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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16일 오전, 온 국민을 깊은 슬픔과 절망, 분노에 빠져들게 했던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던 날이다. 이날은 인천과 제주를 오가는 여객선 세월호에는 승무원과 승객을 모두 포함해 476명이 탑승하고 있었다. 특히, 탑승객 중 상당수는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떠난 안산 단원고 2학년 학생 325명과 교사 14명이 포함된 단체 여행객들이었다.

그들을 태운 세월호는 봄날의 제주에 대한 기대와 희망, 저마다의 사연을 간직한 채 진도 앞바다는 지나 제주로 향하고 있었다. 특히, 단원고 학생들에게 친구와 함께 하는 항해는 흥분되는 일일 수 있었다. 그렇게 그들의 추억이 쌓여가던 시간 세월호가 바다 한가운데에서 멈췄고 한 쪽으로 기울어지며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후 상황은 급박하게 흘러갔다. 기울어진 세월호는 복원력을 잃었고 통제가 불가능한 상황에 빠졌다. 상식적이라면 승무원들이 배의 상황은 알리고 승객들의 대피를 도와야 하는 게 보통이었다. 당연히 해양경찰 등에 신고를 하고 대책을 강구해야 했다. 하지만 최초 세월호의 사고 소식을 신고한 건 배에 타고 있었던 승객들이었다. 그들은 휴대폰을 통해 해경 등에 신고를 했고 마침내 세월호의 상황이 관계 당국에 전해졌다.

이제 구조 작업이 이어져야 했지만, 한시가 급한 상황에도 조치는 더디게 이루어졌다. 어이없게도 세월호에서 승객들에게 전해진 방송은 객실에 머물러 달라는 게 전부였다. 배는 점점 침몰하고 있었지만, 대부분 승객들은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가만히 있으라는 말을 믿고 각자의 객실에 머물고 있었다. 

 

 

 




온 국민을 깊은 슬픔속에 빠져들게 했던 그날의 기억 


대부분 승객들이 커지는 위험에 다가가고 있는 사이 해양 경찰의 경비정이 도착했다. 구조활동이 이루어질 것으로 보였지만, 경비정의 구조 손길은 선장을 포함한 선원들이었다. 가만히 기다리라는 방송이 계속되는 사이 선장과 선원들은 경비정을 타고 현장을 떠났다. 이제 세월호에는 승객들을 지키고 보호할 누구도 없었다. 위험을 감지하고 생존을 위해 스스로 행동에 나선 이들도 있었지만, 여전히 많은 승객들은 방송에 따라 객실에 머물고 있었다. 그 승객들 중 대부분은 단원고 학생들이었다.

세월호 승객들이 그중 학생들이 위험을 제대로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들이 남긴, 문자와 SNS 메시지, 사진과 영상을 보면 알 수 있다. 학생들이 위험을 인지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인근 어선과 선박들이 세월호 승객 구조를 위해 현장에 왔을 때 배는 전복되어 침몰중이었다. 현장에서는 세월호가 침몰하는 모습을 발을 구르며 지켜만 봐야 했다. 이는 실시간으로 보도되는 장면을 보고 있던 국민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순간 국민들은 21세기 선진국 대열에 올라섰다고 여겼던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신뢰도 함께 침몰했다. 사고 발생 후 구조를 위한 시간이 충분했음에도 구조의 손길이 닿지 못한 현실에 대한 충격과 안타까움, 슬픔 분노가 함께 했다.

이 사고로 단원고 학생과 교사 339명을 포함한 세월호 탑승자 476명 중 299명이 사망했고 5명이 실종됐다. 구조된 인원은 승무원 23명, 단원고 학생 75명과 교사 3명, 일반인 71명을 포함해 총 172명에 불과했다. 이 사고는 그 규모는 물론이고 사망자 대다수가 생의 꽃의 다 피우지도 못한 고등학교 학생들이라는 점이 더 충격이었다. 참혹한 결과 앞에 온 나라는 깊은 슬픔 속에 빠져들었다. 

무거운 추모의 분위기 속에 각종 행사와 이벤트가 취소되고 예능이나 음악 방송 역시 중단됐다. 한편에서는 혹시나 추가로 구조되는 이들이 더 있을까 하는 기대감도 있었다. 하지만 사고 당일 구조된 인원들 외에 추가 구조 소식은 없었다. 그 사이 세월호는 바다 깊은 곳으로 완전히 침몰해 사라지고 말았다. 마지막 희망의 불씨마저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이후 세월호와 관련한 구조 작업은 수색 작업으로 전환됐고 가라앉은 선체 속에 있던 희생자들이 하나 둘 바다 밖으로 나와 가족들에게 인계됐다. 그럴수록 슬픔의 깊이는 더 깊어졌다. 

 

 

 




이해할 수 없는 참사와 정부의 대응 


세월호 참사의 더 큰 문제는 사후 처리에 있었다. 당시 정부는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명확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이라는 상식적인 조치보다는 빠르게 이 사건을 마무리하고 잊힘을 강요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런 정부의 태도는 오히려 더 많은 의혹들을 키우는 원인이 됐다. 당연히 정부와 정권에 대한 사회적 여론도 크게 악화됐다.

그때라도 정부는 상식에 근거한 사후 처리를 하면 되는 일이었지만, 오히려 세월호 유가족들을 사회적으로 고립시키고 그들의 요구를 정치적 요구로 왜곡하기도 했다. 심지어 여론을 조각하거나 정보기관 등을 동원해 유가족들의 움직임을 감시, 사찰하기도 했다. 이후 각종 조사와 수사를 통해 불법적인 사찰 등은 사실로 드러나기도 했다.

또한, 참사를 추모하는 활동이나 행사 등에 대해서도 정치적 의도가 있다는 식으로 폄하하고 각종 수단을 동원해 이를 억누르려 했다. 진상규명을 위한 위원회가 구성됐지만, 정권 편향적인 인사를 위원회에 포함시켜 그 활동을 노골적으로 방해하기도 했다. 당시 정권을 세월호 참사를 인권의 문제가 아닌 정치적 유불리로만 판단했다. 이는 참사에 공감하고 유가족과 함께 행동하는 이들에게 반정부 인사라는 낙인을 찍도록 했다. 이는 독재 권력이 정권을 장악했던 시기와 같은 모습이었다. 

이런 정부의 형태는 이에 편승한 세력들이 희생자와 유가족들에 대한 가짜 뉴스와 혐오와 편견의 여론을 조장하는 일에 동참했다. 그중 일부는 진상규명 등을 요구하며 단식 농성을 벌이는 현장에서 폭식 투쟁이라는 명목으로 음식을 먹으며 이를 조롱하는 폐륜적인 행동을 하는 이들도 있었다. 

정부는 참사와 관련해 정치적인 진영 논리를 들어대며 유가족을 점점 사회에서 격리, 고립시키려 했고 그들의 정당한 요구를 왜곡했다. 유가족들의 활동을 정치세력과 결탁한 반정부 활동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심지어 색깔론을 제기하는 이들도 있었다. 일각에서는 죽인 이들을 이용해 유가족들이 더 많은 보상금을 받아내려 한다라거나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이 나라를 구하다 죽었냐는 등의  조롱과 악의적인 주장들이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퍼져나갔다. 

심지어 이런 정부의 입장에 상당수 언론들이 동조하며 여론을 만들기도 했다. 점점 유가족들의 외침은 점점 힘을 잃어갔다. 그들의 슬픔에 공감하는 이들 역시 점점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추모하는 리본을 가방에 달거나 배지를 부착하는 것에도 용기가 필요한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잊힘을 강요당했던 유가족들


결국, 산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논리와 집요하게 계속된 유가족에 부정적 여론 조성 속에 대중들의 참사와 관련한 피로감이 쌓이기 시작했다.  추모 분위기를 벗아나 일상 회복이라는 명분에 세월호 참사는 그 속에서 세월호 참사는 유가족들만의 슬픔 속에 갇혀있어야만 했다. 진실의 목소리를 내려는 이들은 큰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억울함과 원통함이 쌓여갔다. 정부가 주도한 명백한 2차 가해였다. 

세월호 참사는 이전에 구축된 국가 재난 대처 시스템이 제대로 가동됐다면 그 피해를 상당 부분 줄일 수 있었다. 국민들의 분노는 당시 정부가 참사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정부는 사후 수습 과정에서 관련 문제들을 분석하고 이를 개선하는 한편, 책임자들에 대한 처벌 등 조치를 해야 했다. 하지만 정부는 문제를 덥고 무마하기에만 급급했다. 관련한 표현 등에 대해서도 이를 억압하기만 했다. 그 속에서 공권력을 동원해 슬픔의 표출을 막았다. 그들에 동조하는 세력들 또한 그에 동참했다. 그 속에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의 목소리는 점점 그 힘을 잃어갔다. 

이 상황에 변호가 생긴 건 정치 상황의 급변이었다. 국정 농단 사태 속에 2016년 연말부터 불타오른 정권에 대한 국민적 여론의 악화는 정치적 성향을 초월한 대규모 촛불집회로 이어졌고 국민적 저항은 정치권을 움직였다. 결국, 국회는 2016년 12월 9일 대통령 탄핵안을 본회의 표결에서 통과시켰다. 그리고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는 탄핵안을 인용하면서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현직 대통령이 파면되는 일이 발생했다. 

이후 세월호 참사와 관련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 등의 목소리는 다시 힘을 얻었다. 이와 관련해 위원회 활동이 이어지고 특검까지 이루어졌다. 깊은 바닷속에 머물러 있었던 세월호도 인양되어 세상의 빛과 함께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유가족들이 그토록 원했던 참사의 원인과 상식 밖의 사고 대처와 관련한 해법은 끝내 명확하게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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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풀리지 않는 의문들 


애초 사고 원인과 관련해 과적과 세월호 운항 시 급격한 방향 전환에 의한 균형 상실이 유력한 원인으로 지목됐지만, 외국의 전문 기관 실험과 관련자들의 재판에서 이 주장은 증명되거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밖에 참사 원인과 관련해 여러 가설들이 주장됐지만, 어느 것 하나 그동안의 의문들을 완벽히 해결해 주지 못하고 있다.

이 밖에 주요 선원들이 왜 승객들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했는지, 승객들의 위험을 알고도 먼저 탈출을 했는지 최초로 현장에 도착한 해경의 배는 왜 승무원들만 먼저 구출하고 조치를 다른 구조 활동을 하지 않았는지 왜 당시 정부의 재난 대처 시스템이 제대로 가동되지 못하고 대통령이 참사 발생 후 한참 지난 시점에 상황과 동떨어진 발언을 했는지, 생존자들 다수 인근 어선들을 통해 구조됐어야 했는지 등등 수많은 의문에 대한 답은 아직 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 사이 생존자들과 유가족 구조 활동에 헌신했던 잠수사 등 수많은 이들은 큰 정신적 고통에 시달렸고 여전히 시달리고 있다. 그 속에서 극단적인 선택으로 세상을 떠난 이들도 있다. 그리고 10년 전처럼 유가족들과 희생자, 생존자들을 상대로 한 혐오와 계속되는 2차 가해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달라진 게 있다면 유가족들이 스스로 조직되어 희생자들을 기억하는 등의 활동과 사회활동을 지속하며 슬픔을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노력으로 승화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AI 생성, 그들의 항해가 행복하게 마무리되길 기원하며

 




세월호 참사는 인간의 문제 


새월호 참사는 정치적 이해관계로 설명되거나 판단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이는 사람의 문제이고 인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일에 진보와 보수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지난해 할로윈에 있었던 큰 참사 속에서 세월호 때와 같은 정부의 대처와 그에 편승한 이들의 혐오와 조롱을 다시 한번 접해야 했다. 지금도 세월호 관련 기사의 인터넷 댓글에는 혐오와 멸시를 담은 글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사회적 참사에 대해 아직도 우리는 그 사안의 본질이 아닌 이해관계에 따라 판단하는 나쁜 사회의 모습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사회적 참사에 대한 원인과 진상을 밝히고 잘못이 있는 이들에 대한 처벌을 하는 건 매우 당연한 일이지만, 그 당연한 일을 말하기가 부담스럽고 큰 용기가 필요한 현실이 반복되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그나마 세월호 참사 10주기는 추모를 보다 자유롭게 적극적으로 할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는 게 작은 위안이다. 다만, 이곳이 정치적 상황 변화에 따라 또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은 마음 한편을 무겁게 한다. 

이제는 큰 비극에 공감하고 마음껏 추모하고 슬픔을 나눌 수 있는 세상이 돼야 한다. 슬픔은 잊는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잊힘을 강조하면 할수록 슬픔은 더 커진다. 오히려 더 기억하고 그것을 통해 교훈을 되새겨야 또 다른 비국을 막을 수 있다. 그동안 있었던 모든 사회적 참사 역시 마찬가지다. 세월호 참사 10주기는 그런 교훈을 보다 더 분명히 하는 시간이 되도록 해야 한다. 이제는 참사 희생자들과 유가족의 시간을 그 시점에만 머물게 하는 사회적 가해는 더는 있어서는 안된다. 

마지막으로 2014년 4월 16일 그날의 희생자들이 못다한 항해를 마치고 이제는 편안한 안식에 들어가기를 소망해 본다.  


사진,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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