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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1월 21일부터 한달여간 열리는 카타르월드컵은 세계 축구 역사상 최초로 중동에서 열리는 대회다. 또한, 월드컵이 통상 여름에 열리는 것과 달리 이번 월드컵은 중동의 무더위를 피해 늦가을로 대회 개최 시기를 늦추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 유럽 빅리그에서는 큰 불만을 표출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2022 카타르 월드컵은 코로나 사태 이후 노마스크 상태에서 열리는 대형 스포츠 이벤트라는 점에서는 상징성이 크다. 하지만 카타르 월드컵은 개최국 결정과 관련해 중동 오일달러가 크게 작용하는 등 이런 저런 잡음이 있었고 카타르의 개최 역량에 대한 의문이 지속적으로 있었다. 대회를 얼마 안 남겨둔 상황에서 준비부족의 모습도 노출되고 있다. 기대와 걱정이 교차하는 카타르 월드컵이다. 
 
카타르 월드컵과 별개로 우리 월드컵 역사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2002년 한.일 월드컵이다. 월드컵 역사상 처음으로 복수의 국가가 공동개최를 했고 이는 새로운 월드컵 대회 모델이 됐습니다. 당시 한국과 일본은 치열한 유치 경쟁을 펼쳤고 FIFA는 개최국 선정을 위한 표결 대신 공동 개최를 결정했다. 
 
공동개최를 하면서 한국은 개막경기와 한국의 이름을 대회명 앞에 넣게 됐고 일본은 결승전 경기를 자국에서 할 수 있게 됐다.

이렇게 유치한 한.일 월드컵은 대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IMF 경제 위기가 발생했고 준비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대회의 필수 요소인 경기장 건설에 차질이 발생했다. 주 경기장인 상암 경기장은 수많은 논란과 협의 끝에 장소가 결정됐고 대회 일정에 맞춰 바쁘게 건설됐다. 
 
그렇게 IMF 경제위기 극복과 월드컵 준비는 함께 이루어졌고 2002 한.일 월드컵은 우리의 경제 재건을 상징하는 대회였다. 또한, 한.일 월드컵에서는 월드컵 축구 대표팀이 우리 축구 역사에 오래도록 남을 최고의 성적을 거두었고 대규모 길거리 응원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축구문화가 자리잡기도 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의 백미는 역시 대표팀의 성공 스토리였습니다. 대회 개최를 앞둔 시점에 대표팀은 개최국의 이점에도 불구하고 약체라는 평가를 받았고 개최국 사상 처음으로 16강에 진출하지 못하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가 있었다.
 
실제 대표팀은 월드컵 1년여 앞둔 시점에 경기력에서 심각한 부진을 보였다. 세계와의 격차는 좁혀지지 않았고 국제경기에서 고전을 거듭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대표팀에는 선진 축구 무대인 유럽리그에서 뛰는 선수가 안정환 한 명에 불과했다. 해외파 선수라 해도 일본리그가 보통이었고 대부분 국내 리그에서 뛰는 선수들이었다. 그 국내 리그는 활성화되지 못했고 선수들의 기량 발전에 한계가 있었다. 여기에 세계 축구 흐름에 뒤 떨어진 국내 지도자들의 역량과 행정 능력도 발전에 걸림돌이었다. 
 
한국은 2002년 월드컵 직전 월드컵인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조 예선 1무 2패로 16강 진출에 실패했다. 멕시코와의 첫 경기에서는 월드컵 사상 최초로 선취골을 넣고도 경기 운영 미숙 등 원인으로 1 : 3으로 역전패했다. 두 번째 네덜란드와의 경기에서는 5골을 내주며 0 : 5로 참패했다. 이 참패는 대표팀에 대한 국내 비난여론을 들끓게 했습니다. 이에 대회 도중 차범근 당시 대표팀 감독이 경질되어 홀로 귀국 비행기에 오르는 초유의 상황이 발생했다.  마지막 벨기에전에서 선수들이 엄청난 의지를 보이며 1 : 1 무승부로 전 패를 막았다. 세계 축구와 한참 떨어진 대표팀의 현 주소를 확인할 수 있는 대회였다. 
 
이후 대표팀의 경기력을 끌어올리기 위한 노력이 있었지만, 성과나 나오지 않았다. 개최국의 월드컵 본선 예선 탈락이라는 망신을 당할 수 있다는 위기감이 커졌다. 반대로 공동 개최국 일본은 외국인 지도자를 중심으로 눈에 띄게 발전된 경기력을 보이면서 큰 대조를 보였다. 이에 국내 지도자로는 어렵다는 여론이 커졌고 단기간에 경기력을 끌어올릴 우수한 해외 지도자 영입이 공론화됐다.
 
하지만 명망 있고 지도력을 인정받은 해외 지도자의 영입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막대한 연봉 지출이 필요했고 우리가 원하는 지도자들이 한국행을 주저하기도 했다.
 
대표팀의 선택은 히딩크였다. 그는 1998년 프랑스월드컵에서 대표팀에 0 : 5 패배를 안긴 네덜란드 팀의 감독이었다. 이후 히딩크는 해외 명문 클럽 감독 등을 역임했다. 하지만 성적 부진으로 물러나는 등 감독으로서의 이력이 잠시 단절된 상황이었다. 이런 그에게 한국 대표팀이 손을 내밀었고 히딩크는 그 손을 잡았다. 우리에 참패를 안긴 적장이 구원자로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이는 히딩크는 물론이고 대표팀에도 큰 모험이었다. 

 

 

 



어렵게 영입한 히딩크였지만, 국내 여론은 호의적이지 않았다. 한국 대표팀 감독 부임 직전 성적이 부진했다는 점과 함께 국내 여론에서 선호하는 감독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히딩크는 우리 대표팀이 할 수 있는 최상의 선택지였다. 이는 결과적으로 한.일 월드컵을 더 극적으로 만드는 장치가 됐다.
 
대표팀에 부임한 히딩크는 자신만의 축구 철학과 방식으로 대표팀을 지도했다. 그에 발맞춰 대표팀은 사실상 소속팀 경기를 거의 포기하다시피 하면서 대표팀 선수들의 훈련 시간을 보장하고 히딩크의 요청 사항을 적극으로 수용하는 등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만큼 대표팀은 절박했다.

히딩크는 이전 국내 지도자와 크게 달랐다. 그는 대표팀의 약점을 진단함에 있어 항상 지적되던 기술부족보다는 체력적인 문제에 주목했다. 그는 대표팀 경기를 분석하면서 경기력 향상을 위한 다른 처방을 내놨다. 히딩크는 전문 코치를 통해 고강도 체력 훈련을 강력히 시행했다. 경기 내내 쉼없이 뛰고 상대를 압박할 수 있는 체력이 성적의 첫 걸음임을 그는 알았다. 일각에서 한시라도 빨리 경기력을 끌어올리기 위한 실전 훈련과 전술개발이 시급하다는 의견에도 히딩크는 체력 훈련을 멈추지 않았다.
 
그와 함께 대표팀에 자리한 선수간 위계질서를 파괴했다. 우리 스포츠는 과거부터 학연과 지연을 바탕으로 한 선.후배 질서가 강하게 자리하고 있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는 훈련이나 경기중에도 작용했다.
 
히딩크는 경기중 선수간 호칭에 존대말을 금지하고 서로의 이름을 부르도록 했다. 경기중에는 선후배가 없고 같은 동료일 뿐이었다. 이를 통해 경기 중 소통을 원할하게 할 수 있었다. 

히딩크 축구는 신선했지만, 바로 결과로 이어지지 않았다. 대표팀은 국제 경기 성적과 A매치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축구 강국과의 대결에서 수준차는 분명했고 수 차례 0 : 5 패배도 있었다. 이에 히딩크 대해 오대영 감독이라는 비아냥이 나오기도 했고 그에 대한 신뢰에도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의 경질을 주장하는 등 그를 흔드는 움직임도 나타났다.

 

 

 


 
하지만 히딩크는 자신의 스타일을 버리지 않았고 대표팀도 그를 계속 신뢰했다. 계속된 패배가 있었지만, 시간 흐를수록 대표팀의 경기력은 점점 나아졌다. 월드컵 개막을 앞둔 시점에 대표팀은 그들에게 대패를 안겼던 강팀과 대등한 경기를 하는 등 경기력에서 발전된 모습을 보였다. 쉼없는 압박과 엄청난 기동력에 근거한 히등크 축구는 이전 우리 대표팀에서 볼 수 없는 스타일이었다. 
 
그 기세는 대회에서도 이어졌습니다. 예선 첫 경기에서 대표팀은 월드컵에서 숨은 강자로 주목받았던 폴란드에 2 : 0으로 승리했다. 그 경기에서 대표팀은 완벽한 경기력으로 폴란드를 압도했다. 그 승리는 선수들의 자신감을 한층 끌어올렸다.
 
이는 선수뿐만 아니라 대표팀을 응원하는 관중들 국민들의 자신감도 함께 끌어올렸다. 반신반의하던 국민들의 응원은 폴란드 전 승리를 기점으로 거대한 응원물결로 변했다. 광장은 응원을 위한 붉을 물결로 가득했다. 월드컵 기간 거의 모든 국민이 대표팀 응원을 하는 서포터즈 붉은 악마가 됐다. 응원을 위한 붉은 티셔츠는 없어서 못 파는 상황이 됐고 관련 응원가는 큰 사랑을 받았다.
 
일상에서 월드컵은 국민의 삶을 함께 했습니다. 당시 국민들은 대표팀 선수들과 함께 뛰는 12번째 선수였다. 이런 응원 열기가 그 에너지를 더한 대표팀은 선전에 선전을 거듭했다.
 
예선 두 번째 미국과의 경기에서는 0 : 1로 밀리던 경기를 안정환의 극적인 동점골로 1 : 1 무승부로 마무리했다. 그 경기에서 안정환과 선수들은 월드컵 전 열렸던 동계 올림픽에서 있었던 쇼트트랙 편파 판정을 풍자한 골 세리머니로 주목을 받기도 했다.
 
예선 세 번째 경기에서는 강 팀 포르투갈을 시종일관 밀어붙였고 박지성의 결승골로 1 : 0으로 승리했다. 그 경기에서 포르투갈은 거친 플레이를 연발하다 2명의 선수가 퇴장당하는 졸전을 펼쳤다. 전.후반이 교차하는 시간에 포르투갈 선수들은 한국 선수들에게 무승부로 함께 16강에 진출하자는 제스쳐를 하는 추태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대표팀은 승리를 위하 온 힘을 다했고 2승 1무 조 1위로 16강에 진출했다. 

이후 대표팀은 16강전에서 한국 축구 역사에 남을 명승부를 펼치며 안정환의 연장 골든골과 함께 이탈리아에 2 : 1로 승리했고 8강전에서는 우승 후보 스페인과 승부차기까지 가는 접전 끝에 승리하며 4강에 진출했다.  믿기 힘든 순간의 연속이었다. 

 

 

 


 
대표팀은 4강전에서 독일에 0 : 1의 아쉬운 패배를 당했고 튀르키예와의 3. 4위전 2 : 3 패배로 4위로 월드컵을 마무리하긴 했지만, 16강 진출도 낙관할 수 없었던 대표팀에게는 꿈만 같은 결과였다. 이는 국민들도 다르지 않았다.
 
월드컵 4강은 과감한 변화와 목표를 위해 하나가 된 선수단의 의지와 협회의 지원, 국민들의 성원이 이뤄낸 성과였다. 이후 한국 축구는 박지성, 손흥민으로 대표되는 다수의 선수가 해외로 진출하고 국내 리그 활성화가 촉진되는 등 발전의 속도를 높일 수 있었다.

2002년 월드컵 멤버들은 지금도 지도자로 축구 행정가로 큰 역할을 하고 있고 예능이나 사회 여러 분야에서도 활약하고 있다. 당시 대표팀 감독 히딩크는 여전히 국민들의 관심을 받는 인사로 남아있다. 그의 리더십은 성공학의 중요한 소재가 되고 있다. 대표팀도 이후 월드컵 본선 무대에 지속적으로 올라 단골 진출팀이 됐다. 그 결과 대표팀은 10회 연속 월드컵 진출에 성공했고 2022년 카타르 월드컵을 맞이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 월드컵에서 대표팀의 성적에 대한 전망은 밝지 않습니다. 그동안 대표팀 경기력이 만족스럽지 않았고 대표팀 에이스 손흥민의 부상 변수도 있다. 월드컵때마다 있었던 거리 응원도 10.29 참사 여파로 취소됐다. 월드컵 마케팅 열기도 급격히 식었다. 월드컵 특수는 사실상 사라졌다. 

이런 분위기를 바꾸는 건 2002년처럼 대표팀의 선전이다. 과연 월드컵 대표팀이 그들에 대한 우려를 지우고 국민들을 열광시킬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 궁금하다. 한국 월드컵 대표팀의 여정은 11월 24일 우루과이전부터 시작된다. 


사진 : 픽사베이, 카타르월드컵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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