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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룡이 그토록 대비하고자 했던 일본의 조선 침략, 임진왜란이 시작됐다. 일본은 고니시를 선봉장으로 내세워 부산에 대규모 상륙 작전을 전개했다. 일본은 온 국력을 모두 쏟아부은 전면전으로 조선과 명나라까지 전쟁의 대상으로 삼았지만, 조선의 대응은 허술하지 그지없었다. 개전 초기 조선은 과거 왜구들의 노략질로 상황을 오판하면서 대응에 혼선을 빚었다. 



일본군의 전력의 상상이이었다. 오랜 기간 내전을 통해 단련한 일본군의 최정예 부대였고 조선에는 없는 신식 무기인 조총으로 무장돼 있었다. 이런 일본군에 맞서 부산진성의 정발 장군과 동래성의 송상헌 장군이 온 힘을 다해 싸웠지만, 중과 부족이었다. 두 장군은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다. 이렇게 최 일선이 쉽게 허물어지면서 조선 임금 선조와 조정은 큰 충격에 빠졌다. 



조선의 군사제도인 제승방략 체제에서 중앙군이 분쟁 지역으로 향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일선이 쉽게 무너진다면 적은 수월하게 도성으로 향할 수 있었다. 조선은 급히 동원령을 내리고 대응책 마련에 부심했다. 하지만 이미 문란해진 군역 제도하에서 그 일은 수월하지 않았다. 누구도 쉽게 전투에 나서려 하지 않았다. 특히, 양반 자제들과 같은 지도층에서 미온적이 태도를 보였다. 









한시가 급한 상황이었지만, 조선 조정은 이러지도 저러지고 못 했다. 선조는 급히 류성룡에 전권을 주며 사태 수습에 나섰다. 하지만 선조와 동인 주류 세력은 일본의 침략을 전면전으로 생각지 않았다. 그들은 일본의 그토록 강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미 일본의 위협을 감지하고 있었던 류성룡은 전면전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대응에 고심했다. 



그 사이 일본은 고니시의 선봉부대에 이어 가토가 이끄는 제2군의 조선 상륙을 준비하고 있었다. 토요토미는 평소 강한 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고니시와 가토의 경쟁을 부추기며 속전속결을 노렸다. 토요토미는 빠른 시간 내 조선의 도성을 점령하고 선조를 생포에 항복을 받아낼 심산이었다. 조선과의 전쟁을 빠른 시간에 끝낸다면 그의 꿈을 대륙 진출도 한결 수월해지기 때문이었다. 토요토미의 전략은 치밀했고 강한 전의로 불타이었다.



이런 토요토미의 정예 일본군을 상대하기에 조선의 군사력을 허약했다. 부산의 중요한 2개 성이 쉽게 허물어지는 것도 예상된 수순이었다. 류성룡이 동분서주하고 있지만, 일본군의 진격을 멈출 묘안이 없었다. 류성룡은 급한 대로 비리로 점철된 병조판서의 죄를 묻고 전쟁에 대비한 비상조치를 선조에 건의했다. 선조는 이를 받아들였다. 이미 민심 수습을 위해 전쟁 대비에 미온적이었던 선조로서는 대안이 없었다. 



하지만 류성룡의 조치들이 큰 효과를 거둘지는 미지수다. 조선은 최고의 장수 신립을 중심으로 중앙군을 꾸려 고니시의 일본군에 맞서려 하지만, 수적으로 크게 밀리는 상황이고 무엇보다 그들에 대한 정보가 없다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일본군의 조총부대 전술을 모르고 있다는 점은 앞으로 대결이 쉽지 않음을 예고하고 있다. 



조선의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전쟁은 이제 현실이 됐다. 회피하려는 마음만으로 토요토미의 침략 야욕을 막는 건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렇게 조선 역사에 있어 가장 큰 외세와의 전쟁인 임진왜란, 7년 전쟁은 큰 시련을 예고하며 시작됐다. 



사진, 글 : 심종열 (http://blog.naver.com/youlsim74)



징비록

정보
KBS1 | 토, 일 21시 40분 | 2015-02-14 ~
출연
김상중, 김태우, 정태우, 이관훈, 한지완
소개
'징비록'은 임진왜란 당시 전시 총사령관격인 영의정 겸 도체찰사였던 '류성룡'이 임진왜란 7년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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