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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대회 이후 10년이 넘은 세월을 지나 WBC에서 다시 만난 한국과 일본의 대결은 미디어의 홍보처럼 숙명의 라이벌이란 말이 무색하게 한 경기였다. 대표팀은 조 예선 2차전 일본과의 경기에서 투. 타에서 완전히 밀리며 4 : 13으로 패했다. 만약 한 점만 더 허용해 10점 차가 됐다면 콜드 패를 당할 수도 있었던 완패였다. 

이 경기는 대표팀에서 중요했다. 항상 스포츠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한. 일전의 특수성도 있었지만, 패한다면 3대회 연속 1라운드 탈락이 사실상 확정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선수들 역시 이 점을 분명히 알고 있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정신력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차이가 양 팀에 존재했다. 이 간극은 이닝을 거듭할수록 더 커졌고 패배의 그림자를 대표팀은 피할 수 없었다. 

대표팀은 베테랑 좌완 김광현을 선발 투수로 내세웠다. 애초 김광현은 또 다른 베테랑 좌완 양현종과 함께 불펜진에서 활약할 예정이었다. 대표팀의 애초 구상은 젊고 힘 있는 공을 던지는 좌완 투수인 구창모, 이의리가 선발로 나서 긴 이닝을 소화하는 것이었다. 이는 그들에게 국제경기 경험을 쌓게 하는 의미도 있었고 투구 수 제한이 있는 대회 특성상 가장 믿을 수 있는 투수를 승부처에서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방안이기도 했다. 

하지만 대회 직전까지 구창모와 이의리를 대회 공인구에 적응하지 못했고 스프링 캠프 기간에 열리는 국제경기에 맞게 페이스를 끌어올리지 못했다. 이들은 연습경기와 평가전에서도 불안감을 노출했다. 우완 선발 투수로는 박세웅을 고려할 수 있었지만, 박세웅은 국제경기 경험이 부족하고 지면 탈락이라는 중압감을 이겨낼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30대 후반으로 접어드는 김광현 선발 카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한 수 아래로 여겼던 호주전에서 8실점한 대표팀 마운드의 허약함을 그대로 보여주는 일이었다. 

 

 

 



부담되는 선발 등판이었지만, 김광현은 1회와 2회를 완벽하게 막아냈다. 과거 일본전 호투로 일본 킬러라는 별명을 얻었던 전성기 때 모습 그대로였다. 속구는 힘 있게 스트라이크 존 구석을 파고들었고 주무기 슬라이더도 날카로웠다. 2회 말 내야 실책으로 위기에 몰렸지만, 삼진 3개를 잡아내며 이닝을 정리하기도 했다. 김광현의 공에 일본 타자들은 제대로 된 타격을 하지 못했다. 일본이 자랑하는 투. 타 겸업 선수 오타니 역시 김광현의 슬라이더에 삼진으로 물러났다. 

김광현이 마운드를 완벽하게 지켜내자 대표팀 타선이 힘을 냈다. 그 중심에는 양의지가 있었다. 양의지는 3회 초 일본 선발 투수 다르빗슈의 주무기 슬라이더를 걷어 올려 좌측 담장을 넘기는 2점 홈런과 연결했다. 전날 호주전 3점 홈런과 같이 완벽한 노림수와 타이밍의 타격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기세가 오른 대표팀은 김하성이 상대 실책으로 출루한 이후 이정후의 적시 안타 때 홈을 밟아 3 : 0으로 앞서갔다.

이때까지만 해도 해볼 만하다는 느낌이 들 수 있는 흐름이었다. 하지만 대표팀의 기세는 3회 말 수비에서 이내 꺾이고 말았다. 2회 말까지 일본 타자들을 압도하던 김광현이 흔들렸다. 김광현은 일본의 8번과 9번 하위 타자들이 연거푸 볼넷을 내주며 위기를 자초했다. 김광현은 리드를 잡은 상황에서 더 완벽한 투구를 하려 했지만, 이는 투구 수를 늘리고 볼을 늘렸다. 위기에 몰린 김광현은 두 번째 상대하는 일본 타자들에게 적시 안타를 거듭 허용하며 2실점 했다.

김광현은 3회를 넘기지 못하고 마운드를 원태인에게 넘겨야 했다. 결과적으로 이 장면은 패배의 중요한 원인이 됐다. 대표팀은 김광현이 최소 3이닝 이상을 막아 주길 기대했다. 이미 호주전에서 확인한 허약한 불펜진 상황을 고려하면 선발 투수가 가능한 많은 이닝을 책임질 필요가 있었다. 2회까지 투구 내용이라면 김광현은 4회까지는 무난한 투구가 가능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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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3회 말 김광현은 스스로 무너졌다. 수많은 경기를 치른 그였지만, 그 역시 경기에 대한 중압감을 이겨내기 힘들었다. 어쩌면 대표팀 선수로 마지막 경기가 될 수 있는 경기에서 김광현은 마지막 불꽃을 불태우려 했지만, 그 불꽃은 너무 빨리 사그라 들고 많았다. 김광현에 이어 마운드에 오른 원태인이 적시타를 허용하며 김광현이 내보낸 주자 2명이 다시 홈을 밟았고 김광현의 실점은 4점으로 늘었다. 그의 4실점과 함께 경기 분위기는 일본으로 넘어갔다. 

대표팀 타선은 일본 선발 투수 다르빗슈 공략에는 성공했지만, 이후 마운드에 오른 일본 투수들의 공에 고전했다. 일본 투수들은 150킬로 이상의 속구를 가볍게 지속적으로 던지며 대표팀 타자들을 압박했다. 여기에 전날 호주 투수들과는 한 차원 높은 제구와 변화구 구사능력까지 선보였다. 3회 초 불타올랐던 대표팀 타선은 이후 침묵했다. 6회 초 박건우의 솔로 홈런이 있었지만, 그건 대표팀의 유일한 추가 득점이었다. 

더 큰 문제는 마운드였다. 김광현 이후 대표팀 마운드는 속절없이 무너졌다. 대표팀은 원태인을 시작으로 9명의 투수를 연달아 마운드에 올리는 물량 공세를 펼쳤지만, 대표팀 투수들 공에 적응한 일본 타자들의 방망이는 날카롭게 힘 있게 돌아갔고 대량 득점으로 연결됐다. 특히, 6회 말 일본의 5득점은 경기 승패를 결정짓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대표팀 투수들은 한 이닝을 버티기도 버거웠고 대부분 실점했다. 마지막 투수로 마운드에 오른 박세웅만이 그나마 대등한 승부를 했다. 하지만 박세웅은 이미 승부가 크게 기운 후 등판이었다. 대표팀 투수들은 구속은 일본 타자들을 힘으로 억제하기 힘들었고 제구의 정교함 또한, 일본 투수들과 비교될 수 없을 만큼 부족했다. 대표팀에 기대했던 젊은 좌완 투수 김윤석, 구창모, 이의리는 모두 제구 불안에 노출하며 국가대표라 하기 힘든 투구를 했다. 그 외에 우완 영건들인 곽빈, 정철원 등도 일본 타선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일본은 대표팀 투수들을 상대로 가볍게 추가 득점을 쌓아갔다. 대표팀은 콜드 패를 걱정해야 할 상황까지 몰렸다. 박세웅이 남은 이닝을 무실점으로 정리하고 일본이 다음 경기를 대비해 선발 라인업의 선수들을 교체하는 여유를 가지지 않았다면 전날 중국도 일본에 당하지 않았던 콜드 패를 야구 역사에 남길 수 있었다.

결국, 실력이 부족했다. 패배의 원인을 찾기 민망할 정도의 실력차가 존재한 경기였다. 일본 투수들은 구속이나 제구에서 대표팀 투수들을 훨씬 능가했고 타자들 역시 파워나 기술에서 대표팀 타자들보다 앞선 모습이었다. 과거 일본 야구는 정교하며 현미경 야구로 불릴 정도로 철저한 분석과 작전 야구 등 스몰볼이었지만, 이번 대회 일본은 메이저리그식의 빅볼 야구였다. 일본 대표팀에 힘에 대표팀은 완전히 눌렸다. 

마운드의 부진이 결정적 패인이라 할 수 있지만, 타선 역시 이정후와 양의지, 박건우 정도를 제외하면 아쉬움이 컸다. 대표팀이 기대했던 메이저리그 키스톤 플레어 겸 테이블 세터진은 에드먼, 김하성은 호주전에 이어 일본전에서도 타선에서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

대표팀은 두 선수가 출루해 기동력으로 상대를 흔들고 이정후부터 시작하는 중심 타선의 타점 생산이 중요한 득점 루트였지만, 에드먼과 김하성은 출루조차 쉽지 않았다. 중요한 공격 루트가 사라진 대표팀은 하위 타선에 자리한 양의지, 박건우가 분전하면서 득점을 하긴 했지만, 공격의 연결이나 득점 생산력에서 문제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이강철 감독 역시 경기에 대한 부담 탓인지 특유의 과감한 경기 운영을 망설였다. 3회 말 김광현이 흔들리는 상황에서 보다 빠른 투수 교체로 승부를 걸 필요가 있었지만, 한 템포 느린 교체로 마운드에 오른 원태인이 무사 만루의 큰 위기를 극복해야 했다. 결과적으로 3회 말 4실점은 경기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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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수진의 선발 라인업에서도 타격에서 부진한 에드먼, 김하성의 타순 조정 등을 고려할만했다. 김하성은 현 소속팀 샌디에이고에서도 주로 하위 타선에서 활약했다. 타격감이 좋은 박건우를 테이블 세터로 기용하고 김하성을 부담이 덜한 하위 타선에 배치하는 것도 공격의 연속성을 높이는 방안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강철 감독은 메이저리거 두 명을 믿었고 그들은 반등하지 못했다. 

이렇게 패배에 대한 이런저런 분석이 있겠지만, 대표팀의 연이은 패배 속에서 우리 야구 수준이 리그의 크기에 비례하지 않음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일본전은 애초 승리 가능성이 크지 않았다 하더라도 미니 프로리그를 운영하는 호주전의 패배는 충격적이었다. 또한, 순수 아마추어 선수들로 구성된 체코가 자체 리그를 운영 중인 중국에 승리하는 장면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2009년 WBC 이후 세계 각국의 야구 수준은 크게 향상됐지만, 우리는 KBO 리그에 안주하며 발전하지 못했다. 특히, 투수들 수준이 크게 떨어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번 대회에서 본 세계 야구는 투수들은 스피드 업, 타자들은 파워업의 흐름이 분명해 보였다. 빠른 속구 또는 정교한 제구가 아니면 국제 경기에서 상대 타자를 이겨내기 힘들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과거에는 우리 투수들의 변화구가 위력을 발휘했지만, 야구의 분석 시스템이 크게 발전했고 이에 따라 다른 나라 타자들의 대응능력이 크게 향상됐다. 첫 경기 패배를 안긴 호주 타자들 역시 예상과 달리 변화구 대처능력이 있었다. 마운드에서 부상으로 등판하지 못한 강속구 마무리 고우석의 부재가 생각하기도 하지만, 그가 마운드에 올랐다 해도 이번 대회 부진한 대표팀 마운드의 상황이 크게 달라졌을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이번 대회 드러난 마운드의 수준으로는 앞으로 국제경기에서도 고전을 면치 못할 것으로 보인다.

 

 

 



타자 역시 150킬로 이상의 속구에는 대부분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공을 멀리 보내는 파워 역시 호주, 일본에 미치지 못했다. 최근 우리 프로야구가 파워 면에서 크게 향상된 모습을 보였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타고투저 흐름의 KBO 리그에서 통용되는 것이었음을 이번 대회에서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 야구 좀 한다는 나라였던 한국이었지만, 지난 도쿄 올림픽, 이번 WBC를 통해 세계 야구에서 우리의 위치가 어느 정도인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도쿄 올림픽 메달 실패는 우리의 실력이었다. 우리가 정체한 사이 우리가 애써 라이벌이라 여겼던 일본은 훨씬 더 발전된 야구를 했다.

당분간은 일본과의 격차를 줄이기 어려워 보인다. 그동안 대표팀을 이끌었던 베테랑들이 떠난 이후 일본과의 격차는 더 커질 것으로 보인다. 일본은 젊은 선수들이 대표팀의 주축을 이루면서도 강한 전력을 과시했다. 또한, 일본 외에도 이번 대회 참가한 과거 야구 불모지로 여겼던 나라들의 기량 향상도 눈에 보인다. 

WBC 실패를 두고 여러 분석이 나올 것으로 보인다. 선수들 그리고 KBO 리그에 대한 비난도 커질 수 있다. 하지만 이번 대회에 임하는 선수들의 자세는 분명 이전보다 진지했고 상대에 대한 분석도 철저히 이루어졌다. 선수 선발이나 준비도 이전 대회와 달리 잡음이 거의 없었다. 정신력 부재를 비판하기는 어렵다. 즉, 우리가 더 잘 치지 못하고 잘 던지지 못해서 패했다고 밖에는 설명이 안된다.

이번 WBC 한. 일전은 과거 WBC에서의 한. 일전 선전이 과거의 이야기일 뿐임을 보여줬다. 이제는 우리 야구가 국제 대회에서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방안에 대해 보다 진진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사진 : WBC,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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