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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 40주년을 맞이해 KBO가 다양한 이벤트를 계속 이어가고 있다. 이전과 달리 적극적인 마케팅과 함게 팬들에게 다가서는 노력이 눈에 보인다. 최초의 야구인 출신 총재 허구연 총재가 선임된 이후 보다 적극적인 모습이다. 40주년 올스타전은 그런 KBO의 노력이 집약됐다. 

다양한 행사와 함께 우리 프로야구의 역사를 되짚어 보는 의미 있는 기획이 있었다. 40주년을 맞이해 전문가와 팬 투표를 통해 40인의 레전드를 선정하고 그중 가장 많은 득표를 한 4인을 선정해 시상했다. 이를 통해 프로야구 원년 팬들 특히, 장년층에게는 과거의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청년층에게는 프로야구의 또 다른 매력을 느끼게 할 수 있었다.  

그 4인은 순위대로 선동열, 최동원, 이종범, 이승엽이었다. 이들은 모두 시대를 풍미한 스타이자 리그를 지배했던 선수들이었다. 선동열과 최동원은 프로야구 초창기 그리고 프로야구가 최고 인기 스포츠로 자리를 잡은 90년대 최고의 투수들이었다. 이종범과 이승엽은 리그 역사에 남을 좌우 타자들이었다. 이들을 올스타전이 열리는 잠실 구장에서 수상했다. 이미 고인이 된 최동원은 그의 아들이 대신 수상했고 시구 행사도 함께 했다. 이들을 40주년 올스타전에서 함께 볼 수 있다는 점만으로도 팬들의 마음을 벅차게 했다. 

선동열은 국보급 투수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리그를 한 마디로 평정했다. 1982년 세계야구 선수권대회에서 한국이 최초로 우승을 차지할 당시 대표팀 에이스 역할을 했던 선동열은 1985년 당시로는 최고의 계약금을 받고 해태 타이거스에 입단했다. 입단 전 선동열은 계약금 문제로 해태 구단과 줄다리기를 했고 메이저리그 진출을 위해 실업팀과 계약하기도 했다. 결국 선동열은 전. 후기 리그가 있었던 당시 후기리그부터 마운드에 올랐다. 

 

 

 



이후 선동열은 리그를 지배했다. 1986년에는 무려 262.2이닝을 소화하며 24승 6패 6세이브를 기록했다. 방어율은 꿈의 방어율이라 할 수 있는 0.99를 기록했다. 말 그대로 언터처블 투수였다. 선동열은 이후 선발투수로 마무리 투수로 전천후 활약했고 0점대 방어율을 3번 더 기록했다. 누적된 피로로 어깨 부상을 당했건 1992년, 11경기 등판에 그치며 고비를 겪기도 했고 1994년 다소 부진한 시즌을 보내기도 했지만, 1995년까지 선동열은 한 한 시즌만 제외하고 1점 방어율 이하를 기록했다. 

그가 주로 구원투수로 나서던 시절에는 해태가 리드상 상황에서 그가 불펜에서 몸을 풀기만 해도 상대 팀에서 사실상 경기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선동열은 위력적이었다. 대포알처럼 들어오는 직구와 날카롭게 휘어 떨어지는 슬라이더 이 두 개의 구종만으로도 선동열은 리그를 평정했다. 그를 앞세운 해태는 당대 최강팀으로 군림할 수 있었다. 

선동열에게 KBO 리그는 좁기만 했다. 1995년을 끝으로 선동열은 해외 진출을 선언했다. 당시는 선수의 해외 진출이 구단의 승인 없이는 불가능했다. 해태 구단은 팀의 기둥인 그의 해외 진출을 반대했다. 하지만 팬들이 선동열을 지지했다. 마침 해태는 모기업이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결국, 선동열은 여론의 지지 속에 일본 리그 주니치 드래곤스에 입단했다. 전성기를 지난 시점이었지만, 선동열은 오랜 꿈을 이룰 수 있었다. 해태는 그를 임대 형식으로 일본에 보내면서 막대한 이적료를 챙길 수 있었다. 

일본 리그 초기 선동열은 리그 적응에 어려움을 겪으며 부진했다. 일본 리그는 분명 한 수 위였다. 기존의 투구 패턴으로는 일본 타자들을 상대하기 어려웠다. 또한, KBO 리그에서는 크게 연습을 하지 않아도 문제가 없을 정도였지만, 일본 리그는 달랐다. 입단 첫해 큰 실패를 경험한 선동열은 신인의 마음으로 철저히 다음 시즌을 준비했고 주니치의 마무리 투수로 돌아왔다. 선동열은 주니치에서 최고 마무리 투수로 이름을 날렸다. 정규리그 우승의 영광도 안았다. 1999년까지 선동열은 주니치의 마무리 투수로 활약했다.  

1999 시즌 후 일본 생활을 정리한 선동열은 메이저리그 진출 가능성도 타진했지만, 여러 조건이 맞지 않아 이를 포기하고 은퇴를 선언했다. 아직은 조금 더 여력이 있는 선동열이었다. KBO 리그 복귀도 고려할 수 있는 그였지만, 그는 깔끔한 마무리를 선택했다. 그렇게 한. 일 프로야구를 평정했던 대 투수의 현역 선수 생활을 자기 자신의 의지로 끝났다. 그는 해태 시절 무등산 폭격기로 불렸고 일본 주니치 시절에는 팀 연고지 나고야의 태양으로 불렸다. 그만큼 그는 투수로서 엄청난 존재감을 보였다. KBO 리그에서 그가 남긴 기록들 특히, 정규 시즌 0점대 방어율은 영원히 깨지지 힘든 불멸의 기록이다. 

이런 선동열과 쌍벽을 이루는 투수가 있었다. 레전드 올스타 투표 2위에 오른 최동원이다. 최동원은 고교 야구 시절부터 최고의 투수로 이름을 날렸다. 그는 엄청난 혹사를 당하면서도 소속팀과 국가대표 에이스로 활약했다. 그 활약은 프로에서도 이어졌다. 입단 첫해였던 1983년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성적이었지만, 리그 적응을 끝낸 1984 시즌 최동원은 리그를 지배하는 투수가 됐다. 

1984년 최동원은 무려 284.2이닝을 소화했고 27승 13패 6세이브 방어율 2.40을 기록했다. 탈삼진 223개는 지난 시즌 두산의 외국인 투수 미란다에 의해서 깨질 정도로 또 다른 불멸의 기록이었다. 그해 롯데는 우승 후보가 아니었지만, 최동원의 초인적인 투구를 앞세워 후기리그 우승에 성공했고 한국시리즈 무대에 올랐다. 

그 해 최강 전력으로 평가되던 삼성은 전기리그 우승을 하고 후기에는 여유롭게 한국시리즈를 준비했다. 시즌 막바지 롯데와 OB, 지금의 두산이 후기리그 우승 경쟁을 하는 상황에서 롯데와의 마지막 2경기를 사실상 고의 패배하면서 롯데를 한국시리즈 파트너로 선택했다. 1982년 프로 원년 최강팀이라는 평가에도 두산과의 한국시리즈 패배로 우승을 놓쳤던 아픔일 씻기 위해 삼성은 모든 수단을 다 동원했다. 실제 전력상 롯데는 삼성에 상대가 될 수 없었다. 

하지만 롯데에는 최동원이 있었다. 롯데는 다른 전략이 없었다. 최동원에게 1, 3, 5, 7차전 맡기도 그 경기를 이겨서 시리즈를 승리하겠다는 전략이었다. 지금으로 말하며 무리한 등판 일정이었다. 반대로 삼성은 그해 리그 최고 투수 중 한 명이었던 김일융과 원투펀치를 이루는 투수 김시진이 버티고 있었다. 그 외 투수들의 역량에서 삼성은 롯데보다 앞서 이었다. 그해 한국시리즈는 최동원 대 삼성의 대결이나 다름없었다. 

삼성은 최동원이 등판하는 경기 중 한 경기만 승리하면 무난히 한국시리즈 우승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졌다. 최동원이 아무리 뛰어난 투수고 극한의 투구 일정을 소화할 수 있는 철완이라 해도 4경기를 모두 호투할 수 없다는 판단을 했다. 상식적으로도 가능한 예상이었다. 

 

 

 



이런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최동원은 1차전과 3차전 연이은 호투로 팀을 승리로 이끌었고 한국시리즈는 삼성의 일방적 우세 전망에서 접전으로 분위기가 변했다. 2승 2패에서 맞이한 5차전 최동원은 다시 선발 투수로 나섰다.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삼성은 최동원 공략에 성공하며 5차전을 승리했다. 최동원은 완투 경기를 했지만, 타선이 그를 지원하지 못했다. 롯데의 우승 꿈도 사라지는 듯 보였다. 

여기에 기적이 일어났다. 6차전 경기에서 롯데는 경기 초반 앞서나갔다. 이 상황에서 최동원이 구원 등판했다. 5차전 완투했던 투수가 5회부터 마운드에 오르는 상황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롯데에게는 내일이 없었고 6차전을 무조건 승리해야 했다. 최동원 외에는 승리를 확실히 지킬 투수가 없었다. 최동원은 구원승을 거두며 한국시리즈는 3승 3패 동율이 됐다. 

운명의 7차전,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최동원의 등판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미 그는 정규 시즌부터 초인적인 이닝을 소화했다. 더는 무리였다. 나온다 해도 구위는 크게 떨어져 있었다. 그 상황에서 7차전을 앞두고 비가 내렸고 7차전 일정이 하루 밀렸다. 그 하루의 휴식이 프로야구의 새 역사를 만들었다. 롯데는 7차전 경기에서 최동원을 다시 선발 등판하도록 했다. 하루 휴식을 했지만, 그는 정상적인 컨디션이 아니었다. 롯데도 이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한국시리즈 7차전의 중압감을 이겨내고 마운드를 지킬 투수는 최동원 외에 없었다. 

최동원 역시 7차전까지 온 경기에 자신의 모든 걸 쏟아부었다. 최동원은 4실점했지만, 경기 끝까지 마운드를 지켰다. 삼성 타자들은 경기 초반 구위가 크게 떨어진 최동원을 공략해 4득점했고 삼성은 여유 있게 앞서 나갔다. 상대적으로 힘이 남아있는 삼성 선발 김일융의 공을 롯데 타자들은 제대로 공략하지 못했다. 기울어진 경기 흐름이었지만, 최동원의 포기하지 않는 투혼은 잠들었던 롯데 타자들의 방망이를 깨웠다. 롯데는 경기 후반 김일융 공략에 성공하며 점수 차를 좁해나갔고 8회 초 지금은 고인이 된 유두열의 역전 3점 홈런으로 경기를 6 : 4로 뒤집었다. 

이후 최동원의 구위는 거짓말 처럼 되살아났다. 야수들도 신들린 수비로 그를 도왔다. 최동원은 완투 경기를 했고 롯데는 7차전을 승리하며 창단 후 첫 우승에 성공했다. 만화 같은 승리였다. 이는 최동원이 레전드가 되는 데 있어 결정적 장면이었다. 한국시리즈 7차전에서 4번의 선발 등판, 1번의 구원 등판 포함 5경기 마운드에 선 최동원은 4승 1패를 기록했다. 다시는 나올 수 없는 기록이다.

1984 시즌 롯데의 기적 같은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끈 최동원은 이후 수년간 리그 최고 투수 자리를 지켰다. 그 사이 선동열이라는 강력한 후배가 등장했고 리그 최고 투수 자리를 놓고 두 선후배는 선의의 경쟁을 했다. 라이벌이라고 하지만, 두 투수는 매우 돈독한 사이였다. 다만, 경기에서는 양보가 없었다. 당시 선동열은 전성기에 오르는 상황이었고 최동원은 정점을 지나 내림세에 있었지만, 두 투수의 대결은 팽팽했다.

선발 맞대결에서 두 투수는 1승 1무 1패로 우열을 가리지 못했다. 두 투수의 맞대결에서 지금도 회자되는 최고의 경기는 1987년 5월 16일 경기였다. 이 경기에서 최동원과 선동열은 연장 15회까지 완 투 대결을 펼쳤지만, 경기는 2 : 2 무승부로 마무리됐다. 이전 두 번의 선발 맞대결에서 1승 1패를 기록한 두 투수는 우열을 가리기 위해 가지고 있는 힘을 다 짜냈다. 최동원은 209개를 선동열은 232개의 공을 던졌다. 두 투수의 연장 15회 완투 대결은 프로야구 역사에 남을 명승부였다. 이 대결은 이후 영화화되기도 했다. 

최동원과 선동열은 뛰어난 기량과 함께 영호남을 대표하는 팀의 에이스라는 상징성도 있었다. 롯데와 해태 모두 팬들의 응원이 뜨겁기로 이름난 팀이었고 두 팀은 제과 라이벌이기도 했다. 이에 두 팀의 대결은 응원 열기가 뜨거웠고 강력한 팬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최동원, 선동열의 맞대결은 최고의 흥행 카드이기도 했다. 

이 대결은 끝으로 두 선수의 선발 맞대결은 더는 없었다. 두 선수의 야구 인생도 엇갈렸다. 선동열을 리그를 평정하고 일본 리그에도 진출했지만, 최동원은 무리한 혹사로 점점 내림세를 보였다. 여기에 선수 노조 격인 선수협 창단을 그가 주도하면서 롯데 군단과 불편한 관계에 놓였다.

 

 

 



이미 최동원은 1988시즌 연봉 협상 문제로 롯데 구단과 크게 대립했고 연봉 계약 체결이 늦어지며 후반기에서야 마운드에 올랐다. 최동원은 선수들의 권익과 처우 개선을 위해 선수협 결성을 주도했지만, 이는 실패했다. 이후 최동원은 삼성으로 트레이드 됐다. 보복성 트레이드였다. 최동원으로서는 롯데 외에 다른 구단에서의 선수 생활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그는 삼성 합류를 거부하기도 했다. 뒤늦게 복귀했지만, 몸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강속구는 사라졌고 구위는 회복되지 않았다.

1990 시즌 후 최동원은 조용히 은퇴했다. 리그를 지배했던 대 투수는 변변한 은퇴식도 하지 못한 채 현역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다. 선동열이 은퇴 후 코치로서 감독으로서 명성을 쌓아가는 와중에 최동원은 그가 원하는 롯데에서의 지도자 생활은 물론이고 타 팀에서 환영받지 못했다. 그는 예능인으로 해설위원으로 경기장 밖의 삶을 살았다. 정치인으로서 삶을 모색하기도 했다. 뒤늦게 지도자로 복귀했지만, 롯데가 아닌 한화 코치였다. 하지만 롯데로의 복위는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2011년 최동원은 지병인 암 투병 중 세상을 떠났다. 

롯데는 큰 비난 여론에 직면한 이후에야 그의 등번호를 영구 결번하고 사직 야구장 인근에 동상을 건립하는 등 추모 사업을 했다. 하지만 성난 팬심은 지금도 남아있다. 팀의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끈 영웅에 대한 롯데 구단의 처사는 두고두고 구단의 흑역사가 될 수밖에 없다. 뒤늦게나마 롯데 레전드 선수로서 그의 선수 이력이 자리 잡고 그를 추모하는 행사가 매 시즌 열리는 건 긍정적이다. 

정말 불꽃같았던 두 투수였다. 이들은 프로야구 초창기 프로야구가 최고 인기 스포츠로 자리하는 데 있어 큰 역할을 했다. 리그 수준이 지금보다 떨어진다고 하지만, 성적에서도 매우 뛰어났다. 두 투수의 마운드에서 경기를 지배하는 카리스마는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었다. 해외 리그에서도 충분히 통할 수 있는 기량을 과시했던 투수들이기도 했다. 이들이 40닌 레전드 중 투표 1, 2위를 차지한 건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사진 : 픽사베이,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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