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왕조의 수호를 이끌었던 정몽주가 격살되면서 새로운 왕조 건국의 흐름을 막을 장애물이 모두 사라졌다. 실제 역사에서도 정몽주가 세상을 떠나고 3개월 후 조선이 건국됐다. 이제 이성계가 용상에 오르는 건 시간문제였다. 다시 정국의 주도권을 손에 넣은 급진파 사대부들을 빠르게 움직였다. 정몽주와 함께 이성계 세력과 맞섰던 공양왕은 기울어진 분위기에 전의를 상실했다. 구심점을 잃은 온건파 사대부 세력도 더는 힘을 쓰지 못했다. 정도전을 중심으로 한 급진파 사대부는 고려 왕실을 압박해 선위를 이끌어냈다. 사실상의 왕위 찬탈이었지만, 선위의 형식을 통해 새 왕조 건국의 정당성을 조금이나마 확보했다. 이성계는 왕위에 오르는 걸 주저했지만, 위화도 회군 이후 역사의 흐름을 그는 거스를 수 없었다. 이미 고려왕조 ..
위화도 회군 이후 권력의 정점에 선 이성계와 그의 세력은 새로운 왕조를 열기 위한 움직임을 빠르게 전개했다. 군권은 이성계에 의해 장악됐도 조정의 대신들과 관료 조직도 이성계 세력이 장악했다. 남은 건 그들이 왕위에 올린 공양왕의 선위와 이성계의 즉위, 새로운 왕조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순조롭던 그들의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정몽주를 중심으로 한 온건파 사대부 세력이 새로운 왕조 창조에 반대했다. 온건파 사대부 세력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과 우왕의 최영의 제거, 공양왕의 즉위, 토지개혁인 과전법 시행에는 동조했지만,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는 일에는 함께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왕에 대한 충성을 가장 중요한 덕복이었고 새로운 왕조를 여는 건 명분 없는 일이었다. 반대로 정도전을 중심으로 한 강경파 사대부 세력..
위화도 회군 이후 권력의 중심에 올라섰지만, 심화되는 권력 투쟁 과정에서 가족들의 갈등까지 커지는 상황 속에 이성계는 돌연 그의 근거지인 동북면으로 떠났다. 그는 애써 쌓아온 권력 기반을 버리고 낙향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성계는 백성들의 삶을 편안하게 해주고 새로운 세상을 열겠다는 명분으로 역적의 길을 걸었다. 이성계는 그를 지지하는 강경파 신진 사대부와 일부 가문, 가족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권력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였다. 하지만 그의 중요한 정치적 자산인 백성들이 그와 멀어지면서 마음이 흔들렸다. 이성계 세력의 최영과 우왕 그리고 창왕의 숙청과 참살과 관련해 여론은 이성계 세력에 비판적으로 기울었다. 당장이라도 고려 왕조를 무너뜨릴 수 있는 힘을 가진 이성계였지만, 달라진 여론 동향은 큰 부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