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인 정철과 윤두수가 주축이 된 세자 책봉을 둘러싼 비밀 회합은 선조의 갑작스러운 등장으로 서먹한 자리가 된다. 선조는 서인의 영수 정철과 윤두수, 동인의 영수 이산해, 류성용에게 붕당 간의 대립에 대해 경고했다. 선조는 강력한 왕권을 신하들이 뒷받침해줄것을 은연중 내비쳤다. 당연히 선조의 후계자, 즉 세자 책봉을 위한 논의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하지만 서인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강력한 왕권을 원하는 선조와 정치적 동반자가 될 수 없었다. 신권을 중심으로 한 정치를 구현하기 위한 차세대 권력이 필요했다. 그들은 미래 권력만큼은 서인의 정치 성향과 맞는 인물이 필요했다. 서인이 원하는 세자 후보는 광해군이었다. 서인은 이러한 그들의 정치적 의도를 관철하기 위해 동인과 관계에 있어 유화책을 펼쳤다..
힘든 내부 결정 과정을 거쳐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한 조선, 하지만 통신사에 대한 인식은 양국에 크게 달랐다. 조선은 교린을 핑계로 일본과 새 지도자 토요토미의 성향을 파악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일본에서는 조선과의 전면전을 피하려는 세력이 조선 통신사를 이용했다. 고니시와 대마도주는 조선 통신사를 토요토미에서 입조를 위한 사신으로 위장했다.이들은 역관과 문서를 위조하는 방식으로 위기를 넘겼다. 조선 통신사 일행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일본 내부 세력에 이용당하며 소중한 시간만을 흘려보내야 했다. 그나마 정사 황윤길과 부사 김성일의 상황 대체에 대한 방식이 엇갈리며 효율적인 대응을 하지 못 했다. 황윤길과 김성일은 토요토미와 일본의 위협에도 다른 시각을 가지며 앞으로 파란을 예고했다.조선 통..
조선이 통신사의 일본 파견 전제 조건으로 내걸었던 조건을 일본의 실력자 토요토미가 받아들였다. 토요토미는 은 수년 전 남도 지방을 침공했던 왜구의 수장과 그들은 안내했던 조선인 첩자를 조선으로 소환했다. 조선으로서는 예상치 못한 외교적 성과였지만, 이에 따라 일본의 통신사 파견 요청을 무조건 거절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 애초 통신사 파견에 적극적이었던 류성룡과 동인 측은 다시 한 번 선조에서 통신 파견을 주장했지만, 선조는 여전히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동인을 밀어내고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한 서인들 역시 류성용에 반대했다. 류성용으로서는 힘에 부친 상황이었다. 선조는 소환된 이들에 대한 처형을 명했다. 여기서 반전이 일어났다.조선은 첩자의 입에서 비밀리에 개발 중이던 신 무기의 이름이 나왔고..
임진왜란을 다룬 역사 드라마 징비록이 시작됐다. 징비록 1, 2회는 임진왜란 이전 조선 정치 상황과 일본의 상황이 함께 그려졌다. 당시 조선은 선조 즉위 이후 가시화된 동인과 서인의 정치적 대립 속에 동인 정권이 주요 권력을 차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징비록의 저자이자 주인공 류성룡은 선조의 두터운 신임 속에 조정의 요직에 있으면서 집권세력인 동인의 중심인물이었다.당시 임금이었던 선조는 직계 혈족이 아닌 방계 혈족으로 임금에 올라 정통성에 대한 도전을 받고 있었다. 왕권은 미약했다. 하지만, 선조는 명나라로부터 조선 왕조의 정통성을 공인 받으면서 왕권에 확립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게 됐다. 선조는 당시 동인에 밀려 권력에서 멀어진 서인을 이용해 비대해진 동인 세력을 숙청했다.서인은 동인 계열의 정여립이..
전쟁 시작 후 내내 밀리기만 하던 조선이 반격을 위한 움직임을 시작했다. 그 시작은 전라 좌수사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이었다. 선조의 수군 폐지 등의 부정적 시선을 뒤로하고 전쟁에 대비했던 이순신의 수군은 첫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며 승전보를 알렸다. 조선 수군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던 일본군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일본군의 한양을 점령한 부대에 원활한 군량과 군수물자 보급을 위해 바닷길 이용이 필수적이었다. 하지만 수로 이용이 원활하지 않다면 중요 전략이 흐트러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한양을 떠나 선조가 있는 평양성 공략을 준비 중인 일본군에 큰 근심거리가 생긴 셈이었다. 토요토미 역시 조선 수군의 존재가 큰 우려를 표했다. 토요토미는 일본 수군의 증원을 명하며 이순신의 존재에 불편함을 드러냈다. 이는 ..
개성으로 파천한 선조는 계속되는 패전과 전쟁 발발의 책임을 물어 영의정 이산해와 좌의정 류성룡을 파직을 명한다. 이는 왕과 조정이 전란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서 이반된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일이기도 했다. 애초 선조는 좌의정 류성룡에 대해서는 파직보다는 자신의 전쟁 대처에 대해 비판을 하는 것을 무마하기 위한 의미가 강했다. 하지만 류성룡은 좌의정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나며 선조의 항전의 지 부족을 질타했다. 그는 싸우지도 않고 피하기에 급급한 왕과 조정을 국민들이 신뢰하지 않는 상황에서 전란 극복은 공염불에 그칠 수밖에 없음을 이유로 들었다. 류성룡의 북방을 지키던 병력과 호남지역에서 도성 한양으로 향하는 지원군 등을 모아 개성에서 일전을 벌일 것을 주장했다. 이런 류성룡의 바람에도 전황은 나아지지 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