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가 자신했던 임진강 전투는 조선군의 허무한 패배였다. 애초 조선군은 일본군의 도강을 막고 호남에서 한양으로 향하는 증원군과 합세해 위 아래에서 일본군을 협공하려 했지만, 임진강 방어선을 책임진 장수 한웅인의 잘못된 판단이 전략에 혼선을 가져왔다. 그는 의욕이 넘치는 장수였지만, 상황을 읽는 눈이 밝지 않았다. 이는 선조가 도원수 김명원을 제치고 그보다 몇 단계 지위가 낮은 한웅인에게 지휘권을 넘긴 것에서 그 원인이 있었다. 한양 수성전에 실패한 김명원을 신뢰하지 않은 선조는 패기 넘치는 장수 한웅인을 등용했지만, 지휘 체계를 흔드는 일이었다. 류성룡 역시 이런 선조의 결정에 우려를 표했다. 하지만 선조는 이를 무시했다. 선조는 전쟁 발발 이후 파천을 거듭하며 떨어진 자신의 위상을 되찾기 위해 직접 임..
전쟁 시작 후 내내 밀리기만 하던 조선이 반격을 위한 움직임을 시작했다. 그 시작은 전라 좌수사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이었다. 선조의 수군 폐지 등의 부정적 시선을 뒤로하고 전쟁에 대비했던 이순신의 수군은 첫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며 승전보를 알렸다. 조선 수군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던 일본군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일본군의 한양을 점령한 부대에 원활한 군량과 군수물자 보급을 위해 바닷길 이용이 필수적이었다. 하지만 수로 이용이 원활하지 않다면 중요 전략이 흐트러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한양을 떠나 선조가 있는 평양성 공략을 준비 중인 일본군에 큰 근심거리가 생긴 셈이었다. 토요토미 역시 조선 수군의 존재가 큰 우려를 표했다. 토요토미는 일본 수군의 증원을 명하며 이순신의 존재에 불편함을 드러냈다. 이는 ..
개성으로 파천한 선조는 계속되는 패전과 전쟁 발발의 책임을 물어 영의정 이산해와 좌의정 류성룡을 파직을 명한다. 이는 왕과 조정이 전란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서 이반된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일이기도 했다. 애초 선조는 좌의정 류성룡에 대해서는 파직보다는 자신의 전쟁 대처에 대해 비판을 하는 것을 무마하기 위한 의미가 강했다. 하지만 류성룡은 좌의정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나며 선조의 항전의 지 부족을 질타했다. 그는 싸우지도 않고 피하기에 급급한 왕과 조정을 국민들이 신뢰하지 않는 상황에서 전란 극복은 공염불에 그칠 수밖에 없음을 이유로 들었다. 류성룡의 북방을 지키던 병력과 호남지역에서 도성 한양으로 향하는 지원군 등을 모아 개성에서 일전을 벌일 것을 주장했다. 이런 류성룡의 바람에도 전황은 나아지지 않..
마지막 희망이었던 신립의 탄금대 전투 패전과 전사 이후 일본군의 북상에는 더는 장애물이 없었다. 도성인 한양 진출도 시간문제였다. 주력 부대가 모두 궤멸된 상황에서 사기가 충천한 수만의 일본 군대를 막을 군사가 조선에는 없었다. 그나마 남은 병력은 일본군을 두려워하고 있었고 시가는 바닥에 떨어진 상황이었다. 각 지방의 구원군이 도성으로 오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도성 방어는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 선조는 하루라도 빨리 도성을 버리고 파천할 것을 조정에 명했다. 하지만 류성룡을 비롯한 대신들은 도성 사수를 강력히 주장했다. 특히, 류성룡은 자신의 직접 일본군을 맞설 것을 천명하게 항전 의지를 다졌다. 하지만 선조의 마음은 이미 결사 항전과 거리가 있었다. 류성룡이 남은 병력으로 방어를 위해 골몰하고 있었지..
임진왜란 발발 이후 파죽지세로 한양으로 진격하는 고니시의 일본군 앞에 신립의 정예부대가 막아섰다. 신립은 조선 최고의 장수였고 그가 무너지면 며칠 안에 도성 한양에 일본군이 진격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신립은 개전초기 조선의 마지막 희망과도 같았다. 조선 조성의 여망을 안고 충주로 향한 신립은 배수의 진을 치며 결전을 대비했다. 신립의 전술은 분명 무리가 있었다. 병력수가 화력에서 조선은 밀리고 있었다. 정면 승부는 승산이 그만큼 크지 않았다. 일본군이 한양으로 향하기 위해 넘어야 하는 조령의 험준함을 이용한 전술로 그들의 진격을 늦출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신립은 이미 준비가 부족하고 사기까지 떨어질 대로 떨어진 조선군이 고난도 매복전을 전개할 역량이 안된다고 판단했다. 도망자가 속출하는 상황에서 군사들..
임진왜란 개전 초기 선봉대로 조선에 상륙한 고니시의 부대는 부산의 2개성을 함락한 이후 별다른 저항 없이 도성인 한양으로 진군했다. 이런 일본군의 기세에 조선 조정은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 했다. 각 지역별 방위 체계는 허술했고 작전권조차 없는 상황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전투를 치를 수 있는 체계가 구축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일본군의 기세에 눌린 병사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져 있었고 훈련이나 전술 수행 능력은 미흡하기만 했다. 개전초기 양상은 어른과 아이의 싸움 그 자체였다. 일본군은 고니시의 선봉대에 이어 가토의 제2군, 연이어 계속된 부대의 상륙으로 15만이 넘는 대군이 조선 땅을 유린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전면전에서 전혀 대비하지 못한 조선으로서는 나라의 존망이 바람 앞에 등불과 같은 상황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