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0일, 22대 국회를 구성할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총선이 있었다. 이미 몇 달 전부터 시작한 선거 운동의 열기는 그 기간 온 나라를 뜨겁게 했다. 그 때문인지 이번 선거는 지난 총선 이상의 투표율을 기록하며 유권자들의 참여를 이끌어냈다.
선거 결과는 여당과 야당의 희비를 엇갈리게 했지만, 국민들은 다시 한 번 그들의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선거는 국민들이 그들의 의견을 정치권에 반영할 수 있고 정치인들의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하는 몇 안 되는 기회이기도 하다. 이에 선거는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중요한 버팀목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소중한 국민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도록 하는 민주 공화정을 시작된 날이 오늘이다.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날이기 때문이다. 올해 105주년이 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일은 국회의원 총선일과 겹치며 그 의미가 더 새롭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3월 1일 온 국민이 일어나 일제의 압제에 맞선 3.1 운동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3.1 운동은 불의한 세력에 대한 저항이었고 일반 민중들이 주도한 국민운동이었다. 실제 3.1 운동의 주체는 조선의 주류를 이뤘던 양반들이나 관료들이 아니었다. 민족대표 33인의 면면을 살펴도 조선과 대한제국의 주류를 이뤘던 이들이 아니었다. 또한, 만세 운동을 준비하고 거사를 이끈 이들은 젊은 학생들이었다.
국민적 독립 열망이 폭발한 3.1 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그렇게 국민적 저항운동이 된 3.1 운동은 국민이 주인이 되는 나라, 대한민국 역사를 시작하게 했다. 3.1 운동은 여러 국. 내외적 환경이 결합되어 일어났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대통령 윌슨이 주창한 민족 자결주의는 식민 지배를 받고 있는 민족들의 독립의지를 드높였다.
물론, 민족자결주의는 패전국의 식민지에 국한된 한계가 있었지만, 그 파급력은 매우 컸다. 이는 일제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었던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에 상당한 자극제가 됐다. 이는 제1차 세계대전 전후 처리를 위한 국제회의인 파리강화회의의 대표단 파격 등 외교 독립운동과 1918년 음력 11월,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가들이 주축이 된 무오독립선언, 대한독립선언서의 발표로 이어졌다. 대한독립선언서 발표는 1919년 2월 8월 일본에서 유학 중인 조선의 학생들이 주도한 2.8 독립선언으로 다시 이어졌다.
이런 해외 독립운동의 열기는 국내로 전해졌고 국내 독립운동가들이 주도하는 3.1 운동의 거대한 물결을 만들었다. 특히, 고종황제의 갑작스러운 승하는 민족을 하나로 묶는 계기 됐다. 비록, 3.1운동의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대내외에 천명할 수 있었다. 이와 함께 독립운동을 보다 체계화하고 이를 이끌어갈 수 있는 구심점, 지금의 컨트롤 타워의 필요성을 높게 했다.
이에 해외는 물론이고 국내에서도 임시정부 수립의 움직임이 있었다. 그 결과 각지에 임시정부가 만들어졌다. 대표적으로 연해주 지역에 만들어진 대한국민회가 최초의 임시정부로 기록되어 있다. 이후 국내에 한성정부가 수립되어 국내는 물론이고 미주지역을 중심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여기에 일찍부터 개항한 중국의 자유무역 도시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수립됐다.
특히, 상하이는 국제무역항이기도 했고 세계 각지 사람들의 교류가 빈번히 일어나는 곳이었다. 무엇보다 영국과 프랑스 등 서구 열강들의 치외법권이 인정되는 조계지가 있었다. 이곳은 일제의 영향력이 미치기 힘든 곳으로 보다 자유로운 독립운동이 가능했다. 이는 훗날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각지의 임시정부가 통합되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 1919년 4월 11일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4월 10일, 지금의 국회라 할 수 있는 임시의정원을 세우고 회의를 거쳐 4월 11일,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하고 대한민국의 민주공화제 국가임을 명시한 지금의 헌법인 임시헌장을 발표했다. 그 안에는 신분제 철폐와 국민의 권리와 의무, 대한제국의 계승을 명확히 해 정부의 정통성을 분명히 했다. 긴 세월 이어진 봉건제를 타파하고 국민이 주인이 되는 나라 대한민국의 시작이었다. 이어 임시정부는 4월 13일, 정부 조직과 의회를 더해 임시정부의 구성을 더 명확히 했다.
이렇게 세워진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각지의 임시정부 통합을 위한 논의가 활발히 진행됐다. 시간이 흘러 그해 8월, 독립운동 세력 간 통합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고 같은 해 9월에는 기존의 임시헌장을 구체적으로 보강한 대한민국 임시헌법이 공포됐다. 이로써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독립운동의 구심점으로 자리하게 됐다.
임시헌법은 총 8장, 58조로 구성됐고 대한민국의 민주공화국이고 대한제국을 계승함을 한 번 더 천명했다. 통치 체제로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민주주의 국가의 기본인 입법, 사법이 상호 견제와 균형을 이루는 3권 분립의 원칙도 명시했다. 이를 토대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임시정부였지만, 운영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독립운동 방법론을 놓고 그 의견이 엇갈렸고 각 세력 간 불협화음이 커졌다. 외교독립론과 무장투쟁론, 실력 양성론이 대립하며 노선 갈등이 불가피했다. 여기에 지역적, 이념적 대립도 더해졌다.
이런 임시정부의 갈등을 조정하고 이끌어야 할 대통령 이승만은 주로 미국에 머물러 상해에 체류하지 않았다. 또한, 독단적인 일 처리로 임시정부 구성원들과 갈등이 깊어졌다. 결국, 이승만은 임시정부 인사들에 의해 탄핵되고 말았다. 이는 지도부 공백 사태를 불러왔고 임시정부의 각 세력 간 분열은 쉽게 봉합되지 않았다. 여기에 만주사변을 통해 친일 괴뢰 국가인 만주국을 세우고 중국 침략을 본격화하는 일제의 압박도 임시정부에는 큰 위험요인이었다.
이런 대내외적 문제로 임시정부는 그 동력을 상실했다. 아울러 운영에 필수적인 자금 자원마저 원활하지 않으면서 경제적 형편도 악화됐다. 이에 임시정부와 함께 했던 독립운동 세력들이 하나 둘 임시정부를 떠났다. 임시정부 운영 방향을 새롭게 정립하기 위한 논의도 파행됐다. 임시정부는 존립 기반마저 흔들리는 상황에 직면했다.
흔들리는 임시정부를 다시 일으켜 새운 한인 애국단 활동
임시정부의 위기에서 새롭게 임시정부를 이끌게 된 김구는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의지와 그 존재감을 되살리고 보다 실질적이고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무장 투쟁을 적극 시행했다. 김구는 한인 애국단을 조직해 단원들을 모집하고 그들의 의거를 지원했다. 그 결과 이봉창의 일왕에 대한 폭탄 투척 의거와 윤봉길의 상하이 홍코우 공원 폭탄 투척 의거가 일어났다.
이봉창의 의거는 안타깝게도 폭탄이 제대로 폭발하지 않아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지만,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결정적으로 1932년 윤봉길의 홍코우 공원 폭탄 투척 의거는 당시 일본군 장군을 폭사시키면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를 통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그 존재감을 다시 분명히 할 수 있었다. 특히, 일제의 침락에 맞서고 있었던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도자 장제스는 중국의 100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윤봉길이 해냈다고 하며 크게 칭송했다.
이는 중국 국민당 정부의 임시정부에 대한 전포적인 지지와 지원으로 이어졌다. 국민당 정부는 자금 지원과 함께 군사훈련을 할 수 있도록 했다. 홍코우 공원 의거 이후 일제의 추적과 감시를 받던 김구를 포함한 임시정부 요인들을 보호해 주기도 했다. 중국 국민당 정부와의 제휴는 임시정부가 침체기를 벗어나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하지만 임시정부는 일제가 일으킨 중. 일 전쟁 시기 결사 한정을 표방하며 저항한 국민당 정부를 따라 상해에서 내륙의 충칭까지 머나먼 거리를 이동하는 고행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임시정부는 독립운동을 지속 전개했다. 아울러 일제를 향해 선전포고를 하고 한국광복군을 조직해 무장독립 세력을 규합하고 체계화했다. 또한, 각 전선에서 중국군 및 연합군에 연합 작전을 전개하며 전공을 쌓아갔다.
연합군의 일원으로 일제와 맞선 대한민국 광복군
마침내 광복군은 연합군과 함께 국내 침투 및 진공작전을 준비했다. 그 작전은 실행에 옮기기 전 일제의 무조건 항복으로 아쉽게 이행되지 못했다. 만약, 그 작전이 실행되고 광복군이 국내에 주둔하고 있었던 일본군을 상대로 전공을 올리고 영토를 장악했다면 대한민국은 전승국의 지위를 주장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할 수 있었다.
물론, 그것이 현실이 되지 않았다 해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속적인 무장투쟁과 외교적 활동, 광복군의 활약은 대한민국의 존재를 연합국들에 인지토록 했다. 특히, 1943년 12월 1일 미국과 영국, 중국의 지도자들이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한 카이로 선언에서는 한국민이 노예 상태에 있음을 인지하고 적절한 시기에 독립시킨다는 내용을 포함하게 했다. 선언이라고 하지만, 당시 식민 지배를 받고 있는 나라를 딱 지목해 독립을 보장한다는 건 매우 파격적인 일이었다. 임시정부의 지속적 활동이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이렇게 1919년 4월 시작해 1945년 8월 광복까지 독립운동의 중심으로 활약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였지만, 광복 후 임시정부는 그 존재를 대외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임시정부 인사들은 개인 자격으로 귀국길에 올라야 했다. 그럼에도 국내에 있었던 국민들은 임시정부 인사들의 귀국을 열렬히 환영하며 그들을 반겼다. 임시정부 인사들은 김구를 중심으로 정체 세력을 형성하고 광복후 정국에서 영행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하지만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냉전체제가 광복 후 바로 이어지며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의 직접 대립하는 최전선이 되고 말았다. 두 강대국의 대립은 한반도에 각각의 정부가 만들어지게 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그 소임을 다한 임시정부
이에 남한에는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북한에는 공산주의 체제가 자리를 잡았다. 유엔의 남북 동시 총선과 이를 토대로 한 정부 수립 시도 역시 북한과 소련의 반대와 방해로 시행되지 못했다. 결국, 남한과 북한에는 각각의 정부가 들어섰고 한반도는 분단되고 말았다. 김구를 중심으로 한 임시정부의 세력들은 남. 북 분단에 반대하고 남한만의 총선거 참여를 거부하며 그 의사를 분명히 했지만, 그들의 노력은 실패하고 말았다.
이후 임시정부 인사들은 각자의 이념과 정치적 이념, 이해관계 등으로 인해 흩어졌고 김구마저 안두희에 암살당하면서 구심점마저 잃었다. 이미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서면서 이미 임시정부는 해산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런 아쉬움에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지금의 대한민국의 시작이었다. 헌법 전문에도 대한민국인 1919년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대한제국이 일제에 패망하면서 단절될 수 있는 우리 역사의 공백을 극복하고 조선과 대한제국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지속성을 가지게 했다.
이를 통해 대한민국은 그 정통성을 확고히 할 수 있었다. 이는 헌법에 대한민국의 영토를 한반도와 부속도서로 한다고 당당히 명시할 수 있도록 한다. 이를 통해 대한민국은 북한을 수복해야 할 대상으로 할 수 있다. 이는 대한민국이 우리 민족의 역사를 이어가는 전통성을 가지고 있음을 분명히 할 수 있다.
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역할을 폄하하거나 심지어 일각에서 주장하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일로 해야 한다는 주장은 대한민국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그 점에도 꼭 지키고 전해야 할 자랑스러운 역사라 할 수 있다. 22대 국회의원 총선이 있었던 시기와 함께 찾아온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은 더욱더 특별하게 다가온다.
사진,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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