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728x90
반응형
728x170

 

1919년 3월 1일, 그날은 온 민족이 일제의 압제에 맞서 조국과 민족의 독립을 외친 3.1만세 운동이 일어났던 날이다. 1910년 8월 29일, 한. 일 강제병합조약 체결로 조선을 식민지로 만든 일제는 이후 공권력과 무력을 통해 우리 민족을 억누르는 무단통치로 조선을 통치했다. 

무단통치 기간 일제는 헌병대로 대표되는 군을 배치하는 등 헌병경찰 제도를 시행했다. 아울로 중요 지역에 군대를 배치했다. 총칼로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가 저항의지를 막으려는 조치였다. 여기에 더해 언론, 출판, 결사를 통제해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원천적으로 봉쇄했다.

또한, 교육에 있어서도 조선인들에게 민족주의, 고등 교육의 기회를 막았고 민족학교 설립도 불허했다. 토지조사 사업을 통해 일제의 토지 지배권을 강화하고 농업에 종사하는 대부분의 소작농과 자영농들의 몰락을 불러왔다. 회사령과 어업령, 산림령과 광업령 등을 통해서는 민족자본 성장의 싹을 사전에 차단했다. 이런 조치를 통해 일제는 조선을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완전히 장악하려 했다. 

하지만 무단통치의 지속은 조선인들의 큰 원한과 일제에 대한 반감을 불러왔고 1919년 고종 황제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기점으로 3.1만세 운동으로 폭발했다. 3.1 만세운동은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뜻하는 바를 이루지 못했지만,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대. 내외에 다시 천명하고 국내외 독립운동을 다시 활발하게 하는 계기가 됐다.

 

 

외신에서 보도한 3.1운동

 

 

민주 공화정의 시작 3.1 운동


무엇보다 독립운동의 구심점이자 민주공화정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임시정부 수립이라는 의미있는 결과로 이어졌다. 임시정부의 수립은 단절된 우리 민족 역사의 복원이자 길었던 봉건적 구체제를 탈피하는 일이었다. 이와 함께 국민이 주인인 나라 대한민국의 시작점이기도 했다. 

이처럼 3.1 만세운동은 자랑스러운 우리 역사지만, 그에 앞서 조선의 패망사에 대해서도 살필 필요가 있다. 조선은 수백년의 역사를 가진 나라였고 단일 민족의 정체성도 강했다. 하지만 조선은 일제에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고 국권을 강탈당하고 말았다.

일제 강점기 전 다수의 의병운동도 있었고 애국지사들의 독립운동도 있었지만, 조선의 집권세력은 그런 국권을 지키려는 민족적 의지를 결집하지 못했고 상당수는 일제의 조선병합에 협조하기도 했다. 이는 외침에 전쟁 한번 하지 못하고 나라를 빼앗기는 비운의 역사로 이어졌다. 이와 관련해 조선의 패망 과정을 순차적으로 살피면 그 이유에 대해 조금은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임시정부 요인들

 

 

일제 조선 침략의 시작점 된 강화도 조약


일제의 조선 강제 병합의 시작은 1876년 강화도조약이라 알려진 조일수호조규의 체결이다. 그전 조선은 흥선대원권이 조정의 실권을 장악한 상황에서 서구 열강들의 통상 요구에 강력히 대응하는 쇄국정책으로 맞섰다. 그 과정에서 대대적인 천주교 박해, 프랑스, 미국 군대와 무력 충돌한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의 전투도 있었다.

이를 두고 시대 흐름을 읽지 못한 대원군의 실책이라는 평가가 대부분이지만, 당시 조선은 여전히 사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청나라가 아편 전쟁 패전 등을 통해 서구 열강에 속수무책으로 침탈당하는 모습을 봤다. 서구 열강에 대한 공포심이 극대화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그들에 대한 반감도 큰 상황이었다. 대원군은 자신의 권력 기반을 더 공고히 하려 대외 강경책을 펼친 부분이 크지만, 준비 안된 통상에 대한 우려도 있었고 여론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 시기 흥선대원군은 장성한 아들 고종이 친정 체제에 대한 의지를 보일 시점이었고 그에 대한 조정의 여론도 긍정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흥선대원군

 



흥선대원군은 집권 연장을 위해 국민적 지지를 얻어야 했을 것으로 보인다. 결과적으로 이런 쇄국 정책은 조선의 근대화를 늦추고 말았다. 한편으로는 서구 열강들의 여타 아시아 국가들과의 통상은 불평등 관계 속에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그 시기 통상을 했다 해서 조선이 근대화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촉진했을지는 보다 면밀히 살필 필요가 있다. 

이렇게 쇄국정책의 중심이었던 흥선대원군이 1873년 실각하면서 조선의 대외 정책에 변화가 생겼다. 이후 정권을 장악한 민비, 명성황후를 중심으로 한 민씨 정권은 개항에 우호적이었고 개화파 인사들도 조정에서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 시점에 조선과 서구적인 외교관계 수립을 원했던 일본은 1875년 운요호 사건으로 조선에 무력시위를 했고 이를 기점으로 조선과 일본은 수교 협상을 위한 테이블에 앉았다. 문제는 조선이 국가간의 조약 체결에 무지했다는 점이다.

조선의 외교는 사대관계를 지속하는 대중국 관계에 집중되어 있었다. 국가 간의 협상과 그에 따른 조약체결은 선례도 없었고 경험도 없었다. 반대로 일본은 강제 개항이었지만, 미국을 포함한 서구 열강과 외교 통상 조약을 체결한 바 있다.


 

강화도 조약문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 침략 답습한 일본


이후 일본은 1866년 메이지 유신을 기점으로 급속한 서구식 근대화를 추진했다. 조선보다 국제 정세에 대한 이해나 정보가 많았던 일본이었다. 또한, 당시 일본에는 국력의 신장 등을 위해 조선을 정벌해야 한다는 정한론이 강하게 대두되고 있었다.

이는 조선에 대한 군사적 침공까지 고려한 강경책이었고 점점 일본 권력내에서 힘을 얻었다. 역사적으로 일본은 한반도에 대한 침략을 지속했고 임진왜란과 같은 대규모 침공을 단행한 적이 있다. 즉, 정한론은 그러한 침략 역사의 연장선이자 메이지 유신 후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 열차에 탑승한 일본의 국군주의를 대표하는 사상적 근거였다. 그 점에서 강화도조약 체결은 일제의 조선 침략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일본은 조선의 국제조약에 대한 부족한 이해 등을 이용해 서구 열강이 그들에게 했던 것처럼 그들에 유리한 불평등 조약을 이끌어냈다. 이 조약으로 조선은 기존 일본과 통상관계를 유지하던 부산 외 항구 2개를 개항하게 됐다. 또한, 일본인들의 개항장 내 거주와 상업활동이 가능해졌고 각종 범죄에 대한 치외법권도 인정됐다. 또한, 비관세 혜택까지 일본은 인정받았다. 이런 일본과의 불평등 조약과 개항은 이후 서구 열강과의 불평등 조약으로 이어졌다. 

그 이면에 여러 문제가 있었지만, 조선은 이후 근대화를 진행했다. 하지만 기존의 봉건적 국가 운영 시스템에는 변화가 없었다. 더군다나 대원군 이후 집권세력이었던 민씨 정권은 무능하기도 했고 부정부패가 만연했다. 매관매직이 성행했고 과거 조선을 병들게 한 세도정치 시기와 같은 권력의 사유화도 심화됐다. 또한, 준비 안된 근대화 정책은 곳곳에서 부작용을 발생시키고 일반 국민들의 삶을 더 어렵게 했다. 

 

 

반응형

 




민씨 정권의 무능과 부정부패, 근대화에 대한 불만 폭발한 임오군란


이런 일반 국민들의 정권에 대한 불만은 1882년 임오군란으로 폭발했다. 임오군란의 결정적 계기는 구식 군대에 대한 지속적인 차별에 있었다. 민씨 정권은 일본의 지원을 받아 신식 군대 양성에 공을 들였다. 그 과정에서 기존 군대의 병사들은 급료가 장기간 밀리는 등 생활고를 겪어야 했다. 군대의 편제를 개편하고 현대화하려 한다면 기존 군대를 이용하면 됐지만, 민씨 정권은 신신 군대를 별개로 운영했다.

당연히 구식 군대의 불만은 나날이 커져갔고 모처럼 쌀로 지급된 급료에 다수의 모래와 겨 등이 포함되면서 누적된 불만이 폭력적으로 폭발했다. 무장한 구식군대는 민씨 정권의 주요 인사를 참살하고 신식 군대의 일본 교관을 살해하는가 하면 일본 공사관을 습격하기도 했다.

이런 구식 군대의 무장봉기에는 한양의 상당수 백성들도 함께 했다. 구식군대는 궁궐을 점령하고 민비를 찾아 척살하려 했다. 그들은 무능하고 부패한 민씨 정권에 정점에 민비가 있다고 여겼고 실제 민비는 사실상 권력의 실세이기도 했다. 민비는 그 사이 궁궐을 벗어나 장호원까지 피난을 떠나는 처지가 됐다. 자칫 자신의 왕위마저 위협받을 수 있는 상황에 몰린 고종은 아버지 흥선대원군에게 권력을 이양해야 했다. 흥선대원군은 상황을 진정시키는 한편 민씨 정권이 추진했던 각종 개화정책과 군과 조정의 편제 개편을 폐기했다. 

그렇게 구체제로의 복귀로 귀결되던 임오군란은 조선 조정의 요청을 받은 청나라 군의 개입으로 반전된다. 청나라 군대는 흥선대원군을 납치해 청나라로 압송했고 구심점을 잃은 구식군대의 조직은 쉽게 와해됐다. 이후 민비가 다사 궁궐로 복귀했고 민씨 정권이 다시 권력을 장악했다. 

하지만 국가 내부의 문제를 외세를 통해 해결한 결과는 큰 대가가 필요했다. 이후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내정 간섭을 본격화했고 이를 국가 간 조약의 형태로 분명히 했다. 또한, 경제 관련 조약을 통해 청나라 상인들의 조선에 대한 자유로운 무역을 허용해야 했다. 

일본에 대해서도 조선은 제물포 조약을 통해 일본인들에 대한 보호 명분으로 일본군의 조선 주둔을 허용해야 했고 임오군란 과정에서 파괴된 일본 공사관에 대한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다. 일본으로서는 임오군란을 통해 조선에 대한 침략을 더 본격화할 수 있었다. 이에 조선은 어느새 청나라군과 일본군이 동시에 주둔하면서 양국의 세력 각축장으로 변모하고 말았다. 

 

 

1883년 미국 방문한 외교사절관인 보빙사 일행




서구 열강과의 첫 수교, 조미수호통상조약


이런 상황에 조선은 청나라와 일본의 위협에 대응하는 방편으로 신흥 강국인 미국과의 수교를 적극 추진했다. 1882년 5월 조선은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다. 이 조약은 서구 열강과 체결한 최초의 수호통상 조약이었다. 이 조약에는 조선의 외부로부터 위협에 미국이 적극 개입해 거중 조정해 조선의 안위를 보장한다는 조항을 넣었다. 조선으로서는 외교적으로 중요한 안전판을 확보한 셈이었지만, 국익이 우선인 국제 관계에서 이는 훗날 무의미한 문구가 된다. 

하지만 미국과의 수교가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을 벗어나게 하는 건 아니었다. 여전히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에 조선의 개화파 중에서 이에 대한 불만을 가진 이들이 늘어났다. 특히, 김옥균 등을 중심으로 한 젊은 급진 개화파 세력들의 반감이 더 컸다.

그들은 청나라의 간섭을 완전히 벗어나고 조선의 근대화 촉진을 위한 정변을 추진했다. 급진 개화파는 정변의 성공을 위해 일본을 끌어들였다. 조선에 대한 영향력 확대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일본 역시 이에 동조했다. 1884년 12월 4일 급진 개화파는 우정국 개국 축하 연회 자리에서 정변을 감행했다. 그들은 고종과 민비의 신병을 확보해 인근 궁으로 이동시켰다. 일본군은 그 궁궐을 수비를 담당했다. 

 

 

김옥균




3일 천하 갑신정변


급진 개화파는 이후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간섭 배제, 문벌 신분제 타파, 근대적 제도 개혁과, 조정 개편, 치안 확립 등의 정책을 발표했다. 하지만 갑신정변은 외세에 의존했다는 구조적 한계가 있었고 국민적 지지를 얻지 못했다. 애초 예상과 달리 고종마저 그들에게 등을 돌리면서 명분마저 잃었다.

결국, 갑신 정변은 민씨 정권의 요청을 받는 청나라군의 개입과 함께 3일만에 실패로 돌아갔다. 그들과 함께 했던 일본군은 중과부족의 상황에서 청나라군과의 무력 충돌에 소극적이었다. 갑신정변의 실패와 함께 김옥균을 포함한 다수 개화파 인사들은 대역죄로 처형되거나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다시 한번 청나라의 도움을 받은 민씨 정권을 친 청나라 정책을 강화했다. 또한, 급지 개화파 인사들의 대거 숙청으로 조선의 근대화 역시 그 속도를 더할 수 없게 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정변에 책임이 있는 일본에 대해 조선은 그 책임을 묻지도 못했고 오히려 한성조약을  통해 정변 과정에서 발생한 일본의 피해를 배상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갑신정변 후 청나라와 일본은 1885년 톈진 조약을 체결하고 양국 군대의 조선에서 철군과 향후 양국 중 어느 한쪽이라도 조선에 파병 시 상대국에 알릴 것을 규정했다. 이는 일본의 조선에 대한 군대 파병을 인정한 것으로 이는 훗날 1894년, 동학 농민군의 진압을 위한 조선 조정의 요청에 의한 청나라군의 조선 파병과 이에 대응한 일본의 파병, 청. 일 전쟁 발발로 연결된다. 

이후 일본은 서구식 근대화에 박차를 가했고 국력을 신장시켜나갔다. 그러면서 막강한 군사력을 구축할 수 있었다. 일본의 근대화와 군비증강은 그들이 추종했던 서구 열강들의 제국주의화를 촉진했다. 그리고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한 우선 목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의 외적 확장을 위해서는 인근 국가와의 전쟁은 필수적이었고 그 첫 대상은 청나라였다. 청나라는 이미 아편 전쟁 등을 통해 예전과 같은 강대국이 아님이 드러났고 내부 권력의 부정부패와 무능 등으로 국력이 크게 약해졌다. 이에 청나라는 서구 열강의 이권 각축장으로 변모했다. 그 왕조는 유지됐지만, 각 지역의 군벌들의 세력을 확대하는 등 통일된 국가 체제를 유지할 수 없었다. 당연히 근대화도 지지부진했다. 이런 청나라의 내부 상황은 일본이 청나라에 도전할 수 있는 근거가 됐다. 

 

 

일본에서 그린 청일전쟁도

 




일본의 청일전쟁 승리 그리고 조선에 대한 지배권 강화 


1894년 일본에 기회가 찾아왔다. 당시 조선은 개항 후 오히려 악화된 민생과 집권층의 부정부패 등으로 국민적 불만이 커져있었다. 이는 반 외세, 반봉건을 기치로 한 동학농민 혁명으로 이어졌다. 호남지역의 농민들을 중심으로 한 동학 농민군은 애초 지역의 탐관오리를 처단하려는 목적으로 봉기했지만, 부정부패 일소와 내정 개혁, 외세배격 등 개혁안을 내놓으며 혁명군의 성격을 띠기 시작했다. 

동학농민 혁명군의 위세는 호남과 충남지역의 관군을 연전 연파하고 그 지역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부정부패 일소, 남녀평등을 포함한 신분제 철폐, 토지의 평등한 분대 등을 담은 동학농민 혁명군의 개혁안은 당시 민중들의 큰 지지를 얻었고 이는 동학농민혁명군의 세력을 더 확대 강화하도록 했다. 이에 조선 조정은 또다시 내부의 문제를 외세의 개입으로 해결하려 했다. 조선 조정은 다시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했고 이는 일본군의 동판 파병을 불러왔다. 

다시 조선은 청나라와 일본군이 맞서는 군사적 긴장이 조성됐다. 언제든 전쟁이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 상황에서 일본은 기습적으로 경복궁을 점령하고 고종을 연금했다. 조선 조정을 장악한 일본은 청나라에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에 돌입했다. 애초 청나라의 우세가 예상됐지만, 지속적으로 군비를 확장하고 신식 무기와 편제로 무장한 일본군은 청나라군에 연전연승했다. 결국, 청일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돌아갔다. 

일본은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막대한 배상금을 청나라가 지불하게 했다. 또한,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배제하고 요동반도와 대만에 대한 그들 지배권에 포함했다. 이 결과로 일본은 친일 내각을 구성하고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할 수 있었다. 

이에 동학 농민군은 반외세를 명분으로 다시 궐기해 일본군에 맞섰지만,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 패하며 동학농민혁명 역시 실패하고 말았다. 조선으로서는 내부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고 국민적 합의를 통해 나라의 개혁과 근대화를 추진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날리고 말았다. 조선의 집권층은 그들의 권력을 지키는 것에만 매달렸고 국내 문제에 지속적으로 외세를 끌어들이는 우를 범했다. 그 결과 조선은 청나라에 이어 일본의 내정간섭을 받는 상황이 됐다.

 

 

압송되는 전봉준

 




동학혁명의 실패, 일본이 주도한 갑오개혁 


일본 주도로 구성된 친일 내각은 청일 전쟁 후 조선의 근대화를 촉진하기 위한 갑오 개혁안을 발표했다. 그 안에는 신분제 철폐를 포함해 정부 조직의 근대화와 중앙과 지방의 행정조직 개편, 근대 교육의 실시, 구체제 개편 등 사회 전반의 개혁을 담고 있다.

비록, 일본의 입김이 크게 작용한 외적 개혁이지만, 그동안 지지부진했던 근대화를 국가 차원에서 추진하게 됐다는 점은 의미가 있었다. 무엇보다 수천 년 세월 이어진 신분제가 사라졌다는 점은 진일보한 일이었다. 하지만 일본의 내정간섭은 여전했고 일본의 이해관계가 크게 작용한 개혁이라는 점은 한계가 있었다. 

이에 조선 조정은 다시 한번 또 다른 강대국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의 간섭을 벗어나려 했다. 러시아는 독일, 프랑스와 함께 청. 일 전쟁 후 일본이 차지한 요동반도의 반환을 하도록 압력을 행사했고 일본은 이에 응해야 했다. 당시 러시아는 서구 열강들도 두려워하는 강대국이었기 때문이었다. 조선 조정은 이를 통해 러시아의 힘을 확인했고 러시아와의 관계를 강화하려 했다. 

이런 조선의 움직임에 일본은 당시 조선 조정의 실권자인 민비를 시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1895년 8월 20일 밤, 일본 정부가 사주해 조직한 자객들이 일본군과 함께 경복궁을 습격했다. 그들은 고종과 세자의 신병을 확보했고 민비의 거처로 가 그를 무참히 살해했다. 또한, 그 시신을 불에 태워 증거를 인멸했다. 역사는 이를 을미사변으로 기록한다. 그들의 만행은 당시 서울에 머물던 외국인 선교사 등에 의해 목격됐고 외신을 통해 알려져 큰 국제적 비난을 받았다.

이는 조선에서도 반일 감정을 크게 하는 일이었다. 당시 조선은 친일 내각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어 있었고 각종 개혁 정책에 대한 저항도 컸다. 특히, 단발령은 국민적 저항을 강하게 일어나게 했다. 그 속에서 중전의 시해는 반일의 불길을 더 거세게 했다.

 

 

을미사변 주도한 일본인들




을미사변과 아관파천


이는 고종도 마찬가지였다. 고종은 일본이 점령한 궁궐에서 신변의 위협에 시달려야 했다. 고종은 첩보작전을 연상하게 하는 방식으로 극적을 경복궁을 탈출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사실상의 망명을 했다. 아관파천이라 불리는 이 사건은 조정 조정의 판도를 친일에서 친러로 변화하게 했다. 당시 친일파 내각을 구성하는 인물들은 숙청됐고 일부는 성난 군중들에 의해 살해되는 일도 있었다. 

이렇게 조정의 상황을 변화시킨 고종은 일본의 간섭을 배제하고 자신의 왕위를 강화할 수 있었지만, 또 다른 외세에 의존한 결과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필요했다. 당연히 러시아의 내정간섭이 심화되고 이권 침탈도 이어졌다. 하지만 이는 외교에서 공짜 점심은 없다는 속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일이었다. 

이런 조선에서 그들의 자주성을 지키고 근대국가로 발전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찾아왔다. 1897년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을 나와 지금의 덕수궁으로 환궁을 결정했다. 그러면서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 자리에 올랐다. 대한제국 역사의 시작이었다.

그는 군주 중심의 권력체제를 바탕으로 적극적은 근대화 정책을 추진했다. 광무개혁으로 불리는 근대화 정책은 전기와 철도, 등 사회 인프라 구축과 토지제도 현대화, 계량형 통일, 군비 강화 등 전방위적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 개혁은 부족한 국가 재정으로 한계가 있었고 서울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면서 많은 국민들이 그 효과를 체감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사회개혁의 핵심인 권력구조 개편 등 정치개혁이 없었다. 오히려 전 근대적인 군주제로 정치체제가 퇴행했다. 

 

 

독립신문

 

 

고종황제

 




조선 자주적 근대화의 마지막 기회 


하지만 그 한편에서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시민운동이 일어났고 진정한 근대국가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도 있었다. 그때 고종을 비롯한 집권층이 이런 국민적 요구를 수용하고 정치체제를 개편하고 민주주의를 발전시켰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만약, 그런 개혁이 있었다면 국민적 역량을 하나로 모으고 외세에 대응할 수 있는 내적 역량이 더 커질 수 있었다. 고종은 독립협회 등의 활동을 자신의 권력에 대한 도전으로 여겼고 이들을 탄압했다. 결국, 독립협회는 해산됐고 자주적 민주주의 발전의 불씨도 사라지고 말았다.

이렇게 대한제국이 개혁이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사이 국제정세는 대한제국에 불리하게 전개됐다. 일본은 한층 강해진 국력을 바탕으로 서구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대열에 합류했고 독자적인 외교를 전개했다. 일본은 러시아와 강하게 대립하던 영국과 동맹을 체결하고 대한제국에 대한 지재권을 인정받았다. 또한, 미국과는 가쓰라 테프트 밀약을 통해 미국의 필리핀 지배권과 일본의 대한제국에 대한 지배권을 상호 인정했다. 

이런 외교활동과 함께 일본은 대한제국에 대한 지배권을 놓고 대결한 러. 일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조선에 대한 지배권에 있어 마지막 장애물마저 치워냈다. 러. 일 전쟁 과정에서 전쟁 개시 전 조선 영토 곳곳에 일본군을 주둔하게 했다. 1904년 2월 한일 의정서를 통해 대한제국 내 일본군 주둔을 공식화했다. 그해 8월, 1차 한일협약을 통해서는 고문정치를 통해 대한제국의 내각을 사실상 장악했다. 

 

 

러일전쟁 풍자그림

 

을사오적 가운데 이완용, 왼쪽 위 이근택, 왼쪽 아래 이지용 오른쪽 위 박제순, 오른쪽 아래 권중현

 




러.일 전쟁 직후 급속히 진행된 일본의 대한제국 강제병합 


또한, 1905년과 1909년 사이에는 화폐개혁을 통해 일본 화폐에 대한제국의 경제가 종속되게 하면서 경제의 예속화를 촉진했다. 1905년 9월 러. 일 전쟁의 승리를 사실상 확정 이후 일본의 대한제국 침탈은 거침이 없어졌다. 급기야 1905년, 을사늑약으로 기록된 2차 한일 협약으로 일본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했다. 이로써 대한제국, 조선은 그 역사를 다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후 일본은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권과 관련해 고종황제를 강제 퇴위시킨데 이어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하고 차관 정치를 통해 조선을 그들의 통치체제에 포함됐다. 이 시기 대한제국의 국민들은 을사늑약으로 이후 의병운동을 활발히 전개해 저항했다. 대한제국 군대는 강제 해산에 맞서 서울에서 치열한 시가전을 전개하기도 했고 다수의 의병에 가담해 의병운동은 활기를 더했다. 

의병은 이후 13도 창의군을 설치하고 전국 단위의 조직으로 발전했다. 또한, 그 역량을 모아 서울 진공작전을 전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의병활동은 일본의 대대적인 토벌 작전으로 점차 그 힘을 잃었다. 아시아에서 최강의 전력을 가지고 있는 일본군의 앞선 화력을 의병들이 당하긴 힘들었다. 1909년 일본은 남한 대토벌 작전을 통해 대한제국내 의병을 무력화시켰다. 이에 상당수 의병조직은 와해됐고 상당수는 만주와 연해주로 이동해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대한제국 내 저항을 완전히 해소한 일본은 대한제국의 행정, 사법, 경찰권을 등을 차례로 장악한 데 이어 1910년 8월 29일 한일강제병합 조약을 통해 조선에 대한 식민통치를 본격화했다. 이 당시 조선 조정은 이미 친일파에 장악되어 있었고 을사늑약 때와 달리 큰 저항도 없었다. 순종 황제는 한일병합조약의 불가피성을 설파하는 조서를 남기기도 했다. 

 

 

1907년 정미의병 사진

 

 

경술국적 시계방향 이완용, 윤덕영, 민병석, 고영희, 박제순, 조중응, 이병무, 조민희

 




집권층의 거듭된 무능을 넘어선 시민운동이었던 3.1 운동


결국, 조선의 집권층은 국민들의 열망을 저버리고 국권을 일본에 스스로 넘겨주고 말았다. 이런 조정의 무기력과 무책임함은 한일강제병합조약 당시 국가의 분위기를 매우 차분하고 조용한 모습으로 만들었다. 당시 국민들은 이를 통해 자신의 안위에 따라 국권을 넘겨준 집권층에 대한 불만은 침묵으로 표출했을지도 모른다. 실제 한일병합조약에 찬성한 관리들과 왕족들은 일제 강점기 그 직위를 유지하며 편안한 삶을 살았다. 

이런 집권층에 대한 불신은 3.1 운동을 시민 계급이 주도하게 했다. 3.1 운동의 민족대표 33인 대부분은 기존 집권 세력은 양반 등이 아니었고 평민 계급이었다. 또한, 만세운동을 이끌었던 이들 상당수는 학생들이었다. 3.1 운동은 불의에 저항한 시민운동이었다. 

이런 국민적 열망을 모으지 못한 조선의 집권층은 역사의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아울러 일본의 조선 침략에 대한 야욕에 대응할 수 있는 기회를 잡지 못한 점도 비판받아 마땅하다. 조선의 패망사를 따라가다 보면 중요한 전환점이 될 지점들이 있었지만, 조선의 집권층은  그들의 기득권 유지가 중요했고 외세를 통해 상황을 모면하기에 바빴다. 스스로 자신을 지킬 힘이 없다면 효과적 외교를 할 수 없음을 그들은 인지하지 못했다. 대한제국 말기에는 그 외세에 영합하는 모습도 보였다. 

이 점에서 조선의 패망사는 지속적인 연구와 함께 교훈을 삼을 필요가 있다.

 

 



사진 : 프로그램, 글 : jihuni74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댓글
반응형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   2024/04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