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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 그날 279회] 부끄러운 정치의 민낯 드러낸 정인숙 피살 사건

문화/미디어

by 지후니74 지후니74 2020. 9. 16.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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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현대사의 사건들을 재조명하고 있는 역사 교양프로 역사저널 그날 279회에서는 1970년 온 나라를 뒤흔들었던 정인숙 피살 사건을 주제로 했다. 정인숙 피살 사건은 당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피살 시간은 통행금지가 있었던 시절 통행금지가 발효될 심야였다. 피살된 정인숙이라는 여성은 26살의 젊은 나이로 피살 당시 정재계 고위직들이 사용하는 기사가 딸린 외제 승용차를 타고 있었고 값비싼 장신구와 보석을 소지하고 있었다. 

 놀라운 건 총기에 의한 피살이었다는 점이었다. 지금도 일반인들의 총기 소유와 사용이 극히 제한되는 현실에서 1970년대 총기 살인 사건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여기에 정인숙의 자택에는 거액의 현금이 예금된 통장과 보석류는 물론이고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않은 시대에는 일반인이 소지할 수 없는 복수여권이 발견됐다. 여권에는 미국과 일본을 수시로 드나들었던 기록이 남아있었다. 이에 더해 그녀가 보관하고 있었던 수첩에는 이름만 들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회 고위직 인사들의 이름과 연락처에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그 명단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이름도 있었다. 이렇게 보통의 20대 여성이 누릴 수 없는 삶을 살았던 삶을 살았던 피해자는 사회적으로 큰 관심을 불러왔다. 

이를 두고 정인숙이라는 여성이 권력의 고위층과 깊게 연관된 인물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난무했다. 수사 과정에서 드러난 사실들은 그러한 추정을 충분히 가능하게 했다. 더 의문스러웠던 건 경찰과 검찰의 수사 과정이었다. 경찰은 살인사건의 현장을 보전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사건 발생 후 2시간여 만에 현장을 정리했다. 또한, 사건이 발생한 차량을 관할 경찰 주차장에 보관했고 시신을 방치하기도 했다. 일반적인 살인사건과는 크게 다른 일처리였다. 또한, 수사를 지휘할 검사는 살인 사건을 주로 다룰 강력부가 아닌 정치적 사건을 주로 다루는 공안부에 소속되어 있었다. 사건을 취재하는 언론사들의 접근도 강력한 통제했다. 이에 사거에 대한 미스터리와 의문은 커져갔다. 

 

 

 


얼마 후 범인이 특정됐다. 당시 차량을 운전하고 있었던 정인숙의 오빠 정종욱이 살해범으로 체포되었고 그는 범행을 인정하고 재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그의 범행 동기가 석연치 않았고 범행의 결정적 증거라 할 수 있는 총기는 끝내 발견하지 못했다. 증거는 오로지 정종욱의 증언뿐이었다. 누구든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지만, 사건은 빠르게 종결됐다. 

이후에도 이 사건을 두고 국민들의 관심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녀가 3살 나이의 아들이 있었고 그 아들이 당시 권력 최상위층의 오랜 기간 자리했던 정일권 국무총리의 아들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실제 정일권 총리 역시 정인숙 수첩에 그 이름이 포함되어 있었다. 정일권 총리는 박정희 대통령 최 측근 인사로 만주군관 학교와 일본 육사를 나오고 군 참모총장과 장관, 국무총리, 국회의장까지 역임한 권력의 중심부에 있었던 인사였다. 그는 권력욕을 보이지 않았고 충실한 2인자의 삶을 살았다. 이에 박정희 대통령은 그를 신뢰하고 오랜 기간 그를 권력의 요직에 등용했다. 정일권과 정인숙의 관계는 그만큼 세간의 관심을 받을 수 받게 없었다. 

또한, 최고 권력층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던 정인숙이었다는 점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혼외 자식이 아닌가 하는 소문도 있었다. 대학가에서는 당시 히트곡을 개사한 사건 관련 노래가 불리기도 했다. 해당 곡은 금지곡이 되기도 했다. 

이렇게 보통의 살인 사건과는 너무나 달랐던 사건이었지만, 당시 집권층은 이 사건을 빠르게 덮기에 급급했다. 1971년 대통령 선거를 얼마 남겨두지 않았던 시점에 정권은 이 사건이 정치 쟁점화되는 걸 극히 경계했다. 이 선거는 박정희 대통령이 무리한 3선 개헌을 감행한 후 치러지는 선거라는 점에서 정권에게는 매우 중요했다. 정인숙 피살 사건은 자칫 정권을 흔들 수 있는 스캔들이 될 수 있었다. 정권의 통제 속에 정인숙 피살 사건은 점점 사람들 기억 속에서 멀어져 갔다. 

하지만 이 사건의 이면에는 우리 정치의 부끄러운 이면이 존재하고 있었다. 후에 밝혀졌지만, 정인숙은 당시 정관계 고위 인사들이 주로 이용하는 유흥업소인 요정에서 일하는 여성이었다. 정인숙은 대학교 중퇴의 당시로는 고학력 여성으로 수려한 외모와 영어에까지 능통한 지성까지 갖췄다고 전해진다. 이런 정인숙은 요정에서 고위 인사들과 수시로 소통했고 깊은 관계를 맺기도 했다. 권력자들과의 우호적 관계 속에 정인숙은 알게 모르게 힘을 키워갈 수 있었다. 

당시 요정은 정부의 고위 관료들과 정치인들이 은밀한 만남이 이루어지는 곳이었고 그 속에서 나라의 중요한 사안들이 논의되기도 했다. 그 은밀성으로 인해 부정과 비리가 거래되는 이이 비일비재했다. 권력과의 만남이 필요했던 경제가 인사들은 요정을 매개로 그들과 접촉했고 검은 돈이 오가곤 했다. 일반 국민들의 알 수 없는 그들만의 세계에서 이루어진 일은 결코 나라에 도움이 될 수 없었다. 

정부는 이에 요정들의 영업을 규제하기도 했지만, 고위직들의 수요가 여전한 탓에 비밀 요정이 수없이 생겨나곤 했다. 이런 요정 정치는 1970년대 정치사에서 중요한 부분이었다. 하지만 유흥업소를 그것도 여성을 매개로 한 정치행태는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 당시 지금의 국정원인 중앙정보부는 요정들을 특별히 관리하는 조직을 두고 그 안에서 정치공작과 정보 수집 활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고위직들과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접대 여성들은 정보원의 역할을 하면서 자신의 뜻과 다르게 권력에 가까워지기도 했다. 

정인숙은 이런 비정상적인 시대 상황 속에서 권력의 중심부에 위치하면서 일반인 상상할 수 없는 부를 축적하는 한편 화려한 삶을 살수 있었다. 하지만 불안한 토대 위에 세워진 그녀의 삶은 항상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실제 정인숙의 위세는 웬만한 정부 고위직들 부럽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결국, 각종 정보를 한 손에 쥔 그녀의 존재는 정권에 큰 위협으로 다가올 수 있었다. 이는 정인숙 피살 사건에 어떤 거대한 힘이 개입되어 있음을 추론하기 않을 수 없다.

사건에 대한 의문은 살인범으로 장기간 복역하고 출소한 정인숙의 오빠 정종욱이 출소 후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고 새로운 증언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면서 다시 주목을 받았다. 이 사건을 재조명한 TV 프로그램을 통해 그 의문은 더 커졌다. 수사기록 등에서 허술한 부분이 많았고 정종욱의 무죄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가 드러났다. 정종욱은 사건 당시 2명의 정체불명의 남자들이 자신의 차량을 막아섰고 총리실에서 나왔다는 말을 했다 주장했다. 그 남자들이 총격을 가했고 정인숙은 그 자리에서 2발의 총탄을 맞고 사망했다. 정종욱 역시 총상을 입었다. 당시 수사에서는 정종욱이 범행을 숨기기 위해 자해를 했다고 결론을 내렸지만, 그 주장을 스스로 뒤집었다. 서슬 퍼런 독재 권력이 지배하던 시절이었음을 고려하면 정확한 수사와 재판이 이루어질 수 있었을지에 대한 의문이 생기는 건 사실이다. 

결국, 정인숙 피살 사건은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또한, 정인숙의 아들이 장성한 후 제기한 정일권 전 총리에 대한 친자확인 소송은 정일권 전 총리가 재판 도중 별세하면서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정인숙에 대한 각종 의문들은 제대로 풀리지 않은 채 남아있다. 

하지만 이 사건을 통해 우리가 알아야 할 일은 요정정치로 불리는 비정상적이고 변태적이었던 우리 정치 문화의 전 근대성이다. 일제시대 요정문화를 답습한 이런 밀실 정치는 건전한 정치문화 발전을 저해하고 부정부패를 더 촉진하기 때문이다. 또한, 퇴폐 향락 문화의 표본으로 이어가서는 안되는 일이기도 하다. 1970년대 요정은 이후 룸살롱 형태로 그 명맥을 이어갔다. 더 충격적인 건 요정 문화가 1970년대와 80년대까지 사회 지도층의 퇴폐적 유흥에서 벗어나 관광자원으로 활용되었다는 점이다. 

실제로 1970년대 요정의 여성 종사자들은 관광업 종사자로 인정되었고 주로 일본인들의 주류를 이루는 해외 관광객들을 상대로 일했다. 한때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었던 기생관광의 형태로 상당 시간 요정이 존재했다. 외화벌이라는 목표를 위해 기생관광의 변태적 관광문화가 용인된 것이다. 이는 분명 결과는 위해 정당한 과정이 무시되고 개인의 인권이 존중되지 않는 부끄러운 우리 현대사의 한 장면이다. 또한, 여성을 상품화하는 비 인권적 형태이기도 했다. 이런 잘못된 문화가 사회 지도층들의 비도덕성에서 파생되었다는 점은 부끄러움을 더한다. 

이렇게 정인숙 피살 사건은 우리 사회의 부끄러운 이면을 그대로 드러낸 일이었다. 하지만 당시는 물론이고 지금도 정인숙 피살 사건을 두고 정인숙 아들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등 극히 자극적이고 지협적인 부분에도 관심을 두는 이들이 많다. 한 20대 여성의 원치 않았던 죽음에 대한 애도와 사건의 실체에 다가서려는 노력은 부족하기만 하다. 사건이 발생한 1970년과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사건은 왜곡된 우리 현대사의 한 단면이다. 이를 통해 교훈을 얻어야 한다. 더는 비정상이 정상이 되는 세상이 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정인숙 피살 사건은 또 다른 관점에서 재조명되고 진실을 밝히기 위한 노력이 더해져야 한다. 

사진 : 프로그램 홈페이지,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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