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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잔한 영상으로 우리 동네를 탐방하는 프로그램,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가 찾은 3번째 동네는 서울 은평구 그중에서 북한산 바로 아래 자리한 불광, 녹번동이었다. 불광, 녹번동은 삭막한 서울에서 자연의 숨결을 가득 느낄 수 있는 북한산이 병풍처럼 동네를 감싸고 있고 한옥이나 역사 유적지는 없지만, 점점 사라져가는 추억 속의 장면들이 함께 살아 숨 쉬는 곳이었다. 

오래전 지어진 단독 주택들과 다세대 주택들이 유독 많은 이 동네의 골목길을 걷다가 만난 동네 탐방의 첫 장소는 부자가 운영하는 대장간이었다. 이 대장간은 80대의 아버지와 아버지의 대장간을 이어받아 운영하는 아들이 힘차게 망치질을 하고 있었다. 마트에 가면 쉽게 구입할 수 있는 쇠로 만든 생활용품들이지만, 이 대장간에서는 사람의 힘으로 제품을 하나하나 만들고 있었다. 

길고 힘든 작업이지만, 여전히 이 대장간에서 만든 제품을 찾는 단골손님들이 있어 그들로 인해 이 대장간을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고 우리 동네에 한편을 지키고 있었다. 제품마다 새겨진 "불광" 이라는 대장간의 낙인은 대장간을 지키는 부자의 자부심과 긍지, 그들의 노력을 그대로 함축하고 있었다. 






대장간을 지나 바쁘게 일을 하고 있는 방앗간을 찾았다. 이 방앗간은 앞서 만난 대장간과 함께 수십 년을 이 동네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손쉽게 떡을 사서 먹을 수 있는 시대지만, 이 동네 방앗간에는 떡을 만들어 먹는 사람들, 김장철에서는 고추를 빠서 가져가는 사람들이 이곳을 찾고 있었다. 이곳의 주인과 손님들은 마치 가족과 같이 서로와 서로를 잘 알고 있었다. 동네의 사랑방 같은 이 방앗간을 주인의 수십 년 가정사와 함께 하는 또 다른 역사가 가득한 곳이었다. 

불광동에서의 발걸음은 우리나라 건축사에서 중요 건축가 중 한 명이고 이제 고인이 된 고 김수근의 마지막 작품 불광동 성당을 지났다. 불광동 성당은 우리나라 100대 건축물에 포함될 정도로 건축물이 창의적이고 아름다운 모습이었고 동네 한 편에 우뚝 자리하고 있었다. 

성당을 지나 녹번동으로 향하는 길, 큰 표지석에는 녹번동의 원래 이름이 양천리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이곳은의주에서 천리, 부산에서 천리의 거리에 위치한 조선시대 국토의 중심에 있었다. 양천리라는 이름도 그렇게 유래됐다고 한다. 지금은 녹번동으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녹번동은 상당한 상징성을 지닌 곳이었다.

녹번동에는 서울 혁신파크라는 명소가 있다. 이곳은 과거 질병관리본부가 있었던 곳으로 질병관리본부가 지방으로 이전하면서 비게 된 공간을 지역민들을 위한 공원, 공공장소로 변화시켰다. 이곳에서는 도서관, 미술관, 동네 책방, 예술 활동을 위한 장소, 청년들 위한 열린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이곳은 소통의 장소로 시민들의 쉼터로 질병관리본부가 수행했던 공공적 성격의 일을 더 발전시켰다. 과거와 현대가 멋지게 조화를 이룬 곳이었다. 

서울혁신파크를 떠나 골목길로 접어든 발걸음을 노부부가 운영하는 작은 중화음식점이었다. 방송에 나와 이름이 알려지고 많은 이들이 이곳을 찾으면 손님들에 소홀해질 수 있음을 걱정하는 노부부의 마음을 담은 중화 음식점은 면을 제면기로 직접 뽑아내고 짜장 소스를  그때그때 만들어 내는 등 짜장면 한 그릇에도 정성이 가득 담겨 있었다. 짜장면 하면 신속 배달을 당연한 것으로 알고 있는 우리들에게 불광동의 중화 음식점은 음식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곳이었다. 

짜장면의 구수한 냄새를 뒤로하고 찾은 녹번동의 또 다른 명소는 산골마을이었다. 얼핏 시골의 산골마을은 시골의 두메산골을 생각하게 한다. 실제 이 마을은 100여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독특한 커뮤니티를 구성하고 있었다. 이 마을 입구에는 각각의 집이 가지고 있는 이력과 특색을 살린 이름들을 표시한 간판이 눈에 띄었다. 이 마을의 이름은 서울시에서 유일한 광산이고 산골이라는 한약재로 사용하는 광 물질을 생산하는 산골 광산에서 유래됐다. 서울 속 오지와 같은 곳이지만, 마을의 사람들의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이 산골마을에는 서울에서 얼마 안 남은 연탄을 사용하는 집이 있고 그곳에서는 수십 년의 추억을 간직한 집을 지키는 할머니가 홀로 그 집을 지키고 있었다. 결혼 직후 한국전쟁 때 남편을 떠나보낸 할머니는 그곳에서 자녀들을 키우고 장성한 자녀들이 떠난 이후에도 불편함에도 그 집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 할머니에게는 자신이 그 집에서 쌓아온 추억들이 너무나 소중했다. 

연탄아궁이 집의 추억을 뒤로하고 찾은 곳은 산골마을에서 운영하는 극장이었다. 그 그 극장은 몇 개 안되는 좌석이 있었지만, 마을 주민들이 상영된 영화를 무료로 즐길 수 있는 장소였다. 이 극장은 이 마을의 유일한 30대 청년이고 운영하고 있었다. 이 극장은 재활용품으로 자신만의 방식으로 극장을 구성하고 산골마을의 문화예술 공간이지 소통의 장소로 이용되고 있었다. 이 극장은 사장은 자신의 생업을 하면서도 마을 주민들을 위해 자신의 공간을 함께 내어주고 있었다. 

이렇게 불광동, 녹번동의 사람들은 화려한 도시의 삶과는 다른 과거를 함께 간직하면서도 이웃들과 정을 나누는 따뜻함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 아파트의 편리함에 익숙한 도시 사람들에게는 불편함을 느껴질 수도 있었지만, 이 동네에서는 이웃과 교류가 없는 도시의 삭막함을 덜 느낄 수 있었다. 그러면서 어떤 것이 진정 행복한 삶인지 한 번 더 생각하게 했다. 


사진 :  프로그램 홈페이지, 글 : 지후니 74 (youlsim7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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