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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9월 17일 개막되어 10월 2일까지 열렸던 서울하계올림픽은 우리 역사에서 최초의 종합스포츠 이벤트이자 가장 큰 국제 이벤트였고 국제 행사였다. 
 
이 올림픽의 중요한 구호였던 ‘세계는 서울로, 서울은 세계로’ 라는 말처럼 한국은 아시아의 가난하고 소외된 나라에서 올림픽을 기점으로 세계적으로 그 인지도를 높였고 세계적으로도 그 유래가 없는 산업화, 경제발전을 이룬 나라로 알려질 수 있었다. 
 
또한, 한국은 올림픽이 열리기 한 해 전이었던 1987년, 전국민적인 민주화운동인 6월 항쟁의 결과로 오랜 군사독재의 굴레를 벗고 대통령 직선제를 중심으로 한 헌법 개정 등 급속한 민주화를 이룬 나라였다. 한국은 서울하계올림픽을 계기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산업화와 민주화를 모두 성공적으로 이뤄낸 개발도상국가로서 그 입지를 확실히 할 수 있었다.
 
부수적으로 올림픽 유치를 전후로 건설된 잠실종합경기장을 포함한 다양한 스포츠 시설과 올림픽 대교 등 사회인프라, 도시 재개발과 정비 사업은 서울을 국제적인 도시로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됐다.

여기에 성공적인 올림픽 개최를 기점으로 우리 국민들의 국가적 자긍심이 커지고 국민들의 의식 수준이 한 차원 높이는 등의 부수 효과도 있었다. 1988년 서울 하계올림픽은 여러 방면에서 우리나라가 선진국으로 발돋움하는 데 있어 중요한 계기가 됐다. 한편으로 올림픽을 전후로 한국은 급속한 세계화 개방의 물결속으로 들어섰다. 우리 현대사의 큰 전환점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서울하계올림픽의 유치는 1970년대 후반 박정희 정권 시절 이미 대두되었고 정부차원에서 추진됐다. 그 시기 한국은 국제경기대회를 수차례 유치해 성공적으로 이를 개최했고 국제스포츠 대회 유치 운영에 대한 자신감이 커졌다.
 
이에 체육계를 중심으로 하계올림픽 유치에 대한 의견이 커졌고 정부 각부처가 이에 공감대를 형성하고 박정희 대통령의 재가가 이루어지면서 1979년 9월 한국은 1988년 하계올림픽 유치전에 나설것을 공식적으로 선포한다. 
 
하지만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당시 안기부장의 총탄에 살해당하는 10.26 사태 이후 우리나라 정치상황이 격변기를 맞이하면서 올림픽 유치활동은 뒷전으로 밀리고 말았다.
 
1979년 12월 12일, 12.12 군사반란을 일으킨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은 이후 국가 권력을 사실상 장악했습니다. 신군부 세력은 정권 찬탈의 마지막 단계로 1980년 5월 17일, 10.26 사태 이후 지속 중이던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5.17 내란을 일으켰다.
 
이에 반대하는 광주지역 시민들의 민주화운동을 군대를 동원해 유혈진압한 신군부 세력은 그들의 집권 시나리오대로 권력을 찬탈했고 헌법 개정을 통해 대통령 선거인단이 체육관에서 대통령 선거를 하는 간선제 선거를 통해 전두환이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그들의 내란을 완성했다.
 
이 신군부 정권의 집권은 애초부터 국민들의 지지를 받지 않았고 군대를 동원한 초법적인 수단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전통성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또한, 국내에서는 철저한 언론 통제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5.18 민주화운동의 학살이나 다름없는 유혈진압은 외신을 통해 해외에서는 이미 광범위하게 알려진 사실로 전두환 정권에 대한 국제적 이미지도 매우 부정적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전두환 정권은 국민적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릴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에 전두환 정권은 여러 유화책을 실시했습니다. 오랜 세월 유지되던 심야 통행금지를 해제했고 이는 심야 유흥문화가 급속한 발전을 불러왔다. 문화예술분야에서는 사회 비판 영화를 제외하고 영화 심의를 크게 완화하면서 다수의 애로 영화들이 제작 상영되는 계기가 됐다. 이와 함께 프로스포츠들이 급속히 생겨났습니다. 프로야구와 축구 프로 씨름 등이 전두환 정권 출범과 그 역사를 함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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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함께 전두환 정권은 박정희 정권시절 추진했던 하계올림픽 유치전에 다시 뛰어들었다. 국내 사정으로 올림픽 유치는 사실상 끝난 것이라 다름없었지만, 전두환 정권은 이전 정부에서 추진하던 사업의 지속성이라는 점을 이유로 이를 다시 꺼내들었다.
 
하지만 당시 한국의 경제상황은 국.내외 악재들로 좋지 않았다. 올림픽을 치르기 위해 필요한 수조원의 재원 마련이 어려웠다. 스포츠, 문화관련 정부부처에서는 올림픽 유치에 적극적이었지만, 경제부처에는 현실적인 문제를 들어 이를 반대했습니다. 이미 그때부터 올림픽을 개최했던 국가들은 막대한 부채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1976년 하계올림픽을 유치했던 캐나다 몬트리올시는 그 때의 부채로 인해 파산을 고려할 정도의 재정위기를 겪었고 그때의 빚을 오랜 세월 상환해야 했다.
 
당시 정부는 전두환의 재가를 얻어 유치전에 나서긴 했지만, 정부기관의 대립은 올림픽 유치전을 원활하게 진행할 수 없게 했다. 올림픽은 각 도시가 그 주체가 되지만, 실질적으로는 국가 차원의 행사였다. 정부부처 간에도 이견 대립이 여전한 상황은 유치전에 큰 장애물이었다.

전두환 정권 역시 막대한 비용 조달 문제가 커지면서 유치전에서 발을 빼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심지어 정치적 타격과 국제적 위신 하락을 최소화한 유치철회를 논의하기도 했다. 심지어 일본과의 협상을 통해 한국은 1986년 아시안게임을 유치하고 일본에게 1988년 하계올림픽 유치하도록 상호 지원하게 하는 중재안이 힘을 얻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한국을 경쟁상대로 여기지 않았던 일본은 이 제안을 일축했다. 유치전을 지속하기도 그대로 포기하기도 힘든 진퇴양난의 한국이었다.
 
이 상황에서도 구원투수로 등장한 인물이 당시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이었던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었다. 정주영 회장은 민간차원의 올림픽 유치추진위원회 회장이 되면서 유치전 전면에 나섰다. 하지만 이는 정부의 책임회피를 위한 일종의 면피용 전략이기도 했다.
 
야구로 치면 패전 처리 투수로 나선 정주영 회장이었지만, 그는 이미 불가능이라고 했던 조선소 건설, 자동차 산업 부흥, 각종 건설사업 등을 성공시킨 불굴의 기업인이었다. 그의 승부욕은 올림픽 유치전에도 발휘됐다.
 
개최지 결정까지 매우 촉박한 시간이었지만, 정주영 회장을 중심으로 한 유치위원회는 개인적인 인맥과 대기업들의 해외 네트워크를 적극 활용해 올림픽 개최지 투표를 하는 IOC 위원들에 대한 로비를 적극적으로 진행했다.
 
당시 올림픽 유치전은 일본의 도시 나고야가 가장 앞서 있었고 서울은 한참 떨어진 후발주자였다. 나고야는 5년여 전부터 올림 유치를 적극적으로 추진했고 유치가 유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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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까지 선진국들의 전유물이었던 올림픽에서 일본과 비교해 경제력이 크게 부족한 개발도상국의 올림픽 유치에 대한 회의적인 시선이 많았다. 설상가상으로 남북의 대결국면이 격화하는 상황에서 상존하는 전쟁에 대한 위협과 북한의 강력한 방해공작도 한국에 불리한 요소였다.

하지만 유치위원회의 끈질긴 유치활동은 점점 IOC 위원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또한, 일본의 나고야 하계올림픽 유치와 관련해 일본내 반대 여론이 크게 일어나고 있는 점도 일본에 불리하게 작용했다.
 
한국은 유치전에서 이를 적극적으로 홍보했고 이미 한국은 잠실 일대에 올림픽 개회식을 열 수 있는 종합운동장 등 운동장 건설을 진행중이라는 점, 일본은 멀지 않은 시기인 1964년 도쿄 올림픽을 개최했다는 점을 부각하며 신규 유치국인 한국의 개최 당위성을 강력히 주장했다.
 
또한, 당시 세계 제2위 경제대국으로 부상한 일본을 경계하고 있던 영국 등 유럽 국가들에게 일본의 1988년 하계올림픽 유치가 일본 경제 발전을 더 가속화시킬 수 있다는 점을 상기시키며 유럽의 대 일본 견제심리를 자극하기도 했다. 국가 정보기관인 안기부에서도 별도 첩보활동으로 일본 유치전략 관련 정보를 파악하는 등 측면에서 유치전을 지원했다.
 
아울러 하계올림픽 개최지가 결정되는 독일의 도시 바덴바덴에서의 마지막 유치활동에서도 한국은 상황을 낙관한 일본에 비해 매우 적극적으로 감성을 파고드는 전략으로 현지에서 우호적인 여론을 형성토록 했다.
 
이를 위해 한국은 유치홍보 부스에 독일과 관련 있는 스포츠 스타들을 상주시키기도 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의 주인공 손기정과 차붐으로 불리며 독일 최고 인구 축구스타였던 차범근이 힘을 보탰다.

 

 

 


 
한국의 개최에 부정적이었던 사마란치 IOC 위원장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그의 아들이 태권도를 배우고 있다는 점에 착안해 사마란치 아들 태권도 사범을 유치부스에서 사마란치 위원장을 만나게 하는 등 매우 세밀하고 전략적으로 유치전을 지속했다.

결정적으로 세계 스포츠계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굴지의 스포츠 브랜드인 아디다스와의 협상을 통해 그들에게 올림픽 관련 마케팅 권한과 스폰서십 권한을 주는 대가로 한국의 유치활동을 지원하게 한 점도 적중했다. 아디다스는 일본의 올림픽 유치를 통해 일본 스포츠브랜드들의 급부상을 극도로 경계했고 한국의 올림픽 유치를 지원했습니다.
 
마침내 1981년 9월 30일 치열한 유치경쟁의 결과 한국 서울은 ICO의 총회에서 선거인단 53대 27의 압도적 차이로 일본 나고야를 누르고 1988년 하계올림픽 개최권을 가져올 수 있었다.
 
이렇게 올림픽 유치전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역량을 다 쥐어짜낸 과정이 있었다. 물론, 그 노력의 중요한 부분은 우리 기업 등 민간 영역에서 담당했다. 하지만 하계올림픽 유치는 전두환 정권의 정통성을 강화시키는 부작용을 불러왔다. 올림픽을 이유로 전두환 정권은 민주화 요구를 무마시키고 정권 기반을 공고히 하는 수단으로 악용했다. 올림픽 유치에 큰 역할을 하는 이들이 배제되고 그 과실을 전두환 정권 인사들이 독점하는 문제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문제에도 1988년 하계 올림픽은 동. 서 냉전체제가 유지되는 상황에서 이전 소련 모스코바, 미국 LA 올림픽과 달리 민주, 공산주의 진영 모두가 참여하는 역대 최대, 가장 성공적인 올림픽으로 올림픽 역사에 기록됐다. 이런 올림픽을 한국 서울이 개최했다는 사실은 우리가 충분히 자랑스러워할 수 있는 역사라 할 수 있다. 


사진 : 픽사베이,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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