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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시즌 프로야구에는 두 명의 신이 존재했습니다. 삼성의 양준혁 선수와 KIA 이종범 선수가 그들이었습니다. 이 두 선수는 프로입단 직후 부터 대형신인으로 주목받았고 그 성적도 출중했습니다. 무엇보다 팀의 프랜차이즈 스타로서 팬들의 절대적인 사랑을 받았다는 공통점도 있습니다. 나이를 먹고 기량이 저하되었어도 그들을 보는 것 만으로 팬들은 즐거웠고 팬들은 그들에게 양신, 종범신의 칭호를 붙여주었니다.
전성기 시설 팀의 간판타자로 한국시리즈 무대에서 자주 만나기도 했던 양 선수는 우리 프로야구의 한 세대를 대표하는 선수였습니다. 이 중 양준혁 선수는 팬들의 큰 아쉬움 속에 현역 생활을 마감하고 야구 해설자로 새로운 삶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종범 신 이종범 선수는 여전히 현역으로 동계 훈련장에서 구슬땀을 흘리고 있습니다.
이종범 선수는1993년 KIA의 전신 해태에서 프로선수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입단 직후부터 이종범 선수는 공수를 겸비한 대형 내야수로 기대를 모았고 그 기대는 곧바로 현실이 되었습니다. 입단 첫해 타율 0.280, 홈런 16, 도루 73개의 준수한 타격 성적을 기록한 이종범 선수는 다이나믹한 유격수 수비까지 보여주면서 당시 막강 전력이었던 해태의 주전 유격수 자리를 확고히 굳혔습니다.
이종범 선수의 성장은 이 후 너무나도 눈부셨습니다. 1994년 2년차 징크스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이종범 선수는 최고의 한 해를 만들었습니다. 타율은 무려 0.393이었고 홈런 19, 도루 84, 장타율 0.581의 괴력을 뽐냈습니다. 만약 그가 도루를 조금만 더 자재하고 타격에만 집중했다면 꿈의 4할 타율도 가능한 시즌이었습니다. 이러한 성적을 바탕으로 이종범 선수는 공격, 수비, 주루, 장타율 등 선수가 갖추어야할 모든 것을 지는 선수로 우리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선수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이종범 선수에게 바람의 아들이라는 별명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최강 전력의 해태는 이종범 선수의 눈부신 활약과 함께 절대 강자의 위치를 더욱 더 공고히 할 수 있었습니다. 선동열 선수가 일본에 진출한 이후에는 팀의 간판 선수로 해태의 우승을 이끌기도 했습니다. 원년 해태 선수들이 해태의 신화를 만들었다면 이종범 선수는 그 신화를 더 크게 완성시킨 선수였습니다.
(사진 : KBO 홈페이지)
이렇게 팀의 간판으로 리그를 대표하는 선수로 최고의 활약을 하던 이종범 선수였지만 더 큰 무대에 대한 갈망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마침 그의 소속팀 해태는 모기업의 부도로 심각한 운영난에 직면했고 이종범 선수의 명성과 성적에 걸맞는 대우를 하기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이종범 선수는 1997년 시즌을 끝으로 일본 프로야구 진출을 선언했습니다.
해태 구단은 그의 일본행을 막으려 최선을 다했지만 여론은 이종범 선수의 일본행에 호의적이었고 이종범 선수는 막대한 이적료를 소속팀에 안겨주면서 당시 선동열 선수가 활약하던 일본 주니치로 활동 무대를 옮겼습니다. 선동열 선수가 주니치의 마무리로 명성을 떨치던 시기여서 이종범 선수의 일본행은 양국 야구팬들 모두에게 큰 관심거리였습니다.
주니치 입단 첫 해 이종범 선수는 국내에서 보여준 화려한 플레이를 재현하면서 주니치 전력의 핵심선수로 자리했습니다. 일본 프로야구의 원조 한류바람을 일으켰다고 할 정도로 그의 활약은 주니치에 큰 힘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불의의 부상은 이종범 선수의 더 큰 꿈을 접게 만들었습니다. 일본 투수들의 극심한 견제속에 이종범 선수는 몸에 맞는 공으로 뼈가 골절되는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습니다.
굳은 의지로 재활에 성공하긴 했지만 전성기의 기량을 되찾는데는 끝내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가 부상재활중이 사이 그의 유격수 자리는 다른 선수로 대체되었고 이종범 선수는 내야와 외야를 전전하는 백업요원으로 선수생활을 이어가야했습니다. 한국 최고의 선수로서의 자존심에 큰 상처가 될 수 밖에 없었고 이종범 그 기량을 펼칠 기회마저 상실한채 일본에서의 선수생활이 이어졌습니다.
이 때 운영난에 허덕이던 해태는 KIA로 간판을 바꿔 달았습니다. KIA는 팀의 오랜 침체기를 극복하고 선수들의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선수로 이종범 선수의 국내복귀를 적극 추진했고 이종범 선수는 최고 대우를 받으면 화려하게 고향팀에 복귀했습니다. 전성기의 이종범은 아니었지만 이종범 선수는 오랜 경험속에서 나오는 노련미가 떨어진 힘을 대신하면서 KIA의 중심선수로 꾸준히 재 역할을 다했습니다.
그의 활약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2006년 한국 대표팀의 WBC 4강 신화재현에도 큰 몫을 담당하면서 노장이 살아있음을 입증했습니다. 특히 한 수위로 여겨지던 일본과의 경기에서 보여준 활약은 아직도 야구팬들의 기억속에 생생히 남아있습니다. 이렇게 국내 복귀 이후에도 좋은활약을 이어가던 이종범 선수도 세월의 무게를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이종범 선수는 꾸준히 그 위치를 지켰지만 구단은 그의 많은 연봉과 세대교체의 명분을 앞세워 그의 은퇴를 종용했습니다. 이종범 선수는 자신의 경쟁력이 충분함을 주장하면서 이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팀의 간판선수에 대한 홀대에 KIA 팬들도 동조하면서 KIA 구단은 비판 여론에 시달렸고 이종범 선수의 선수생활은 계속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살아있는 전설에 대한 팬들의 신뢰와 사랑이 그의 선수생활을 연장한 것이었습니다.
선수생활 연장은 그에게 연봉의 대폭 삭감과 함께 젊은 선수들과의 주전경쟁이라는 시련을 안겨주었습니다. 이종범 선수는 이에 굴하지 않고 실력으로 그 위치를 지켰고 KIA 외야진에서 없어서는 안될 선수로 그 자리를 여전히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 중간중간 몸에 맞는 볼에의한 심각한 안면부상을 당하기도 했고 그 외에도 크고 작은 부상이 그를 괴롭혔지만 그의 의지는 꺽이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힘든 고비를 넘기면서 팀의 정신적 지주로 그 역할을 해왔던 이종범 선수는 2009시즌 KIA가 그토록 염원하던 10번째 우승의 주역으로 그 영광을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그가 세월의 무게를 이겨내기 못하고 구단의 은퇴제안을 받아들였다면 이룰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KIA 복귀 이후 고군분투하던 이종범 선수로서는 이 우승으로 마음을 짐을 덜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난 시즌 이종범 선수는 또 한번 큰 고비를 맞이했습니다. 성적의 급격한 하락과 함께 또 다른 선수들의 성장은 그의 자리를 더 강하게 위협했습니다. 선수들의 부상도미노 속에 내외야를 가리지 않고 빈자리에 들어섰던 이종범 선수였지만 그 공로를 인정받기 보다는 더 강한 세대교체의 압력을 느꼈을 뿐입니다.
올 시즌 이종범 선수는 양준혁 선수의 은퇴와 함께 외롭게 또 한번의 시즌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매스컴도 그의 현역 연장을 큰 이슈로 다루지 않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종범 선수는 강한 의지로 선수생활을 연장하고 있습니다. KIA로서도 아직은 그가 필요한 선수입니다. 이종범 선수가 선수들에게 주는 멘토로서의 역할과 팬들의 성원은 현역 이종범을 또 한번 볼 수 있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제 이종범 선수는 한 경기, 한 타석이 소중한 시즌이되었습니다. 그가 나서는 경기는 우리 프로야구의 역사와 같습니다. 그는 더 이상 확실한 주전이 아니고 더 심한 경쟁구도속에 있습니다. 타 선수들과의 경쟁을 이겨내지 못한다면 올 시즌이 그의 마지막 시즌이 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최근 몇 년간 이종범 선수는 마지막이라는 말과 싸워왔습니다. 함께 싸우던 양준혁 선수가 은퇴하면서 이종범 선수는 더 외로운 처지가 되었습니다.
아직 이종범 선수의 선수로서의 역사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더 많은 기록을 세울 수 있는 기회가 열려있습니다. 누구보다 열심히 동계훈련을 소화하고 있는 이종범 선수이기도 합니다. 과연 이종범 선수가 나이에 대한 편견을 극복하고 그의 전설이 살아있음을 증명할 수 있을지 그의 2011년이 기대됩니다.
전성기 시설 팀의 간판타자로 한국시리즈 무대에서 자주 만나기도 했던 양 선수는 우리 프로야구의 한 세대를 대표하는 선수였습니다. 이 중 양준혁 선수는 팬들의 큰 아쉬움 속에 현역 생활을 마감하고 야구 해설자로 새로운 삶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종범 신 이종범 선수는 여전히 현역으로 동계 훈련장에서 구슬땀을 흘리고 있습니다.
이종범 선수는1993년 KIA의 전신 해태에서 프로선수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입단 직후부터 이종범 선수는 공수를 겸비한 대형 내야수로 기대를 모았고 그 기대는 곧바로 현실이 되었습니다. 입단 첫해 타율 0.280, 홈런 16, 도루 73개의 준수한 타격 성적을 기록한 이종범 선수는 다이나믹한 유격수 수비까지 보여주면서 당시 막강 전력이었던 해태의 주전 유격수 자리를 확고히 굳혔습니다.
이종범 선수의 성장은 이 후 너무나도 눈부셨습니다. 1994년 2년차 징크스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이종범 선수는 최고의 한 해를 만들었습니다. 타율은 무려 0.393이었고 홈런 19, 도루 84, 장타율 0.581의 괴력을 뽐냈습니다. 만약 그가 도루를 조금만 더 자재하고 타격에만 집중했다면 꿈의 4할 타율도 가능한 시즌이었습니다. 이러한 성적을 바탕으로 이종범 선수는 공격, 수비, 주루, 장타율 등 선수가 갖추어야할 모든 것을 지는 선수로 우리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선수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이종범 선수에게 바람의 아들이라는 별명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최강 전력의 해태는 이종범 선수의 눈부신 활약과 함께 절대 강자의 위치를 더욱 더 공고히 할 수 있었습니다. 선동열 선수가 일본에 진출한 이후에는 팀의 간판 선수로 해태의 우승을 이끌기도 했습니다. 원년 해태 선수들이 해태의 신화를 만들었다면 이종범 선수는 그 신화를 더 크게 완성시킨 선수였습니다.
(사진 : KBO 홈페이지)
이렇게 팀의 간판으로 리그를 대표하는 선수로 최고의 활약을 하던 이종범 선수였지만 더 큰 무대에 대한 갈망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마침 그의 소속팀 해태는 모기업의 부도로 심각한 운영난에 직면했고 이종범 선수의 명성과 성적에 걸맞는 대우를 하기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이종범 선수는 1997년 시즌을 끝으로 일본 프로야구 진출을 선언했습니다.
해태 구단은 그의 일본행을 막으려 최선을 다했지만 여론은 이종범 선수의 일본행에 호의적이었고 이종범 선수는 막대한 이적료를 소속팀에 안겨주면서 당시 선동열 선수가 활약하던 일본 주니치로 활동 무대를 옮겼습니다. 선동열 선수가 주니치의 마무리로 명성을 떨치던 시기여서 이종범 선수의 일본행은 양국 야구팬들 모두에게 큰 관심거리였습니다.
주니치 입단 첫 해 이종범 선수는 국내에서 보여준 화려한 플레이를 재현하면서 주니치 전력의 핵심선수로 자리했습니다. 일본 프로야구의 원조 한류바람을 일으켰다고 할 정도로 그의 활약은 주니치에 큰 힘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불의의 부상은 이종범 선수의 더 큰 꿈을 접게 만들었습니다. 일본 투수들의 극심한 견제속에 이종범 선수는 몸에 맞는 공으로 뼈가 골절되는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습니다.
굳은 의지로 재활에 성공하긴 했지만 전성기의 기량을 되찾는데는 끝내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가 부상재활중이 사이 그의 유격수 자리는 다른 선수로 대체되었고 이종범 선수는 내야와 외야를 전전하는 백업요원으로 선수생활을 이어가야했습니다. 한국 최고의 선수로서의 자존심에 큰 상처가 될 수 밖에 없었고 이종범 그 기량을 펼칠 기회마저 상실한채 일본에서의 선수생활이 이어졌습니다.
이 때 운영난에 허덕이던 해태는 KIA로 간판을 바꿔 달았습니다. KIA는 팀의 오랜 침체기를 극복하고 선수들의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선수로 이종범 선수의 국내복귀를 적극 추진했고 이종범 선수는 최고 대우를 받으면 화려하게 고향팀에 복귀했습니다. 전성기의 이종범은 아니었지만 이종범 선수는 오랜 경험속에서 나오는 노련미가 떨어진 힘을 대신하면서 KIA의 중심선수로 꾸준히 재 역할을 다했습니다.
그의 활약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2006년 한국 대표팀의 WBC 4강 신화재현에도 큰 몫을 담당하면서 노장이 살아있음을 입증했습니다. 특히 한 수위로 여겨지던 일본과의 경기에서 보여준 활약은 아직도 야구팬들의 기억속에 생생히 남아있습니다. 이렇게 국내 복귀 이후에도 좋은활약을 이어가던 이종범 선수도 세월의 무게를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이종범 선수는 꾸준히 그 위치를 지켰지만 구단은 그의 많은 연봉과 세대교체의 명분을 앞세워 그의 은퇴를 종용했습니다. 이종범 선수는 자신의 경쟁력이 충분함을 주장하면서 이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팀의 간판선수에 대한 홀대에 KIA 팬들도 동조하면서 KIA 구단은 비판 여론에 시달렸고 이종범 선수의 선수생활은 계속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살아있는 전설에 대한 팬들의 신뢰와 사랑이 그의 선수생활을 연장한 것이었습니다.
선수생활 연장은 그에게 연봉의 대폭 삭감과 함께 젊은 선수들과의 주전경쟁이라는 시련을 안겨주었습니다. 이종범 선수는 이에 굴하지 않고 실력으로 그 위치를 지켰고 KIA 외야진에서 없어서는 안될 선수로 그 자리를 여전히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 중간중간 몸에 맞는 볼에의한 심각한 안면부상을 당하기도 했고 그 외에도 크고 작은 부상이 그를 괴롭혔지만 그의 의지는 꺽이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힘든 고비를 넘기면서 팀의 정신적 지주로 그 역할을 해왔던 이종범 선수는 2009시즌 KIA가 그토록 염원하던 10번째 우승의 주역으로 그 영광을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그가 세월의 무게를 이겨내기 못하고 구단의 은퇴제안을 받아들였다면 이룰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KIA 복귀 이후 고군분투하던 이종범 선수로서는 이 우승으로 마음을 짐을 덜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난 시즌 이종범 선수는 또 한번 큰 고비를 맞이했습니다. 성적의 급격한 하락과 함께 또 다른 선수들의 성장은 그의 자리를 더 강하게 위협했습니다. 선수들의 부상도미노 속에 내외야를 가리지 않고 빈자리에 들어섰던 이종범 선수였지만 그 공로를 인정받기 보다는 더 강한 세대교체의 압력을 느꼈을 뿐입니다.
올 시즌 이종범 선수는 양준혁 선수의 은퇴와 함께 외롭게 또 한번의 시즌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매스컴도 그의 현역 연장을 큰 이슈로 다루지 않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종범 선수는 강한 의지로 선수생활을 연장하고 있습니다. KIA로서도 아직은 그가 필요한 선수입니다. 이종범 선수가 선수들에게 주는 멘토로서의 역할과 팬들의 성원은 현역 이종범을 또 한번 볼 수 있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제 이종범 선수는 한 경기, 한 타석이 소중한 시즌이되었습니다. 그가 나서는 경기는 우리 프로야구의 역사와 같습니다. 그는 더 이상 확실한 주전이 아니고 더 심한 경쟁구도속에 있습니다. 타 선수들과의 경쟁을 이겨내지 못한다면 올 시즌이 그의 마지막 시즌이 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최근 몇 년간 이종범 선수는 마지막이라는 말과 싸워왔습니다. 함께 싸우던 양준혁 선수가 은퇴하면서 이종범 선수는 더 외로운 처지가 되었습니다.
아직 이종범 선수의 선수로서의 역사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더 많은 기록을 세울 수 있는 기회가 열려있습니다. 누구보다 열심히 동계훈련을 소화하고 있는 이종범 선수이기도 합니다. 과연 이종범 선수가 나이에 대한 편견을 극복하고 그의 전설이 살아있음을 증명할 수 있을지 그의 2011년이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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