가 있었다.

고려는 초기 대 거란 적대정책으로 일관했지만, 이후 점점 실리 외교로 전환을 시도했다. 서경을 영토 확장의 전전기로 삼으며 새롭게 개발하면서도 거란을 자극하지 않았다. 거란과 송나라 사이에서 중립적인 자세를 유지했다. 이는 60여 년간 거란이 고려를 침략하지 않게 했다. 거란으로서도 고려와 군사적 충돌을 지향하고 송나라와의 대결이 주력할 필요가 있었다. 고려 건국 후 거란은 국경 인근에서 국지적 충돌이 있었겠지만, 전쟁의 위험까지 가는 상황은 아니었다.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기도 했고 고려의 외교술도 작용했다. 

 

 

 

 

송과 거란 사이 균형 외교 정책 고려가 맞이한 거란의 1차 침공


하지만 거란은 993년 돌연 고려 침공을 단행했다. 송나라와의 전면전을 위한 사전 작업의 성격이 강했다. 혹시 모를 고려의 배후 공격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고 고려와 송나라의 연결 고리를 끊기 위한 목적이었다. 역사에는 거란이 80만 대군으로 침략했다고 했지만, 거란이 송나라와 군사적인 긴장 관계에 있었음을 고려하면 그런 대군을 동원하기 어려웠다. 80만 대군설은 과장된 측면이 강하다. 또한, 거란군을 이끌었던 장군, 소손녕의 직급은 최고 지휘자 수준은 아니었다. 전면적인 침공보다는 일부 병력을 동원한 무력시위를 통해 고려를 굴복시키려는 의도가 강했다. 

거란 대군의 침공은 고려에 큰 충격이었다. 고려는 건국 초기부터 30만 명에 이르는 광군을 조직하는 등 전시 동원 체제를 갖추고 있었지만, 실전 경험이 부족한 병사들이 대부분이었다. 여기에 거란의 군대에 80만에 이른다는 소식은 고려 조정을 더 큰 혼란 속으로 빠져들게 했다. 

이에 고려 조정에서는 화친을 주장하는 여론이 강하게 일어났다. 전쟁 불사론은 힘을 잃었고 화친의 방식을 두고 항복과 영토의 일부는 내주는 할지론으로 나뉘어 논쟁하게 이르렀다. 거란의 침략을 맞서기 위해 서경까지 군대와 함께 와 있었던 성종으로서는 답답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제대로 된 전투 없이 항복부터 주장하는 대신들에게 강한 불만과 실망감을 가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미 송나라를 넘어서는 강국이 된 거란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확률이 낮은 것도 사실이었다. 

 

EBS 클래스 e

https://classe.ebs.co.kr/classe/detail/show?siteCd=CL&prodId=441752&courseId=10207460&stepId=60049821&lectId=60368643&clsfn_syst_id=40009039

 

박종기 - 백 년의 영토분쟁과 실리 외교

세계는 왜 대한민국을 ‘Korea’라고 부르는 걸까요?<br>그 답은 한반도 역사상 가장 개방적이고 역동적인 나라, ‘고려’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br>하지만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고려사는

classe.ebs.co.kr:443

 

 

이때 나선 이가 서희였다. 서희는 두 번째 전투에서 고려 성을 함락하지 못한 거란군의 군세에 의문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의 침략에 숨은 의도가 있다는 분석을 했다. 서희는 직접 적진으로 가 거란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한 협상을 주장했다. 그리고 자신이 사신으로 나섰다. 아무도 나서지 않는 길, 서희에게는 목숨을 담보로 한 위험한 일이었다. 

이에 성종은 거란 진영으로 떠나는 서희를 밖에서 배웅하며 격려했다. 그렇게 거란군 진영으로 간 서희는 거란 장군 소손녕과 치열한 신경전을 펼쳤다. 소손녕은 서희에게 신하의 예를 갖추길 강요했고 서희는 한 나라를 대표한 사신이 적국의 장군에게 예를 갖출 수 없다고 맞섰다. 이후 서희는 막사로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소손녕으로서는 기선 제압을 위한 시도가 뜻하지 않은 결과로 연결되고 말았다. 이에 소손녕은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고 양측은 동등한 위치에서 협상을 시작했다. 소손녕은 고려가 신라를 계승한 나라이고 그에 따라 기존 신라 영토가 아닌 북방의 영토를 거란에 내놓을 것으로 주장했다. 이에 서희는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임을 분명하고 거란의 논리대로라면 오히려 거란의 영역까지 고려의 영토가 되어야 한다고 역공했다.  

영토와 관련한 침략 명분이 궁색해진 소손녕은 고려가 거란과 수교하지 않고 송나라와 교류하는 점을 지적했다. 이에 서희는 거란의 고려 침공의 중요한 목적이 송나라의 관계 단절에 있음을 간파했다. 서희는 이를 이용해 새로운 제안을 했다. 고려가 거란과 친교하지 못하는 건 국경 사이에 있는 여진족 때문임을 주장했고 만약, 고려가 여진족을 토벌하고 진지를 구축해 영토를 확보하면 교류가 가능하다는 주장을 더했다.

 

 

 

 

전면전 피한 서희의 외교술, 전략지 강동 6주 확보와 성공적 개척 


이에 소손녕은 서희의 주장을 받아들여 고려의 강동 6주 관할권을 인정하고 화친을 맺는 조건으로 철군을 약속했다. 결국, 서희는 전면전을 피하고 고려의 오랜 숙원이었던 북방영토 개척과 영토 확장을 함께 이룰 기회를 열었다. 합의 후 서희는 소손녕으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았고 많은 선물을 받아 돌아올 수 있었다.

서희의 비범함과 외교적 통찰력이 이룬 성과였다. 이후 고려는 송나라와의 외교 관계를 중단하고 거란에 사대를 하게 됐지만, 강동 6주라는 중요한 전략지역을 차지하는 실리를 취할 수 있었다. 또한, 거란에 대한 사대는 형식적인 것으로 자주성을 유지할 수 있었고 송나라와 비공식 루트로 관계를 유지하는 등거리 외교를 유지했다. 

여기까지가 많은 이들이 알고 있는 서희의 모습이다. 서희의 업적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서희는 이후 강동 6주 개척을 주도했다. 그의 주도로 그 지역에 성이 구축되고 진지가 만들어졌다. 고려의 북방 수비 진영은 서희에 의해 기초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기반 위에 고려는 북방의 수비를 강화할 수 있었고 이는 거란의 거듭된 침략을 막아내는 기반이 됐다. 일설에는 서희가 강동 6주 개척 등 각종 현안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과로로 세상을 떠났다고 전해진다. 그만큼 서희는 자신보다 국가를 우선했던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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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희의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2차 고려 거란 전쟁시 고려는 개경이 함락되는 아픔이 있었지만, 북방의 성들이 건재하면서 거란군의 추가 남하를 저지했고 철군하는 거란군에 치명적 피해를 입힐 수 있었다. 또한 고려 현종은 남쪽으로 몽진해 안위를 지킬 수 있었다. 이를 통해 고려는 최악의 상황을 피하고 전후 복구와 향후 전쟁을 대비할 수 있었다.

2차 고려 거란 전쟁에서도 거란은 북방의 고려 성을 점령하지 못하고 개경으로 바로 진격하는 전략을 펼쳤다. 그만큼 북방의 고려 수비 진영이 강력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거란군은 개경 공격을 하지 못하고 후퇴하다 귀주에서 궤멸되고 말았다. 그 빛나는 승리를 우리는 귀주대첩이라 말하고 그 대승의 기반은 서희가 주도한 강동 6주 개척에 있었다. 

이에 서희는 뛰어난 외교관이자 또 다른 전쟁영웅으로 손색이 없다. 그런 서희를 알아보고 중용한 고려 성종 또한 인정받아야 한다. 앞으로 고려 거란 전쟁 드라마를 보는 이들이 서희에 대한 정보를 함께 한다면 그 이해의 폭을 보다 넓힐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본 게시글은 EBS 스토리 기자단 18기 활동으로 작성하였습니다.

 


사진 : 드라마 / EBS/ 위키백과,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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