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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에서 역스윕, 리버스 스윕, 업셋, 이 단어는 주로 프로야구 포스트시즌에서 자주 등장하는 말이다. 역스윕, 리버스 스윕은 한 번 만 패하면 포스트시즌 시리즈를 내주는 팀이 나머지 경기를 모두 승리해 시리즈를 가져오는 것이고 업셋은 포스트시즌 진출팀 중 순위가 낮은 팀이 상위권 팀에 거듭 승리하며 우승을 차지할 경우 사용된다.

정규리그 1위부터 5위까지 포스트시즌 진출 기회가 주어지는 우리나라 프로야구에서 가끔 일어나는 일이다. 하지만, 그 확률은 그리 높지 않다. 상위에 있는 팀이 객관적 전력에서 앞서고 포스트시즌 진출 하위권에 자리한 팀을 상대적으로 많은 경기를 치르고 상위 라운드로 올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여자 프로배구에서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남자부 대한항공이 정규리그와 포스트시즌에서 가볍게 우승한 것과 달리 여자부 챔피언 결정전에서 정규리그 3위 도로공사가 정규리그 1위 흥국생명에 승리하며 최후의 승자가 됐기 때문이다. 도로공사는 4월 6일 2승 2패로 맞서며 맞이한 챔피언 결정전 마지막 5차전에서 세트 스코어 3 : 2로 승리하며 챔피언 자리에 올랐다. 

도로공사의 챔피언결정전은 말 그대로 드라마였다. 도로공사는 정규리그 3위로 1위 흥국생명과는 승점이 무려 22점이나 차이가 났다. 상대 전적에서도 크게 밀렸고 시즌 마지막까지 포스트시즌 진출을 위해 온 힘을 다해야 했다. 특히, 도로공사는 시즌 초반 부진한 경기력으로 불안감을 노출했고 외국인 선수를 시즌 도중 교체하는 변화도 있었다. 시즌 후반기 힘을 내며 포스트시즌에 올랐지만, 그 과정에서 상당한 체력 소모가 있었다. 

 

 

 



이에 전문가들의 예상은 여자 프로배구 챔피언 결정전은 정규리그 1위 흥국생명과 2위 현대건설이 대결이 될 거라는 전망이 대다수였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포스트시즌에서 가장 약한 팀, 언더독이었던 도로공사의 우승 스토리를 더 극적으로 만드는 장치가 됐다. 

도로공사는 플레이오프에서 현대건설에 2연승 하며 챔피언 결정전에 올랐다. 이변이었지만, 현대건설이 정규리그에서 여유 있는 1위를 유지하다 외국인 선수의 부상 이탈과 선수들의 체력 저하로 급격한 내림세의 분위기를 극복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도로공사의 챔피언 결정전 진출은 흥국생명의 우승 가능성을 더 높여주는 일이 될 것으로 보였다. 

흥국생명이 정규리그와 챔피언 결정전을 모두 승리한다면 그 또한 한 편의 드라마 완성이었다. 흥국생명은 1년간 해외리그에서 활약하던 여자배구의 살아있는 전설이라 할 수 있는 김연경과 다시 계약하며 진력에 포함했고 감독과 코치진을 개편하는 등 변화를 가져왔다. 이를 통해 흥국생명은 과거 배구계 전체에 큰 파문을 불러왔던 이재영, 이다영 쌍둥이 자매의 학교폭력 사건과 관련한 팀 내 분란과 그 후유증을 해소하려 했다. 

이런 흥국생명의 노력은 분명 효과가 있었다. 지난 시즌 하위권에 머물렀던 흥국생명은 이번 시즌 신임 권순찬 감독 체제로 팀을 안정시키고 김연경이 중심이 되어 젊은 선수들을 이끌었다. 국가대표 리베로 출신 김혜란의 복귀도 팀 전력에 큰 플러스 요인이었다. 세터진의 약점에도 흥국생명은 절대 1강이라 평가받았던 현대건설과 맞설 수 있는 팀으로 평가받았고 실제 리그에서 선두 경쟁을 했다. 

하지만 현대건설과의 선두 경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과정에서 돌발 변수가 발생했다. 구단과 갈등이 있었던 권순찬 감독이 돌연 경질됐기 때문이다. 권순찬 감독의 흥국생명은 정규리그 2위를 유지했고 순위 역전이 가능성이 컸다. 이 시점에 감독 경질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에 흥국생명 프런트에 구단에 대한 비판 여론이 강하게 일어났다. 이번에는 선수들도 이에 강하게 반발했다. 김연경 역시 언론 인터뷰를 통해 구단의 처사에 강한 불만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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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국생명은 서둘러 신임 감독을 선임하려 했지만, 팀 내부와 팬 등의 강한 반발 속에 그 시도는 무산됐다. 여기에 감독 대행으로 임명한 수석 코치가 팀을 떠나면서 감독 대행에 또 다른 대행이 팀을 이끄는 상황이 발생했다. 그동안 파행적인 구단 운영으로 수차례 배구팬들의 비판을 받은 바 있었던 흥국생명에 대한 여론은 더 악화됐다. 자칫 팀 분위기가 완전히 와해될 수 있었다. 

이 흥국생명을 지탱한 건 김연경의 강력한 리더십이었다. 김연경은 경험이 부족한 감독 대행과 함께 사실상 팀 코치 역할을 하면서 선수들을 이끌었다. 힘겨웠지만, 흥국생명은 조금씩 안정을 되찾았고 선두 경쟁을 이어갔다. 그 사이 다수 나라의 국가대표 프로팀 감독을 역임한 외국인 아본단자 감독이 새롭게 선임되며 감독 공백도 해소됐다.

아본단자 감독은 과거 터키에서 김연경이 활약할 때 같은 감독과 선수로 한 이력이 있었다. 쉽게 국내 배구팀이 영입할 수 없는 감독이었지만, 김연경의 존재감이 상당 부분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터키 대지진으로 터키 여자배구 리그가 중단되고 터키 소속팀과의 계약이 종료되면서 무적 신분이 됐고 흥국생명과 인연이 닿았다.

아본단자 감독의 영입은 흥국생명의 정규 리그의 우승에 긍정적인 영향을 줬다. 그와 함께 정규리그 1위 경쟁을 하던 현대건설이 시즌 후반기 급격히 페이스가 떨어지고 연패 늪에 빠지는 상황이 더해지면서 흥국생명은 정규리그 1위를 더 수월하게 할 수 있었다. 

이렇게 시즌 중 일어난 팀의 시련을 극복하고 이룬 정규리그 1위의 성과는 특별할 수밖에 없었다. 팀 위기 속에서 굳건히 팀을 지킨 김연경에 대한 배구팬들의 지지와 성원은 더 뜨거워졌다. 만약, 흥국생명이 챔피언전까지 우승하며 통합 우승에 성공한다면 배구 역사에 남을 우승 스토리가 될 수 있었다.

또한, 30대 후반의 나이가 김연경은 이번 시즌 후 은퇴 가능성이 있고 마침 IOC 선수위원 출마 자격을 갖추고 있는 김연경이 그에 뜻이 있다면 새로운 도전을 위해 선수 생활을 접을 가능성이 있었다. 이에 이번 여자 프로배구 챔피언전은 현역 선수로서 김연경을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점에서 큰 관심을 모았다. 김연경이 통합 우승을 이끌고 은퇴한다면 말 그대로 여자 배구 황제의 화려한 대관식을 하며 현역 선수 생활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이에 이번 챔피언 결정전은 말 그대로 김연경 시리즈라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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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도로공사는 이런 흥국생명, 김연경의 바람을 이루지지 못하게 했다. 도로공사는 절대 열세라는 전망과 체력 부담, 선수들의 컨디션 난조 속에 1차전과 2차전을 힘없이 내주며 벼랑 끝에 몰렸다. 지금까지 역대 프로배구에서 5전 3선승제의 챔피언 결정전에서 2판을 먼저 내주고 시리즈를 승리한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지금까지 통계라면 도로공사의 챔피언 결정전 우승 확률을 0였다. 이대로 배구 여제의 대관식이 3차전에서 열릴 것으로 보였다. 

여기서 반전이 일어났다. 홈에서 열린 3, 4차전에서 도로공사는 기적같이 부활했다. 경기력이 몰라보게 달라졌다. 외국인 선수 켓벨과 새로운 국가대표 에이스 박정아의 공격 살아나면서 공격의 결정력을 높였고 특유의 강력한 팀 수비가 되살아났다. 여기에 흥국생명을 흔드는 서브가 승부처에서 적중하며 분위기를 가져왔다.

특히, 도로공사는 매 세트 후반, 엄청난 뒷심을 발휘하며 경기를 역전시키며 승리를 가져왔다. 흥국생명은 초반과 중반 끼지 유리한 흐름을 유지하다 후반 범실이 속출하고 상대 블로킹에 공격이 막히는 등 결정을 짓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며 도로공사의 상승세를 억제하지 못했다. 

결국, 챔피언 결정전 승부는 2연패 후 2연승에 성공한 도로공사의 상승세 속에 2승 2패 동률이 됐고 흥국생명의 홈구장에서 마지막 5차전에 돌입했다. 도로공사의 상승세가 여전했지만, 홈구장에서 강점이 있는 흥국생명이고 플레이오프 2차전을 치르고 올라온 도로공사의 체력 부담 등을 고려하면 흥국생명이 마지막 승자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여전히 우세했다. 역대로 리버스 스윕으로 챔피언 결정전 우승을 할 사례가 한 번도 없었다는 점도 흥국생명에게는 힘이 될 수 있는 통계였다. 

 

 

 



하지만 도로공사의 상승세는 5차전에서도 꺾이지 않았다. 도로공사는 1세트를 내줬지만, 2세트와 3세트를 특유의 후반 뒷심 발휘로 가져오면서 우승에 성큼 다가섰다. 4세트 흥국생명이 김연경이 마지막 힘을 짜내며 반격하면서 5세트에 접어들었지만, 도로공사는 5세트 내내 리드를 유지했고 마지막 승부처에서 2번의 비디오 판독을 거치며 심판이 판정이 바뀌는 행운이 더해지며 우승 드라마를 더 극적으로 만들었다. 

프로배구 사상 최초의 리버스 스윕 우승이었다. 이로써 통합 우승과 함께 화려한 은퇴를 고려했던 김연경의 바람은 사라지고 말았다. 도로공사는 시즌 전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우승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면서 환호했다. 올 시즌 후 주전 선수 대부분이 FA 자격을 얻으면서 현재의 멤버들이 함께 할 수 있는 사실상 마지막 시즌에서 도로공사는 구단 역사에 남을 성과를 남겼다. 

두 팀의 챔피언 결정전은 배구의 묘미를 그대로 보여줬다. 우승을 위한 선수들의 투지와 지켜 쓰러질 정도의 온 힘을 다하는 플레이, 5차전에서 보여준 수많은 랠리와 결과를 알 수 없게 하는 접전의 경기 내용은 배구를 모르는 이들도 배구에 빠져들게 할 만큼 흥미로웠다. 왜 스포츠 TV들이  평일 저녁 항상 하던 프로야구 중계방송 대신 여자 프로배구 챔피언 결정전 중계방송을 선택했는지, 왜 여자배구 인기가 높아졌는지, 그 이유를 두 팀은 경기로 입증했다. 

이 대결에서 도로공사는 조연으로 시리즈를 시작했지만, 최근 큰 유행어이자 여러 곳에서 인용되는 말인 우승을 향한 '꺾이지 않는 마음'으로 선수들이 하나로 뭉쳤고 벼랑 끝 위기에서 오히려 더 힘을 내며 최후의 승자가 됐다. 도로공사의 챔피언 결정전 우승은 스포츠가 사람에게 큰 감동을 줄 수 있음을 보여주는 예이기도 했다. 이번 챔피언 결정전은 앞으로도 프로배구 역사에서 두고두고 언급될 명승부였다. 



사진 : KOVO,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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