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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교양 프로그램 역사저널 그날 278회에서는 1969년 9월 통과된 3선 개헌을 둘러싼 막전 막후 상황들을 그 주제로 했다. 3선 개헌은 1967년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한 박정희 대통령이 당시 대통령 연임을 명시한 헌법을 바꿔 3번째 대통령 출마의 길을 열기 위해 단행됐다. 

하지만 헌법을 개정해야 하는 일로 이를 위해서는 국회의 개정안 통과와 국민투표를 거쳐야 했다. 대통령의 의지만으로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박정희 대통령이 철권통치를 하던 시절이었다 해도 3선 개헌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상당한 상황에서 힘으로만 이를 실행하기는 어려웠다. 결국, 3선 개헌안은 우여곡절 끝에 국회를 통과했고 이는 이후 10월 유신으로 이어지며 장기 독재의 시작이 됐다.

1967년 대통령 선거에서 여유 있게 재선에 성공한 박정희 대통령은 그 직후부터 대통령 3연임을 준비했다. 경제성장의 결과에 따른 자신감을 그 바탕에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를 위해 개헌을 강력히 추진했다. 이를 위해서는 국회의원 3분의 2의 찬성이 필요했다. 그 정지작업으로 대통령 선거 직후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에서 여당의 압도적 승리가 필요했다. 이는 금권과 관권을 비롯한 대규모 부정선거를 불러왔다. 역대 최악의 선거로 기록된 국회의원 총선에서 공화당은 야당의 반대를 뛰어넘어 개헌을 이룰 수 있는 넉넉한 의석 수를 확보했다. 이제 개헌안을 발의하고 통과하는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될 것으로 보였다. 

 

 



여기서 변수가 발생했다. 당시 정권의 2인자 김종필을 중심으로 한 여당 내 세력이 이에 반대했다. 그 수는 40여 명 정도로 개헌한 통과를 장담할 수 없었다. 김종필의 3선 개헌 반대는 박정희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김종필은 5.16 쿠데타 당시 이를 설계하고 이후 정권의 중요한 유지 기반인 지금의 국정원이 중앙정보부를 창설하여 초대 중앙정보부장을 역임했다. 그는 5.16 쿠데타 당시 30대의 젊은 나이로 박정희 정권의 중요한 인적  기반인 육사 8기생의 리더였고 이후 공화당 내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김종필은 박정희와는 혈연으로 얽힌 최 측근이었고 한일협정과 각종 정권의 어려운 일들을 도맡아 처리했다. 김종필은 박정희 다음을 이어갈 유력한 대권 후보이기도 했다. 

김종필로서는 박정희의 3선 개헌과 대통령 3연임이 그의 차기 대권 도전을 가로막는 일이었다. 그를 따르는 다수 여당 의원들도 마찬가지 생각이었다. 또한, 3선 개헌은 대통령의 필요에 의해 헌법을 개정하는 한마디로 법치주의를 흔드는 일로 반대에 대한 명분도 충분했다. 김종필로서는 3선 개헌 반대가 절대 권력자인 대통령에 반기를 드는 일이었지만, 2인자가 아닌 차기 대권 주자로서 그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는 일이 될 수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으로서는 김종필 세력의 반대를 무마시켜야 했다. 이를 위해 박정희 대통령은 김종필에 대응한 새로운 인물에 힘을 실어주는 전략을 사용했다. 그 과정에서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형욱이 급부상했다. 김형욱은 김종필과 같이 육사 8기였지만, 정치적 입지는 튼튼하지 않았다. 그는 김종필의 천거로 기용되었고 중앙정보부장 자리에 올랐다. 그에게 김종필은 정치적으로 큰 은인이었고 그 관계고 돈독했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3선 개헌 성공이라는 명을 하달 받는 김형욱은 김종필과 큰 대립각을 세우게 된다. 이미 김형욱은 중앙정보부를 통해 철권통치를 뒷받침하고 있어고 그 악명이 높았다. 또한, 여당과 야당 의원들에 사찰과 감시를 진행하는 한편, 회유와 협박도 서슴지 않았다. 심지어 테러까지 감행했다. 대표적으로 당시 야당의 지도자였던 김영삼은 출근길에 괴한들에 의해 초산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범인들은 잡히지 않았지만, 중앙정보부가 그 배후에 있음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김형욱은 중앙정보부의 힘을 바탕으로 3선 개헌에 반대하는 국회의원들에 대한 공작을 지속했고 그 중심에 있었던 김종필도 예외는 아니었다. 중앙정보부의 계속되는 공작에 3선 개헌에 반대하는 국회의원 중 상당수가 찬성으로 돌아섰다. 큰 위협을 느낀 김종필은 정계은퇴를 선언하기도 했다. 개헌 반대의 동력이 크게 상실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김종필의 뜻을 따르는 여당 내 국회의원들이 여전히 저항을 하고 있었고 개헌안의 국회 통과를 장담할 수 없었다. 이에 반대하는 국민 여론도 무시하기 어려웠다. 

이 상황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직접 담화를 발표해 3선 개헌안 찬성이 정부에 대한 신임과 불심임을 묻는 프레임의 전환을 시도했다. 대통령 재선 직후 높은 지지율을 활용하고 3선 개헌을 민주주의 가치를 훼손하는 일이 아닌 정부에 대한 지지와 반대를 가르는 것으로 쟁점을 전환했다. 이후 박정희 정권은 3선 개헌의 당위성을 적극적으로 알리기 시작하며 여론의 변화를 시도했다. 

이와 함께 당시 베트남전에 유일하게 대규모 전투병력을 파견해 이를 주도하는 미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점을 활용하여 미국의 지지도 이끌어냈다. 최고의 민주주의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미국이었지만, 미.소 냉전체제가 공고하던 시기에 반공의 기치를 든 정권에 대해서는 정권의 도덕성이나 민주주의 정신을 지키는지 유무를 떠나, 지지하고 지원했다. 박정희 정권은 분명 미국에 큰 이익이 되는 정권이었다. 

이와 동시에 나중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미국 정보기관과 정치권에서는 차기 유력 대권후보인 김종필에 대한 부정적 견해가 많았다. 3선 개헌에 반대하는 김종필로서는 정권의 계속된 압력과 함께, 미국의 지지도 이끌어내지 못하는 상황에서 점점 그 입지가 줄었다. 또한, 박정희 대통령과의 인간적 관계로 무시할 수 없었다. 

결국, 김종필은 돌연 3선 개헌에 대한 적극 지지로 돌아섰다. 그를 따르던 국회의원 들도 대부분 이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가장 큰 장애물을 제거한 박정희 대통령은 이에 필요한 국회의원 정족수를 확보할 수 있었다. 당시 야당과 이에 반대하는 여당 국회의원들은 국회 본관을 점거하며 몸으로 투표를 저지하며 저항했다. 자칫 큰 물리적 충돌이 발생할 수 있었다. 힘으로 이를 제압한다면 정치적으로 부담이 될 수 있었다. 

이에 여당은 새벽 시간 국회를 점거한 야당 의원들 몰래 국회 별관에서 그들만의 회의를 진행했고 3선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122명의 국회의원이 단 6분 만에 투표를 마치고 의사봉이 없어 주전자 뚜껑으로 이를 대신하는 촌극 속에 일어난 날치기 통과였다. 이를 위해 개헌안에 찬성하는 국회의원들은 인적인 없는 새벽에 골목길을 돌아 회의장으로 향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뒤늦게 이를 파악한 야당 의원들의 회의장을 찾았지만, 상황이 끝난 이후였다. 

이렇게 통과된 개헌안은 이후 국민투표를 거쳐 확정되었고 박정희 대통령은 그가 원하던 3번째 대통령 출마를 할 길을 열었다. 결과적으로 3선 개헌안의 통과는 이후 10월 유신으로 이어지며 유신독재로 이어지며 민주주의의 가치가 심각하게 손상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더 나아가 이는 박정희 정권의 비참한 최후를 잉태하는 일이었다. 한때 3선 개헌에 반대했다 찬성으로 돌아선 김종필은 이후 영원한 2인자로 남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만약, 김종필이 회유와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이에 반대하고 정치인으로서의 입지를 다졌다면 그의 정치적 여정이 크게 달라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더 나아가지 못하고 주저앉고 말았다. 여기에 3선 개헌안 통과에 결정적 역할을 한 김형국 중앙정보부장은 3선 개헌안 통과 직후 그 자리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그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국회의원들이 3선 개헌안 지지 조건으로 내건 김형욱의 퇴진 요구를 박정희 대통령이 받아들인 결과였다. 박정희 대통령으로서는 자신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충성했던 김형욱을 그의 목적을 달성하자 정치적 부담을 덜어내기 위해 내치는 비정함을 보였다. 

정권 2인자로 큰 위세를 떨치던 김형욱은 이후 그의 입지가 크게 축소되며 사실상 토사구팽 당하는 비운을 맞이했다. 이후 김형국은 미국으로 망명하여 박정희 정권의 각종 비리를 폭로하는 등 유신독재를 비판하는 활동을 하다 파리에서 의문의 실종을 당하며 역사에서 그 이름이 사라졌다.

이렇게 박정희 대통령은 김종필과 김형욱의 역학 관계를 이용해 2인자 충성 경쟁을 유도하는 용인술과 국제 정세까지 활용하는 전략을 동원해 그토록 원했던 장기 독재의 길로 들어섰다. 3선 개헌은 박정희 대통령의 공과를 떠나 군사 쿠데타로 들어선 군사정권하에서 권력자에 의해 좌우되는 왜곡된  민주주의 시스템의 한 단면을 그대로 보여주는 일이었다. 절대 권력을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이 부재한 상황에서 지도자의 잘못된 판단을 제어할 수단이 없었다. 이는 결과적으로 우리 현대사의 큰 아픔으로 이어졌다. 

사진 : 프로그램 홈페이지,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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